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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51> 석탑의 복원을 위하여 (3) - 창조적인 스토리텔링은 무엇일까?...1311

 

 

 

 

 

 

   3) 문화유적 복원을 통해 회복할 문화원형과 정체성, 그리고 미래를 향한 스토리텔링...

 

 

흔히 폐사지는 폐사지로서 충분히 역할을 한다는 이야기들이 많고, 나 역시 충분히 동의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파괴된 그 흔적까지도 역사인 이상, 현재의 필요와 현대의 미감으로 추정조차 막연한 폐사지에 대한 어설픈 접근과 복원은, 문화예술작품의 보존과 올바른 시대정신의 매개체로 복원되기보다 파괴와 해체로 귀결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파손된 탑은 폐사지와 다르다고 생각되며, 그 원형추정과 복원도 건축구조물과 다르게 간단명료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석탑을 복원할 때는 최초 조성된 시점을 기준으로, 부분적으로 파손된 부위는 보수를 원칙으로 하고, 박물관 등에 진본이 있을 경우는 이관하는 것보다 재현품을 만들어 본래의 입지에 전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점을 제시했다.

 

 

<폐사지는 폐사지다운 맛과 멋이 있다... 내게 폐사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거돈사지와 영암사지다. 거돈사지에서는 단절이 주는 여유로움에서 그윽한 평화를, 영암사지에서는 은둔속의 옹골찬 기개 같은 걸 읽을 수 있어 좋아한다... 폐사지에도 분위기와 품격 같은 게 있다는 말이다...>

<폐사지가 주는 가장 큰 미덕은 한계 지워지지 않는 무한대의 상상속에서 구현되는 건축적 구상과 한시대를 살아간 이들이 읽고 간직하고 싶어 했던 정신의 향기 같은 걸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폐허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추측할 수 있는 매개들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정도의 복원이다...>

 

 

 

 

 

물론 이런 점들은, 석탑의 보존은 있는 그대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가장 간단한 예로 나는 석탑과 석불 등 석조유물의 세척에 절대 동의한다. 왜냐하면 노천에 위치한 석탑은 열화와 풍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데, 오염은 미생물의 증식으로 풍화를 촉진하고 미세 균열 등을 관찰하는데 절대적인 장애요인이 되기 때문에, 석조유물의 생명력을 지속시키려면 세척 등 지속적인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즉 석탑이나 전탑, 불상 등에서 느끼는 세월의 무게와 역사는, 끼어있는 이끼나 들풀이 주는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주는 감동에서 시작하는 것이고, 현재의 오염는 기껏 몇십년 동안 지속된 방치에 불과하고, 부분적인 파손과 인위적인 훼손도 길어야 몇백년 동안의 무관심과 가치를 몰랐던 무지의 흔적에 불과할 뿐이지만, 지금까지 보존된 문화유산과 석탑은 지나온 세월보다 더 긴 시간을 지켜나갈 때 더욱 큰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항리탑 세척 전후의 모습... 오래되게 보여서 좋은 게 아니라, 오래됐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조금 더 확장해 이야기한다면, 현재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자는 말은 자연재해나 인위적인 파괴도 역사이기 때문에 현상태를 유지하면서 그대로 관리만 해야 한다는 말과 다를바 없다. 이건 무책임이다. 또 문화예술과 역사의 감동은 새것처럼 산뜻해 보인다고해서 호기심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래되고 헌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 중후하거나 기품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다(본래 명품의 기준이라는 게 ; 새것일 때도 가볍거나 낯설지 않아 친숙하면서 품위가 있고, 오래됐을 때도 여전히 참신하고 현대적이며 질리지 않는 거 아닌가?). 즉 어떤 상태에서 어떻게 보이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를 읽고 해독할 수 있는 관점과 정보와 관심의 문제인 것으로, 지속적인 관리와 끊임없는 보존 의지를 가진 것들이 현재적 의의와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같은 장항리사지에서 발굴된 석불의 복원과정... 시멘트로 형상만 발라 놓은 것도 역사지만,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여력과 기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치하는 것은 더 심각한 비역사적인 훼손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원형 추정이 가능한 문화유적에 대해 복원을 거론하는 것은 역사의 원형을 재현하면서 문화적 정체성을 끊임없이 각인하자는데 있다. 즉 역사는 망각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과거의 재현이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기 때문에, 혹은 반성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숨겨진 잠재력을 찾을 수 있는 영감의 대상이기 때문에, 또 미래로 나갈 더 풍부한 원형을 간직하고 있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체감을 중시하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뿌리에 대한 정체성이 없으면 남들과 비교하다 방향을 잃기 마련이고, 그 기준이 되는 잣대를 상실했을 때 더 이상 돌아갈 고향도 미래도 상실하게 된다. 현재를 풍부히 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기억해야하고, 기억하려면 친해져야하며, 친해지려면 복원해야 한다. 그게 내 생각이다.

