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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65> 화엄사 (5) - 국보35호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이형석탑의 완성 ... 1312

 

 

 

 

 

 

   7)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 경전에 근거한 이형석탑의 완성

      (5) 사사자 삼층석탑의 조형적 특징과 편년

 

 

 

지금까지 우리는 화엄사의 가람배치와 더불어 사사자탑이 조형된 시점을 추적하기 위해 화엄사에서 출토된 다양한 유물과 사료들을 검토해왔다. 이를 정리하면 1630년대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을 맡고 있던 벽암선사의 지휘아래 중창했는데, 사사자탑이 도괴되지 않았던만큼 대웅전 영역을 먼저 중건하고, 이미 파훼된 화엄석경이 봉안된 각황전의 규모를 놓고 고심하다가 70여년 후에 중건한 것으로 보이고, 이때 각 건축물의 축을 안으로 들이고 밖으로 미는 등 건축적 조율을 통해 현재 화엄사 안마당의 주요전각들이 균형을 이루고 시각적 균제를 이루었다. 즉 800년대 중반부터 900년대 초반까지 오층석탑과 석등 등이 추가됐지만 755년부터 800년대 초반에 화엄석경이 봉안된 각황전을 비롯한 현재의 석축과 계단 등 주요골격은 이미 완성됐고, 현재의 공간적 완성도를 갖춘데는 벽암선사라는 걸출한 인물의 깊은 안목에 힘입은 바 크다는 말이다.

 

<화엄사 가람배치 입면도/앞 신용철 논문에서... 화엄사는 처음부터 별도의 탑원을 두어 공간적 연속성은 완전히 분리되지만, 초기 안마당에는 석탑을 두지 않고 관념적 위계로 완성했다... 탑이 금당보다 높은 곳에 자리한 예는 고선사지, 나원리, 황복사지, 창림사지 등 초기 가람배치에서 즐겨 사용했던 방식이다...>

 

<현재 화엄사 안마당을 감싸는 전각들은 각황전과 대웅전만 석축과 평행하게 배치하고, 여타의 건물들은 보제루 맨 왼편 - 사람들이 안마당에 들어서는 지점을 기준으로 시계반대 방향으로 동서남북의 각 전각들을 안쪽으로 들여, 대웅전과 각황전으로 시선을 향하게 만들면서 시선이 분산되는 걸 막았다(실제 대부분 사람들은 대웅전 뒤에 상전영역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각황전 오른쪽 건물들과 달리 영산전이 보제루와 직교하는 방향으로 배치되었음에도 불균형을 느끼지 못한다)... 착시를 보정하기 위해 미켈란젤로가 카피톨리노 광장의 코르노나타 계단 끝 - 맨 위쪽을 넓혔다면, 벽암대사는 건물 배치축을 4방향에서 바람개비처럼 틀어 시선과 동선을 일치시키면서 착시를 보정했다는 말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고건축이 지향했던 자연스러움은 심리적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하학적 질서를 의도적으로 비틀줄 아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 이렇게 화엄사의 가람배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물론 이런 내용은 훼손되지 않은 탑원의 현재 배치는 800년을 전후한 시점(780~828년)에 사사자탑이 조형되면서부터 유지됐고 사사자탑의 제작기법 및 양식이 이 시기와 맞아 떨어진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사실 통일신라의 이형석탑을 대표하면서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볼 수 없었던 사사자탑은 그 조형시점 뿐만 아니라 형태의 독창성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나 역시 700년대 후반, 다보탑에서 시작된 다양한 이형석탑에 대한 실험은, 지붕돌에 변화를 주면서 감실을 재도입한 낙산동탑, 초기 석탑의 특징인 목탑의 번안과 석탑의 모형화를 촉진시킨 정혜사탑, 그리고 층수를 다양화한 탑평리탑 등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삼층석탑의 완결성에 화엄종 교리를 접목시킨 사사자탑에서 완결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화엄사 사사자탑은 세련된 비례와 양식적 완성도보다 교리의 구현에서 더 높은 독창성을 보이고 있다...>

<연등으로 제작된 사사자탑... 내부 인물상이 석탑을 직접 지지하지 않은 구조이기 때문에, 사사자 좌대만으로 의지하기 위해 갑석은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시각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경사면으로 가공했고... 그러나 현재의 비례는 조형의 독창성만큼 상큼한 눈맛을 주는 조화는 아니다...>

