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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47>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경주의 확장과 전성기 석탑의 미감... 1013

 

 

 

 

 

 

   3)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 - 경주의 확장과 전성기 통일신라 초기 석탑의 미감

     - 경주의 확장과 풍수비보 사찰 

     - 석탑의 비례와 미감에서 읽히는 시대정신...

     - 그리고 지붕돌 층급받침과 석탑 편년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통일신라 석탑의 편년을 다루면서 미탄사지탑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또 우리는 한번도 미탄사지탑이 경주시내(!)에서는 유일하게 분황사탑과 함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석탑이며, 현재 남아있는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 중 평지가람에 세워졌던 유일한 탑이며, 수도 경주 궁궐에 가장 가까이에 남아있는 탑이란 점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거 같다. 게다가 안정된 구조와 시원한 체감 등 군더더기 없는 세련된 미감을 갖춘 석탑으로 높은 완성도를 가졌음에도 비지정 문화재란 이유로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비껴나 있는데다, 조성시기까지 9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는 등 제 가치도 인정받지 못한채 홀대 받고 있다는 사실에 이견을 제시하는 데도 인색한 거 같다. 해서 한두가지 요소로 석탑 편년을 결정하는 것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과 비례와 미감, 그리고 양식을 통해 접근하는 것이 맞다는 걸 언급하고자 따로 장을 만들었다.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 월성의 동쪽, 경주의 사방과 주변의 산하가 모두 보이는 너른 평지에 서서 한번이라도 경주의 석양과 일출을 본 사람이면 미탄사지탑의 아름다움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층지붕돌과 몸돌, 그리고 기단부까지 통일신라 석탑의 초기 양식과 결구방식을 그대로 계승해 만든 멋지고 준수한 탑으로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바로 뒤에 보이는 야트막한 동산의 숲이 궁궐인 월성이다...>

 

 

 

 

지금까지 미탄사지탑 편년은 8세기말에서 9세기말까지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설명되고 있는데, 이에 접근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3단으로 이루어진 층급받침이다. 즉 전성기에 해당하는 8세기에는 5단의 층급받침이 일률적으로 적용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9세기에 해당한다는 의견과, 전체적인 규모와 미감은 8세기에 해당하니 이의 절충으로 8세기말까지는 일부에서도 인정하는 정도다. 내 생각은 전혀 다른데, 당장 석탑에 대해 살펴보는 것보다 지금까지 본피부 출신의 최치원이 자기 집 가는 길(옛 금산가리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미탄사의 입지를 중심으로 경주의 형성과정부터 짧게 살펴본다.

 

 

<언젠가 석탑에 대해 다뤄볼 때 꼭 빼먹지 않고 언급하고 싶었는데, 오늘서야 미탄사지탑을 소개하게 됐다... 곧바로 탑을 하나하나 읽어보는 것보다, 일단 사지에 대해 살펴보면서 경주의 확장과정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물론 석탑이 워낙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특히 눈에 거슬렸던 게 안내판의 건립연대 추정 문구였다... 너무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한 거 아니냐는 생각에서... 왜냐하면 창림사지탑도 그렇지만 이런 공식적 안내판의 문구는 석탑을 바라보는 당시 상황을 규정하는 것으로, 자칫 오독과 엉뚱한 상상을 강제하게 된다...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아라고 억지 부리듯 말이다...> 

 

 

 

경주에 대해 정통하신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미탄사지가 자리잡은 곳은 현재 경주박물관과 동궁(안압지)을 한변으로 잡고 동쪽으로 삼각형을 그리면 꼭지점인데, 당대로보면 통일신라의 궁궐인 월성지구에서 이어진 동궁(안압지)에서 정동방향으로 700m 가량 떨어진 지점이다. 주위를 더 살펴보면 동궁을 중심으로 북쪽에 황룡사지가, 여기서 북동쪽으로 700m 가량 올라가면 분황사가, 다시 동궁에서 서쪽으로 700m 떨어져 첨성대, 월성 남쪽의 남천을 바로 건너면 인용사지가 있다(조금 더 서쪽으로 복원되고 있는 월정교가 있고). 이렇게보면 혹시 동궁과 임해전지를 조성한 다음 곧바로(문무왕이나 신문왕대쯤?) 사지조성에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미탄사지는 통일신라 궁궐 바로 인접한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다.