 

<건청궁... . 나는 권력과 부를 싫어해야 할 것처럼 배워왔다. 그 각성이 지금까지 남았는지 궁궐과 사대부집 같은 곳을 외면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궁궐에 대한 답사기를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경복궁에 복원된 건천궁으로 인해 이제 창덕궁의 연경당(1827년)과 함께, 궁궐 건축 기술자들이 만든 1800년대 조선 사대부 건축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는 건축적 의미만 있을까?>

<연경당과 건청궁에서는 당대를 주도했던 권력과 지식이 무엇을 지향했는지, 그들이 거주했던 공간과 건축은 어떻게 기획됐는지 비교적 상세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역사의 현장이란 꼬리표가 붙지만 복원 됐기 때문에 다시 보이는 것들이다...>

 

 

 

 

 

 

 

5.

 

 

사실 이런 면에서 석조유물이면서 우리문화의 가장 오래된 건축적 유구를 간직한 석탑은 그 어떤 문화유산보다 풍부한 상징성과 대중성, 그리고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의 소유물이 아닌 처음부터 대중들의 교화를 겨냥해서 만들었으며, 폐쇄적인 공간이 아닌 수양과 교류와 강론이 진행되는 네트워크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만들었고, 장롱과 금고에 소장하는 공예품이 아니라 건축 구조물들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자연속의 위치해 있으며, 게다가 특정 양식을 계승하면서 신성과 영원성을 함께 갖추고 있다. 또한 특정 계급과 특정 집단, 특정 지역에 한정돼 만들어지거나 계승된 게 아니고 천년이 넘는 동안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항상 민중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지켜며 망각의 시간보다 긴 세월을 사랑받아왔다. 때문에 종교적 교리만으로 한계를 지울 이유도, 한 시대를 대변하는 특정 유물로 폭을 제한할 이유도, 예술적인 완성도만으로 접근을 한정 시킬 이유가 없다.

 

 

<탑평리탑에서... 우리가 문화예술이란 이름으로 접하는 것들은 모두 당대의 종교와 권력과 경제적 능력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들이 그걸 통해 찾는 것은 건축적 공간이고, 자연과의 조화이며, 인간내면의 의지 같은 것들이다...>

<피렌체 다비드 재현품 앞에서... 탑평리탑과 이 광장에 머무는 사람들의 양식은 다양하다. 그걸 좋아해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그 공간이 있어서 모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사랑받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잇다... 즉 과거에 묶어 놓은 것과 현재의 나로 승화시키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지, 유물과 유적을 남긴 이들의 의도와 무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석조유물은 유리, 철, 목재 구조물과 또 다른 특징과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기껏 70여년을 넘지 않는 유리구조물, 에펠탑부터 계산해봐야 120년에 불과한 철구조물과 비교할 건 아니지만, 수명에 한계(일본 이세신궁의 내궁은 양쪽에 부지를 마련해 20년마다 비어있는 부지에 똑같은 신궁을 짓고 기존의 건물을 헐어 버린다. 이 전통은 690년부터 2013년 현재 62회차가 되는데 전국시대에 120년간 중단된 적이 있었으니 최고 570년 양식(일본에서는 이보다 10갑자, 600년 이전으로 주장한다)이 재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륭사 금당과 오중탑보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 양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목조건축 수명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원형을 보존하려는 지혜도 놀랍지만, 1300년전 약속을 지금도 지키고 있다는 게 더 놀랍다)를 가지면서 온전한 형태가 아니면 복원이 불가능한 목구조물과 달리, 최초의 원형만 확인된다면 당장에 복원을 시도할 수 있다는 유일한 건축구조물이며 또한 영구적인 소재와 구조가 석조유물이기도 하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의 문화유적 복원과 보존은 석조유물과 유적들에서 시작했다(그들은 피라미드를 복원하는 게 아니라 발굴만 한다. 이집트에 있어 그럴 수도 있지만, 왕의 묘는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민주성과 대중성, 그리고 개방성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더 완벽한 복원을 위해 석조건축물 내부의 벽화와 세부 디테일까지 하나하나 복원하고 있다.

