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 - 과도기 석탑의 다양한 실험과 변화
<이제 과도기의 석탑 몇기를 살펴보려 한다... 먼저 그 출발로 낙산동 삼층석탑을 골라봤는데, 석탑의 미감에 가장 민감한 지붕돌의 변화가 있음에도 전성기 석탑에서 보이는 기단부와 탑신의 비례를 유지하고 아직 내부공간을 갖추고 있는 감실이 있어, 건축적 결구가 살아있는 가장 고식의 석탑이기 때문이다...>
(1)
앞서 경주에서 팔공산을 거쳐 북으로 진출하는 방향의 구미 선산에 대해 살펴봤는데, 이곳에는 석탑 편년 설정에 문제가 되는 석탑 두기가 있다. 그러나 조금 더 범위를 넓혀보면 의성에도 이와 비슷한 양식의 석탑이 한기 더 있으니, 그것이 바로 빙산사지 오층석탑이고 이들이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의 아류임을 부정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앞선 글에서 이들 석탑을 모전석탑이라 부르거나 분류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일반 석탑들과 달리 전탑 비슷한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일층몸돌에 조형된 감실이다.
<먼저 낙산동탑을 통해 감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사실 우리는 고선사탑/장항리탑 등 일층몸돌에 조각된 문비가 바로 감실의 양식을 번안했고, 고려시대 석탑 중 강릉 신륵사지/강진 금곡사 삼층석탑, 안성 죽산리/동사리(부여박물관) 오층석탑 일층몸돌의 깊은 음각 부분도 감실의 퇴화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감실의 목적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한 안동 안기동 삼층/ 공주 청량사지탑/ 정읍 은선리 삼층석탑과, 완벽하게 감실의 기능과 목적을 살려 내부 공간을 만든 석탑은 의성과 선산에 있는 이들 4기와 화순 운주사탑에 불과할만큼 석탑건축에서 극히 드물다는 점을 간과할 때가 많다. 또한 내부공간이 확보된 감실은 이들 탑과 같은 층단형 낙수면을 가진 경주 남산동과 서악동 삼층석탑이나 월출산의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에서도 사용하지 않았던 독특한 양식임을 곧잘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분황사탑에서 시작한 감실의 변화유형 1
<감실 주변에 수호신장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로 나눠 살펴보려 한다... 먼저 분황사석탑의 감실. 634년이다...>
<분황사석탑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의 감실... 그러나 이 탑도 일층지붕돌부터 벽돌로 구성했지만, 일층몸돌은 완전한 화강석으로 조형했다...>
<건축적 기능과 목적을 가진 감실의 이미지만 차용하여 조형한 장항리탑의 일층몸돌... 700년대 초반이다...>
<감실도 인왕상도 많이 변한다... 800년대...>
<그리고 진전사지탑 등에 이르면 내부에 있을 것이라 추정한 석가의 진신사리가 구체적인 형상으로 구현되기에 이른다... 믿음이 깨진 것일까? 적극적인 표현일까?... 이것은 퇴화일까? 발전일까?...>
그런데 우리나라 초기 석탑에서 감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체감이나 결구방식, 민흘림으로 가공된 우주 외에 석탑이 목탑의 번안에 출발했다는 가장 중요한 근거로 제시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건축적 요소라는 점이다. 즉 사리나 경전, 혹은 불상 봉안 등을 목적으로 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내부공간을 만들어야 했던 건축적 목적과 기능이, 구조적 문제와 작업의 난이도에도 불구하고 석탑에 적용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지와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적 형태인 미륵사지탑이나 분황사탑에서만 시도되고, 이후 왕궁리탑이나 감은사탑/고선사탑 등 석탑의 전형이 만들어지면서 석탑에 맞는 방식으로 수정 개발되어야만 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 미륵사지탑 → 탑리리탑에 이은 감실의 변화 2
<익산 미륵사지탑의 감실에는 사람이 들어가 움직일 수 있는 충분한 건축공간이 있었다... 인도나 중국의 전탑 감실 벽면에는 또 다른 소형의 감실을 두어 불상을 안치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륵사지탑에도 벽면에 장식된 수호신장은 없지만, 주변에 수호신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탑리리탑의 감실... 이젠 사람이 들어갈 수는 없지만, 감실이 충족시키고자 하는 기능과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내부공간으로 축소된다... 이곳에는 불상을 비롯해 경전이나 각종 기물들이 보존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영양 산해리 오층석탑의 감실... 분황사탑과 전탑양식을 계승했던 모전석탑에는 감실이 적극적으로 계승되었다...>
<영양 현2동 오층모전석탑의 감실... 아마 전탑 양식의 모전석탑으로서는 마지막이 아닐까 싶다...>
<석탑에서도 감실은 문비의 형상만이 아니라, 감실의 기능과 목적을 상징하는 모형들이 끊임없이 전승된다... 이건 축소가 아니라 모형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데,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일층몸돌에는 청동문이 달렸을 것으로 생각되는 못자국이 남아있다...>
<역시 고려시대 작품으로 비슷한 형식의 감실과 청동문이 달렸을 것으로 보이는 못자국이 남아있는 안성 죽산리 봉업사지 오층석탑 일층몸돌...>
