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 경전에 근거한 이형석탑의 완성
(1) 화엄사 가람배치 - 평지형 산지가람배치 화엄사의 공간경영과 묘미
북악(태백산)과 남악(지리산)... 전남 구례의 지리산자락에 위치한 화엄사는 화엄사사적기에 나타나듯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 화엄법운사(華嚴法雲寺) 등으로 불리며 화엄종찰 부석사와 함께 통일신라 하대의 화엄종을 양분했던 고찰이면서, 내가 다루고자하는 사사자 삼층석탑(국보35호)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각황전(국보67호)과 석등(국보12호) 외에도, 화엄석경(보물1040호), 영산회괘불탱(국보301호)과 대웅전(보물299호), 동서 오층석탑(보물132,133호) 및 원통전 앞 사자탑(보물300호), 당간지주, 탑비, 보제루 등 석조예술과 건축, 회화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수많은 유물들을 간직하고 있어 불국사란 위명에 전혀 손색이 없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찰이기도 하다.
<화엄사 전경... 최치원이나 후대 사가들이 화엄사와 불국사를 착각하거나 혼용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국사 외에 불국사로 불렸던 절은 화엄사밖에 없을 거 같다...>
먼저 우리나라 사찰의 가람배치를 직선형, 병렬형, 직교형, 복합형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부석사/해인사/범어사 등을 직선형으로, 봉정사/선운사 등을 병렬형으로, 불국사/통도사/선암사/대흥사 등을 복합형으로 구분한다면, 화엄사는 법주사(대웅보전과 미륵전)/ 보림사(대적광전과 대웅전)/ 금산사(대적광전과 미륵전) 등과 함께 직교형(대웅전과 각황전)으로 분리할 수 있고, 상당히 높고 다양한 석축으로 이루어진 산지형이면서 전체적인 느낌은 평지형으로 보이는 매우 독특한 가람배치로 이루어져 있다. 또 규모에서는 따를 수 없으나 화엄사처럼 마당에 층단을 두고 건물을 기역자형으로 배치한 사찰들이 있는데, 전등사는 너무 분절적이거나 무정형하고, 선운사는 연속성이 없다. 또 표충사와 무량사는 화엄사의 공간경영을 차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지만 화엄사의 완성도를 전혀 따르지 못한다.
<화엄사 가람배치/한국의 건축/공간사에서... 화엄사의 직교축으로 인해 각황전과 대웅전 건립시기에 대해 다양한 설이 제기된다...>
* 우리나라 대표적인 가람배치 유형...
① 먼저 중심성과 수직성이 강조된 직선형... 산지형과 평지형을 막론하고 가장 대표적이며 일반적인 유형이다...
② 일방향이지만 주요 전각에 따라 시계를 구분한 병렬형... 주로 고려시대부터 등장하는데 봉정사, 선운사 등과 조선시대 전등사, 운문사 등이 있으나 소수다...
③ 두가지 성격의 주요 전각이 남북축과 동서축으로 직교된 배치된 형태로... 보림사, 금산사, 법주사 등 대부분 백제지역의 평지형 거찰에서 사용되었다... 쌍계사는 산지형이면서 직교축으로 구성되었고, 화엄사는 평지식 산지형의 절충 형태로 볼 수 있다...
④ 주요 전각들이 별도의 공간을 가지고 직선형과 병렬형, 직교형을 혼용한 경우를 복합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불국사, 통도사 등 다불전 사찰에 적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부터 활성화된 사찰 중 고려시대 확장하면서 다른 성격의 불전을 추가하면서 등장하기도 하는데, 선암사 외에 마곡사, 송광사, 금산사, 장곡사 등이 이 유형이다...
