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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59> 국보6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1) - 석탑 편년설정의 다양한 관점...1312

 

 

 

 

 

 

 

 

 

 

     6)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 풍수비보와 결합한 과도기 호국불교의 기념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이제 780년대 이후 과도기 석탑 중 사찰의 가람배치와 무관하게 호국적 개념의 풍수비보의 입장에서, 전통양식을 계승하되 기존의 삼층/오층이 아닌 칠층석탑의 양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탑평리탑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나는 이 석탑의 토단과 칠층에서 도교적 영향이 강했던 고구려 문화요소를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1) 지역적 배경과 편년에 대한 다양한 입장 검토

 

 

충주는 오래전부터 지리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남한강에 뗏목을 띄우면 한강으로 흘러가고,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으려면 죽령과 계립령을 넘어 중원을 통해야만 했다. 수로와 육로에서 통일 이전부터 백제/고구려/신라 삼국의 지리적 접경지였던만큼 군사적 충돌과 문화교류가 가장 빈번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또 그런 지리적 배경이 있어 진흥왕대부터 가야의 지배층과 신라 6부 부호들을 강제이주 시켜 소경으로 승격시켰던 곳이고, 이 성과들이 하나둘 쌓이면서 문화적 중심지로 부상한 곳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특별히 이곳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를 중원문화권으로 구별해 부르는데, 북쪽 원주를 경계로, 동으로는 제천-단양-영월, 남으로는 괴산과 문경, 서쪽으로는 음성, 그리고 서북으로는 장호원과 여주를 포괄하는데, 이를 구별한 이유는 충주가 통일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인 중원경으로서 위상을 빛낼만큼 많은 인재를 배출했고, 그 위치만큼 문화적으로나 전략적 의미가 막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청주/중원경 주변 유적과 유물 분포도...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고려 초기 문화재가 많다... 먼저 황색은 삼국통일 이전 유물들로 ①중원고구려비, ②의림지, ③온달산성, ④당항성, ⑤봉황리 마애불상군, 노란색이 통일신라 유물로 ⑤흥덕사터 고인쇄 박물관, ⑥탑평리탑, ⑦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⑧각연사, ⑨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이고, 빨간색이 후삼국부터 고려시대 유물 및 유적으로 맨 아래쪽이 견훤산성, 원풍리 마애불좌상, 미륵리, 사자빈산사지석탑, 덕주사 마애불, 단호사 철불좌상, 원평리 석불입상, 청룡사터를 표시한 것이다...>

 

 

 

 

 

고구려의 온달산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 후삼국시대의 격전장답게 견훤산성도 있고, 왕건이 궁예와 통일신라로부터 결정적 우위를 점하게 된 근거도 중원지방 호족 유긍달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면서부터였다. 이처럼 전략적 가치가 갈수록 커진 중원경에 통일신라의 정복전쟁에 당나라군 파병을 촉구 한 대문장가 강수가 600년대 후반 활동했다면, 700년 년간에는 우리나라 4대명필 중 한분인 김생의 탄생지이자 활동무대가 될만큼 높은 문화수준을 담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야유민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어 망국의 설움을 달래던 탄금대의 하류, 굽어진 물길로 유속이 느려지고 폭이 넓어진 강변 언덕둔치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석탑인 탑평리 칠층석탑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며 지금도 지역주민들의 넉넉한 휴식의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의 휴식 공간으로 널리 사랑받는다는 점이 탑평리탑의 행운이며, 이 지역사람들의 자랑인 거 같다...>

 

 

 

 

 

그러면 안동 법흥사 칠층전탑(17m)이나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상륜부 포함 16.13m), 미륵사지서탑(6층 지붕돌까지 14.24m) 다음, 고선사탑(10.4m)/죽장동탑(10m)/나원리탑(9.7m)/감은사탑(9.7m)/장항리탑(9.1m)에 비해서 훨씬 높은 12.95m(1993년 실측을 토대로 한 안내문의 수치다. 참고로 그 이전까지는 14.5m로 추정하고 있었다)에, 4~5m의 토단까지 있어 남한강을 굽어보면서, 중원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손색이 없는 탑평리 칠층석탑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위에서 간략하게 충주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 연원만큼 건립시기에 대해 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문무왕대(670년대, 關野 貞/1932년), 신문왕대(680년대, 고유섭/1948년), 원성왕대(785~798년, 村山智順/1931년), 김헌창의 난 전후(800년대 초), 문성왕대(840년 전후), 후삼국 시대(9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는 것은, 탑평리탑이 그만큼 각각의 시대배경에 어울릴만한 상징적 기념비의 규모를 갖춘 탑으로서 왕실에서 직접 석탑건립을 주도했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는 거 같다.

