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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58> 국보40호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 목탑의 축소 모형...1311

 

 

 

 

 

 

 

 

   5)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 목탑의 완벽한 번안과 석탑의 모형화

 

 

 

780년대 이후 과도기 석탑 중 통일신라 석탑의 시원양식 중 하나인 탑리리탑의 양식을 차용하여 감실양식을 수용하고 지붕돌을 차용한 낙산동탑에 살펴봤으니, 이제 기단부와 몸돌 지붕돌 등 모든 양식에서 전통적인 석탑 양식에서 파격적으로 벗어나 목탑을 축소시킨 예를 찾아보려한다. 이미 다보탑을 통해 석재를 다루는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습득했던 통일신라인들은 이제 석재로 만든 탑을 다양한 양식으로 가공하기 시작했는데, 그 중 정혜사지탑은 목탑의 번안이나 석탑양식의 창출 외에 석탑을 다양한 양식의 불탑을 축소 모형화해도 신성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의식이 자리잡았다고 생각해 이 탑을 골라봤다.

 

 

<정혜사지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모든 양식을 파격적으로 벗어나, 망덕사지 목탑 형태를 그대로 축소 번안해 만들어, 당시부터 통일신라인들은 석탑조성을 건축적 의지가 아니라 공예미술과 기존 불탑의 축소된 모형으로 접근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이형석탑의 대표격인 국보40호 정혜사지 십삼층석탑은 높이 5.9m로 경주의 북쪽 안강읍 옥산리에 있다. 사실 주변에 뚜렷한 사찰의 유구들이 발견되지 않고 기록조차 미비하지만, [동경통지]의 "신라 제37대 선덕왕 원년(780)에 당의 첨의사 백우경이 참소를 입어 이 곳 자옥산 아래에 우거하게 되었다. 그는 경치가 뛰어난 터를 골라서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선덕왕도 행차한 바가 있다. 후에 이것을 고쳐 절을 마련했는데 곧 정혜사라 한다"라는 기록에 근거해 정혜사지탑을 780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안강읍은 경주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포항과 같은 거리의 서쪽에 있다. 정혜사지는 자옥산(서)과 도덕산(북), 그리고 어래산(동)에 둘러쌓인 막다른 길목에 자리잡고 있으며, 인근에 이황이 계승한 주리적 성리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조선 초기 유학자 이언적이 기거하던 독락당과 그를 봉사한 옥산서원이 있다...>

 

 

 

 

 

왜냐하면 당의 첨의사가 어느 정도 벼슬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만(현재의 차관급 이상으로 보이는데, 미국의 차관급은 우리나라에 파견된 미국 대사보다 권력서열이 높다), 안사의 난 이후 등장한 군벌로 인해 잦은 정변에 휩싸인 정황에서 권력투쟁에 실패한 당나라 고위 공직자들에게 지방 절도사로 독립하지 않은 이상 통일신라는 정치적 명망처로 적합할 수 있었다는 게 첫 번째 이유고, 선덕왕이 직접 행차했다면 그에 응당한 선물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만세암이란 암자가 세워졌다니 불탑이 적합했을 거라는 것이 두 번째고, 당나라의 관리였으니 당나라를 위해 지었던 망덕사지 목탑(685년)의 형상을 축소한 석탑이 그 선물이라면 더더욱 좋을 것이라는 게 세 번째 이유다.

 

 

<조선고적보 등 일제강점기 때 사진을 보면 9층까지만 있는 상태에서 조사됐는데, 이후 13층까지 부재를 수습해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나처럼 무식한(?) 상상이 아닌 망덕사지의 답사를 통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 예가 많은데, 그 중 김정수 교수(안양과학대/신라시대 목탑의 전래에 관한 연구/대한건축학회논문집 통권189호)에 의하면 ; 망덕사지 쌍 목탑은 ‘사방 3칸 탑지의 규모에 비해 13층 목탑의 건축 비례가 어울리지 않아’, ‘법계 13층탑과 같은 관념적 기법에 따른 고루식의 이형목탑으로 추정하며, 이 목탑의 형태는 선덕왕 원년(780년)에 창건된 정혜사지 13층 석탑형태의 원류로’ 보는데 그 이유로는, ‘목탑이 건립된 후 바람에 쉽게 흔들려 서로 부딪치는 일(752년/경덕왕, 798년/원성왕, 804년/애장왕, 816년/헌덕왕 등 기록)이 많았다’는 점과 '이형목탑 구조에 적합한 큰 찰주를 세우기 위해 목탑의 한변(16척5촌, 대략 5~8m로 추정)에 비해 거대한 8각 심초석을 사용한 점' 등을 찾을 수 있어 망덕사지 목탑이 정혜사지탑의 모본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며, 정혜사 창건 연대와 건탑 시점을 같다고 추정한 자료를 골라봤다.