게다가 부석사가 좁은 경사지를 개량해 무한히 확장될 수 있는 산지가람의 전형을 보여준다면, 화엄사는 지리산이란 무량한 공간에 의지하면서도 안온한 분지에 중후하게 자리잡아 통일신라시대 백제식 평지가람이 어떻게 산지형과 절충됐는지 보여주는 독특한 형식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절집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엄사를 생각하면 각황전과 그 앞의 석등, 그리고 사사자탑만 생각날지 모르겠다. 조금 더 생각하면 각황전과 함께 역기역자로 구획된 2단의 대웅전 앞마당과 이를 바라볼 수 있는 보제루 정도가 떠오르고, 작은 일주문 정도가 생각나는 게 전부가 아닐까? 실제 상당히 많은 전각들이 고르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왜 우리에게는 몇 개의 아이콘만으로 화엄사가 기억되는 걸까?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우리에게 화엄사는 몇몇 아이콘으로만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우리들이 화엄사를 찾은 목적이 너무 선명해서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각황전, 사사자탑, 그리고 석등 등 특출한 아이콘에 여타의 부속물들과 공간이 가려진 결과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화엄사 대웅전은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 뿐만 아니라, 거조암 영산전, 마곡사 대적광전보다 훨씬 큰 규모이며 쌍계사 대웅전 정도가 겨우 따라 올 정도로 근대 신축된 불전을 제외하면 가장 큰 전각 중 하나고, 각황전과 대웅전 앞마당은 송광사 대웅전에서 성보각, 법주사 대웅보전에서 쌍사자 석등이 포괄하는 앞마당보다 넓고, 금산사 대적광전과 미륵전이 감싸안은 앞마당만큼 넉넉하다. 또 대웅전과 각황전이 보이는 보제루에 당도하기까지 우리는 사천왕문과 금강문, 그리고 일주문과 그 주위의 많은 전각들이 있음에도 우리가 기억하는 화엄사는 그리 복잡하거나 허허러울만치 넓지 않은 게 사실인거 같다.
<화엄사 대웅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복원되거나 신축된 1,924개소의 사찰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빼어난 미감을 가지고 있는 건축이 화엄사 대웅전이 아닐까 생각된다... 각황전의 이미지가 너무 크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웅전+영전+원통전의 단면적 합이 각황전보다 크기 때문에 화엄사는 시각적 균제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상호보완 관계라는 말인데, 이 점이 화엄사 공간경영의 가장 큰 미덕이며 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과연 이 이유가 너무나 선명한 목적 때문이나, 대웅전 앞마당 앞쪽 전각들이 무의미하게 배치되어서일까? 그것보다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선행하는 과정속 동선들이 점차 중심에 다가가면서 한차원씩 상승하기 때문에 이전의 공간들이 쉽게 잊혀지고, 또 계속되는 공간 변화와 최후에 다다라 접하는 공간의 만족도가 점차 높아지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화엄사 항공사지(?)/네이버 지도에서... 보제루에 이르기 전 금강문과 천왕문 주위에도 비록 고건축은 아니지만 상당수 건축물들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현재의 일주문을 벗어난 곳에도 많은 건축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를 인지하지 않는다...>
화엄사는 여느 거찰보다 충실하게 일주문에서 금강문(금강문을 둔 사찰은 금산사, 법주사, 송광사, 수덕사, 쌍계사, 직지사 등 몇 되지 않고, 일주문-금강문-천왕문-불이문 등 4문 구조를 갖춘 사찰은 극히 드물다), 그리고 천왕문을 거치게 돼있고, 여기를 지나 회랑이 있었다면 남문이나 중문에 해당하는 보제루를 넘어 대웅전에 이르게 된다. 또 앞마당은 독특하게 경영된 층단으로 구획돼 있어 거부감이 없으면서도 신선하게 다가와 대웅전, 각황전, 오층탑들이 조화를 이루는데, 효대라 불리는 사사자탑까지 오르면 넓었던 공간에서 확 줄어든 좁은 공간임에도 불탑의 상징성과 꽉찬 구성에 이전의 공간감이 묻혀버리는 새로운 상승감을 느끼게 된다.
