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4) 대웅전, 각황전, 탑원 등 3영역으로 분리된 가람배치와 화엄사 조성시기 검토
그러면 이 화엄사는 언제 창건되었을까? 이 정도의 공간경영을 이룩한 시기를 알아보는 것도 꼭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의 편년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화엄사 창건시점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화엄사 사적기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중첩되어 진위를 판가름하기 어렵지만, 몇가지만 골라보면 544년 창건되어 백제의 법왕(599년)때 3000명의 승려가 주석할 정도의 대찰이었으며, 의상의 화엄십찰 중 하나로 800년대에는 부석사와 900년대에는 해인사와 화엄종찰을 다툴 수준의 위상이었는데, 풍수지리설의 대가 도선국사(827~898년)와 고려 광종대(949~975년) 홍경선사가 크게 중수해 충숙왕(1313년)에 이르기까지 고려왕실의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고, 조선시대(1424년/세종)에는 선종대본산으로 승격된 이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불에 탔고, 벽암선사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된 1636년(인조) 다시 선종대가람으로 승격되고 각황전이 중건된 1702년 선교양종대가람으로 격을 높였다고 한다.
<화엄사는 창건 이후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항상 불교사의 중심에 있었던 거찰이다...>
<그리고 화엄사는 대웅전과 각황전 배치 축이 직교하는 복합형 가람배치다...>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화엄사는 처음부터 대웅전 영역, 각황전 영역과 탑원을 분리해 기획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화엄사는 백제시대 창건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늘 불교사의 중심위치에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먼저 실질적 창건주(?)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많은 화엄사 사적기에서 언급한 이가 바로 연기조사인데, 진흥왕대 창건한 인도승려라는 설에서부터 경덕왕대의 법사라는 설까지 200여년의 시차를 두고 있지만, 한문 표기가 다를뿐 연기라는 이름이 동일하고,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이 연기조사를 찬하며,
위론웅경막불통(偉論雄經莫不通) 논과 경에 뛰어나 막힘이 없고,
일생홍호유심공(一生弘護有深功) 일생 불법을 지킴에 깊은 공이 있네.
삼천의학분등후(三千義學分燈後) (연기조사로 인해) 삼천의 후학들이 의학을 나누어 밝히고,
원교종풍만해동(圓敎宗風滿海東) 원교를 따르려는 바람이 해동에 가득하네 ’
라는 찬시를 진영에 남긴 점을(여기서 의학을 의상의 화엄학, 원교를 원효의 가르침으로 이해하면 연기조사는 의상과 원효의 맥을 잇는 통섭적 학승이면서, 삼천에 달하는 수많은 후학들을 가르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로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준말로 부파불교, 중관파, 유가유식행파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과법칙과 인연법을 설명하는 핵심개념이기도 하다) 감안하면 실존인물이면서 화엄사 창건에 중심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국보196호/고미술소장품/리움박물관/2011년/P177에서... 이 연기조사와 화엄사를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화엄경 사경이다...>
<화엄경 사경은 신역 80권 화엄경을 한축에 10권씩 모두 8축으로 만들었고, 보상화와 신장상이 그려진 표지는 고려사경 표지화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표지화 안쪽의 변상도는 사자대좌에 앉아 지권인을 취했을 것으로 보이는 보살형 비로자나이고, 왼쪽 그림은 주존 옆의 설법자인 보현보살로 추정하고 있다...>
<사경의 표지와 변상도는 자주색 닥종이에 금니와 은니를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엄되었는데, 건축과 불보살상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참고로 검게 보이는 선들이 은니다...>
먼저 이 연기조사와 관련된 구체적 유물이면서 화엄사와 관련된 가장 오래된 자료가 확인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국보196호)>이다. 속칭 <신라백지묵서화엄경사경>은 경주 황룡사에서 754년 시작 755년 완성된 것으로, 연기법사가 아버님의 은혜를 위하고, 법계의 일체중생이 불도를 이루게 해달라는 염원에서 금은니를 사용하여 신역화엄경을 필사했는데, 신장상 등 통일신라의 회화자료와 진원(장성군에 속해 있다), 광주, 남원, 고부(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 관한 연구/이순영/단국대 석사/2007년), 경주 등의 사경사 19인이 참여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엄경 사경이다. 이 자료로 인해 연기조사가 경덕왕대 실존인물이며, 화엄사 역시 이 시기에 창건이든 중창이든 현재의 골격을 갖췄으며, 이 사경이 출토된 석탑이 당대에 만든 것이 아닌가 추정되면서 화엄사 - 석탑 - 경덕왕 - 연기조사가 연결되게 되었다.