 

 

<법륭사 입장티켓... 금당과 오중탑 사진을 너무 남용하는 거 같아서 입장티켓으로 대신하는데,  법륭사를 건축양식과 일본의 문화로만 보는 것은 정식만찬에서 에피타이저에 만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로 임페리얼리... 우리가 고대문물을 찾고 무너진 곳에서 찾는 것은 보이지 않은 더 많은 것들을 갈구하기 때문이다. 이중 석조건축과 유적은 끊어진 시간을 연결하는 가시적 성과이면서 광대한 공간적 확장성까지 가질 수 있다... 참고로 이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포로로마노나 포로임페리얼리는 현재 차와 사람들이 통행하는 지반에서 상당히 낮은 곳에서 발굴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만한 깊이의 퇴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천여년 동안의 방치기간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들에게도 우리만큼의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2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전쟁의 참화와, 민란과 내전, 경쟁적 약탈도 끊이지 않았고, 지진과 화산 등 자연재해도 있었고, 이슬람과 종교개혁 등 종교적 갈등도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는 그리스-로마라는 공통된 문명의 기원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과, 르네상스 등을 통해 과거의 복원을 통해 휴머니즘이란 가치를 찾아낸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공자가 주나라라는 이상향을 설정해 유학을 체계화했듯이, 유럽인들은 그리스-로마를 아이템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자긍심으로 각인시키고 있으며, 이미 르네상스를 통해 복원이 주는 파워를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에 더더욱 서두르지 않고 복원 경험의 성과를 하나하나 집적하며 체계화 시키고 있다(정치공동체를 지향하는 경제공동체 유럽연합 EU의 출발은 문화공동체라고 생각한다).

 

 

<포로로마노에서... 사실 우리가 유럽에 가서 보는 대부분의 문화유적들은 르네상스의 산물이다. 정작 그리스-로마가 남긴 유적과 유구들은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착각이 자연스러운 것은, 르네상스 자체가 그리스-로마 유적들을 복원하는데서 시작했고, 상당 부분이 파괴된 부재를 재사용하거나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대성당... 그리고 그들은 복원과정에서 건축양식과 질적 수준의 회복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승화과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인본주의의 회복이었다...>

<나는 판테온의 돔과 로마대성당 돔의 전혀 다른 모습에서 공통점을 찾곤했다... 모든 신들의 성전인 판테온의 창은 열려 있지만 빛이 들어올 수 없는 구조고(↑), 유일신을 숭배한 로마대성당의 창은 항상 닫혀 있지만 빛이 들어온다(↓)... 닮았으면서도 다른 모습이다...> 

<또 그들의 복원이 종교적 성찰과 과학기술의 발전에만 의지했다면, 르네상스는 그리스-로마를 계승하지 못했을 것이고, 설사 형태의 복원을 했더라도 그 근본을 찾는데는 또 다른 시간과 노력만큼 지채됐을 것이다...>

