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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54> 800년 전후 불교의 변화 - 통일신라 후기 선종의 성장 (2)...1311

 

 

 

 

 

2) 780~828년 불교내부의 흐름과 변화 - 선종이 등장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의 형성기(2)

 

 

그것으로 다였을까? 나는 하나의 상상을 더해본다. 통일신라인들의 눈으로 본 인도의 실체가 미친 영향도 컸다는 생각이다. 나는 통일신라의 750년대를 우리의 1990년대와 연결시켜 생각해보는데, 1970~80년대까지 미국 유학 학위가 없으면 명함도 못 내밀었지만, 90년대가 넘어서면 유럽의 원본들이 직수입되고, 미국의 환상도 상당부분 거세된다. 즉 750년대의 통일신라는 당나라 불교에 대한 기대가 걷힌 시대이기도 하지만, 인도에 대한 환상도 함께 깨진 시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사실 서유기는 구법 여행을 문학화한 소설(!)이지, 인도철학과 불교역사 정리 텍스트가 아니다. 또 그래서 인도여행은 90년대 유럽 배낭여행처럼 당시 통일신라의 유행을 만든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인들에 비쳤을 인도는 어땠을까? 그들이 확인한 인도는 서방 극락도, 살아있는 부처들이 거주하는 신들의 세계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득도가 여전히 중시됐겠지만, 충격과 반성이 따랐을 거라는 말이다.

 

 

<요즘도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TV드라마용 서유기는 중국에서 끊임없이 제작되는 거 같다/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또 손오공하면 그때나 지금이나 애 어른 할 거 없이 모두에게 친숙한 캐릭터로 일본만화와 헐리우드영화 아이콘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물론 그 출발은 서유기다... 서유기의 문학적 희화화는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심성을 닮았지만, 18년 동안 80여국으로 분열된 인도의 75국을 비롯해 중동 이슬람제국까지 110여개국을 돌아다닌 걸 보면, 현장은 정말 성실한 사람이었을 거 같다...>

 

 

 

 

 

이 충격과 함께 어떤 반성으로 귀결됐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한쪽에서는 더더욱 관념적으로 경도했을 것이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근본적인 회의와 직접 체험하지 않는 관념적 신앙에 대한 반성이 있었을 것이다. 사실 미술사를 보면 자연주의에서 시작 고전주의/합리주의가 나오면 이에 반발한 낭만주의/인상주의가 태동하듯, 철학사를 보면 교종 다음에 선종이 등장하는 건 당연하다. 플라톤 중심의 소피스트가 있으면 에피쿠로스파나 스토아학파가 생기고, 교부철학이 생기면서 신의 존재까지 증명하려는 스콜라철학이 등장하면 합리주의(데카르트)가 나오게 되고, 이에 대해 경험론이 득세하면 관념론(칸트, 헤겔)이 나오고, 그 다음엔 유물론(마르크스)이나 비합리주의(니체)가 등장하면 분석적 실증주의와 현상학이 나오고, 여기서 실존주의와 프랑크푸르트파 같은 비판철학이 등장하고, 이제는 극단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 같은 해체철학이 나오면 다시 이를 재구축하려는 철학이 등장하고...

 

 

이들을 진보와 보수, 혹은 전통과 자유주의 입장에서 재단하는 건 비약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대립지점은 명백하다. 출가제자와 교단체계를 강조하면 (재가)신자와 신도들의 믿음이 부각되고, 성경의 해석이 강조되면 개인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이해를 강요하면 체험으로 대립하며, 이상을 노래하면 현재를 비판하고, 관념을 체계화하면 실재를 분석하게 된다. 또한 그 과도기에는 전통양식에 대한 무질서와 반항이 유행하고, 사회안정 기조 중 하나인 숙명론과 운명론을 거부하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적인 사조가 유행하게 된다. 그것이 미술이든 신앙이든 사상이든, 철학의 사유란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결국 선대의 전통이 보수화 경직되면 개인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반대급부가 생성되고, 결국 이를 통해 상호보완 되면서 질적인 변화를 일으킨다. 물론 늘 과도기는 앞선 시기의 결정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자기비판과 정화의 역할을 담당했던 주체들이 선진적이며 진보적으로 보인다는 공통점이 있을 뿐이다.