 

 

<경주시내/Daum지도에서... 1 수도 경주의 궁궐인 월성, 2 동궁과 임해전지, 3 황룡사지, 4 분황사, 5 황복사탑, 6 인용사지, 7 천관사지, 8 첨성대, 그리고 빨간색 화살표가 미탄사지탑 위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4~6세기까지 경주의 영역은 주황색 원으로 그려봤고, 6~8세기 영역은 노란색으로 표기해봤다... 초기에는 오릉과 대릉원 등이 경계였던 것으로 보이고, 아래 지도에서 살펴볼 경주의 6개산줄기 끝지점에 600년대 이후 왕릉들이 산재해 있다...>

 

 

 

 

 

지도를 통해 확인되지만, 로마의 7언덕처럼 대략 6개산(북쪽의 소금강산에서 시계방향으로 명활산/남산/벽도산/선도산/송화산(옥녀봉))과 형상강의 6지류(소금강산과 명활산 사이의 북천에서 시계방향으로 남천/서천/대천(고현천)과 형상강)로 나눠진 경주(경주 6촌은 이런 지형적 기반에서 출발 발전한다는 주장/고대도시 경주의 탄생/이기봉/푸른역사/2007년/여기에 덧붙여 나는 경주 6촌(금산가리촌/자산진지촌/돌산고허촌/무산대수촌/알천양산촌/환산고야촌)이→6성씨(이/최/설/정/손/배씨)→6부(본피부/양부/사량부/모량부/한기부/습비부)→6두품으로 변해갔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이들의 구체적 관련성에 대한 내용은 확인하지 못했다...)는, 4~6세기까지 궁궐 서쪽 대릉원/노서리 고분군/오릉을 서쪽 경계로 하고, 반월성과 남촌을 남쪽 경계로, 황룡사와 분황사를 동쪽경계로 형성돼 있었는데, 가야정복 등 6~7세기 정복전쟁과 함께 본격적으로 확장돼 7~8세기에는 6개산 끝자락에 왕릉을 조성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급격히 팽창했다고 생각된다.

 

 

<8세기 이전 경주의 주요사찰/고대도시 경주의 탄생에서... 이 책의 내용과 부도를 인용했지만, 일치하지 않는 내용은 내 개인적 주관이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러나 경주 확장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형상강과 북천 등주요 지류의 범람이었고, 이를 방비하기 북천과 서천, 그리고 형상강 동편에는 많은 비보숲 (경상도에서 가장 많은 수의 비보숲이 조성된 곳이 경주라 한다)과 이에 연계된 분황사/황룡사/사천왕사/담엄사/영묘사/흥륜사/영흥사 등 칠처가람지허(삼국유사/형상강 지류의 범람을 방재하기 위해 일곱 곳을 선정하여 사찰을 짓고 이를 신성시했다는 기록)가 7세기 이전부터 건립됐다고 한다. 그중 미탄사지는 북천이 범람해 만들어진 퇴적층 한가운데 분황사/황룡사와 함께 있어, 북천의 범람으로부터 월성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지었다면 그 상징적 의미도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실제 이런 지형적 조건 때문인지, 탑이 서있는 부지는 돌과 진흙으로 다진 후 불로 구워 소성했던 흔적이 발굴되었다. 참고로 백제의 사비성과 정림사지 등은 판축기법을 사용했다).

 

 

<경주의 칠처가람지허와 비보숲/고대도시 경주의 탄생에서... 풍수비보는 전국시대 말기부터 유행, 후한에 도교와 연관되면서 더욱 체계화 되었고,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백제/신라의 수도도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자리 잡았으니, 600년대 이전 비보숲의 등장은 틀리지 않은 주장이라 생각되고, 그런 점에서 선종의 세례를 받고 풍수도참비기를 남긴 도선국사는 풍수의 대가였지, 우리나라 풍수지리설의 개창조가 아니다... 즉 도선국사의 풍수도참설은 조상들의 오래된 경험과 지혜를 국토지리로 풀어낸 의견서이지, 성경이 아니라는 말이고, 내 생각이 맞다면 풍수비보 목적으로 조성된 현존 가장 오래된 탑은 분황사탑이 된다...>

 

 

 

 

