4) 울산 간월사지 삼층쌍탑과 석남사 삼층석탑 - 석탑의 복원과 원형추정에 대하여...
- 간월사지탑의 편년과 간월사지 석불여래좌상과의 상관성
- 통일신라 과도기부터 얇아지는 석탑의 지붕돌
- 미감과 양식의 불일치 ; 복원의 잘못일까? 앞당겨진 편년설정이 문제일까?
이제까지 석탑의 편년과 관련해 출토유물과 상관관계, 기단부와 탑신에 새겨진 조각들의 유형, 기단부와 단면적의 비례, 기단부 결구방식의 문제, 층급받침의 변화 등을 살펴보면서 경주의 형성을 비롯해 석탑에서 느끼는 체감과 미감으로 추적할 수 있는 시대배경과 정신 등 다양한 문제들을 다뤄왔다. 이제 간월사지탑을 통해 지붕돌의 변화가 미치는 석탑의 미감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석탑의 복원에 대한 몇가지 메모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울산 간월사지 삼층석탑... 이게 남탑이지? 사실 간월사지탑은 석탑은 편년과 복원에 대해서만 살펴보려 했는데, 지붕돌의 층급받침 등에 대한 변화는 이야기했지만, 지붕돌 자체의 체감과 비례가 어떻게 바뀌는지 설명이 필요할 거 같아, 이를 추가했다... 아무튼 나는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기단부 갑석과 면석이 특히 눈에 거슬렸다... 이야기 출발은 여기서부터다...>
먼저 간월사지는 동향을 축으로 남북 쌍탑과 3구의 석불좌상이 있어 일정한 격식을 갖춘 상태에서 창건되어 오랫동안 사세가 유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2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석탑이나 불상과 상관없는 고려시대 작품이고, 파손된 중대석과 상하대석까지 갖추고 있는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작품으로 석탑과의 상관성이 검토되고 있는데, 대체적인 의견은 700년대 후반 석탑과 비슷한 시기에 조형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820년대 이전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간월사지탑 일층몸돌... 간월사지탑하면 항상 장항리탑의 일층몸돌과 비교를 하게 된다...>
왜냐하면 간월사지 석불과 비슷한 느낌의 석불좌상이 몇구 있는데, 그 중 예천 청룡사와 법주사 수정암의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동화사 비로암 비로자나불좌상을 골라 비교해보면, 먼저 830년 전후 조성됐다고 생각되는 예천 청룡사 석불과 흡사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863년대 조성된 것이 분명한 동화사 비로자나불이나 비슷한 시기의 법주사 수정암 석불에 비해 디테일이 너무 떨어진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울산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 이 석불의 편년을 석탑과 비슷하게 보는데 과연 올바른 추정일까?...>
<예천 청룡사지 석조여래좌상... 청룡사지에는 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2구의 석불좌상이 있는데, 양식적으로나 체감으로는 이쪽이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두툼한 얼굴과 육계, 움추리지 않은 어깨와 역시 풍만한 상체가 그렇다...>
또 석불좌대의 연화문이나 지대석에 대해 충분히 살펴보질 못해 자신할 수 없지만, 목이 짧고 어깨가 좁아지는 등 위축된 모습을 보이는 동화사나 법주사 수정암 석불에 비해 상체의 비례나 안정감에서는 앞선 것으로 보여 청룡사 석불과 비슷한 시기 조성을 고려할 순 있어도, 경주남산 보리사의 미륵곡 석불좌상이나 내원사 석남암수 비로자나불좌상과 현격한 차이가 있어 700년대 후반으로 설정하는 건 무리다 싶다. 때문에 빨라도 820~830년 이전 조형을 추정하기는 어려워 석탑과 불상의 조성시기를 하나의 기준으로 접근하는 건 문제가 많다고 보인다.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상호는 비슷하지 않나? 내 생각인가? 그렇지만 어깨선이 좁아지고 목이 짧아 움추러든 느낌이다...>