 

 

 

 

왜냐하면 800년대 이후 통일신라 석탑들은 다시 축소된 규모와 약화된 기법의 삼층석탑으로 귀결되는데, 이는 석탑의 발원자가 왕실에서 귀족이나 지방 군벌로 위축되면서 규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었고, 석탑을 조형한 장인들이 관소속에서 풀려나 승려들로 대체되면서 질적 완성도가 떨어지고, 진신사리의 보급이 한정되면서 불보살상과 불경, 다라니경등으로 대체되는 등 석탑의 신성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찾아낸 가장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선택의 결과라 생각한다. 이 과정에는 전통적 방식인 부석사탑/법수사지탑과, 안상과 장식적 요소를 가미한 기성동탑/무장사지탑/범학리탑 등의 조형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삼층석탑 조형이란 본궤도로 어렵지 않게 귀착될 수 있었고, 그중 사사자탑이나 죽장동탑, 빙산사지탑 등은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던 800년대 초반 왕실이 주도했던 마지막 이형석탑으로 대미를 장식했다고 판단된다. 

 

<사사자탑은 통일신라의 전통양식인 삼층석탑에 독창적인 사사자 기단부의 조합으로 이해할 수 있다... 5.5m>

<그리고 교리적으로 이를 완성시키는 것은 공양상 석등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럼 사사자탑의 조형시점과 조성 형태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현재 효대의 입지를 보면 사사자탑이 먼저 만들어지고 석등과 배례석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 아니라, 탑원이란 독립적 영역의 체계적 구성을 위해 처음부터 석탑과 동시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또 일제강점기 조선고적보와 현재의 금강산 금장암지 석등 사진 비교를 통해 추측할 수 있듯이 공양석등상의 상륜부가 쉽게 파괴될 수밖에 없는 구조여서, 지금의 화엄사 석등은 한차례 이상 도괴 후 화사석을 교체하고 삼각 방향의 지지대를 추가(자재의 질도 틀리고 치석수법이 공양상에 비해 훨씬 떨어진다)했지만, 공양상은 초기의 모습이 분명해 석탑과 석등은 동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할 거 같다. 석탑과 석등의 동시대 제작이란 추정은 사사자탑의 조형성을 이해하는 출발점이기에 먼저 확인하는 것이다.

 

<금강산 금장암지 석등/석등/홍선/눌와 2011년간/P229에서... 사진과 입면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공양상 석등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했던 거 같다. 최근엔 상부 화사석까지 완전히 붕괴된 사진이 공개된 바 있다... 화엄사 석등의 연화하대석을 파내면서까지 별도의 지지대를 추가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지금까지 사사자탑 조형시점에 대한 시각은 크게 두방향이었다. 하나는 사경을 제작하고 이를 봉안하기 위해 755년경 경덕왕대 건립했다는 주장과 석탑형태에 대한 교리적 이해와 세부 가공기법에 주목해 800년대 이후 조성됐다는 반론이 그것인데, 화엄경사경 및 화엄석경과의 관련성 등 시대배경 외에 뚜렷한 설명을 못하는 전자에 대해 후자의 반론이 만만치 않다. 먼저 사경이나 화엄석경이 장엄된 각황전(장륙전)과 동시대에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전자의 입장에서는, 사사자탑이 자리한 곳을 ‘효대(孝臺)’라고 부르고 부모님의 은혜를 위한다는 연기조사의 설화를 근거로, 사사자탑과 석등을 연기조사의 어머니(사사자탑 상층기단부의 인물상)에게 찻잔을 들고 공양하는 연기조사(석등)의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석등 공양상과 석탑의 인물상...>  

<음식, 향 등 다양한 추정을 할 수 있지만, 나는 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후자의 입장에서는, 부모님에 대한 효사상이 불교에 유입된 것은 오래됐지만 실제 이를 교리로까지 체계화시킨 것은 고려시대 이후이며, <부모은중경>이란 경전이 유입돼 실제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유행한 것은 15세기(현존 최고본은 1378년 제작된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이다)이후 16세기(1553년 언해본이 발간된다)부터였다는 점을 고려해 ‘효대’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고착된 것이라고 반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대각국사 의천이 연기조사를 찬한 것 외에 <류제지리산화엄사>에서 ‘효대’라는 명칭을 이미 사용한 만큼, 부모은중경이 유행하기 이전인 1000년대 중후반에도 효대라 불렸을 것으로 생각돼 이것만으로 편년을 설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는 거 같고, 오히려 우리들이 중요하게 체크할 사항은 사사자탑 내부의 인물상이 부처가 아닌 여성상이라는 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留題智異山華嚴寺 류제지리산화엄사>