<앞선 글에서도 소개했지만, 화엄사 일주문은 그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일주문을 갖췄다... 그리고 일주문 옆으로 회랑이 완전히 퇴화된 거 같은 담장이 이어져 있는데, 이는 보림사, 천은사 등 옛 백제지역 남단이었던 전라도 평지가람에서만 나타나는 양식이다...>
다만 이 과정속의 공간들이 우리들 뇌리에 각인되지 않는 것은, 동선의 끝자락에서 우리들이 지나온 공간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선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사사자탑에서는 각황전 앞마당이 보이지 않고, 대웅전 앞에서는 보제루를 넘어 공간들을 인식할 수 없다. 게다가 개방된 방식이 아닌 보제루 툇마루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축은 다시 대웅전과 각황전으로만 유도하게 되어있다. 즉 후행공간에서 선행공간이 차단되고, 아무리 높고 넓은 공간에서도 주위는 늘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동하는 동선에서 앞 공간의 시선이 차단되고, 다시 후행공간에서 선행공간을 바라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화엄사는 폐쇄적이거나 답답하지 않다.
<벽암선사석비... 임진왜란부터 승병으로 참전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 축성의 감독이었던 벽암선사는 보은천교국일도대선사란 칭호를 받았고, 화엄사의 주요 전각 뿐만 아니라 법주사, 쌍계사, 해인사 등의 중건에도 참여했다... 해인사 국일암에 그의 초상화가 있다... 아무튼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앞에 있는데, 기억이 있으신지...>
<또 사천왕문을 지나 보제루에 당도하기 이전에 당간지주도 만날 수 있다... 정면이 좁고 측면이 넓은 게 동화사 당간지주를 닮았는데, 백제지역 당간지주로는 특이하게 측면에 선문양이 없고 높이는 3m다... 고려시대 작품이란 설명이 있지만, 나는 견훤대에 조성했다고 보는 입장인데 현재의 위치와 방향이 원형이라면 대웅전을 향한 중심선은 그 때 이미 완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이런 석물도 그냥 지나치게 된다...>
이는 산지가람 부석사나 평지가람인 금산사/법주사와 다르면서 또 다른 방식의 공간경영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시선축과 동선축의 완벽한 괴리에도 불구하고 화엄사의 공간경영은 복잡하거나 답답하지 않다. 각황전에서 바라보이는 상하층 넓은 마당이 허하게 보이지 않고, 전체 넓이의 1/2에 불과한 보제루 아래에서 올려보는 마당과 이를 구획한 석축은 답답하게 보이지 않는다. 안양루와 무량수전으로만 향하는 부석사처럼 시선과 동선이 집약된 것도 아니고, 팔상전과 대웅보전, 미륵대불로 시선이 쪼개지면서 동선이 단조로운 법주사의 느슨함도 없다. 또 각각의 공간이 분절돼 유기적으로 구성됐으면서도 석가탑 다보탑이 있는 대웅전 공간에만 기억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불국사와 다르고, 너무 분산돼 하나의 공간이 아닌 집체적 구성만 기억되는 선암사와도 다르다. 이를 지탱했던 공간경영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까?
<천왕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보제루... 2층 누각 형식의 강당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누하진입이 아니라 건물을 돌아가는 우각진입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당도하는 대웅전과 각황전 앞마당... 우리에게 화엄사는 이 공간과 이 장면만이 기억에 남는다... 왜 그럴까?...>
수덕사가 오래 기억되는 건 대웅전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시선은 관람자와 건축자가 한곳을 향할 수밖에 없어, 완벽에 가까운 비례와 뛰어난 완성도를 갖춘 대웅전을 바라볼 때 수덕사의 체감은 이루어진다. 이에반해 부석사는 무량수전을 바라봐서 완성되는 게 아니라, 무량수전이 바라보는 곳을 공유할 때 공간경영의 목적이 달성된다. 막힘없는 시선과 광할한 대자연을 향해 펼쳐진 우리들의 시선은 내 뒤에서 나와 함께 같은 곳을 응시하는 무량수전이란 존재를 감지하면서 완성된다. 바람을 안은 유연한 처마곡선과 대지를 향해 쏟아지는 태양 빛을 모두 담은 낮고 넓은 지붕의 날렵한 맵시는 어느덧 화사함으로 바뀌고 시원하게 가공된다. 수덕사 대웅전이 시각적 완성을 목표로 했다면, 부석사 무량수전은 관념적으로 일체화 될 때 완성되는 것이다. 건축물의 완성도에서는 수덕사 대웅전이 한 수 위일지 모르지만, 우리들의 마음에는 부석사 무량수전 공간이 더 꽉차게 들어오는 이유다.