 

 

즉 소크라테스와 예수, 공자에게 플라톤과 베드로, 맹자가 있다면, 석가모니의 제자로 마하가섭이 있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 다음에 스토아학파가 생기듯 인도불교에서도 부파불교가 생기고, 신플라톤학파와 스콜라철학이 나오듯 용수의 중관학파와 유식설이 체계화되고, 데카르트의 합리주의가 태동하듯이 현장의 유식론이나 원효의 화쟁사상, 주자학 등이 등장하는 것이다(이때까지 서양은 긴세월을 암흑기로 보낸데 반해, 동양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고대종교의 체계를 무너뜨리지만 계급/계층의 신분제도를 변혁시키진 못한다). 그리고 합리주의와 동시에 경험론이 일부에서 세력을 얻어가듯 불교 내에서도 밀교적인 흐름(명랑의 등장과 다라니신앙의 유행)과 소승불교를 중심으로 대승불교를 결합하려는 금강승불교가 정착(티베트의 라마교는 결국 인도불교의 가장 후기 모습을 간직한다)한다.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 상륜부... 원의 영향을 받던 고려후기 석탑으로 석탑 상륜부는 티베트의 라마교 양식 스투파를 그대로 축소해 올려놓은 모습이다...>

<경천사지 십층석탑 기단부... 마곡사탑 상륜부의 금강저가 새겨진 아(亞)자형 기단부를 보고 있자면, 1348년 원나라 장인들을 불러 조형했다는 경천사지 십층석탑이 생각난다...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 양식뿐만 아니라 하부의 앙련이나 우주의 형상까지 똑같다...>

<마곡사에서... 체계적으로만 본다면 금강승불교는 소승과 대승불교의 변증법적 합일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밀교적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신비한 체험에 의지한 밀교적 전통은 합리론이나 관념론에 대항해 일시적인 세를 얻지만 중세이후 사회주도적인 사상으로 정착하지는 못한다...>

 

 

 

 

 

결국 교종이 체계를 갖춰갈수록 선종의 확산 속도도 비례해 빨라지는, 교종과 선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상호 불가분한 대립과 보완구조를 가지고 함께 성장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선종의 핵심적 요소라는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이심전심을 가만히 풀어보면 경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재에서 벗어나, 경전에만(!) 의지하지 않던 초기로 돌아가자는 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현재의 대승불교를 소승불교나 금강승불교로 대체하자는 것이 아닐 뿐이다. 형식은 근본으로 회귀하되, 지금의 성과를 계승하겠다는 게 선종의 주장이다. 게다가 선종계열로 현재 한국 불교의 최대 종파인 조계종도 <금강경>과 <전등법어>를 소의경전으로 한다는 명시를 분명히 하듯,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에 보리 달마 - 조계 혜능 - 도의선사 - 태고보우 - 청허휴정/부휴 양맥의 가르침을 더한 것이다. 즉 교종 다음에 선종이 득세하는 것이 필연이라는 말은 역사적 흐름의 경향성 문제이지 진보와 보수, 역사적 선후의 문제로만 접근할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의천의 교관겸수(敎觀兼修), 지눌의 정혜쌍수(定慧雙修) 역시 입문을 위한 선후, 무게중심의 문제로만 해석할 게 아니라, 한쪽만 강조하려는 경향에 균형감을 주고 상호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해 내건 말로 이해해도 틀리지 않다).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 내 서산휴정 영정... 지리산, 금강산, 묘향산을 놔두고 가사와 발우를 두륜산 대둔사에 전수한 청허당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조직하고 주도한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숭유억불 정책의 핍박에서 조선불교의 맥을 이어간 가장 주요한 사상가였다... 그의 마지막 설법 <八十年前渠是我 팔십년에는 네가 나이더니, 八十年後我是渠 팔십년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는 죽기 전 자신의 영전에 직접 쓴 것으로 사명당 유정과 처영에게 보내진다... 이 진영 좌측 상단에 쓰여있다...>

 

 

 

 

 

 

 

