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3) 백제 땅에 꽃피운 통일신라 가람배치 - 양보와 타협, 그리고 중용이 만들어낸 느슨한 균형
현재 우리들이 접하는 화엄사의 공간경영과 가람배치는 창건 당시와 동일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잦은 전란과 병화로 일본과 달리 통일신라시대의 목조건축물이 남아있지 않아 원형과 중건, 재건과정이 중첩되어 있는 게 현실이고, 화엄사 역시 지금의 골격은 최소 755년에서부터 9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150여년이 넘는 세월이 중첩된 것이고, 현재의 주요 건축물들은 1630년대에서 1800년대 중반까지 누적되었다고 봐야 옳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의 건축구성으로 화엄사를 해석하지 않고 통일신라시대의 가람배치로 그 연원을 추적하는 근거는, 석축과 계단을 비롯해 주요 건축물의 기단 및 석탑, 석등 등 많은 석조 유물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변천을 추적하고 현재 시점에서 완성도를 평가한다.
<석등과 원통전(1703년)에는 800여년의 시차가 있다... 그 세월의 겹을 뛰어넘는 것이 공간경영의 완성도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현재 화엄사 공간경영의 변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먼저 화엄석경으로 장엄된 각황전과 서쪽 석축, 사사자탑이 있는 효대 구역, 대웅전 앞쪽의 북쪽 석축은 각각 다른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각황전 서쪽 석단과 대웅전 북쪽 석단은 구조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고, 탑원이라 할 수 있는 사사자탑 영역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몇가지 설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800년대 초반에는 대웅전 영역이 중심축을 이루면서 현재의 보제루쪽 진입이 일반화 되고, 840년대 즉 장보고 선단이 무주(광주)와 강주(진주)진영을 장악하면서 전라도지역에 경제적 부가 쌓이고 도선국사가 활동하던 시기에 서탑이 만들어지고, 800년대 후반에서 견훤의 후백제 영역에 포섭된 900년대 초반 각황전 앞 석등이 만들어진 다음에 동탑과 원통전 앞 사자탑, 당간지주 등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한다.
<1~2세대의 시차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동서오층석탑... 보주만으로 완결한 상륜부는 사사자석탑과 동일한 양식이다... 신용철은 비로자나불로 설명한다... 90년대 사진이라 오래된 태가 난다...^^>
결국 화엄사는 각각 755년 경덕왕대와, 700년대 후반(원성왕대)에서 800년대 초반(흥덕왕대) 화엄십찰이 본격적으로 경영되던 시기, 그리고 장보고 선단이 세력화된 840년대를 거쳐 900년 전후 견훤에 의해 기본적인 직교축을 갖춘 가람배치를 완성한 이후, 고려시대를 비롯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변화속에서 건축과 석조유물들이 추가되면서도 기본 골격을 놓치지 않고 전체적인 구성을 흩트리지 않았다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사찰이며 가람배치다. 사실 일본과 달리 불국사 외에 700년대 건축적 원형이 거의 없는 우리 상황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완결적 가람배치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찰은 통일신라와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천년을 거쳐 완성된 독특한 집체적 의미의 공간경영을 완성해왔다. 부석사도 통도사도 선암사도 모두 그렇게 완성되어 현재에 이른다는 말이다.
<지역문화와 시대정신이 중첩되고 현재에도 끊임없이 달라지기에 지리산 자락의 대원사를 어느 한시대의 산물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또 같은 산사라도 한국과 일본의 공간경영과 체감은 완전히 다르다... 일본 청수사에서...>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말하는 산사의 정취란 조선시대 소규모 산지중정형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느끼는 자연과의 일체성과 도심에서의 단절감이지, 역사가 오래된 고찰에서 느끼는 사찰의 정감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평지형 백제사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간결함이다. 너무 담백해서 모든 걸 비워야만 채워질 거 같은 절제된 격식만이 남아있다. 다만 법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 체감은 중후장대함으로 짜여진다. 신성이 유지되는 힘이다. 이에 반해 통일신라의 사찰에서 느끼는 기운은 정제미다. 조화롭고 체계적이며 감성보다 이성이 동해야 감응되는 다양한 비례들의 연속 속에서 이해를 강조한다. 불국사와 석굴암까지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통일신라의 가람배치는 이상적인 완벽함으로 우리를 수학적이며 디테일한 세계로 인도한다. 결국 백제와 통일신라의 사찰은 산사의 정취와 무관할지 모른다.