또한 이미 7세기부터 포화 상태에 이른 경주에서 궁궐 확장을 위한 재개발(?) 외에 신규 사찰 건립은 중심지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고, 이를 증명하듯 7세기 후반부터 조성된 고선사/감은사/황복사/나원리/장항리/용명리/염불사/불국사/원원사/마동 등은 시내 외곽의 들판 끝자락이나 산중턱에 터를 닦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면에서 경주 시내 한복판, 궁궐 인근 동쪽에 자리하는 미탄사지가 의미하는 것은 남다를 수밖에 없어, 600년대 후반 통일신라 체계에 걸맞는 경주정비과정에서 이미 기획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 경주의 탄생이란 책의 지도를 인용해 지리적 입지를 살펴봤다.

 

 

<경주의 서북쪽 옥녀봉 방향에서 바라본 미탄사지탑...>

 

 

 

 

물론 미탄사지 조성과 미탄사지탑 건립 시점이 일치된다는 근거는 없지만, 600년대까지 경주시내의 사찰입지 선택 이유와 700년대 조성된 사찰의 입지, 그리고 주변 정비의 필요성 등을 고려하면 미탄사지 조성 시점은 800년대를 넘어설 이유가 거의 없고, 800년대 중반까지는 사찰과 무관하게 탑만 조성하는 문화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이후 9세기 후반을 편년으로 설정하는 건 오류라고 생각된다(또 월성 남쪽의 인용사지나 서남쪽 천관사지 등 궁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사찰의 석탑들도 700년대 후반부터 800년대 초반에 이미 완성됐었다). 결국 미탄사 입지와 관련된 내 결론은 700년을 전후한 시점, 북천의 범람으로부터 월성을 보호하기 위해 분황사-황룡사에서 이어지는 방재벨트의 일환으로 부지를 선정하고, 탑은 울산 및 감포에서 통일신라의 궁궐에 입성하는 길목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조성했다는 게 내 상상이다.

 

 

<경주 6촌과 북천의 범람 방향... 지금은 보문호와 상류에 덕동호가 있어 당대의 범람을 상상할 수는 없지만, 분황사에서부터 남산까지를 경계로 동쪽은 범람으로 인한 퇴적지로 형성되었음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미탄사지는 울산쪽에서 올라오는 길목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이제 경주의 형성과정과 주변 지역과의 관련성을 통해 최치원의 기록 외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는 미탄사지에 대한 입지를 살펴보고 조성 시기에서 상한과 하한시기를 설정했으니, 본격적으로 석탑 자체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는데, 위 내용에서 빠뜨리고 싶지 않는 것은 궁궐과 매우 가까운만큼 신규로 조성하거나 중창했더라도 왕실의 의지와 재가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과, 수준 높은 석공들이 동원되어 왕실 주도하에서 정성들여 만들었을 거라는 개연성에서 출발하고 싶다(뭐 요즘으로 따지자면 철저히 재개발 재건축이 통제되고 있는 청와대 인근이나, 1990년대 이후 자존심을 건 건축 경연장이 되면서 최첨단 호화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는 강남에서의 신축빌딩공사를 상상해보자는 말이다). 그렇다면 왕실에서 직접 주관했을 수 있는 석공들은 어느 시대 어떤 석탑을 만들었던 그룹 혹은 시스템에 속해있었을까?

 

 

<북천 방향을 바라보는 미탄사지탑... 왼쪽에 황룡사 구층목탑과 분황사탑이 서 있었을 것이다...>

 

 

 

 

통일신라의 궁궐 남동쪽 진입로에 장중한 위용의 황룡사목탑을 배경으로 서 있었을 미탄사지탑은, 황룡사탑이 소실된 이후에는 등대탑이란 별칭도 이어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매우 정연한 구성과 안정된 체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단부 폭 3.9m, 노반까지 높이 6m의 작지 않은 크기에서 드러나는 당당한 기품과, 삼단의 층급받침에서 읽히는 굵고 간결한 느낌으로 인해 더욱 의젓해지고 강건한 미감까지 잘 살려 조형되었다. 때문에 증개축 과정에서 솜씨있는 장인이 한 유력가의 발주로 유행하는 형태를 모방하거나 우연한 실험의 결과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었지만, 이제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상상 보다는 오롯이 비슷한 비례와 체감률이나 동일한 양식을 가진 석탑과 비교를 통해 석탑 편년을 설정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된다.