<화엄경 사경/같은 도록에서... 이 묵서도 보관만 하다가 일본에서 초청한 전문 기술자의 도움을 받아 공개되었다고...>
<또 화엄경사경에는 사경을 완성하고 봉안할 때의 의식을 비롯해,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과, 역할분담 및 신분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사경을 주도한 이와 종이제작자, 경필사는 4두품, 경심장과 불보살상을 그린 화공은 5두품, 경의 제목을 쓴 이는 최고 귀족신분인 6두품이었고, 맨 왼쪽 마지막에 연기조사의 아버지 길득아식(여기 식(食)자는 손(飡), 찬(餐) 등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모두 ‘밥’이란 뜻이다) 이름까지 명기되어 있다... 참고로 800년대를 넘어서면 사경 및 각종 장인들의 신분은 4두품 이하로 떨어진다...>
두 번째, 화엄사는 화엄경사경 외에도 경주남산 창림사, 칠불암과 더불어 통일신라가 만든 세 석경 중 하나인 <화엄석경>이 출토되어, 화엄십찰 중 최고의 격식을 갖춘 곳으로 확인됐다. 보물1040호로 지정된 화엄사 화엄석경은 정유재란 전후까지 장륙전이라 불렸던 각황전 내부에 감실처럼 화엄석경만으로 이루어진 내진벽체를 만들어, 가로 65cm x 세로 52cm 석경 550~600매를 8매씩 4m 이상 높이로 장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초 장륙삼불이 있었던 장륙전이 전소하고, 다시 1702년 각황전(7x5칸으로 26.72m x 18.24m로 148평 규모다)으로 재건되었지만 화엄석경은 복원되지 못한체 포장상태에서 보관되다가 625 한국전쟁 때 포탄에 맞아 14,000 조각으로 파손된다(이후 동탑 주변에서 380여점을 포함 2,000여 조각이 재수습 되었다).
<각황전 내부 화엄석경 배치추정도/통일신라시대 화엄사에 관한 연구/윤정혜/영남대 석사논문/P31에서... 내부에 5칸x3칸 규모의 감실벽을 화엄석경으로 장엄했을 것으로 윤정혜는 추정하고 있다...>
그러면 이 화엄석경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화엄석경은 화엄사에서 35km 떨어진 조계산이 있는 승주에서 반입한 석재를 가공해, 1매에 28자 x 32행 = 890자 총 49만여자를 서각 했는데(나무경판인 팔만대장경은 1매 644자, 81,258매로 총 5천2백만자로 16년이 소요됐다), 1매 두께를 3cm로 계산해 쌓아올리면 높이만 16.5m를 넘어 안동 법흥사지 전탑에 맞먹고, 석경판 무게만도 15ton에 달하며, 418년 <육십화엄>, 685년 <팔십화엄>, 797년 <사십화엄> 중 <육십화엄>을 구양순체로 필각한 것으로 밝혀져 의상대사 제자들이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때문에 문무왕대 80화엄을 의상이 조성했다는 설이나 887년 화엄결사와 관련해 40화엄이 포함되었다는 설은 타당성이 떨어지고, 부도탑비에 대한 수요가 확산되면서 각자승과 각자장인들이 늘어난 880년대 전후 헌강왕제작 설은 특별한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때문에 석경의 서체와 석경문화가 활성화된 시기를 통해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설의 설득력이 조금 더 높아 보인다.