적멸당 앞에는 승경도 많은데

실상봉 위에는 가는 티끌조차 끊겼네

하루종일 배회하며 지난일들을 생각하니

저무는 날 슬픈바람은 효대에 감도네

<통일신라 석탑 연구/신용철/동국대 박사논문/2006년/P190에서...>

<화성 용주사의 부모은중경 탑비... 용주사는 사도세자(장헌세자)를 추복하기 위한 정조의 원찰이었고, 용주사에는 ‘불설부모은경판’이 있다... 뒤에 보이는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갈양사 때 조형된 칠층석탑의 현재 모습이다...> 

 

 

 

 

두 번째, 후자의 입장에서 사사자탑의 양식과 형태를 이해하기 위해 탑신을 떠받치는 사사자가 각각 앙련과 복련을 동시에 갖춘 연화장좌대 위에 있다는 점을 중시하여 비로자나불 신앙으로 연결시킨 연구가 있는데, 연화장좌대는 하대석-중대석(혹은 간주석)-상대석을 갖춘 석불좌상과 석등, 800년대 중반 이후 승탑에서만 보이던 양식으로 석불입상이나 사자상 등에서 이를 사용한 경우가 드물다는 점에서 착안한 듯하다. 실제 중대석없이 하대석만으로 연화장좌대를 적용한 예를 찾아보면, 감산사(719년) 석조여래와 미륵보살상 및 다보탑 사자상(760년대), 실상사 백장암과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에만 있는 양식으로, 법주사(780년대)와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이나 분황사탑 및 관덕리 삼층석탑의 사자상과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보인다.

 

 

<연화장을 갖춘 사자의 좌대... 이런 격식을 차린 좌대는 흔하지 않다...>

 

 

 

 * 연화장 좌대를 갖춘 석불과 석등

   - 석탑과 사자상, 그리고 좌대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꾸릴 수 있겠다 싶어 여기에서 몇가지를 더 살펴본다...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의 연화장좌대/국립중앙박물관에서... 중대석이나 간주석이 없는 연화장좌대의 시원일 거 같다...>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연화장좌대/국립중앙박물관에서...>

<중흥산성 쌍사자석등의 연화장좌대/국립광주박물관에서... 그럼 사자좌는 모두 연화장을 갖췄을까?... >

<법주사 쌍사자석등의 좌대... 같은 쌍사자 석등이고 중흥산성 석등보다 훨씬 앞선 70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지만 여기서는 연화장 좌대를 갖추지 않았다...>

<양평 상원사 사자석등... 사자상하면 꼭 떠올라 주제와 무관하지만 같이 소개한다... 고려나 조선 이후 것으로 보이는 화사석의 지붕돌은 제짝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이 사자상만큼은 절정기 통일신라 수법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실상사 백장암 석등의 연화장좌대... 팔각간주석 양식의 석등으로서는 특이하게 연화장 좌대를 갖췄다...>

 

 

* 사사좌를 갖춘 석불좌상

  - 사자좌대를 갖춘 경우는 그림이든 조형물이든 우리나라에서는 극히 드물다...

 

<신라백지묵서화엄경사경(755년) 변상도에 그려진 비로자나의 사자좌대/오른쪽... 화엄사 사사자탑에 봉안되었을지 모르는 이 사경을 보면, 사사자탑은 당초부터 사자좌를 기획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밀양 천왕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700년대 후반)의 사사좌대... 위 화엄경사경처럼 사자좌를 그린 예도 드물지만, 우리나라에서 사사좌대를 갖춘 불상은 천왕사가 유일하다...>

<근데 아쉬운 건 사자가 앞을 보는 게 아니라, 불상을 향하고 있다는 점... 문상 갔을 때 국화꽃은 영정이나 위패를 향하는 게 맞을까? 빈객을 향하게 놓는 게 맞을까?>

 

 

* 석불과 승탑의 좌대

   - 우리에게 익숙한 석불과 승탑, 석등은 대부분 연화장을 갖추고 있다... 중대석이나 간주석을 제외하고 보면 말이다... 