<르네상스의 복원과정에서 그들의 화려함에만 현혹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복원하려는 것은 오브제의 원형이 아니라, 그 정신까지 복원하면서 이를 한차원 끌어올린 방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에 비해 우리, 역사와 문화 공동체라 불러야할 우리는 정체성과 자긍심을 결집시킬 뿌리 같은 역사의 영광을 공유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된다(단기 4446년, 그레고리력과 별도의 연혁을 가진 문명이 세계적으로 극히 희귀함에도 일부에서는 건국 65년을 강조한다). 또 이미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복원하고 재현하면서 새로운 가치와 미래를 열어갈 동력을 얻은 중세 르네상스의 경험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뿌리가 뚜렷하지 않아 현재 우리들이 꿈꾸는 미래는 하나로 묶이지 못하고, 저마다 따르고자 하는 가치도 일관되지 못하며, 다른 나라 다른 문화와 비교를 통해서만 만족을 꾀하려 한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잃어버린 백제의 원형을 일본이 보존하고 있듯이, 중국이 상실한 유교의 전통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고, 인도가 상실한 대승불교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해서 나는 복원해보자는 것이다. 복원을 통해 과거의 역사를 깊이 이해해보자는 것이다. 그 속에서 뭔가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동양문명의 가장 핵심적인 뿌리를 간직한 우리의 잠재력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화성에서... 그러나 우리들의 복원은 아직 단기간의 성과와 과거영광의 재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보다 중요한 것은, 복원과정과 결과가 우리의 문화와 사상과 사회질서를 변화시키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 수준과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기능과 기술을 뛰어넘으려는 노력과 문제의식이 없는 한 우리들의 복원은 문화와 관광상품의 연계에 만족할 뿐이다...>

<화성에 대한 내 생각을 첨언한다면 ; 화성은 유럽이나 일본의 성과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며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궁궐, 도성과도 다르다... 과거 우리나라에 산재한 산성이나 읍성의 장단점을 모두 수렴해 건설한 화성은 1800년대 우리 문화가 시도했던 신도시 개발의 총체였고, 자급자족의 도시공동체를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발로나 권력기반의 재편과정으로 그 의의를 축소시키는데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들의 복원은 늘 단발적이고 단편적이며 절름발이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 문화가 이룩한 성과는 유럽의 화려함과 스케일에 미치지 못하고, 같은 석조건축으로도 중국이나 동남아시아에 비해 열악하다. 화강암을 다루면서 양궁이나 골프, 세공기술과 각종 기능에서 두각을 나타냈다고 강변하지만 인도의 석조공예나 양탄자를 만들어왔던 이슬람의 섬세함에 견주기도 힘들다. 문학적 상상력에서는 프랑스에, 파격과 자유로움에서는 이탈리아에, 실증적 분석에 입각한 체계화에서는 미국에 미치지 못한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동양문명의 원형을 간직한 우리문화는 예의범절에서는 영국에 뒤지지 않고, 모방과 응용에서 일본과 견줄만하며, 관념성과 사변성에서는 독일에 버금간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과거에 대한 관심과 집착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이르기까지 세계최고(世界最高)와 최고(最古)의 기록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역사유물과 유적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면서 우리가 잘했던 것을 찾기 위해 보존과 복원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에게 부족한 개념화와 창조적 상상력, 그리고 스토리텔링에 대한 단초를 문화재의 복원에서 찾아보자는 것이다.

 

 

<우리시대 가장 큰 규모인 경복궁 복원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자...>

<재복원 되기 이전의 광화문... 경복궁 광화문 1395년 창건돼 정도전에 의해 사정문이라 명명됐던 광화문은 1425년 집현전 학자들의 건의로 개명된 이후 세차례에 걸쳐 복원된다. 한번은 1864년 임진왜란 이후 270년만에 대원군에 의해 복원되고, 다시 625전쟁의 참화로 1968년, 그리고 다시 2006년 재복원 된다...>