 

 

<어느 시대 누가 주도했든, 탑평리탑은 일개 지방호족이나 사찰에서 단독적으로 건립했다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독보적일만큼 장대하다...>

 

 

 

 

문제는 이렇게 다양한 설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편년에 대한 논의가 정리되지 못하는 것은, 각각 해당 시대배경에 유사한 양식적 특성만을 강조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이를 확인하기 위해 몇가지 메모가 필요한 거 같다. 700년대 이전 조성설의 주요한 근거는 탱주의 수가 많고, 일층몸돌의 우주가 별석으로 조립돼 감은사탑과 같은 수법이며, 일층몸돌 괴임이 별석이어서 탑리리탑과 같은 양식이고, 지붕돌이 일층에서는 8매로 조립하였지만 차츰 고층으로 올라가면서 4매, 2매, 단일석으로 구성됐다는 점과, 무엇보다 인근에서 600년대 후반 양식의 기와 등이 발굴되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한다(특히 고유섭 선생은 지붕돌의 변화에서 가구적 자태에서 조각적 자태로 전변(轉變)한 과도적 성격을 보인다고 강조했다).

 

 

<기단부에서부터 몸돌과 지붕돌에 이르기까지 탑평리탑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나는 그 이유를 규모에 맞추기 위한 소재의 한계로 본다... 만약 이 탑을 문무왕이나 신문왕대 만들었다면 이만한 부재크기를 이렇게 잘게 잘라 복잡하게 결구했을리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에반해 800년대 초반 이후로 보는 입장에서는, 하층기단부 3개는 600년대 후반 양식이지만(낙산동탑/창림사지탑도 3개다) 상층기단부의 탱주가 균일하지 않고, 일층몸돌에 우주가 별석으로 가공되었으나 엔타시스 수법이 소멸되는 등 고식(古式)은 부분적인 곳에 제한적으로 사용됐으며, 일층몸돌은 넓고 낮은 3단 괴임 위에 별석받침을 둔 것으로 오히려 성주사지탑과 친연성이 높다는 점과 함께, 층급받침에서 지붕돌 처마끝선까지 간격이 물끊기 홈을 둘만큼 상대적으로 넓어졌고, 각층 몸돌의 폭에 맞지 않게 너무 좁게 처리된 우주와 유약해진 지붕돌의 체감 등을 고려하면, 대체적으로 결구방식과 부재의 가공이 치밀하지 못하고 간략화된 양식과 섬약해진 느낌을 고려할 수밖에 없어 아무리 빨라도 700년대 후반 이전에 조형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지붕돌 층급받침 세부... 각 층급받침의 폭이 높이보다 넓고, 마지막 낙수면과 연결된 절단면에는 물끊기 홈 자국이 확인된다...>

<가장 많은 논란이 되는 기단부...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점들은, 하층기단부 갑석에 경사면으로 가공됐고, 상층기단부 갑석이 돌출되면서 부연 등이 얇아졌다는 점, 그리고 기단부 면석과 일층몸돌 부재가 몇개의 부재로 조립되는 방식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입장은 통일신라 영토의 한가운데라는 의미의 중앙탑 설화가 원성왕대 등장하는 것을 계기로 785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는 입장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으로 가장 일반적인 의견이기도 하다. 그런데 양식에 대한 논란은 여기에서 끊이지 않고, 인근에서 출토된 600년대 후반의 기와는 사찰과 무관하며 최근 발굴조사에서 인근에 사찰 유구가 전혀 없어 가람배치의 일환으로 조형된 불탑이 아닌, 충주의 지세를 강조하기위해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석탑으로 840년대(문성왕대) 조형했다는 주장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이런 논란이 가중된 데에는 두차례의 주요한 보수 혹은 복원과정에서 이질적 요소가 유입되면서 시작됐다고 생각된다.

 

 

<석탑 조형과 직접 관련이 있을지 모르지만, 탑평리탑 앞에 있는 석등의 지대석도 편년설정에 주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석굴암 본존불 전후인 700년대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의 복련... 이 석불좌상의 복련과 비교하면 탑평리탑 앞의 연화하대석은 섬약하면서 조형성이 강조되었고, 그 보다 앞선 시기에 조형된 불국사 대웅전앞 석등이나 봉기동탑 앞의 천정사지 연화하대석과 비교해도 느낌과 치석수법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800년대 중반부터 보이는 귀꽃이 없어 700년대 후반에서 800년 초반에 조성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탑평리탑 상륜부에는 2단의 노반을 갖춰 통일신라석탑으로는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보면 두 노반의 마무리나 치석수법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고려시대 초기에 추가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처럼 2단의 노반을 둔 경우가 고려초기 몇기의 탑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에는 두기의 삼층석탑이 있고, 이들 탑 상륜부는 모두 2단의 노반으로 구성돼있다...>