<앞선 글 창림사편에서 석경에 대해 살펴보아 사진이 중복되지만 다시 올린다... 동국대박물관 소장 화엄석경...>
<화엄석경과 화엄경사경의 필체를 비교하기 위해 부분 사진을 올려보는데... ... 구양순의 해서체라 한다...^^>
화엄석경은 구양순체로 서각 됐는데 이를 당대의 금석문 및 사경서체와 비교하면, 왕희지체로 일통됐던 통일신라 초기를 벗어나 사천왕사비나 문무대왕릉비(682년)에서 구양순체가 보이기 시작하고, 황복사지 삼층석탑 사리함 명문(706년 이전), 석가탑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인쇄본(741년 이전), 연기조사의 신라백지묵서화엄경 사경(755년)에서 구양순 해서체가 본격적으로 사용, 이차돈 순교비인 백률사석당기(818년, 헌덕왕)와 비슷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주장과, 700년대 중후반 창림사의 <법화석경>, 칠불암의 <금강석경> 등이 조성된 시기에 화엄사의 화엄석경도 제작되었다는 주장이 비슷한 시대배경을 근거로 하고 있어 유력하게 보인다. 또한 화엄석경의 규모를 고려하면 여기에 투입된 인력과 기간, 재원은 일개 사찰이나 귀족이 발원하기엔 규모가 너무 크고, 석경이 시대배경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만큼 화엄석경은 법화석경, 금강석경이 만들어진 시대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에 동조하고 싶다.
<이차돈 순교비로 더 많이 알려진 백률사석당기/경주국립박물관에서... 백률사석당기, 창림사비, 화엄석경은 모두 우리나라 4대 명필인 김생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화엄경사경과 화엄석경의 실질적 발원자 및 제작시기를 검토한 이유는 현재 화엄사의 가람배치 완성시점과 사사자 삼층석탑의 조형시점을 찾기 위함이다. 먼저 사리갖춤으로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큰 사경은 화엄사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유물인 사사자 삼층석탑에서 출토됐을 가능성이 큰 만큼 사경 제작시기인 755년이 사사자탑 조형의 상한시점이 될 수 있다. 또 탑원이라 생각할 수 있는 효대가 대웅전 앞마당을 벗어나 각황전의 연속선상에 있는 만큼 사사자탑 건립은 각황전 이후 혹은 동시대에 조성하지 않겠냐는 추정이 성립되는데, 각황전은 화엄석경을 장엄하기 위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늦어도 800년대 초반에는 각황전이 준공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인다.
<화엄석경/동국대박물관에서... 동국대박물관에서는 화엄석경 제작시점을 725년으로 보는 듯 하다... 물론 이 주장이 맞다면 화엄사의 가장 오래된 석조유물은 화엄석경이 되고, 각황전 창건 상한시점도 755년이 아니라 725년이 되는데, 이 주장은 일반적이지 않다고 보여 별도로 소개하지 않았다...>
그러면 전체적인 가람배치에서 각 영역의 조성시점을 직접 추적할 수는 없을까? 나는 앞서 효대로 불리는 탑원과 각황전, 그리고 대웅전 조성시점이 각기 다를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한 몇가지 연구가 있어 소개한다. 김봉렬 교수를 비롯한 대부분 연구자들은 정동에서 15도 정도 남향한 각황전이 가장 먼저 건립되고 이후에 대웅전이 조성됐다고 말하는데, 초기에는 각황전 좌우로 회랑이 있었고 화엄사의 출입동선도 현재의 적묵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로 원통전의 석단이 가장 오래됐고 대부분의 주불전은 주산을 배경으로 조성되는데 대웅전 뒤쪽으로는 원경이 될만한 주봉이 없지만, 각황전은 바로 뒷산인 원사봉에 잘 조응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현재 대웅전 뒤로는 주봉이 없지만, 각황전은 뒤 원사봉에 조응한 축으로 배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몇가지 의문이 있다. 먼저 평지가람에 적용됐던 회랑이 있었다고 보기에 각황전 좌우의 레벨차이가 너무 심하고, 회랑을 철거하고 대웅전으로 개축했다고 보기에 각황전 좌우의 균형이 맞지 않다. 더군다나 회랑이 있었다면 상당한 체계와 격식을 갖췄을테고 현재 각황전 위치는 회랑이 있던 가람에서는 강당에 해당하는 위치로 내부에 탑이나 금당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유구도 없다. 또 하나 700년대 중후반 통일신라의 가람배치에서 주봉이란 개념이 중요했겠냐는 의문이다.
* 주봉 축과 주금당의 축선 비교...