<백제의 중후장대함과 통일신라의 정제미는 미륵사 석탑과 석굴암 본존불만큼 다르다...>
그러면 고려시대의 특징은 뭘까? 고려의 특징은 창작이 아닌 확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통일신라부터 유지되던 많은 사찰을 그들은 상하좌우 공간적인 확대를 통해 불교의 신성과 그들의 불심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통일신라 사찰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특히 산지중정형이 정착된 이후 통일신라 하대의 사찰들은 고립적이고 폐쇄적이었을 따름이다(부석사처럼 시원한 조망을 갖춘 산사는 매우 드물다). 여기에 공간적 연속성을 첨가하고 수직적 수평적 확산을 꾀한 고려의 가람배치는 광대한 규모에서 신성을 찾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허장성세와 화려함으로 불교문화를 새롭게 꽃피웠지만, 확장된 공간에서도 건축의 독자적 완성도를 놓치지 않았다.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 뿐만 아니라 창고 건축이라 할 수 있는 봉정사 극락전이나 거조암 영산전에서 우리는 고려시대 사람들이 규모에 짓눌리지 않은 건강한 절제미를 함께 읽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장대한 규모와 화렴함은 통일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체계와 경제적 부에 기인했겠지만, 디테일에서 건강함까지 잃지는 않았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가늘면서 높고 긴 탑의 공통점이 있지? 참고로 화엄사 대웅전과 규모 비교를 위해 마곡사 대광보전 사진을 다시 올리는데, 높이와 깊이 등 화엄사 대웅전이 훨씬 크다...>
<거조암 영산전... 한눈에 담기에 규모가 크다... 고려시대엔 모든 게 컸다? 청자와 불화가 섬세해진만큼 석조유물과 건축은 크고 무미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묘한 균형이지?>
그러나 고려시대의 화려함과 절제미는 조선시대 많은 사찰 및 불교유적들과 함께 훼손된다. 폐불이 장려되고 심지어 석불상의 머리를 가져와 관에 신고하면 상까지 주는 시대였고, 한번쯤 사찰에 불을 질러 혼비백산하는 승려들을 바라보며 웃고 즐길 줄 알아야 같은 연배의 유학자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대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병자호란까지 겪고 나서야 그들의 불장난은 멈춰졌고 허례허식이 담지 못했던 백성들과 자신의 마음을 돌이켜 보게 된다. 광해군과 인조대 이후에야 그들은 지금까지 남아있던 사찰보다 240여곳이 늘어난 1900여 곳의 사찰 재건축을 용인하며 중창하고 보수한다. 또다시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고 하청 수공업자로 승려들을 전락시켰지만, 통일신라에서 이어지던 수많은 명찰들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파괴에서 허용된 작은 반성의 결과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새로운 공간경영을 창조하지 못했고, 답습된 과거의 재현만을 목적했다.
<수많은 포기와 양보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까지 살아남은 것들은 신성이 너무 컸거나, 친근한 설화를 간직해 지키려는 이들이 많은 곳들이었을 것이다... 영월 주천 사자암에서...>
<그리고 풍류와 풍수와 호연지기에 민간신앙과의 타협이 있었을 뿐이다... 양평 수종사 산신각...>
그렇게 조선시대 가람배치와 건축양식은 새롭게 변한다. 경영하고자 하는 공간도 축소되고 마음에 담고자했던 자연의 배경도 축약된다. 위축됐던 시대가 그렇게 반영된다. 그 부족함을 우리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에 담아 산사의 미학으로 승화시켰을 뿐이다. 조선시대는 공간을 확장한 것이 아니라 빈틈을 채우는데 열성이었고, 개별 건축에 화려한 장식을 첨가했다. 절제와 담백함으로 설득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이 없던 긴축의 시대였다. 예학으로 경도된 사회문화에서 불교가 그랬고, 선(禪)에서 벗어나고 교(敎)도 깊지 않은 승려들이 그랬으며, 사원과 서원에 집중된 경제적 불편이 사찰경영을 한가롭지 못하게 규제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첨삭한 것들에는 디테일과 깊이가 있었다는 점이다. 전통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고, 훼손되는 많은 것들을 우려하는 지혜가 살아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단절과 망각이 아닌 축소와 긴축의 결과겠지만) 안목 있는 지성보다 미래를 향한 희망 섞인 관성이 작용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결국 현대에 들어와 우리가 노래하는 산사의 미학이란 그렇게 조선시대를 통해 윤색된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찰 진입로는 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확실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다... 메이지 유신이나 문화혁명을 통한 폐불훼석보다 더 혹독하고 긴 세월을 보냈지만, 조선시대 불교는 망각의 객체가 아닌 긴축의 주체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동아시아 각국의 사찰 진입공간 풍경...