 

 

 

 

 

 

즉 탑평리탑 기단부에서 출토된 사리갖춤을 역추정하면 고려시대에 해체에 가까운 보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일제강점기 때에도 전면적인 복원이 시도되었는데, 이때 양식적으로 통일성이 없는 2단의 노반으로 변경됐을 수 있고, 상층기단부의 불규칙한 탱주와 판석 배열에서 확인되듯 정밀하지 못한 복원으로 인해 다양한 시대 양식이 혼재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내 생각이지만 7~800년 통일신라 석탑에서 보이지 않았지만 대흥사 북미륵암 삼층석탑 등 고려초기에 등장하는 2중으로 구성된 노반 양식의 문제도 그렇고, 탑평리탑 정도의 규모와 비례를 갖춘 석탑에서 상층기단부의 탱주가 일률적이지 않다는 것은 정교하지 못한 보수의 결과일 수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점들까지 감안하더라도 통일신라의 석탑 편년에 250년 이상의 편차를 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해서 가장 낮은 가능성을 하나씩 배제하는 식으로 접근해 보고자 한다.

 

 

<양식적으로 언제 조성됐는가를 살펴보기 이전에, 여러 주장들의 문제점을 찾아 가능성이 낮은 것들부터 제외하는 방식으로 접근해보고자 한다...>

 

 

 

   2) 기존 편년 설정에 대한 검토

 

먼저 신라말, 즉 후삼국시대나 고려초기로 보는 입장은 중원지방이 궁예나 왕건, 그리고 견훤과 통일신라의 격전지였다는 시대배경에 기인하고 있지만, 940년 전후의 석탑과 승탑, 그리고 탑비의 조형수준은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863년)이나 쌍봉사 철감선사탑의 수준을 결코 뛰어넘지 못했다. 그만큼 800년대 후반부터 900년대 중반까지 정국은 불안정했고, 게다가 고려 왕실은 지방호족들과의 타협과정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을 성립하지 못했다. 또 왕실의 권위를 갖추며 왕실이 주도하에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기 시작한 때가 광종(949~975년)대인데 그가 바로 충주호족 유긍달의 딸(순명신성왕후)과 왕건 사이의 아들이다. 그리고 광종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충주에 숭선사를 창건하는 등 충주에 애착을 보였지만, 같은 이유로 951년 조형한 개성의 불일사 오층석탑을 보면 고려초기의 석탑과 탑평리탑은 친연성을 확인할만한 공통점이 전혀 없다. 때문에 충주지방의 호족 유씨에 근거한 900년대 이후로 편년을 설정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김제 금산사 오층석탑... 고려초기 조성된 것이 확실한 불일사 오층석탑과 기단부를 제외하면 가장 비슷한 미감이어서 금산사탑을 골라봤다. 즉 900년대 중반 석탑 체감이나 미감과 탑평리탑은 관련성이 거의 없다...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고려의 석탑이 통일신라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더라도 그나마 일정한 수준을 구현하기 시작하는 시대는, 960년 전후 광종대 대부분의 개국공신을 숙청하면서 체제를 정비하고, 유교정치이념을 수렴한 980년부터 거란침입이 시작되기 전까지인 1000년대 초반에 와서야 가능해졌고, 문벌귀족들이 발호하기 이전인 1030~1080년대까지 고려의 석조예술은 절정기(지광국사 현묘탑과 탑비)를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840년 전후 문성왕대에 조형됐을 거라는 설은, 탑평리탑 인근에서 사찰의 유구가 전혀 없어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건립했다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풍수지리설이 도선국사에 의해 확산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고구려, 백제의 왕궁터를 잡을 때나, 600년 전후 경주의 7처가람의 위치도 풍수지리설에 바탕을 두고 조성된 이상, 풍수지리설만을 근거로 문성왕대를 연결시키는 것은 비약이라 생각된다. 또한 이 시기는 통일신라 석조예술이 석탑과 석불, 승탑과 탑비로 세분화되면서 석탑 중심의 불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석탑의 장식화와 공예화 역시 절정에 달했으며 이런 규모의 석탑을 만들만한 주체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즉 탑평리탑의 현재 위치를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점지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그 이전 시기인 820년대나 780년대에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로 문성왕대를 지칭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 800년대 초반이 되면 가람배치와 무관하게 석탑이 조성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시발점이 탑평리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 번째는 820년대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이후에 세웠다는 입장이 있는데, 반란의 여파가 미친 영향의 중대성을 감안하더라도 왕실의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선택한 지역으로 과연 충주 중원지방이 가장 최우선 순위로 꼽힐 수 있을까? 뒤에서 재차 이야기하겠지만 김헌창의 난에서 전선이 형성된 곳은 선산과 대구, 언양을 경계로 한 상주와 달성, 양산지방이었고, 5소경 중 중원경(충주)/서원경(청주)/남원경(남원)/금관경(김해)이 김헌창의 난에 동조했지만 실제 핵심근거지는 웅주 즉 공주였다. 그런데 과연 중원경에 탑평리탑을 세운다는 것이 반란의 진압에 어떤 상징성을 줄 수 있겠는가. 중원경이었던 충주는 진흥왕 이후부터 당항성과 예성강 진출의 교두보로서 의미가 훨씬 크며, 김헌창 난의 진압과정에서도 후방 견제역할 외에 특별히 부각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웅주를 비롯한 청주, 남원, 김해에는 이와 관련된 아무런 기념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도 그런 기념비를 정복한 땅에 세운 예는 없다. 김헌창의 난에 포섭되었던 지역에 군림의 의지를 표명하려 했다면 다른 소경에는 없는데 중원경에만 세워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이 반란과 탑평리탑은 관련성 자체가 희박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헌창의 난에 대해서 다시 살펴볼 예정인데 미리 지도를 소개한다/지도로 보는 한국사 P88/김춘수/수막새에서... 만약 김헌창의 난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면 공주에 먼저 세우는 게 맞다... 그러나 정림사탑에 명문을 새긴 것 외에 어느 지역에도 백제와 고구려 정복 기념비를 세운적이 없다...>