<이미 몸돌 내부에 사리갖춤을 봉안할 사리공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고집스럽게 감실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신성이 담긴 불탑의 상징적 요소들은 건축이나 공예적 기능과 목적에 우선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고려시대 어는 시점에선가 부터는 감실이 1층몸돌에서 2층으로 올라간다... 실제 감실이었을지 아니면 표현에 만족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때문에 탑리리탑과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는 지리적 친연성 외에, 각각 안동/영주와 상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자리한 이들 4기의 탑에 내부공간을 조형한 감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들 지역에 유독 강하게 남아있는 전통에 대한 집착과 석탑건립에 투영하고자 했던 전성기의 건축적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들 4기의 탑 특징으로 규모가 최소 7.2m에서 10m에 이를 정도로 장대하다는 공통점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800년대 중반 이후에 이 정도 규모와 장대한 미감을 가진 석탑은 조성된 바가 없고, 또 이 규모는 일개 사찰이나 지방관이 임의로 조형할 규모가 아니라는 점이다. 때문에 나는 탑리리탑을 제외한 3기의 탑은 왕실과 지방관, 그리고 교단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상호협조 하에 828년 이전에 조형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탑리리탑의 전승한 석탑들에 모두 감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석탑에 감실의 형상을 차용한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적은 수량일 뿐이다...>
<낙수면에 층단을 둔 같은 양식의 낙산동탑과 월남사지탑을 비교해 본다. 7m가 넘는 비슷한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두 석탑의 체감과 미감은 완연히 다르다... 통일신라와 고려의 차이일 수도 있고, 780년 전후와 1200년 전후의 400여년이 흐른 다음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양식의 퇴화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도 변하고, 주변 자연환경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같은 크기의 석탑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도 변했을 것이다...>
(2)
사실 이들 석탑에 대한 편년설정 때문에 이 글의 순서를 수도 없이 바꿨던 거 같다. 탑리리탑은 문무왕대로 설정할 정황이 명백하지만 빙산사지탑은 고려초기 즉 10세기 중반으로까지 밀려나 설명되고 있었고, 죽장동탑은 통일신라라는 연대구분 외에 아예 편년에 대한 설명 자체가 없는 실정인데다 연구자의 시선에 따라 250여년의 시차를 오락가락할 정도로 보편적인 양식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 시대배경에 따른 건탑 위치와 전체적인 미감만으로 편년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700년대 후반 시대배경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면, 800년대 중반에서 900년대 초반의 상황에서는 이 정도 규모의 석탑이 만들어진 예가 없고, 감실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점은 석탑에서 건축적 요소가 완전히 망각되기 이전이라는 점을 근거로 편년을 추정할 수 있는데, 나는 탑리리탑을 제외한 세기의 탑도 조성연대가 다르며, 이중 낙산동탑은 780년대, 죽장동탑과 빙산사지탑은 82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생각하며 그 이유에 대해 한가지를 더 첨언하고자 한다.
<탑리리탑을 모본으로 한 3기의 석탑은 조성된 시대가 달랐던만큼, 선보이고자 한 미감과 당대에 선호했던 체감도 달랐다고 생각된다...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지만 빙산사지탑과 죽장동탑을 낙산동탑과 비교하기 위해 짧게 메모해 본다...>
그건 바로 낙산동탑은 죽장동탑이나 빙산사지탑과 다른 미감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빙산사지탑은 매우 정연하지만 엄격하지 않다. 규칙적이고 정교하지만 그렇다고 답답한 것도 시원한 것도 아니다. 장대한 규모에 비해 위압감이 없고 그렇다고 친숙하거나 편안한 것도 아니다. 묘한 긴강감이 일지만, 그건 주변을 압도하거나 시대를 관통하는 의지가 보여서가 아니라 불탑과 관람자의 시선에만 고정되기 때문이다.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설레임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아쉬움이 더 많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탑은 선도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고, 과거로 시선이 고정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700년대 후반의 시대정신과 관련이 없을뿐더러 소규모화 장식화된 800년대 중반의 자기만족적 과시와도 거리가 멀다. 낙산동탑보다 앞설 이유도 없고, 800년대 후반까지 밀어 봐야할 근거도 없다.
<주변을 둘러 볼 여유를 주지 못한다는 것. 그게 빙산사지탑의 한계이자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820년대 후반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죽장동탑은 낙산동탑에 비해 3m나 높은 초대형 석탑이다. 어쩌면 석가탑에 석굴암 삼층석탑 정도를 얹혀놔야 비슷해지는 규모를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는 문약하게 보인다. 굳이 남성적 여성적이라는 개념으로 비교해 본다면 낙산동탑이 완전한 남성성을 갖춘데 반해, 죽장동탑은 여성성이 훨씬 큰 중성적 느낌이다. 하나하나는 규칙적이지만 전체적인 리듬감이 떨어지고, 부분부분은 정연하지만 전체적인 짜임새에서 긴장감보다 느슨함이 많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석탑의 결구에서 느껴지는 것은 당당한 자신감보다 뭔가 뒤로 후퇴하는 듯한 타협이 보인다. 나는 그걸 심지어 비겁함이라고까지 표현한다. 때문에 이 역시 700년대 후반의 사회흐름과 직접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800년대 중반 이후의 분위기도 감지되지 않는다. 더더욱 900년대 초반 견훤이 이곳 선산까지 장악한 이후 조성했다고 볼만한 위압감도 없다. 낙산동탑 보다 조성시기가 늦지만 800년대 중반 이후로 보지 않는 이유다.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석탑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장악하고 주위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느끼기 힘들다... 시선을 어디 두어야할지 모르는 낯섬. 하나하나가 빠지거나 부족하지 않음에도 완벽함에 다가서지 못하는 한계. 애초 그렇게 시작해 완성된 자기만족의 귀결일 거 같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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