<법주사 수정암 석조여래좌상... 동화사와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되는데... 특히 하대석 복련 귀꽃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럼 황복사탑의 결구방식과 장항리탑의 일층몸돌 문비와 인왕상 조각 양식을 계승한 간월사지탑의 편년은 700년대 후반이 맞을까? 남아있는 부재에 새로 가공한 신재를 짜맞춰 복원한 간월사지탑은, 규모와 비례를 비롯 상층기단부 탱주 2개와 장항리탑의 일층몸돌을 차용한 부조 등 8세기 전성기 석탑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또 상층기단부 면석을 보면 하나의 판석으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황복사탑과 동일한 유형으로 만들어져 석탑의 편년은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다만 짚고 싶은 점은 황복사탑을 비롯해 원원사탑, 보월동탑 등 700년대 석탑에 비해 지붕돌이 급속히 얇아졌다고 보이는데, 지붕돌 층급받침도 그만큼 조밀하게 느껴져 월광사탑 지붕돌과 비슷한 유형으로 보여 700년대 후반 이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술정리탑 편에서 살펴봤던 기단부 결구방식에 따르면, 간월사지탑은 염불사지탑과 같은 계통이다... 귀틀석 + 면석...>
<간월사지탑... 새로 보수한 쪽과 당초 있었던 부재가 색깔에서 차이가 나는데, 같은 방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면석+귀틀석으로 이루어진 천군동탑 기단부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석가탑편에서도 이미 살펴봤지만, 700년대 중반까지 석가탑을 제외한 모든 통일신라 석탑의 일층지붕돌은 2층몸돌 보다 두껍고, 2층지붕돌은 3층몸돌 보다 두껍다. 목탑의 비례도 그렇고, 석탑으로 전승되면서도 이런 관념적 완결성은 깨지지 않았다. 그러나 800년대 들어서 석탑 조형이 양적으로 확산되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매너리즘의 함정이었다. 완벽한 비례의 석가탑과 최고로 복잡한 다보탑의 존재로 인한 변화였겠지만, 이제는 기단부 결구방식까지 해체되면서 석탑은 공예적 완성도만을 위해 치닫게 된다. 이때의 변화 중 하나가 지붕돌이라 생각하는데, 규모와 양식의 변화에 결부돼 석탑 전체의 느낌까지 변화시켰다고 생각된다.
* 700년대 전성기 석탑의 지붕돌 두께...
<먼저 700년대 초반 염불사지탑의 지붕돌 두께... 1,2,3층이 일정한 비례를 갖추며 얇아지지만 상당히 두툼하다...>
<염불사지탑... 그러나 그 두께는 부분적으로 파손됐거나 복원해서 두껍게 보이는 건 아니다...>
<염불사지탑보다 조금 늦은 용명리탑의 지붕돌... 워낙 비례가 좋아서 묻히지만 일층지붕돌은 2층몸돌보다 훨씬 두껍다...>
<700년대 중반을 넘어선 성주 보월동탑의 지붕돌... 보월동탑도 역시 생각보다 지붕돌이 두툼하다... 지붕돌 전각부위들만 보수됐어도 매우 뛰어난 미감을 자랑했을텐데...>
<비슷한 시기로 보이는 월광사탑의 지붕돌 두께... 앞서 살펴본 탑들보다 지붕돌이 많이 약화됐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전체적인 미감도 상당히 문약해졌다고 본다...>
<이렇게 700년대 탑들을 몇기 모아보면 간월사지탑의 지붕돌이 얼마나 얇아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몸돌의 중량감은 대단한데, 지붕돌은 비례가 깨뜨려지게 보일 정도로 얇아졌다...>
800년대 이후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지붕돌 변화는, 흔히 생각하는 전각부위의 반전이 심해지거나 층급받침의 단수가 줄었다는 것 외에도,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절단면의 두께가 현저히 얇아져 지붕돌의 중량감이 반감되고, 층급받침이 낙수면 보다 얇아지는 역전현상이 생기거나 지붕돌 끝보다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더욱 얇아지고 형식적으로 변하게 된다. 한편으론 그만큼 넓어진 부위에는 물끊기 홈 가공이 가능해진 측면도 발생하지만, 이로인해 탄탄하고 꽉차게 보였던 구성이 이완되고 부드럽고 느슨해진 느낌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즉 변화의 시작은 얇아진 지붕돌 두께에서 파생한 기술적인 문제였지만, 여기에 시대배경과 생산 시스템의 변화가 맞물리면서 결국 양식이 기술을 퇴화시키고, 세부 디테일이 전체 석탑의 미감까지 바꾸게 됐다.