아무튼 당나라와 인도로의 구법여행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700년대 중반은, 1980~90년대 대한민국의 미래상으로서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듯, 인도와 당나라에 대한 환상도 깨진 시점이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논리적 체계를 갖춘 이상주의와 관념성과 사변성이 극치에 이르렀을 것이다. 실제 경덕왕대 불교의 기록은 김현과 호녀의 만남이나 처용설화 등 신비주의적인 체험과 주술적 신앙이 어우러져 불교와 무속의 구분도 모호해진다. 당시 교단은 금은을 남용한 불사에 전념하거나 승려들은 책상머리에서 경전만 파고 있었을 것이다. 순수성도 퇴색하고 건강한 활력도 자리를 잃어가면서 자기비판과 자기정화 시스템도 함께 붕괴됐을 것이고. 이미 이때부터 일부 승려들이 경주를 벗어나 오지를 찾고 왕실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반발과 이들에 대한 대중적 호응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책과 문자를 버리고, 마음과 마음으로, 경험과 체득을 중심으로, 결국 논리적 체계를 버린 선문답도 유행할 수 있고, 이상주의적 보수성이 해체되면서 자유롭고 다양한 실험이 중시되고, 합리적인 실재보다 신비주의적인 경험과 주술이 유행하고, 게다가 신분세습이란 운명론도 퇴색하고... 즉 교종의 입장에서는 무질서와 무정부주의적 반항으로만 보였을 선종은 세를 얻지 못하고 체계화 되지 못하고 대중화 되지 못했을 뿐 이때부터 불교의 논리적 기반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왕실이 주도하는 불교, 고답적이고 학술적인 불교, 그리고 호국불교와 친당정책, 골품제와 6두품 등 정치적 경향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이 동시에 전개되었으니, 교종보다 진보적이며 자유로운 선종이 유입돼 통일신라의 불교와 정책이 변화한 게 아니라, 선종이 쉽게 정착할 수 있는 토양은 통일신라 내부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는 말이다(실제 선종은 지방호족들이 중앙집권적 왕실에 대항하기 위해 선호했던 신앙체계가 아니다. 이미 교종에 식상했던 800년대 대부분 신라왕들도 선종에 열광했다).

 

 

<통일신라의 5교9산/고등학교 역사부도에서... 선종을 통일신라 왕실이 터부시했거나, 지방호족은 선종 - 왕실은 교종이란 대립구도로 800년대 통일신라 하대의 불교지형을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라고 생각한다. 선종의 확산은 모든 권력층에서 선호했지만, 여전히 두터운 교종 세력에 막혀 신라의 전통적인 세력기반 내부에 정착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무튼 이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종의 주요 본산지는 낙동강을 넘지 않았다... 그런면에서 통일신라 하대의 정치/군사/사상/경제/문화의 새로운 지리적 경계점은, 이전까지 유지되던 소백산맥이 아니라 낙동강이 된다고 생각한다...>

 

 

 

 

 

700년대 후반부터 800년대 초반의 통일신라 불교에서 나는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불교사적인 위기의식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750년 5개국으로 분열된 인도를 통일한 팔라왕조가 들어서면서 인도의 불교는 힌두교와 무차별적이라 싶을 정도로 섞이면서 해체의 위기에 직면한다. 또 751년 당나라의 탈라스전투 패배는 불교의 서역확산의 중단뿐 아니라 이슬람의 확산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했다. 이 일련의 진행은 인도만이 아니라 당나라의 변화까지 수반한다. 북방 실크로드의 패쇄는 당나라의 확장이 중단됨을 의미하고 서역으로부터 들어오던 상당한 수입원의 차단을 의미한다. 주나라로부터 진, 한을 거쳐 수, 당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넘게 중화민족의 정치경제 중심역할을 하던 황하 중상류 장안(서안/시안)의 경제적 기반 붕괴로 귀결되는 것이다(755년 안사의 난은 율령제의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 등 세제의 이완, 부병제의 붕괴 등 내부 시스템의 문제에서 기인하겠지만, 경제적 기반이 무너진 중국 서북지역에 대한 동북지방의 우위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도와 중국의 분열과 불교의 침체는 통일신라 불교의 변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비단의 전파 경로/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 P78에서... 견마무역, 즉 말과 비단을 바꾸는데서 시작한 비단길은 유목민들에게 말을 사들여 기동력을 보강하고자 했던 중국과, 지중해제국에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자했던 아랍 유목민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시작했다... 물론 이렇게 개설된 오아시스로를 통해 유리와 옥 등 동서양의 사치품들과 교역됐다... 생각해보면 이 길을 하나의 세력이 장악했을 때 세계는 요동치게 된다. 흉노, 훈족의 이동으로 서로마가 멸망하고, 원나라의 등장으로 유럽은 근대세계를 열어가게 된다(유럽의 근대와 칭기스칸의 영향에 대한 내용은 '칭기스칸, 근대세계를 열다/정영목 옮김'을 참조하면 좋을 듯)...>