 

 

<미탄사지탑과 통일신라 석탑의 원형인 감은사탑을 직접 비교해 본다... 아마 가장 큰 차이는 지붕돌일 거 같은데, 층급받침이 줄어든만큼 훨씬 간결하고 강건하게 보인다...>

 

 

 

 

 

물론 이런 미감 때문에 나는 삼단의 층급받침만 중시하여 700년대를 처음부터 배제하고, 진골그룹들이 본격적으로 권력쟁투에 나선 800년대 전후나, 지방호족들의 영향이 지대해진 800년대 중반 이후로 미탄사지탑 편년을 하향조정하는데 더욱 반대하는 입장인데, 무엇보다 석탑의 기단부와 탑신의 입면적 비교에서 700년대 초반 석탑의 비례를 느끼고 있으며, 2매로 이루어진 일층 지붕돌은 감은사탑/나원리탑 등에 이어 가장 고식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또 1980년 복원된 미탄사지탑 상층기단부 탱주는 2개로 아무리 늦춰도 700년대 후반을 넘어갈 수 없는 양식인데다, 앞서 살펴봤듯이 기단부 결구방식도 780년 이전에 유행했던 감은사탑/고선사탑과 같은 기법이어서, 동일한 기법을 사용한 석가탑이나 이보다 늦은 것으로 보이는 술정리탑과의 비교에서 편년을 결정하는 것이 조금 더 현명한 접근이라 생각된다.

 

 

<미탄사지탑 탑신부... 2매로 이뤄진 일층지붕돌... 일층몸돌은 파괴로 인해 부분적으로 보수를 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하나의 통돌이 아니었는지 불확실하다...>

<미탄사지탑 기단부... 깨진 판석을 보수한 선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낮고 넓은 상층기단부는 가장 고식의 비례다...>

 

 

 

실제 탑신의 단면적이 기단부보다 큰 경우는 700년대 후반 이후 석탑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비례이고, 석가탑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술정리탑에 비해서도 미탄사지탑의 탑신 단면적은 월등히 클 뿐 아니라, 미탄사지탑에는 무엇보다 초기 석탑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인 낮은 기단부의 비례가 충실히 살아있고, 하층기단부가 높아진 석가탑이나 술정리탑에 비해서도 초기 형태의 비례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문제는 비지정 문화재여서 그런지 확인할 수 있는 도면과 실측자료가 없어 추정에 불과하지만, 지금까지 육안으로 느낀 점들을 숙고하고 가지고 있는 사진을 뜯어볼수록 지금의 느낌은 오히려 확신에 가까워질 뿐이다.

 

<만약 일층몸돌이 판석의 결구방식으로 만들어졌다면, 감은사탑/고선사탑/나원리탑과 동일한 가장 초기의 형태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확인할 길이 없어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참고로 일층몸돌을 판석으로 만든 탑은 이들 외에도 탑리리탑/탑평리탑/낙산동탑/죽장동탑이 있어, 같은 결구방식을 채택했더라도 무조건 동 시기로 규정하는 건 합리적 기준이 아니다. 다만 전성기 석탑의 체감과 미감을 가진 석탑과 비교하면서 그 결구방식을 통해 선후를 가늠하려는 것이고, 미탄사지탑은 그 중에서 가장 원형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특별히 거론하는 것이다... 아무튼 멋진 비례다...>

 

 

 

 

또 쟁점이 되고 있는 삼단의 층급받침의 경우, 이미 780년대 만들어진 정혜사지탑에서도 사용된 예가 있을 뿐만 아니라, 700년 전후 조형된 나원리탑 출토 삼층소탑의 층급받침은 2단에 불과하고, 조금 무리한 비유겠지만 왕궁리탑의 층급받침 역시 3단이다. 그리고 정혜사지탑에서도 다시 부연되겠지만,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1~3층까지 전층 지붕돌을 3단 층급받침으로 조형한 석탑은 미탄사지 삼층석탑을 비롯해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석굴암 삼층석탑 3기뿐으로, 800년대 이후 4단 등의 층급받침을 구성하는 석탑들과 이들의 구성의도는 전혀 다르다고 확신하고 있다.