* 수덕사와 부석사의 간단한 비교...
<요사채가 헐리고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 수덕사 대웅전... 요사채가 막았던 대웅전 앞마당이 좁았던만큼 훨씬 장중하고 중후하게 다가왔던 대웅전이다... 1308년 중건으로, 1363년 중수된 봉정사 극락전보다는 늦고, 1376년 중창된 부석사 무량수전 보다는 빠른 고려시대 뿐아니라 우리나라 목조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온화한 목재질감과 색감이 그대로 살아있어 친근하면서 더 중후한데, 수덕사 대웅전의 미감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절제미'가 아닐런지...>
<그리고 수덕사는 온전히 대웅전만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건축물이 아닌 공간경영의 풍부한 이야기가 수덕사에는 없다...>
<이 사찰은 어디일까? 무정형에 산만하게까지 보이는 이 곳이 바로 부석사다... 그러나 부석사를 이렇게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우리나라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부석사 무량수전... 건축물의 빼어남도 있지만, 우리에게 부석사는 다른 많은 이야기를 보장해 준다...>
<상큼한 눈맛이라 표현했던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와 최순우 선생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부석사의 경관을 우리나라 건축의 미와 점지의 묘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킨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부석사가 오래 기억되는 것은 한층 한층 올라간 후행공간에서 지금까지 자신이 지나온 길을 함께 되짚어 볼 수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에비해 화엄사는 시각적 완성이나 관념적 일체화가 없다. 그래서 부석사나 수덕사에 비해 덜 자극적이다. 그렇다고 화엄사는 석가탑이나 다보탑 같은 아이콘만으로 완결되지 않고, 금산사나 법주사처럼 단일 유물들이 분산돼 기억되는 것도 아니며, 통도사나 선암사처럼 단순함과 복잡함의 유기적 구성에 의해 새로운 체감으로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중간쯤, 또 그래서 차원이 다른 이해로 우리들의 마음을 유도한다. 각황전과 대웅전은 서로를 침해하지 않지만, 금산사의 미륵전과 대적광전처럼 수평성과 수직성의 대응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사사자탑이 독특하지만 다보탑만큼 복잡한 것도 아니고, 장중한 석등이 있지만 석가탑만큼 간결하지도 않다.
<가람배치와 공간경영의 짜임새보다는 단일 유물들의 명성이 산개된 법주사... 하나하나의 장대함이 전체의 통일성으로 승화되지는 못했다...>
<대웅전과 대광명전, 그리고 영산전 영역이 일방향에 직교형으로 배치된 통도사... 어쩌면 3개의 사찰을 하나로 묶어 놓은 모습으로 해체될 수도 있지만, 통도사는 집합적 건축의 유기적 구성으로 우리나라 건축의 완결성과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지 설명해 주는 교과서 같은 곳으로 사랑받는다...>
어쩌면 장중한 각황전과 중후한 대웅전, 그리고 넉넉한 공간에 어울리지 않은 가느다란 오층탑이 알게 모르게 전체에 균형을 주는지도 모르고, ▜자로 집약된 건축물들에 띄엄띄엄 점처럼 산개된 석조유물들이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국 화엄사는 ◱ 로 구획된 공간에서 부석사에서 느낄 수 없는 자연에 묻힌 편안함과, 선암사에서 볼 수 없는 넉넉한 공간의 개방감, 그리고 법주사만큼 분산되지 않은 집중성과 통도사만큼 복잡하게 느껴지지 않는 간결함, 불국사에서 느끼는 분절감을 일체성으로 완벽하게 극복하는데 성공했는지 모르겠다. 또 그래서 덜 자극적이고, 또 그래서 평이하고, 또 그래서 한마디로 설명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가 화엄사에서 생각하는 공간경영의 묘미다.
<화엄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다보면, 우리나라 사찰에 사용됐던 다양한 공간경영의 철학이 지나치지도 부조하지도 않게 적절히 융화된 새로운 미감으로 다가옴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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