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780년대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 양식의 해체와 쇠퇴 - 기념비적 이형석탑의 등장
1) 780~828년 정치적 배경의 변화 - 지방호족이 성장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의 형성기
지금부터 살펴볼 석탑들은 780년 전후(선덕왕)부터 828년(흥덕왕 초기)까지 만들어진 것으로 전성기 통일신라의 마지막 여운이 남아있는 석탑들이라 생각돼 골라봤다. 700년대 초반 신성이 강조되고 위압적일만큼 장중했던 석탑은 석조건축이었지만, 700년대 중반부터 세련되고 우아한 법신으로 이상주의적 비례와 조화에 다다르며 형상의 완성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이고, 다시 800년대 초반에 이르면 주관적이거나 독자적인 완결성을 지향하는 단아하고 건실한 석조공예로 변모해간다고 생각되는데, 그 과도기에 있는 석탑들이다. 대략 4~50년 기간동안 조성된 과도기 석탑들은 대체적으로 장중하거나 중성적인 미감을 보이면서, 다양한 기예로 정형화된 규모와 양식을 벗어난 석탑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보수적인 경주의 폐쇄성을 극복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화엄사 사사자석탑... 이 시기 석탑의 가장 큰 특징은, 파격적인 다양함, 외형에 얽매인 무미건조함, 그리고 경주양식과 규모에서의 탈피로 요약할 수 있을 거 같다... 흑백사진으로 골라봤는데, 너무 오래전에 스캔한 거라 파일크기가 너무 작았다...ㅠ>
먼저 그 분포를 보면 경주와 대구, 안동 등을 벗어나 문무왕 시절 기념비적 석탑과 석불을 주요 교통로를 따라 조성했듯이, 이제 본격적으로 소백산맥을 벗어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는 등 700년대 중반보다 확장된 지역에 분포하는 특징을 보이게 된다. 확장방향은 경주를 둘러싼 울산, 대구, 포항으로의 확대가 하나이고, 구미-안동-문경-영양-영주와 창녕-합천-산청 등 소백산맥 동남쪽의 전통적인 신라문화권으로의 확대가 둘이고, 양양-횡성-원주-제천-여주-충주와 지리산 일대의 남원-구례-광주 등이 셋이라 할 수 있는데, 한강 넘어 예성강 북쪽과 지리산 서남쪽의 전라남도 일대가 본격적으로 경영되던 시점이지만, 고백제의 중심지였던 공주와 익산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변화는 당시 변화된 각국의 국내정세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과도기 석탑의 분포도...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소백산맥을 벗어난 전국적 확산이다. 이 지도에서는 석탑의 유형보다 지역성을 근거로 색을 나눴다...
▶ 먼저 600년대 이전 신라영토였던 곳에는 1) 경주 정혜사 십삼층석탑, 무장사지/남산동/인용사지/천룡사지/석굴암/숭복사지 삼층석탑, 2) 울산 석남사/청송사지 삼층석탑, 3) 창녕 술정리 서삼층석탑, 4) 칠곡 기성동 삼층석탑, 송림사 오층전탑, 5) 포항 법광사 삼층석탑, 6)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 죽장동 오층석탑, 직지사 청풍료앞 삼층석탑, 7) 안동 임하동 삼층석탑, 법흥사지 칠층전탑, 조탑동 오층전탑, 8)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 9)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등이 건탑되고...
▶ 소백산맥 경계지역의 10) 산청 단속사 삼층석탑, 11) 합천 청량사 삼층석탑, 12)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13)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14)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이,
▶ 소백산맥 북쪽으로는 15)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16)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17) 양양 선림원지/진전사지 삼층석탑, 18) 횡성 중금리 삼층석탑,
▶ 그리고 소백산맥 서쪽 구 백제지역에는 19)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21) 광주 지산동 삼층석탑 등이 조성되고, 진표율사의 기반인 20) 김제 금산사와 22) 보은 법주사 등이 있다...
나는 이런 변화가 통일신라 석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먼저 700년대 후반은 당나라, 통일신라, 일본 등이 친당정책을 중심으로 형성된 전제정치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각국은 권력다툼과 민란 등 내홍으로 국내적 응집력이 급속도로 와해되던 시점으로, 이런 혼란을 틈타 발해가 영토확장 등을 통해 해동성국으로 불릴만큼 부흥하고 남해안 일대의 해적 출몰이 본격화 된 시점이기도 하다. 한반도 북쪽의 흑수말갈을 흡수하고, 요동지방까지 진출한 발해는 800년대 초반 당나라의 사신서열에서 신라보다 앞선 자리를 요구하는 등 대국으로 성장하면서 대동강 이남까지 진출하게 됐으니, 이에 대항하기 위해 강릉에서 양양, 충주에서 한주(경기도 광주)에 이르는 길목의 소경과 군진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대두 된다.