<내가 현재 화엄사 가람배치가 완성된 시점으로 생각하는 700년대 중후반에서 800년대 초중반까지의 몇몇 사찰 사진을 참고로 올려본다... 먼저 762년경 금산사의 대적광전... 주봉이란 개념이 없다...>
<776년경 법주사의 대웅보전... 여기서도 마찬가지...>
<그리고 860년경 보림사 전경... 여기에서도 주봉 축은 주요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보림사 대적광전 축...>
<보림사 대웅보전 축에도 주봉이란 개념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단적으로 불국사는 주산인 토함산을 배경으로 삼지 않았고 대웅전은 주봉이란 개념 자체도 없다. 비단 불국사만이 아니라 700년대 중후반 조성된 금산사 대적광전, 법주사 대웅보전, 800년대 후반기에 들어가는 보림사 대적광전도 주봉을 중심으로 한 축에서 완전히 비켜서 있다. 물론 다불전의 특징을 가진 이들 사찰의 다른 축은 주봉이란 배경을 가지지만 이는 중심성과 선후의 문제를 가름하는 기준이 아니고, 산지구릉형인 부석사, 법수사, 청량사 등은 주봉을 축이나 배경으로 가람을 배치한 예도 있지만, 하나의 불전을 중심축으로 조성된 산지중정형에서 주봉이 사찰의 주요축이나 배경으로 등장한 것은 800년대 중반 이후라고 생각된다.
<부석사 등과 함께 산지구릉형의 대표적 가람배치라 할 수 있는 합천 청량사 전경...>
<배경이 되는 황매산과 석등-석탑-대웅전이 잘 어울린다...>
<그러나 대웅전을 축으로 정면에서 바라보면 주봉축은 차경의 개념이지 중심축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즉 신성시되는 산의 품에 있다는 것과 가람배치의 중심축을 배경이 되는 주산의 주봉우리에 맞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고, 사찰의 주요 안대 역시 교리와 입지 등이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지, 주봉축만을 우선 고려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각황전이 지향하는 방향(김봉렬 교수는 이를 안대라고 표현한다)은, 법주사 용화전(현재 청동미륵불 자리), 보림사 대적광전(삼층쌍탑과 석등), 범어사 대웅전, 실상사 보광전(삼층쌍탑과 석등), 수도암(삼층양탑) 등과 비슷한 동남 30도 방향(700년대 중후반 간월사지(비로자나불과 쌍탑배치)는 북북동향이고, 800년대 조성된 고달사, 범어사는 동향에 가깝다)으로 석굴암의 본존불이 바라보던 방향과 같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보인다.
* 화엄사 각황전 축과 800년 전후 주요 사찰의 중심축 비교...
<파란 실선이 정동방향인데, 먼저 화엄사 각황전의 방향...>
<이 방향은 700년대 후반 조성된 석굴암의 본존불이 바라보는 방향과 비슷하다...>
<그리고 776년 진표율사의 제자들에 의해 조성된 법주사의 초창기 중심축은 현재 금동미륵불이 있는 용화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이 역시 석굴암과 같은 방향이다...>
<구산선문 중 가장 이른 시기인 828년 홍척에 의해 창건된 실상사 역시 비슷한 방향이다... 삼층쌍탑을 기준으로 축을 그려봤다...>
<그리고 앞서 본 870년 경 보림사의 중심축 역시 동일하다... 참고로 모든 사찰의 중심축은 남향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경상도 지방에는 동향이, 구백제지역이라 할 수 있는 충청과 전라도는 지형상 조건 때문인지 동향보다 서향이 더 많다...>
<그리고 통일신라 가람배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900년 전후 김천 수도암에서도 이 방향은 유지된다... 산지구릉형이라 할 수 있는 수도암에서도 확인되듯, 중심축은 꼭 주봉을 기준으로 안대를 설정한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즉 교리와 시대의 유행이라는 게 있었다는 말이다...>
<이에 비해 700년대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간월사지는 북북동 방향이다... 이 사찰의 주불도 비로자나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화엄종의 중심사찰 중 하나로 통일신라시대 창건됐지만 조선시대 가람배치를 보이는 부산 범어사는 동향에 가깝다...>
즉 700년대 후반에서 800년대 초중반까지 유행하던 동남향 30도축에서 교리와의 관련성(석가모니불을 비롯 비로자나불과 미륵불이 많다)이나 시대배경을 추적할 이유는 있지만, 평지형과 산지중정형의 절충인 화엄사의 가람배치에서 주봉을 축으로 각황전과 대웅전의 선후를 따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된다. 또 이를 근거로 각황전을 중심으로 있었던 좌우 회랑을 철저하고 대웅전을 만들었다는 주장도, 가장 오래됐다는 원통전의 낮은 석단은 건축물의 방향을 제시할 뿐 오히려 회랑이 없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어 쉽게 수긍하기 힘들다.