 

* 3단 층급받침을 가진 백제, 통일신라, 고려의 석탑들...

 

 

<나원리탑에서 출토된 소형 금동탑/재인용... 소탑의 2단 층급받침을, 금속공예의 기술적인 수준과 소규모로 인한 어쩔 수없이 생략하면서 단순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래하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금속공예는 석조건축이나 공예에 비교할 수없이 정교하고 디테일하다... 이미 통일신라는 그런 기술적 수준에 올라 있었고, 소탑의 상륜부나 금동불의 수인이나 광배 등에서 충분히 확인된다... 즉 700년 전후에 만들어진 나원리탑에서 출토된 이 소탑의 층급받침을 2단으로 표현한 것은 귀찮아서가 아니라는 말이다...>

<왕궁리탑 탑신과 3단의 층급받침... 한번 비교해 보고 싶어 백제와 신라, 고려의 3단 층급받침 석탑을 모아봤다...>

<석굴암 삼층석탑의 탑신과 층급받침... 전층이 3단 층급받침으로 이뤄진 신라계 석탑은 극히 드물다...> 

<담양 읍내리 오층석탑 탑신과 3단 층급받침... 똑같은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3단 층급받침 양식이지만, 각 시대의 유행과 정신은 각각 서로 다른 미감과 표현기법을 선호했던 게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800년대 초반 조형된 석탑에서 발견되는 4단 층급받침은 3층 지붕돌(5단-5단-4단)에서 부분적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석탑의 체감을 맞추면서 높이를 조정하기 위한 편법에 불과한 것이고, 전층 지붕돌을 4단 층급받침으로 조형한 석탑은 공예화된 느낌의 800년대 중후반 이후 소규모 석탑에 등장한다. 즉 800년대 이후부터 석탑 층급받침이 줄어든 이유는, 기단부 결구방식의 변화에 조응하여 석탑 규모가 줄어들고, 이에 맞게 지붕돌 두께와 폭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간략화된 변형으로, 체감을 고려한 임기응변의 산물이며 기술적 퇴화의 결과일 뿐이라는 말이다.

 

 

* 통일신라 석탑 층급받침 다양한 변화...

 

<나원리 오층석탑의 5단 층급받침...>

<만약 석탑의 규모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5단의 층급받침을 고집했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물론 내 생각이지만, 여러 부재를 모아놓은 경주 남사리북탑의 일층몸돌은 제짝이 아니라 생각된다...>

<홍천 물걸리 삼층석탑... 내 기억과 사진이 맞는다면 이탑의 층급받침은 5단-5단-4단으로 구성됐다...>

<의성 관덕동 삼층석탑 탑신... 이탑의 층급받침은 4단-4단-3단이다... 내 생각이지만 이건 리듬을 주기 위해 처음부터 기획됐다기 보다 작아지고 얇아진 규모에 조응하면서 각층 지붕돌 층급받침의 간격과 두께를 지키기 위한 어쩔 수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전체의 체감률과 각층의 비례를 지키기 위해 부분의 일관성을 포기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삼단 층급받침을 근거로 미탄사지석탑 편년을 800년대 중후반으로 끌어내리는 것은, 탑의 규모가 5m 이하로 줄어들었다는 이유로 758년 조형된 갈항사지탑을 800년대 중후반에 조성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사찰의 조성연대를 석탑 건립연대로 착각하는 것, 또는 석탑 출토유물 편년을 석탑 건립시기로 대체하는 것이나, 하층기단부에 탱주가 3개 있다는 이유로 중흥산성탑을 나원리탑과 동시대에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우를 범하게 된다. 기법이나 양식, 공통점 등은 전체적인 흐름을 조망하기 위해 후대의 우리가 과거를 읽기 위해 만들어낸 잣대일뿐, 이를 역으로 적용하여 석탑 개개의 특성과 전체적인 느낌 및 보편적 흐름까지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하나의 특징과 디테일한 요소로 시대를 재단하려는 것은 꼬리깃털 하나로 몸통을 흔들려는 것과 같은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 800년대 중반을 전후한 시기, 4단 층급받침 석탑들의 체감과 미감비교...