<일본의 센소지덴진... 대부분 도심지 평지형 가람배치를 가진 일본의 사찰에는 남문이나 중문 입구까지 세속(?)의 공간이 이어져, 상점가와 산문까지 일정한 거리를 둔 우리와 다르고, 같은 상점들이라도 통일되고 체계적으로 배열된 일본과 그렇지 않은 우리가 다르다...>
<소주의 한산사... 한산한(?) 입구와 달리 내부는 향 연기와 사람들로 꽉찬 곳이 중국이나 대만의 사찰이다... 주변에 상점도 없고, 짙은 노란색이나 하얀색 페인트로 칠해진 담장으로 외부와 내부는 구획된다...>
<태국 푸켓 왓찰롱... 1930년대 신축 사찰이지만, 전통양식이며서 가장 화려하게 지어 태국인들에게 사랑받는 곳이다... 공원 같은 느낌...>
<그리고 우리나라 통도사 천왕문 앞...>
<그리고 2010년대 우리사회에서 산사의 미학은 1980(±15)년대와 또 다른 의미로 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도심에 공원이 없었고, 콘도와 펜션이 귀했으며, 귀농이 아닌 이농의 개념만 있었을 때다... 무엇보다 기계화와 도시화, 그리고 속도의 경제라는 바람에 모두가 휩쓸렸던 시대였기에, 산사의 정취가 더 소중했을 시대였다는 말이다...>
이렇게 가람배치 변천의 긴 흐름을 보고 있자면 화엄사는 대부분 목조건축이 소실됐음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은 편이다. 터가 좋았을까? 화엄사에 인연을 맺은 이들의 안목과 원력 때문일까? 축적된 화엄사의 명성 때문일까? 경덕왕대 의상의 화엄학과 원효의 가르침을 전승한 연기법사, 때 맞춰 불어온 장보고선단의 넉넉한 후원, 후백제에 들어 지속된 견훤의 지원, 의천과 벽암선사의 중창까지 하나하나의 인연이 예사롭지 않았고, 화엄석경과 사사자탑, 각황전과 석등 등이 지리산이란 명산에 어울리는 명찰 화엄사를 만들었다. 여기에 선행하는 가치를 후대에 추가한 것들이 서로를 빛내며 조화를 이루었다. 바둑에서 앞서 둔 돌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 장고에 장고를 거듭하듯, 세월을 두고 하나씩 추가된 것들은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지만 튼실한 짜임새로 구현됐다. 완벽한 기획과 완벽한 디테일의 조합이 아닌, 성글게 보이고 넘치지 않지만 일정한 리듬과 균형에 성공한 것이다.
<화엄사의 석조유물 중 가장 늦게 조형된 것으로 보이는 원통전 앞 사사자탑... 이 탑을 보더라도 화엄사의 석조유물들은 완벽한 디테일과 세련되거나 우아한 미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규모와 자리매김에서보면 전체적인 균제와 짜임새을 완전하게 보완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내부공간은 900년대 초반 완성된 이후 더 보태지지도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고려시대 공간적 확장은 현재 일주문 밖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통일신라대까지 유지되던 화엄사 내부 공간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았고, 모든 게 전소된 정유재란 이후 조선시대 중창은 기존의 골격을 살려내는데 실패하지 않았다. 그들이 지켜낸 기준틀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말하면 백제지역의 문화와 통일신라대의 규격이 아니었을까 싶다. 먼저 대웅전과 각황전 중건 시기는 대략 60년의 시차가 있다. 이미 있던 석등에 어울리는 규모의 건축(자재, 기술력, 자본)을 위해서 그들은 기다릴 줄 알았다는 말이다. 또 내부의 석축과 일정한 축에서 벗어난 아랫마당의 석탑 위치는 내부공간으로 더 이상의 증축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천왕문과 금강문 주변의 영역에 만족하며 대웅전 앞마당을 침범하지 않았다. 즉 통일신라시대 석조유물들이 고려와 조선시대 중창과 보수에서 규준점으로 작용했다는 말이다.
<묘한 곳에 자리한 두기의 오층석탑은 초창기부터 유지되던 내부공간의 파괴를 지켜낸 수호신장의 역할을 했다...>
또한 화엄사는 백제지역에 잠재된 문화적 전통을 독창적으로 재해석해내는데 성공한다. 그 전통이란 평지형이란 가람배치, 오층석탑과 2층 이상 중층형 전각, 그리고 중후장대한 미감이다. 금산사(미륵전), 법주사(대웅보전), 보림사(대웅전), 무량사(극락전), 마곡사(대웅보전), 쌍봉사(대웅전)처럼 백제지역에만 유행했던 중층형 각황전이 살아날 수 있었고(근래 신축된 도갑사, 관촉사, 용화사 등도 그렇고, 선암사도 중건을 준비하고 있다), 통일신라 석탑의 결구방식을 택했지만 2기의 오층석탑이 만들어지고, 어느 사찰에서도 시도하지 못했던 장대하면서도 화려한 대웅전을 재건한 것이다. 그렇게보면 화엄사는 백제땅에 꽃피운 통일신라의 문화고, 통일신라시대에 열매를 맺은 백제의 문화가 아닐까?