<바다를 통한 도자기의 전파/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 P105에서... 비단길 폐쇄 이후 새롭게 부상한 물품이 바로 당나라의 도자기다. 육로를 통한 운반이 어려웠던 탓에 해상교역로가 개설되고 이때 축적된 부가 있어 양자강 일대와 중국 남부 연안이 급격히 성장하고, 송나라의 기반이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정치중심지 장안은 몰락하고, 경제중심지 낙양이 부상하며 결국 송나라 수도는 개봉으로 이전된다... 즉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에는 정치적 사상적 변동뿐만 아니라 경제력의 이동이 가장 근본적인 배경이 된다고 생각된다... 혜초도 이 길을 통해 인도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700년대 초반부터 750년대 전후까지 당나라, 통일신라, 일본 등 삼국은 현학적이다 싶을 정도로 고도의 정교한 논리체계에 입각, 비대칭적인 대립 요소마저 조화롭게 통일하면서 동북아시아 최고의 문화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 시기를 특별히 성당양식(당), 덴표양식(일본), 통일신라의 전성기 혹은 이상주의적 사실주의가 절정에 다다른 시기로 구별해 부르고 있지만, 그 시대의 완성은 퇴조의 변곡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가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와 일본은 양국 공히 당나라와의 시차를 극복하고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면서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고유의 문화적 전통을 수립해 나갔다고 생각된다.

 

 

<700년대 전후 당나라와 이슬람 제국의 세력권/비단길에서 만난 세계사/P290에서... 750년까지 당나라는 지속적으로 확장하면서 서진하지만, 600년대 후반 마호메드가 창시한 이슬람 제국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751년 탈라스 전투의 후폭풍은 그렇게 동북아시아 정치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그 시대까지 동북아시아 삼국은 정치적 안정을 비롯해 생산력의 증대와 사치향략이 유행하는 등 최고의 문화 절정기를 연다...>

 

 

 

 

 

그리고 750년대에서 800년초반까지는 고대종교의 특징들이 완전히 해체되고, 보편주의와 특수성 혹은 개별성이 대립할 수 있었고, 관념성과 신비주의 합리주의가 공존했던 시기로 바뀌게 된다. 당나라와 아스카시대가 해체되듯 통일신라도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시기였다는 말이다. 경주의 폐쇄성, 신라의 보수성, 불교의 관념성, 호국불교, 친당정책, 골품제와 6두품, 그리고 전제정치... 이 모든 게 재검토되던 시점이 700년대 후반이었던 거 같다.

 

 

전통에 입각한 석가탑이 만들어진 다음 곧바로 교리를 재해석한 전대미문의 다보탑이 등장할 수 있고, 민간신앙을 수렴한 약사신앙과 관음보살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불상 최후의 형태인 비로자나불이 조형될 수 있었고, 이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스케일의 석굴암 본존불이 조성되면서 곧바로 경주남산이 토속적이고 무속적인 불교성지로 재해석되고, 다양한 크기와 형식의 석탑에 주술적이며 풍수적 의미의 해석이 가능해진다. 그만큼 이완된 형태를 우리는 자유로운 양식과 형상의 등장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그만큼 대중화된 분포를 전국적 확산의 시점으로 해석하며, 그만큼 친근해지면서 간략화 퇴화되는 과정과 양식을 우리는 소규모화와 공예화로 이해하는 게 아닐까 싶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700년대 전성기의 여운이 남은 통일신라의 가장 장대한 규모 석탑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경주와 당나라, 발해를 연결하는 가장 주요한 길목인 충주에 위치한 탑평리탑은 불사가 이루어낸 기념비라기보다 밀교적 유행과 풍수비보를 수렴한 왕실의 의지 표명이 더 중요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