<발해의 확장/지도로 보는 한국사/김용만.김준수 지음/수막새/2005년... 700년대 중반까지 소강상태였던 대동강 이남에서 예성강 이북지방은 750년대 후반 안사의 난 이후 요동지방에 대한 당나라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절도사들이 난립하는 지방분권적 자치체제로 재편되면서 상대적으로 발해의 확장이 용이하게 바뀌고, 이로인해 예성강에서 대동강 일대의 국경지역에는 긴장관계가 제고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794년 교토로 천도하면서 내부정비를 서두를 수밖에 없던 일본의 약화된 국정장악력 여파는 역으로 남해안 일대에 출몰하는 해적을 양산하게 되고, 이에 대항해 남원에 집중된 행정력 외에 무주(광주)가 전략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한편으로 통일신라의 어민들도 일본 서부와 당나라 연안을 겨냥한 해적들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즉 600년대 중후반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국제적 역학관계가 100여년이 지나 새롭게 재편되면서 통일신라의 영토방위는 기존 지방관이 파견된 9주 5소경 외에 10정과 5군진의 비중이 점차 커지게 되고, 북방과 남해안의 백성들은 스스로 생존을 위해 무장을 시작했다는 말이다.
<9서당의 설치/지도로 보는 한국사 P84에서... 통일신라의 지방통치는 초기 군사적 편제에서부터 시작했다...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설치하기 시작한 9서당은 지방에 주둔한 통일신라 중앙군이었고, 이를 신문왕이 정비한 것이 통일신라의 9주 5소경이 된다... 즉 9주5소경 편제가 형성되기 이전 형태가 9서당이란 존재며, 이 주축은 백제유민이 아니라 고구려와 말갈인들이었다...>
<9주 5소경과 10정 5군진/지도로 보는 한국사 P90~91... 9주는 구 고구려/백제/신라 지역에 각각 3주씩 설치되고, 5소경에는 중앙에서 밀려난 귀족세력이 정착하면서 이들 지방은 정치/문화/군사적 부수도로 발전한다... 금관경에서는 소율희/김인광 등이 호족세력으로 성장하고, 북원경은 반신라를 내건 양길과 궁예 등장의 바탕이 되었고, 중원경의 충주 유씨는 왕건의 가장 유력한 호족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기병군단인 10정이 각 주에 배치되고, 그 외 승병인 신삼천당/창병인 비금당/도끼부대인 만보당 등이 배치되며, 북진/패강진/청해진/당성진/혈구진 등 해진이 개설돼 해상교통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나는 5군진이 활성화된 시기를 700년대 후반으로 본다...>
때문에 경주를 중심으로 청송-상주-달성-양산의 방어체계에, 강릉을 중심으로 삼척에서 속초쪽으로 북진이 이동하고, 원주와 춘천을 잇는 홍천, 충주와 광주를 잇는 곳에는 여주와 이천을 거쳐 평택-강화-해주(사리원)을 잇는 해진(海陣), 청주와 공주를 잇는 서산, 그리고 광주 주변의 나주와 청해진, 동남해안에는 김해를 중심으로 함안과 진주 등이 부각되면서 이들 지역에 10정과 5군진이 만들어지는 등 군사적 요충지로 발전할 수 있는 객관적인 토대가 형성된다는 말인데, 실제 이들 지역에는 800년대 초반부터 석탑과 석불 등의 유물들이 하나둘씩 조형되면서 이후의 변화를 도모하게 된다(소백산맥 바깥쪽만 보더라도 속초 향성사탑, 양양 선림원지탑, 진전사탑, 도의선사탑, 횡성 중금리탑, 제천 장락동탑, 충주 탑평리탑, 광주 지산동탑 등과 금산사, 법주사, 화엄사, 남원 등).
<횡성 중금리 삼층석탑... 한성 백제시절 백제의 영토였던 여주, 원주는 웅진(공주)와 함께 유력한 천도 후보지였을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통일신라시대에도 5소경 중 하나인 북원경으로 부상한 원주에는 수준 높은 석불좌상과 철불 등이 조성되는 등 정치/군사/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남원 출토 사리갖춤/국립 전주 박물관에서... 5소경의 문화적 성과도 상당한 것이어서, 충주에서는 우륵/강수/김생 등이 활동했고, 원주와 남원도 상당한 문화적 발전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데, 남원의 문화적 역량은 상대적으로 저평가 됐던 게 아닌가 생각된다... 내 생각이지만 남원에서 출토된 이 사리갖춤은 통일신라시대 가장 독특하면서도 화려한 대표적 유물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몇가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고 보는데, 하나는 9주5소경 외에 파견지가 늘어나면서 훨씬 많은 진골그룹과 6두품이 전국적으로 파견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주의 문화가 인적으로 확산될 계기가 되었고, 두 번째는 군사적 성격에서 출발했으나 차츰 행정력에 이어 문화권력까지 결부되면서 800년 전후가 되면 무인들의 강건한 문화가 새롭게 결합됐으며, 세 번째는 중앙에서 체계적으로 양성된 지배층에 자체적으로 형성된 민간 무장세력들이 흡수되면서 지방의 특성이 경주중심 문화와 결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이다(여기에 중앙진출이 봉쇄된 진골그룹들이 지방관 파견이나 경주를 벗어난 곳에 강제 이주되면서 정착한 지역에 형성한 식읍과 녹읍 등 경제력이 합쳐져 소위 통일신라 하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지방호족의 발판이 된다).