* 800년대 이후 석탑들의 지붕돌...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의 지붕돌... 처마 끝에서 상당히 많이 들어가 있어 물끊기 홈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데, 이전 시기 석탑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물끊기 홈의 필요성이 강조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거돈사지탑의 지붕돌은 800년대 변화의 모든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구 부인사탑의 지붕돌... 규모도 그렇지만 각층 지붕돌의 비례가 제짝일까 싶을 정도로 무너졌다... 3층 지붕돌이 2층보다 두꺼운 이유는 5단층급받침을 고집하면서 파생된 문제라 생각된다...>
이미 줄어든 규모에서 더 이상 장중하거나 중후한 기품을 바랄 수도 없었지만, 좁고 얇아진 선들에서 강건하고 당당한 기운도 사라진다. 우아함도, 준수함도, 중성적인 깊이도 사라지며, 넓고 두터운 지붕돌이 주는 중량감과 그로인해 대지를 누르는 중량감은 약해지고 상승감이 더 강조된다는 말이다. 그만큼 거부감이 없이 친숙해졌지만 문약하게 보이고, 조화로운 비례에 정연함은 남아있지만 단아하게 조율될 뿐이었다. 안정감보다는 상승감이, 둔중한 무게보다는 경쾌한 느낌이 강조되는 등, 전체적인 체감과 미감도 건강미인 보다 성형미인이 유행하는 시대로 바뀌었다고 말해야할까? 그래서 나는 돌의 원시성과 가공된 석재의 괴체감 등 시원시원한 느낌을 가진 전성기 석탑의 마지막쯤에 간월사지탑이 있다고 생각하며, 지붕돌이 얇아지면서 섬약해지는 출발점 역시 간월사지탑이라 생각한다.
<경주 감산사탑의 지붕돌... 층급받침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지붕돌에는 힘이 살아있다...>
<동화사 비로암탑... 860년대쯤 되면 석탑에서 어떤 힘을 느끼기는 힘들다... 비례와 조화에 충실한 모습...>
<경주 효현동탑... 이탑을 비롯해 월광사동탑도 층급받침쪽이 낙수면에 비해 훨씬 얇아졌는데, 석탑의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그런 강점에도 불구하고 현재 간월사지 남북쌍탑은 800년을 전후한 양식과 미감이 어정쩡하게 조합되면서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 얇아진 지붕돌과 함께 제짝이 맞는가 싶게 거슬리는 요소들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필요 이상 돌출된 기단부 갑석과 생각보다 넓고 낮은 일층몸돌의 괴임이 그것이다. 남아있는 부재들을 찾아보면 한편으론 원형을 기준으로 부재를 교체했다고 보이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일지는 몰라도 현재의 규모와 세부 디테일은 두 개의 상반된 시대적 양식과 미감이 절충돼, 탱크에 분홍색 레이스를 붙여 놓은 것만큼 어색하고, 간월사지탑이 갖고 있는 당당하고 둔중한 이미지를 완전히 깨뜨리고 있다고 보인다. 무엇이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700년대 후반 양식과 800년대의 디테일이 일관되지 못한채 혼용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간월사지탑의 지붕돌... 700년대 석탑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지붕돌의 변화가 그대로 확인된다... 때문에 나는 간월사지탑의 편년을 아무리 빨리 앞당겨도 78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과도기의 특성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내가 간월사지탑의 복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상층기단부 갑석 때문이다... 일층괴임이 저렇게 넓은 것도 선뜩 이해하기 어렵고, 갑석의 두께도 맘에 안 들고, 특히 저렇게 툭 튀어나온 모습은 석탑의 미감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이것이 원형이라면 간월사지탑의 편년은 800년대 초반으로 밀려나야 한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 실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간월사지탑의 미감을 살리려면 일층몸돌의 괴임은 저렇게 넓을 필요가 없을뿐더러 훨씬 높아져야 하고, 상층기단부를 받치는 하층기단부 갑석의 괴임도 마찬가지다. 700년대 중반까지 석탑에서 괴임이 저렇게 무기력하고 형식적으로 조성된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그 두께만큼 구조적 안정성을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괴임을 넓고 낮게 가공했으니 당연히 상층기단부 갑석은 넓어질 수밖에 없다. 또 반대로 현재의 상층기단부 갑석이 제짝이라면 상층기단부 면석은 지금보다 1~20cm는 넓게 복원됐어야 안정된 비례(단면적의 균형)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원 부재의 수치를 감안했다는 말이 있을 수 있지만, 보월동탑에서처럼 가운데 부재 폭보다 양옆 면석을 키우면 해결될 수도 있었다.