 

  

<정혜사지탑의 모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망덕사지 목탑(쌍탑)의 복원도와 심초석... 각각 통일신라 석탑 연구/신용철/P80, 신라시대 목탑의 전래에 관한 연구/김정수/P134에서 인용... 오른쪽 도면의 단위는 mm → cm로 바뀌는 게 맞다고 생각되는데, 망덕사지 목탑은 심초석만 140cm로 사리공 위에 세워진 심주 지름이 1.3m에 가까운 거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혜사지탑 1층 지붕돌 앙시도/솔뫼님 블로그에서... 망덕사지 목탑의 심초석과 심주 양식까지 차용했는지, 정혜사지탑의 1층 내부는 심초석이 상층 탑신을 구조적으로 떠받치고 있다... 이런 구조는 미륵사지탑과 왕궁리탑 기단부에서 사용됐던 방식으로, 나는 이런 점들을 근거로 정혜사지탑이 모목석탑 양식을 계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주장들이 있음을 참고하기로 하고 정혜사지탑은 각층 몸체가 생략되고 층급받침이 3단으로 축소되었으며, 비대해진 1층 몸체 등을 근거로 800년대 이후에 건탑 되었다는 주장이 없지 않지만, 이 역시 추정에 불과하고 780년대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반박할만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먼저 석탑의 몸체가 생략되었다고 하지만, 자세히보면 지붕돌마다 1단의 괴임이 있고 그 위로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절단면 정도 두께의 몸돌이 표현돼 있고, 또한 상층지붕돌의 체감을 고려하여 약간씩 안쏠림까지 적용하여 마름모꼴로 다듬은 모습은 치밀하게 계산된 가공 방식이다. 즉 지붕돌만 얹어 놓은 게 아니라 지붕돌과 상층 몸돌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을 뿐으로, 몸돌을 생략한 게 아니라 축소한 것이다.

 

 

<사진을 확대해보면, 상층의 탑신은 지붕돌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3단 층급받침에 낙수면이 있고, 그 위에 1단의 괴임을 두고, 안쏠림을 적용한 낮은 몸돌로 구획 가공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정혜사지탑 입면도/솔뫼님 블로그에서... 이 입면도에도 괴임 등이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3단의 층급받침은 800년대 석탑에서 보이는 3~4단으로 약화된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미 미탄사지탑 편에서 설명했지만, 800년대 석탑에서 층급받침이 3단으로 균일화된 예가 없고, 후대의 최상층 3단 층급받침은 처마의 깊이와 체감을 조율하지 못한 석공들의 기술력과 설계 기획력 문제 때문이지만, 정혜사탑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3단 층급받침을 염두에 두고 일정한 체감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3단의 층급받침이 끝나는 부분에서 지붕돌의 끝이 조금 더 넓게 기획된 것도 13층까지 균일할만큼 정교하다. 또한 이미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미탄사지탑에서도 사용했으며, 비슷한 시기의 석굴암 삼층석탑에서도 각층 모두를 3단 층급받침으로 조성한 예가 있다(물론 세탑의 편년이 공인되지 않아 자칫 순환참조에 걸릴 우려가 있기는 하지만, 미탄사지탑은 700년대 초중반 건립 이유는 앞서 설명했고, 석굴암 삼층석탑도 지대석의 치석방법이나 형상이 석굴암 본존불 좌대의 지대석과 같은 방식이어서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13층 지붕돌과 노반은 단일석으로 가공되었다... 노반밑에도 1단의 층단을 두었는데, 12개층 지붕돌이 균일하다... 솔뫼님 블로그에서...>

 

 

 

 

 

 

그리고 비대한 기단부처럼 보이는 최하층 탑신과 급격히 축소된 상층의 2단 구성은 이미 다보탑에서도 실험된 바가 있고, 무엇보다 1층 탑신의 결구방식은 목탑의 훌륭한 번안 양식으로 정림사탑에서 시작해 미륵사탑→탑리리탑→다보탑→(정혜사탑→)백장암탑으로 이어지는 모목석탑의 계보를 충실히 잇고 있다.

 

* 주요 모목석탑의 기단부와 고려시대 모형화된 불탑...

 

<단층 기단부 구성을 갖는 탑리리탑의 일층몸돌은 목조건축의 주요 결구방식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탑의 몸돌로 볼 것인지 기단부로 볼 것인지 논란이 많지만, 다보탑의 하층기단부 위의 구조는 목조건축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우주 위 공포구조를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주두만 표현한 탑리리탑보다 고식이고, 다보탑에는 심초석와 동일한 기능을 하는 심주도 구현되었다...>  

<탑리리탑과 다보탑의 우주와 심주 혹은 심초석을 단순화 시키면 정혜사지탑 일층몸돌 구조가 된다... 우주위 목조건축의 흔적은 사라졌다...>

<망덕사지 목탑 같은 구조는 고려나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불탑(승탑 포함) 구조로 계승됐다... 세중돌박물관에서...>

<정혜사지탑의 단순하면서도 숙련된 가공수법과 비례는 정연함을 넘어 현대적이거나 세련된 디자인으로 보이게 만든다...>

 

 

 

 

 