<통일신라의 지방호족/지도로 보는 한국사 P88에서... 9주 5소경 지역에는 처음 군사력 중심의 군주로 파견됐다가 후에 총관 혹은 도독으로 명칭이 바뀌듯 행정력까지 겸비되면서 무장세력을 사유화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780년부터 본격화된 왕위쟁탈전과 민란 등에 편승하거나 이를 이용하여 더욱 지방분권적인 자치세력을 공고히 해나간다... 이 지도의 분포는 800년대 초반부터 900년대 초반까지를 포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경주와 중앙진출에 목말라하다 회의를 느낀 6두품들이 대거 당나라 유학길에 대거 나섰지만, 상당수는 지방에 파견된 진골그룹이나 군진에 합류하게 되었고, 또 각지방에 파견된 진골과 군진의 세력에 권력화된 교단에서 벗어나려는 고승과 선승들이 결합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청해진 개설(828년)과 함께 장보고 군단이 1만의 수군을 쉽게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기존의 해적화된 어민들을 규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전라남도는 진골출신 지방관과 자체적으로 무장세력이 된 군진, 그리고 귀국 후 경주에 입성하지 못한 선승들이 결합한 권력창출의 새로운 모델로 등장하게 된다고 보인다(상대적으로 발해와 접경지역인 예성강 일대가 이런 모델과 비슷하게 세력화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었다고 생각되고).
<장보고의 해상무역/지도로 보는 한국사 P98에서... 일본에서도 '항해의 수호신', '바다의 신'으로 불리웠던 장보고의 활동영역은 생각보다 넓었다... 안사의 난으로 이완된 당나라의 실정을 틈타 산둥반도에서 궐기한 절도사 이정기 제국(765~819년)의 몰락을 곧바로 계승하여, 북으로는 고구려 유민들과 중국 연안의 신라방을 모두 포괄하고 있었고, 남으로는 과거 백제의 재해권 영역까지 상당부분 복원했으며, 가까이는 중국 연안의 신라방을 모두 포괄하였다... 이때 유입된 부로 800년대 중반 통일신라는 선종의 부흥과 지식인들의 국제적 교류도 활발해지는 등 문화적으로 융성해지지만 결국 846년 장보고는 몰락하고, 851년 결국 청해진도 혁파된다... 이들을 강제 이주 시킨 곳이 바로 견훤의 토대가 된 김제 벽골제고, 이들이 다시 밀려난 곳이 서산지방과 나주 그리고 왕건의 성장지인 개성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변화는 앞서 살펴봤듯이 경덕왕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전제정치의 와해과정이 가장 큰 요인이었고, 원성왕 사후 헌덕왕에서 흥덕왕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빈번하게 발생했던 흉작과 전염병이 커다란 이유가 됐다(816년에는 양자강 하류 절동까지 식량을 구하러간 백성이 170명, 821년에는 자식을 팔아 끼니를 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극심한 식량난에 초적과 도적의 봉기가 끊이지 않았으니 800년대 초반 통일신라의 불안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듯싶고, 여기에 사치향락에 빠진 상태에서 계속된 왕위계승전쟁은 백성들의 민심을 경주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800년대 통일신라 주요 반란세력/지도로 보는 한국사 P88에서... 600년대 후반에서 700년대 중반까지 왕위계승과 관련된 반란과 700년대 후반에서 800년대 초반까지 반란의 규모와 발발지역은 달라진다... 즉 경주와 궁궐에 집중된 반란이 지역 거점을 중심으로 발발했다는 점에서 다르고, 다시 820년대 이후부터 반란은 아예 반신라를 표명하며 단순한 왕위계승의 성격을 벗어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800년대 후반에 이르면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몇 년사이에 급속히 진행된 게 아니라, 상당 기간동안 누적된 문제들이 고질적 병폐로 고착된 다음이지만, 이미 그 단초를 760년 경덕왕에게 충담사란 승려가 지어 바친 ‘안민가’라는 향가에서 찾을 수 있는데, ‘ ... ... 탄식하는 뭇 창생, 이를 먹도록 다스릴지어다.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갈까 하면, 나라가 지녀지리라. 아아 임금은 임금같이,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같이 하면 나라 태평하리라... ...’를 역으로 읽으면 태평성대를 노래한 게 아니라 절박한 심정에서 사회상을 개탄했다(역사신문 1권/P102/사계절)고 볼 수 있고, 권력과 경제력 세습을 개혁하기 위해 원성왕이 788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독서삼품과마저 진골그룹의 반대로 물거품이 되면서 자기비판과 정화 시스템까지 차단됐으니, 이때부터 생각해도 수십년 동안 누적된 6두품과 백성의 불만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농민의 경제기반 몰락과 불교의 사회비판 기능 상실, 그리고 유학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층의 이반은 중앙집권 체계 해체를 더욱 촉진시켰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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