<상층기단부 갑석에 모각된 일층몸돌 괴임은, 2층 몸돌 아래쪽에 있는 일층지붕돌 괴임만큼 얇다...>
<성주 보월동 삼층석탑의 기단부... 일층몸돌 괴임에도 원시적 힘이 살아있고, 상층기단부 면석은 탱주 사이의 면보다 양쪽 우주쪽의 면이 더 넓다... 때문에 간월사지탑의 상층기단부 우주쪽 귀틀석을 가공할 때 더 넓게 만들어도 흠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간월사지탑의 기단부... 앞에서 제기한 문제 외에도 하층기단부의 괴임도 보월동탑에 비해 엄청 얇다...>
결국 현재 복원된 간월사지탑은 돌출된 상층기단부 갑석과 이로인해 약해진 부연은 전체 석탑의 비례와 미감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고, 가뜩이나 얇아진 지붕돌과 절단면으로 인해 약해 보이는데 상층기단부 갑석까지 얇고 불필요하게 돌출되었으니, 전체적으로 둔중한 기운과 장대한 기풍을 살릴 수 있는 요소들이 완전히 묻혀버리고, 두툼한 몸돌에 어울리지 않게 섬약한 요소들만 부각돼 보인다. 그럼 간월사지탑은 700년대 후반이 맞을까? 아니면 빨라도 800년대 초반일까? 또 복원에 문제가 있었을까? 애초 편년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일까?
<간월사지탑의 현재 모습은 복원의 잘못일까? 아니면 편년설정의 잘못일까? 나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편년설정을 앞당기는 쪽으로 많은 생각을 했는데, 과도기 석탑에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이것저것 뜯어봤다...>
만약 현재의 복원이 원형에 가깝다면 간월사지탑은 700년대 후반 양식을 가진 800년대 초반 석탑이 될 것이고, 석불좌상과의 상관성은 오히려 쉽게 해결될 수도 있어, 복원 잘못이 아니라 석탑의 편년추정이 앞당겨진데서 오는 미감의 오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본래 700년대 후반의 석탑이었는데 이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과도기적 특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면서 전체적인 미감을 더욱 불분명하게 만들거나 일관된 미감을 놓쳤다는 말로도 현재의 모습을 해석할 수 있다. 즉 어느 경우든 미륵사지탑처럼 년대와 양식과 기법 등을 명료화하기 힘든 전환기의 석탑을 복원할 경우,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확인되지 않은 많은 요소들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을 때 혼란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간월사지탑을 골라봤다.
<남탑과 북탑 사이에는 소나무들이 몇 그루 있어 한번에 보이지 않는데, 소나무들은 이식하는 게 석탑과 사지 보존을 위해서 더 좋을 거라는 생각...>
또 복원과 관련해 간월사지탑과 비슷한 경우가 울산 석남사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이다. 석남사에는 두기의 삼층석탑이 있는데 내가 관심을 두는 것은, 현재 극락전 앞쪽에 있는 삼층소탑이 아니라, 몇몇 부재를 모아 1973년 복원한 현 대웅전 앞 삼층석탑이다. 2.5m 높이에 불과하지만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들을 충실히 계승하고 좋은 비례와 세련된 맵시를 가진 극락전 앞쪽의 삼층소탑은 통일신라 후기의 특징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조형했을지 편년이 불분명한 대탑은 기단부 넓이가 4.6m로 석가탑보다 넓고(4.4m), 현재 높이 11m로 삼층석탑 중 감은사와 맞먹는 높이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물론 감은사 기단부 넓이는 6.3m, 지대석만 8.5m가 넘지만).
<석남사에는 2기의 탑이 있다... 원래부터 대웅전 앞에 있다가 극락전 앞으로 옮겨진 석탑은 2.5m, 현재 대웅전 앞 석탑은 11m 높이다... 800년대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석탑은 하층기단부 면석에 안상이 있고, 하층기단부 갑석은 괴임을 안쪽으로 들여 모각한 게 아니라 통돌로 가공했고, 상층기단부 갑석의 부연은 거의 퇴화됐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비례가 좋고 안정적이며, 상층기단부 갑석 전각부위에는 청량사탑과 똑같은 반전이 있어 아주 경쾌하게 보인다...>
<석남사 대웅전 앞 삼층석탑... 삼층대탑으로 불리는 이 석탑은 우리들 생각보다 훨씬 크다... 탑의 오른쪽 스텐레스 안내판이 내 키와 비슷하다...^^>
현재 삼층 석가 사리탑(스리랑카 스님이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시면서 붙여진 이름 같다)으로 불리는 대탑은, 하층기단부 면석, 일층몸돌과 지붕돌, 2층과 3층 지붕돌, 그리고 노반까지가 같은 석질에 비슷한 색깔을 지녀(솔직히 상륜부는 잘 모르겠다) 이외 부재는 1973년 복원하면서 새로 가공한 부재로 보이는데, 석남사에서는 임진왜란 때 도괴된 15층 석탑의 부재를 수습했다고 하나, 처음부터 삼층석탑의 부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시기는 도의선사가 석남사를 창건했다는 826년 전후로 보이는데, 현재 하층기단부 면석이 원래부터의 부재였다면 탱주가 2개 있어 내가 설정한 편년과 다르지 않고(나는 과도기 하한을 828년까지로 잡았다), 이 시기라면 이 정도 규모를 욕심낼만 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흥덕왕이란 존재 때문이다.