다만 지붕돌을 4매로 구성한 다보탑과 달리 정혜사탑은, 정림사탑이나 왕궁리탑과 같이 8매의 돌로 구성하여 맵시 있게 처리했고, 왕궁리탑 기단부 갑석처럼 낙수면 전각부위에 우동, 즉 내림마루를 강조하여 살려냈다. 그렇게보면 3단 층급받침에 우동을 살린 지붕돌은 왕궁리탑의 디테일을 확대 적용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낙수면에 우동이 강조된 석탑으로는 귀산사 삼층석탑과 담양읍 오층석탑이 있다). 그러나 이미 목탑의 모형화를 작정하고 만든 석탑인만큼 1층 탑신의 우주는 민흘림이 없고, 석실의 구성도 처음부터 문이 달리지 않는 형상만 차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왕궁리탑 지붕돌 구성과 상층기단부 갑석의 우동...

 

<왕궁리탑은 3단의 층급받침에 낙수면이 있고, 그 위에 단위 괴임과 낮은 비례의 몸돌이 있다... 이를 축소하고 낙수면에 경사각을 세워 축소면 정혜사지탑과 똑같아진다... 내 생각인가? ^^...>

 

<정혜사지탑 1층 지붕돌 평면도/솔뫼님 블로그에서... 합각면에 우동이 모각되어 있다...>

<왕궁리탑 기단부 갑석에도 매우 옅은 두께의 우동이 모각되어 있다...>

<이처럼 지붕돌 합각면에 우동이 적극적으로 살아있는 대표적인 석탑이 귀신사 삼층석탑과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예전엔 읍내리라 불렀다)이다... 백제풍이라고 해야하나, 고려풍이라고 해야하나...>

 

 

 

 

 

무엇보다 내가 이 정혜사탑이 800년을 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낙수면의 경사가 감은사탑 등 700년대 전성기 석탑의 곡선 각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반전이 과장된 800년대 탑과 엄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고, 층급받침이 3단이지만 낙수면에 비해 약화되지 않았으며, 각층 몸돌에 목조건축의 양식인 안쏠림까지 감안한 노련한 치석수법, 그리고 지붕돌 두께가 얇아지고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지붕돌 절단면이 약화되지 않고 두툼함을 유지한다는 점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지적할만한 것은 1990년대까지 이 석탑에는 탑리리탑과 비슷한 방식의 흙으로 단을 둔 기단부가 있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언제일지 모를 보수공사에서 동산처럼 꾸미며 기단부가 완전히 사라졌지만, 만약 이탑이 13층을 유지하려면 토단으로 만든 기단부가 엄연히 존재했어야 맞다고 생각한다.

 

 

<분황사탑에서부터 탑리리탑, 조탑동 전탑, 탑평리탑, 산해리모전석탑 등에는 별도의 기단이 있었다...>

<정혜사지탑 토축기단부/솔뫼님 블로그에서... 이런 입면도가 있어 토단이 있었다는 주장이 내 개인적인 생각만은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어 즐거웠다...^^>

<1990년대 후반에 찍었던 정혜사지탑의 토단부... 2단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부터 그랬는지 조선시대의 보강인지는 모르겠다... 참고로 천군리탑에도 이런 토단이 있는데, 나는 고구려문화의 영향이라 생각한다...>

 

 

 

 

 

 

 

깊지도 않고 마냥 호젓하지만도 않은 곳에 위치한 정혜사탑. 2008년인가 내가 좋아하는 탑의 목차를 만들면서 정혜사지탑을 탄탄한 기초와 내실을 갖춘 사춘기 직전의 동심으로 표현한 적이 있다. 그러나 소꿉장난처럼 귀엽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정교하며 세련된 기법이 살아있고, 당당하거나 우아하다고 말하기에는 깜찍하고 건실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 정연한 비례와 엄정한 체계를 잃지 않은 정혜사탑은 다양해질 수 있는 우리나라 석탑의 한 유형을 대표할 만한 것으로, 700년대 후반 아직 가시지 않는 통일신라 석탑의 장점을 고르게 살린 매우 우수한 작품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모형화 되는 과정에서의 창작의지와 불탑이라는 상징성, 그리고 목탑을 형상화한 공예품으로 전환되는 과정이 완벽하게 소화되지는 않았더라도, 쉽게 흉내낼 수 없고 함부로 모방할 수 없는 탄탄한 기운을 숨기지 않는 정혜사 십삼층탑은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명품임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정혜사지탑에서 어떤 힘이나 생동하는 기운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일부러 내가 좋아하는 각을 잡아 올려봤지만 역시 우람한 느낌이 없다... 기단부로 구획할 수 있는 일층몸돌에 비해 과도하게 작아진 상부 탑신의 입면적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목탑을 축소 번안하는 과정에서 창작을 위한 치열한 고심이 빠졌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결국 남는 것은 정교한 손놀림과 정돈된 형상 뿐이다...>

<문제는 복원과 보수 후 토단이 사라지면서 이제 정혜사지탑은 완전히 공예화된 모형 같아 보여, 강한 임팩트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