<내가 화엄사 가람배치와 공간경영, 그리고 다양한 건축과 석조유물들의 유기적인 조화에서 읽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것은 백제와 통일신라의 융합과 그 힘이다...>
우리는 화엄사에서 백제 때 잡은 터에 통일신라의 공간경영과 석조유물이 더해지고, 다시 고려시대의 공간적 확장과 조선시대의 건축이 보태진 역사의 축적을 바라보고 있다. 초창기부터 완벽한 기획에 의해 조형된 불국사와 다르고, 후대에 추가된 공간으로 중심으로 뒤바뀐 마곡사나 대흥사와도 다르며, 석조유물들이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원형추정이 간단치 않은 금산사나 법주사와도 다르다. 부석사처럼 조금씩 넓혀진 공간들이 보다 높은 완성도를 지향했고, 통도사처럼 하나씩 첨가된 석조유물들이 허한 곳들을 보완하면서 밀도를 높여갔다. 그러면서 1500여년 동안의 변화를 나이테처럼, DNA 유전정보처럼 고갱만은 다치지 않은채 온전히 보존 계승하고 있다. 이 힘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화엄사와 인연을 맺은 이들에게 잠재된 공간을 경영할 줄 아는 지성과, 자연의 흐름에 조응할 줄 아는 건축적 안목은 어떻게 발현될 수 있었을까? 뿌리를 잃지 않으려는 낮은 자세의 비워진 마음일까? 아니면 광대무량한 지리산의 넉넉한 기운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 겸손함에서 출발한 것이었을까?
<각기 시대를 달리해 조형된 5가지 기물들이 있다... 각황전을 중심으로 석등과 오층석탑, 그리고 사자탑과 계단... 아무런 공통점도 일체감도 없지만, 함부로 배치를 바꾸거나 하나라도 빼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변화와 차이 속에서도 상호 균형을 이루는 균제의 자연스러운 힘이다...>
크고 작은 기물들을 보며 뭔가를 보태기엔 규칙이 없는 거 같지만, 하나라도 빼내면 기존의 체계가 무너질 거 같은 기묘한 균제, 지나침도 부족함도 없는 느슨한 균형을 느낀다. 또 석등을 등지고 앞마당을 바라보며 넓음과 좁음, 비움과 채움이란 묘한 긴장을 느낀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중관과 유학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중용의 건축적 구현이 아닐까? 그리고 석축과 계단을 오르내리며 한국 고건축의 특징 중 하나인 자연에 순응하면서 최소의 인위적 장치로 공간의 통일성을 조율한 깊은 안목에 감사함을 느낀다. 보제루에 앉아 목적을 위해 과정이, 중심과 주인공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키지 않은 유기적 통합과 조화로운 균제에서 높은 안목과 지성을 읽는다. 한사람에 의해 또는 단기간에 완성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의도를 흐트러지지 않은 지혜와, 하나하나를 더해가면서도 넓은 시야를 놓치지 않고 완성해나간 중용의 미덕이 화엄사 앞마당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화엄사를 생각하며 우리나라 가람배치를 더듬어 본 이유는 세월의 퇴적이라는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시선을 벗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공간경영이 지닌 균형과 조화, 리듬과 변화에는 적극적인 양보와 타협, 그리고 넓고 깊은 안목으로 다듬어진 세심한 배려가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런 중용의 미덕을 뒷받침한 것이 양보와 타협, 절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새시대를 선도하겠다는 과시욕을 절제하고, 부족함을 이유로 기존 유물을 새롭게 대체하는데 욕심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화엄사는 체계적인 기획을 통해 완성된 완결적 구조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먼저 둔 돌의 가치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더디게 착수하면서도 악수를 두지 않은 긴 여정의 바둑을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치열한 전투바둑도 아니고, 성근 그물처럼 비대칭에 무정형한 배치로 보이지만, 시각을 넓히면 전체 바둑판을 짜임새 있는 포석으로 완결해 가려는 고수들의 수읽기가 느껴져 오히려 고맙고 즐거운 공간이기도 하다. 한 곳에만 시선을 뺏기지 않으면서 양보와 타협을 이루는 절제와,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중심을 놓치 않으면서 자아를 잊어가는 순간, 화엄사의 미덕이 살아나고 공간경영은 한차원 높게 승화될 수 있었다. 모든 여정을 끝내고 보제루 툇마루에서 지나온 발걸음을 하나하나 되돌아보는 순간 화엄사의 공간경영은 그제야 완성되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 사람들은 보제루의 맨 끝-사진의 왼쪽에 앉고, 또 그곳부터 채워진다... 모든 사람들의 눈에도 화엄사에서 제일 편한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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