<동해를 통해 울산으로 상륙하여 경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간월사, 청송사, 석남사가 있다...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했던 곳인만큼 이곳에 있는 탑들은 하나 같이 장대하고 육중한 기운을 담고 있다...>
변화된 권력구조와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고 구시대적 방법으로 통일신라의 마지막 전제정치 부활을 꾀하다 실패한 흥덕왕(826~836년)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삼층대탑으로 넘어가면, 역시 상층기단부와 괴임이 눈에 거슬린다. 왜냐하면 현재 괴임은 매우 장식적인 3단으로 가공되어 있는데 내가 설정한 편년이 맞다면 동시대에는 그렇게 장식적이며 문약하게 보이는 양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괴임 높이가 약화되고 직각이 둔각으로 완화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을 뿐인데 복원과정에서 너무 장식적인 요소를 우선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또 전체적인 비례를 보면 현재의 상층기단부 면석은 조금 더 높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석남사탑 상륜부... 이게 원형인지 1973년 재현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석남사탑 지붕돌... 이 지붕돌들도 700년대 석탑과 달리 처마끝에서 안쪽으로 많이 들어가 층급받침이 조성됐다...>
<석남사탑 탑신... 통돌로 만든 일층몸돌 중에 가장 큰 게 석남사탑일 거 같다... 지붕돌의 낙수면 경사는 일정하지 않는데, 일층 지붕돌은 황복사탑을 닮았고, 2층 지붕돌은 염불사지탑을, 3층 지붕돌은 감은사탑을 닮았다... 제각각이라는 말...^^>
<석남사탑 기단부... 이건 아니다 싶어 한참을 봤다... 일층몸돌 괴임은 3단으로 가공했고, 갑석의 부연은 보이지도 않고, 하층기단부에 비해 상층기단부가 너무 낮다... 혹시 하층기단부의 면석들은 당초 상층기단부 부재들이 아니었을까? 저렇게 높을 이유가 없는데...>
솔직히 현재의 하층기단부가 과연 제짝일까 의심스러운데, 현재 일층몸돌과 탑신의 체감률 등을 고려하면 하층기단부는 지나치게 높고, 또 3칸으로 나눠진 하층기단부의 2칸은 상층기단부 폭과 비슷하다고 보인다. 즉 폐탑 부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상층기단부 면석을 하층기단부에 재단하여 잘못 사용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는 말이다. 높아진 하층기단부 때문에, 하층기단부 단면적보다 좁은 상층기단부를 만들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깨진 비례는 감은사탑만한 규모와 미감이 사라지고 공예품 같은 어정쩡한 느낌으로 장중한 위용을 반감시켜버렸다. 물론 여기에는 모호한 높이의 상륜부도 한 몫 하고 있다.
<해서 내 맘대로 현재의 석남사탑을 해체 복원해봤다...ㅋㅋ 상륜부는 지금보다 2배 정도 올리고, 하층기단부는 낮추고 그만큼 상층기단부를 높이고, 그리고 상층기단부 갑석에는 부연을 확실히 표현하고...>
<석남사탑 원형 추정도...^^뭐 이정도면 수정한 태가 잘 보이진 않지? ㅋㅋ 8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탑이라면 이런 비례였을 거 같다...>
이만한 높이를 가진 삼층석탑이 없고, 황복사탑이나 석가탑 양식으로 감은사탑 규모와 크기를 만들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본 나로서는 무척 안타까운데, 하층기단부가 조금 더 낮아지고, 상층기단부는 그만큼 높아지면서 넓어지고, 상층기단부 갑석에는 부연이 생기고, 상륜부가 지금보다 1.5~2배 정도 높아졌다면 석남사 대탑은 전혀 다른 미감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이 문제도 간월사지탑처럼 편년과 무관한 양식들이 혼용되고, 수습된 자재를 오용하면서 비례와 미감까지의 복원에 실패한 케이스라 생각해 같이 다뤄봤다. 자 그럼 석탑의 복원과 그 원칙에 대해 몇가지 정리해볼까?
<간월사지탑 일층몸돌 인왕상...>
<석탑 편년과 관련한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봤으니, 이제 석탑의 복원에 대해 몇가지만 메모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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