 

<산청 내원리 삼층석탑... 양식적 퇴화는 있지만, 30대 초반의 강직한 힘이 느껴지는 석탑이다... 4단 층급받침 중 비교적 초기 형태가 아닐런지...>

<대흥사 응전전 삼층석탑... 아마 단아한 미감의 삼층석탑을 꼽으라면 결코 빠지지 않을 석탑이다... 20대 초반의 생기발랄한 아가씨 같은 느낌도 함께...^^>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 내원사탑이나 대흥사탑에 비해 범어사탑은 지붕돌의 층급받침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가장 전형적인 퇴화과정을 보여주는 석탑이라 생각된다... 그만큼 전성기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는 말도 되는 것이고... 초등학교 자녀를 둔 차분하고 안정적인 학부모 같은 느낌이다...^^>   

<경주 남사리사지 삼층석탑... 남사리탑은 높이 4m로 작지않은데도 탑만 보면 귀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담하게 보인다... 온실속에서 자라난 화초처럼 곱게 정규교육과 가정교육을 받고, 이제 막 대학교에 입학한 여대생 같은 느낌...^^ 비슷한 규모와 비슷한 시기, 그리고 비슷한 양식에 층급받침까지 똑같은 탑들이지만 이렇게 모아보면 같은 느낌의 석탑은 하나도 없다...>

<위 탑들에 비해 조금 더 늦은 900년 전후로 보이는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탑신... 이처럼 4단 층급받침이 일관되게 적용된 석탑들은 있지만, 3단은 없다... 그리고 탑신만으론 전체적 분위기를 느낄 수 없지만, 후기와 말기로 내려가면 800년대 중반까지의 미감과 기단부가 완전히 변하게 된다...>

<향산리탑... 탑신만 보는 것과 전체를 보는 건 이렇게 다르다는... 말기의 특징이 모두 있지만, 기존 양식과 기법을 충실히 계승했음도... 아무튼 800년대 석탑과 미탄사지탑의 체감 및 미감은 일체의 친연성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 미탄사지탑의 편년을 추정하면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비교적 자유롭고 느슨해진(전제정권의 몰락과 관에 소속된 석공조직의 해체 등)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석탑의 양식들이 출현하고 실험된 780년대, 똑같이 3단 층급받침을 적용한 정혜사지탑이나 석굴암탑과 같은 시기에 만들었을 거라는 추측과, 700년대 전후 경주의 도시정비 과정에서 초기 석탑의 비례와 결구방식을 유지하면서, 여성적인 우아함을 한차원 승화시켜 보다 간결하고 중후한 기운을 요구했던 700년대 중반 이전에 조형했을 거라는 생각으로 축약할 수 있는데,

 

 

<쪼금 삐딱하게 잡혔지만 수정하지 않았다. 저 큰 탑이 햇살이 무게 때문에 기울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ㅋㅋ(10년전 사진이다)... 굳이 이 사진을 고른 이유는 3층과 2층 지붕돌 전각부위를 보면 보수한 흔적이 있는데, 직각이라 생각할 정도로 바짝 세운 각이 거슬리기 때문이다... 살짝 더 안쪽으로 죽였어야 하는데...>

 

 

 

 

나는 상층기단부 탱주 2개 양식을 고집하면서 700년대 초반의 비례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늦어도 석가탑이 조형된 740년 전후에 만들었다 생각하고 있다. 특히 똑같이 상층기단부 탱주가 2개이면서 700년대 후반에 조형된 선본사탑이나 보월동탑, 그리고 800년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향성사지탑과 비교하면 미탄사지탑의 미감은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700년대 초반 건탑까지도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 미탄사지탑과 700년대 후반 이후 석탑의 미감과 체감 비교...

 

<통일신라 후기와 말기, 800년대 조성된 석탑들은 위에서 층급받침을 핑계로 살펴봤으니 이제 그들보다 조금 더 앞선 시기의 두탑을 살펴본다... 먼저 속초 향성사지 삼층석탑... 상층기단부 탱주가 2개임에도 불구하고 800년대를 전반기 석탑이라고 생각하는데, 미탄사지탑과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훨씬 많다... 미탄사지탑이 800년대 이후에 조성됐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향성사지탑보다 3~4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700년대 후반의 성주 보월동탑... 미탄사지탑의 체감과 미감과 조금씩 가까워지지??^^... 그럼 700년대 중반까지 내려가 볼까?...>

 

 

 

 

 