<원통전과 석조 기단부 모습... 원통전의 석단은 각황전 오른편 전각의 방향을 제시할 뿐, 회랑의 유구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회랑이 있었던 감은사, 불국사 등은 주불전인 금당이나 강당까지 회랑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라 더 복잡해진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각황전이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점이 탑원과 대웅전 영역이 후대에 조성됐다는 것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럼 역으로 추적해보자. 조선시대 이전 화엄사가 불교사에서 가장 부각된 시점은 통일신라 말기 견훤의 후백제에서 의천이 등장하기 전까지다. 즉 북악(희랑대사)과 남악(관혜조사)으로 갈려 해인사에서 중재를 했던 시점이 900년대 초반이고, 지방호족들이 선호하던 법상종에 대항하기 위해 고려 왕실이 후원한 화엄종을 일통하려 했던 균여가 900년대 중후반 광종대 승려이며, 1000년대 후반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화엄종과 법상종을 통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화엄사는 화엄석경이 봉안된 절이며, 남원과 무주의 승려들에게 승려의 신분을 보장하는 계(조선시대 구족계처럼)를 내려주던 사찰이다. 즉 800년대 후반 이전부터 불교행정을 감당할 규모와 사찰의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화엄사는 북악과 남악으로 갈등이 표면화 되기 이전부터 충분한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참고로 900년대초 부석사와 화엄사의 갈등을 중재했던 해인사에 희랑대사상이 있다...>
또 현재의 배치를 통해 각종 기물과 건축의 배치를 역추적 해보자, 먼저 화엄사 안마당에는 동탑과 서탑 2기가 있는데, 대웅전과 각황전 안마당을 비롯해 당간지주에 이르기까지 탑원의 사사자탑을 제외한 석조유물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서탑이며, 상하기단부와 일층몸돌의 장식, 상층기단부 갑석의 부연과 괴임, 그리고 각층 지붕돌의 층급받침 등을 고려하면 820~840년대 양식으로, 동탑에 비해 30~60년 정도 이전에 만들진 것으로 보인다. 또 사경이 완성된 755년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한창 조형하고 있었던만큼 정연하고 체계적인 이상적 질서를 구현하던 시대로 현재의 화엄사 앞마당처럼 정면성을 해치는 구성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규모가 작은 서탑을 먼저 만들고 서탑에 맞춰 각황전이 자리를 잡았다고 보기는 더 힘들다. 결국 서탑 조형시점이 각황전 건립의 하한시점이 된다는 말인데, 각황전은 늦어도 830년대 이전에는 만들어졌어야 맞다는 게 내 생각이다.