<한번은 왕실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또 한번은 민족문화 재건을 위해(?), 그리고 마지막은 건축적 원형복구를 위해... 이 복원과정들이 남긴 것은 무엇일까?... 내가 듣고 싶은 것들과 무관하게 복원에 대한 우리들의 평가는 칠이 왜 벗겨졌는가? 제대로 건조한 소나무를 사용했는가? 혹시 공사관리 감독에서 문제는 없었는가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복원의 첫 번째 대상은 건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집단적이고 사회적이며 지속적으로 발전한 건축을 만든 것은 인간뿐이기 때문이다. 새도 집을 짓고 수달도 댐을 만들지만 그 주체는 한쌍을 벗어나지 않고, 유일하게 사회적으로 건축하는 벌과 개미가 있지만, 그 집은 발전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만이 본능을 벗어난 건축을 한다. 기획, 설계, 시공, 사용, 보수로 이루어진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고, 공간의 경영이며, 과학기술의 구현이며, 사회적 관계의 구축이고, 미래를 향한 꿈의 실현이다. 때문에 레고도 건축경험이고, 정치경제문화도 건축의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사회적 제관계를 담을 수 있는 건축이 복원되어야, 음악과 그림과 시가 살아날 수 있고, 정치와 경제와 문화가 읽힐 수 있고, 역사와 종교와 사상이 실체를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건축이 먼저 복원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원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 출발은 건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건청궁도 다시 살펴본다... 광화문 경복궁이 복원된 이후 곧바로 1873년 고종에 의해 신축돼, 1909년 일제에 의해 헐렸다가 2007년 복원된 건청궁은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곳으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한번 생각해보자... 고종이 건청궁을 신축하고 기거한 이유는 대원군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하겠다는 의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873년은 경복궁 재건과정에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발행한 당백전으로 인플레이션이 심화되고, 대소신료들과 백성들의 반발이 극에 다다르던 시점이며, 이후 1876년 강화도 조약에 의해 부산에 이어 원산과 인천이 강제개항 되고 신료들은 척화파와 개화파로 분열된다...>

<이 불평등조약을 강제한 일본은 1853년 페리제독에 의해 불평등조약을 맺지만,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 보신전쟁에서 승리하고 1873년 폐번치현을 비롯해 기존의 봉건제를 완전히 개혁한다... 불과 20년만의 일이고, 이를 주도했던 곳이 바로 도자기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강제개항도 당했던 큐슈지방의 사쓰마번이었다... 그 때 외척과 세도정치에 대립했던 왕실은 무얼했고, 우리의 유학자들은 무엇을 했을까?...>  

<우리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경복궁을 복원에 전력을 기울이고, 건청궁을 신축하며 왕실의 권위회복을 꾀했지만, 이 역시 왕실 내부의 분열을 상징하는 것 뿐이었고, 일본은 봉건체제를 뿌리채 개혁했다... 또 강제개항 후 15년만에 보신전쟁이 일어났듯, 강화도 조약 18년후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지만 우리의 왕실과 사대부와 유학자들은 일본군까지 끌어들여 무참히 진압한다... 복원된 건청궁은 아픈 역사의 현장으로만 기억되어야 할까? 복원을 통해 회복할 문화원형과 정체성, 그리고 미래를 향한 스토리텔링은 과연 무엇이 되어야할까?>

<광화문만 보더라도 불과 40년만에 미감과 체감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엇이 건축적 원형인지는 불분명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모습은 1864년의 모습을 원형으로 한 것이지 1395년을 모델로 한 것은 아니고, 현재의 처마선도 남아있던 부재를 사용한 것이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곡선은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1968년의 복원에 대한 반성과 현재의 분위기와 미감이 가미됐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 중인 경복궁 복원 과정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 광화문과 경복궁 사진을 곁들여봤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좋은 것이 석탑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든 석탑은 거석문화의 변형으로 우리문화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뭐 은근과 끈기 집념 같은 걸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돌을 잘 다뤘기 때문에 손재주가 좋다고 마냥 비약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대표적인 경쟁력이 손을 통해 이루진 것들임은 분명하다. 거칠고 투박한 질감과 과감한 추상성에 신성과 예술성이 복합적으로 가미된 것으로 석탑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선만의 것도 아니고, 고려만의 것도, 신라만의 것도 아닌, 백제와 고구려까지 관통하는 가장 유력한 것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생명력이 유지되기 때문이고, 중국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형상은 있지만 교본은 없고, 호불호는 있지만 시시비비가 없고,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함부로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화유산이고, 가까이는 풍수비보의, 멀리는 고인돌을 계승한 가장 전통적인 유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시대 석탑의 복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이 역시 1980년 해체 복원된 모습이다... 내가 석탑복원을 우선 거론하는 이유는 우리의 현대사와 근대사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역시 기독교 계열의 역차별 논란까지 섞이고 있음에도, 불교가 우리의 가장 전통적인 신앙이자 철학이라는 점도 있겠지만, 700년대는 19세기 전후를 제외하면 가장 국제적이고 가장 역동적인 사건의 과실들이 무르익어 최고의 문화역량이 발휘됐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봉감탑이 담고 있는 생명이나, 관리의 목적을 이 들풀에만 둘 필요는 없지 않을까?>