3단 층급받침으로 더 간결하고 단호해진 느낌의 미탄사지탑은, 기존 장항리탑이나 염불사탑/용명리탑에서 유지하던 세련됨과 우아한 미감을 준수하고 중성적 느낌으로 전환시키면서 더욱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기운으로 승화시켰다. 게다가 높아진 일층몸돌에 낮은 기단부를 조합하여 날씬하면서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미탄사지탑은 동시대의 봉기동탑이나 후대의 선본사탑에 비해 훨씬 장대하게 느껴져 안정감과 함께 상승감을 적절히 조합한 수준높은 완성도를 가져 700년대 전성기 석탑의 미감을 충실히 구현했다.

 

* 741년대 전후 석탑들과 미탄사지탑의 비교...

 

<이제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 741년 석가탑 전후 석탑들을 잠깐 비교해 본다... 먼저 경주 용명리탑...>

<비슷한 거리와 각도의 탑을 찾다보니 다시 북천 방향을 바라보는 사진을 재사용함을 이해해주시길... 미탄사지탑과 가장 가까운 체감과 비례를 찾는다면 용명리탑이 아닐까 싶은데... 여성적과 남성적이란 느낌의 차이가 있는 거 같고... 층급받침의 영향이다...> 

<청도 봉기동탑... 같은 각도 사진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어수선해서 할 수 없이 이 사진으로... 서로 비교가 될까??>

<술정리탑 글에서 쓰려고 그렸었는데, 아까워서 올린다...^^ 이렇게 저렇게 정삼각형 비례가 잘 만들어지는 석탑이다...>

 

 

 

 

경주IC로 진입해 보문단지로 향하는 산업로 길목 왼편, 예전에는 울산이나 감포를 통해 경주로 들어와 궁궐로 향하는 방향, 동궁과 황룡사지를 배경으로 서있는 미탄사지탑은 새롭게 경주에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준수하고 세련된 기품과 너른 들판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당당한 위용을 함께 갖추며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북천과 남천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퇴적지 한가운데, 자연이 준 재해를 다스려 번영의 기반으로 삼은 경주인들의 굳센 의지와, 전성기 신라의 발전과 풍요를 지키려는듯 의연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는 미탄사지탑에서 나는 여전히 중성적이면서 이상주의적으로 흘러가는 700년대 초중반기의 미감과 정신을 읽고 있다. 

 

 

<산업로-낭산쪽에서 바라다 본 모습... 바로 뒤 왼편에 보이는 소나무 숲이 월성이고, 그 뒤로 단석산에서 선도산으로 이어지는 산맥과 오른쪽 봉우리는 옥녀봉으로 불리는 송화산이다... 이곳에 서서 경주가 어떻게 형성돼서 발전 확장해 나갔는지 한번 그려보는 것도 즐거운 상상이 된다...>

<늘 경주 IC를 통해 진입하는 나로서는 미탄사지탑을 맨 먼저 접하게 되는데,

경주 한복판을 경주의 다른 탑이 아닌 미탄사지탑이 지키고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 때가 많았다...

경주에 처음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는데는 어떤 석탑이 좋을까?  하는...

 

인근에서 찾아보면 ;

나원리탑이었으면 너무 무겁고,

황복사탑은 너무 둔하고,

천군동은 혼자만 당당했지 주변에 너무 무관심해 보이고...

아무래도 이들은 너무 딱딱해서 적당하지 않은 거 같고, 

 

우아한 미감에서 골라보면

원원사탑은 당당함이 아쉽고,

염불사탑은 조금 연약해 보일 거 같고,

그렇다고 감은사탑/고선사탑/석가탑/장항리탑은 이곳에서 손님맞을 군번은 아닌 거 같고...

 

그나마 잘 어울리는 게 용명리탑과 미탄사지탑이 아닐까 싶은데, 

화사한 한복을 입고 부드럽게 손님을 맞이하는 용명리탑이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세련된 제복에 타이를 맨 준수한 미탄사지탑도 좋을 거 같고...

 

둘 다 괜찮지만 아무래도 남성들 입장에서는 용명리탑이,

여성분들 입장에서는 미탄사지쪽이 더 유력한 거 같은데,

그런면까지 고려하면 중성적인 매력을 가진 미탄사지탑이 모두에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잊지않고 찾을만한 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