<830년 전후에 조형된 것으로 보이는 화엄사 서오층석탑의 기단부와 일층몸돌...>
<화엄사 서탑에 비해 상하층기단부에 각각 탱주가 2개 있고, 5단의 층급받침과 상하층기단부 괴임이 충실하게 조형된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을 백제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세워진 통일신라계 석탑으로 나는 보고 있다...>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133호/높이 6.4m다...>
이렇게보면 각황전이든 탑원이든 화엄사의 주요 전각들이 배치된 시점의 상한선은 사경이 제작된 755년이 되고, 서탑이 조형된 830년 정도가 하한선이 된다. 이제 남는 것은 각각의 정확한 건립시점의 설정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데 내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애초부터 탑원과 각황전, 대웅전 영역을 분리 700년대 후반에서 800년대 초반까지 일정한 시차를 두고 긴 시간동안 완공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왜냐하면 사경을 제작하는데만 6개월 이상 소요됐는데, 창림사의 법화석경이나 칠불암의 금강석경에 비해 규모가 크고 5칸x3칸 건물의 벽을 꽉 채운 550~600매의 화엄석경을 제작하려면 훨씬 긴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당대의 불국사가 3~40년이 걸린만큼 화엄사 공사기간도 오래 걸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창림사의 법화석경은 총 23점으로 화엄석경과 규모에서 비교되지가 않는다... 동국대박물관 도록에서...>
또 석경 장엄이란 불교문화가 지속적으로 부흥하지 않은데는 제작기간과 기술인력과 비용 등 경제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런 이유로 한시대에 잠깐 동안 유행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법화석경이나 금강석경과 많은 시차를 두지 않았을 것이고, 화엄석경의 규모를 보건데 경덕왕이나 원성왕-흥덕왕의 후원 시기를 놓쳤다면 후대를 기약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크다. 실제 840년대부터 무너질 것을 우려한 황룡사구층목탑을 876년에야 중수하고 사리함을 재봉안하기까지 30여년 이상이 걸린 점을 감안한다면 800년대 중반에 각황전과 화엄석경이 제작했다고 보기는 더 힘들다. 때문에 구양순체로 제작된 서당화상비(800~808년) 등을 고려하면 800년대 전후에 화엄석경과 각황전이 완성됐는데, 화엄석경의 제작기간과 소요예산, 제작기술의 습득과 각자공(장인) 양성이란 측면까지 고려하면 이의 제작에만 팔만대장경만큼의 기간이 필요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화엄사 화엄석경에 대해서는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절속 전 내벽에 흙을 바르지 않은 청벽에 화엄경이 새겨져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고 문자가 완몰되어 읽을 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을 종합하면 755년에서 800년 전후에 화엄사는 완공되었는데, 각황전앞 서쪽 석축과 대웅전앞 북쪽 석축이 서로 연결되지 않아 동시대에 한꺼번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서탑 등 후대의 기물이 추가되기 이전부터 화엄사는 대웅전 영역과 화엄석경을 봉안할 각황전, 그리고 탑원이 각각 단계적으로 조성됐고, 화엄석경 등의 제작기간을 고려하면 대웅전보다 각황전이 더 늦게 조성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높은 부지의 서쪽 석축이 보다 낮은 곳의 북쪽 석축보다 늦게 조성됐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맞지 않고, 각황전이 만들어진 이후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에 내부에 감실을 추가로 만들어 화엄석경을 장엄했을 수도 있지만, 대웅전보다 각황전이 무조건 먼저 만들어졌다는 근거는 안 된다고 생각된다.
<1630년대 화엄사를 중창하면서 대웅전이 각황전보다 70여년 먼저 중건한 것은 파손된 화엄석경으로 인한 각황전의 기능과 규모에 대한 고심도 있었겠지만, 대웅전이 각황전보다 중심전각이었기 때문임도 주요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또 가람배치에서 중요한 것은 각황전의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자리잡은 탑원은 대웅전 영역(각황전의 오른쪽)과의 심리적 무게중심과 공간적 균형을 맞추기 위해 처음부터 그 곳(각황전의 왼쪽)을 겨냥해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사자탑의 양식을 고려하면 3영역 중 제일 마지막인 800년대 초반에 탑원이 완성됐을 거 같다. 아무튼 이 모든 생각들은 상상에 공상을 더한 허상일지도 모르지만, 화엄사의 사경과 화엄석경, 그리고 사사자탑이란 독보적인 유물들이 있어 화엄사는 많은 설화를 가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성덕왕에서 경덕왕, 혜공광에 이어지는 왕실의 원찰 불국사가 김대성의 효심으로 각색되듯, 상당기간이 소요된 화엄사도 경덕왕, 원성왕 또는 흥덕왕의 원찰이 연기조상의 효심으로 각색된 것도 일반 백성들과의 친근성을 확보하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이었을 수도 있고, 사사자탑이 제일 늦게 조형됐기 때문에 특히 더 강조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화엄사의 3영역 중 가장 늦은 시기에 효대로 불리는 탑원을 조성하고, 사사자탑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 탑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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