<복원은 의도와 의지도 중요하지만, 그 대상이 무엇이든 이를 사회적 아젠다로 확산시키고, 이를 통해 관심을 제고하는 것은 분명한 방향을 가졌을 때 보다 풍부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작기 그지없는 석탑을, 그 자체의 크기만큼으로 한정시키지 말자는 말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석탑은 이집트나 멕시코의 피라미드와 다르고, 앙코르와트나 용문석굴 로마대성당과 다르고, 베르사이유 궁전이나 오사카성과 다르고, 콜롯세움이나 판테온 포로로마노와 다르다. 또 경복궁, 화성, 조선 왕릉, 팔만대장경, 도자기와도 다르다. 공간의 전체도 아니지만 건축의 완결도 아니다. 불상과 석등과 당간지주와 연결되어야 하고, 건축과 석단과 자연과 공존해야만 의의가 살아난다. 또 그렇기 때문에 석탑에는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스케일의 자연과 건축이 있으며, 불교교리와 도교적 풍수지리에 입각한 국토지리, 유학의 터부까지 짙게 깔려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전체를 겨냥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석탑이 전국적으로 연결되면 정림사탑(570년)에서 벽송사탑(1520년)까지 1000년의 시대정신과 문화미감을 관통하는 생명력이 살아난다. 어떤 유적 유물보다 가장 풍부하고 질긴 생명력을 긴긴 역사속에서 잃지 않았다.

 

 

<정림사탑... 석탑은 우리들이 바라보는 스케일보다 훨씬 큰 이야기를 담지하고 있었다... 서산마애불과 금동대향로가 발견되기 이전, 정림사탑 하나로 우리는 백제의 미감을 이야기했듯이...>

<감은사탑... 최초의 삼층석탑이자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이며 원형인 감은사탑은 600년대 후반, 통일신라가 지향하고자 했던 모든 정신을 담기에 결코 부족함이 없다...>

 

 

 

 

문화재의 복원이 우리에게 부족한 모든 것을 채워주는 것도 아니지만, 개념의 창조에 바탕을 둔 스토리텔링(최근 정부가 강조하는 창조경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잘하는 것을 기준으로 우리가 못했던 것을 찾자는 의미에서 나는 스토리텔링을 강조하고 싶다)이 어느 하나로 완결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 석탑이 문화재 복원과 보존의 키워드도 아니겠지만, 가장 빠르고 손쉬운 대상을 외면하는 것은 첫발을 내딜 무게중심을 잃는 것일 수도 있다. 하나하나의 석탑은 작기 그지없지만, 그 하나하나가 시대를 읽는 매개가 되기에 충분한 키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하나하나가 묶이면 우리의 실체가 확연히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석탑의 복원을 말하려는 것이다.

 

 

<석가탑... 이 석가탑이 대외적 긴장관계속에서 삼국의 문화를 융합하여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국제적인 교류까지 가장 활발했던 740~50년대, 문화적 충격과 내부동력의 변화와 교류와 개방이 활성화된 시점에서 우리 문화가 만든 걸작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나이지만 전부일 수 있는 게 석탑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신복사지탑... 그리고 다시 발해가 멸망하고 해상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에 의해 발흥한 고려는 북방개척을 지향했다... 이 탑에서 그걸 읽으려는 건 나만의 욕심일까?> 

<벽송사 삼층석탑... 1520년 통일신라 양식으로 만든 조선의 삼층석탑이다... 이 탑이 조선의 미감을 대표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탑인 것은 분명한 거 같다... 하나하나의 석탑에서 읽을 역사의 양도 적지 않겠지만, 그걸 묶을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질 때 우리들 이야기도 깊이를 갖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아직까지 안개는 걷히지 않고 있는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