 

 

 

 

 

마지막으로 문무왕대나 신문왕대설은 어떨까? 이 시대 탑이라면 탑리리탑과 감은사탑/고선사탑에 나원리탑까지를 고려할 수 있는데, 그 탑들과 탑평리탑이 동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탑의 규모와 높이에서는 탑평리탑이 가장 크지만, 그 외 정연한 치석수법이나 짜임새 있는 결구방식, 그리고 체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차분함에서는 탑리리탑과 비교할 순 있지만 장중함과 당당한 미감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미감을 생각해보자. 고구려와 백제가 어떤 나라들이었는가? 중국의 5호16국 시대에 살아남은 대륙의 강자였고, 해양제국이었다. 그 나라들을 정복하고 멸망시킨 나라가 신라인데, 통일 초기의 석탑에 흐트러짐을 용납할 수 있을까? 국가 백년, 천년 대계를 꿈꾸면서 만든 석탑에 탱주의 숫자가 일정치 않고, 괴임에 여러 양식이 혼재되며 지붕돌 층급받침과 몸돌의 우주가 저렇게 문약하게 보여지는 걸 발주자가 용인할 수 있는 분위기 였을까? 물론 보수와 복원과정에서 부재의 교체와 변경이 있을 수 있지만, 괴임을 포함한 괴임의 양식은 쉽게 자주 바뀔 성질의 것도 아니고, 그런 점에서 탑평리탑은 동시대 석탑들과 비교해 느슨한 점이 많은 게 사실이다.

 

 

<나는 탑평리탑이 칠층인 점을 감안하고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상상을 하면서 나원리탑, 장항리탑과 비교해봤지만, 괴임, 우주의 두께와 돌출깊이, 지붕돌의 낙수면과 층급받침을 비롯해 미감과 체감에서 아무런 친연성을 찾지 못했다...>

 

 

 

 

 

결국 나도 내가 생각하는 시대와 미감을 중점으로 다른 시대에 세워질 수없는 이유들을 먼저 찾은 셈이다. 이만한 규모의 탑은 800년대 중반 이후에는 세우고 싶어도 세울 체계가 없었고, 600년대 후반에는 현재의 완성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또 700년대 초중반까지 이어지던 정연함이 남아있지만 우아하고 세련된 미감에서는 차이가 있기에 이시기로 추정하기도 어렵다. 이런 근거들을 종합하면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북방영토의 긴장감이 재차 제고되면서 강조되는 한주의 위상과 중원경의 전략적 비중이 강화되는 760년대 이후, 아직 중앙집권체제가 위력을 발휘하려 안간힘을 쓰던 700년대 후반, 그리고 다양한 석탑의 양식들이 실험되던 800년 전후 시점이 탑평리탑이 세워질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시대배경과 양식이 아닐까 싶다.

 

 

<이제 785~800년 경 탑평리탑이 만들어졌다는 점을 전제로, 이 석탑의 특징에 대해 몇가지 더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