 

<홍천 물걸리절터 석불좌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석불과 석등, 승탑에서 중대석이나 간주석을 빼면 그것이 연화장좌대가 된다...>

<그러나 승탑의 가장 초기 형태인 염거화상탑(844년) 하대석은 연화석이 아니다... 사자상이 새겨졌는지도 모르겠다...>

<원주 석불좌상의 좌대/국립춘천박물관에서... 그리고 연화하대석 밑 지대석에 안상을 새기고 사자상을 양각한 경우도 많았다... 물론 그 시원적 형태는 장항리사지 석불입상 좌대일 거 같다...>

<망해사지 승탑... 800년대 중반에 이르면 중대석 괴임을 비롯해 연꽃잎 끝부분에 귀꽃이 등장하는 등 훨씬 장식적인 모습으로 변한다...>

 

 

* 석탑의 사자상

   - 그러면 사자상과 관련이 있는 석탑들은 어떤 게 더 있을까?

 

<다보탑 사자상은 사자상 중 유일하게 연화장 좌대를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분황사탑의 사자상은 연화장 혹은 연화하대석을 갖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각형 좌대로 만들어져 있다... 이는 왕릉에서 사용했던 좌대와 동일한 양식으로 나는 이 통일신라에서 가장 잘 생긴 사자상이 헌덕왕릉에 있었던 것으로 본다... 참고로 국립경주박물관에 팔각형 좌대를 갖춘 사자상이 발굴되었는데, 이게 본래 분황사탑에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 사자상은 암좌를 갖추고 있다... 암좌는 분황사탑 인왕상을 시원으로 간월사지탑 인왕상, 화엄사 사사자탑 일층몸돌의 부조상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됐다...>

<그리고 석탑에 사자상이 들어간 마지막 형태가 충주 원평리 삼층석탑이 아닐까 싶어 환조상은 아니지만 소개한다... 기단부(사진 오른쪽)에는 향로가 일층몸돌 사면에는 사자로 보이는 동물상이 새겨진 유일한 예인듯 싶다...>

 

 

 

 

연구자인 신용철은 연화장좌대 위에 있는 사사좌대는 <화엄경>의 <입법계품>에 입각해 사자빈신삼매에 든 비로자나불 신앙을 구현한 것으로, 석등의 공양상은 보살, 비구, 비구니, 동자, 동녀, 천녀, 바라문, 뱃사공, 국왕, 왕비, 지신(地神), 수신(樹神) 등 53선지식을 만나면서 각종 법문을 듣고 마지막에 보현보살을 만나 무생법계에 증입하는 선재동자를 표현한 것이고(통일신라 석탑 연구/신용철/P195~196), 사사자탑의 인물상은 선재동자가 만난 53명 중 25번째 만난 사자빈신 비구니를 구현했으며, 사사자탑의 상륜부는 일체의 광명을 표현하는 보주(화엄사의 세 석탑 상륜부는 보주양식으로 마감된 공통점이 있다)로 탑신은 비로자나불을 상징하는 법신이라고 주장한다.

 

<사자는 연화장좌대에 앉아 있지만, 내부 인물상은 연화하대석 위에 서 있다... 위계상으로 사자가 더 높은 거 아닌가?^^ ...>

 

 

 

 

또 사사자탑 내부의 인물상이 여성상임을 근거로 석등과 석탑의 인물상을 연기조사와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화엄사 사사자탑과 동일한 사사자 기단 양식을 갖춘 제천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1022년)의 내부 인물상(두건을 썼다)과, 공양상 석등이 함께 남아있는 금강산의 금당암지 사사자탑 인물상도 여성상이라는 점을 종합하면, 사사자 좌대와 내부에 인물상이 남아있는 세 석탑이 모두 여성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앞서 확인한 것처럼 연기조사가 조성한 <신라백지묵서화엄경사경>에서 아버지의 은혜를 언급했지 부모님이나 어머니를 특칭하지 않았다(말미에 아버지의 이름까지 명기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사자탑 내부의 인물상은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아니라 ‘사자빈신 비구니’상이며 공양상 역시 ‘선재동자’로 보는 것이 일관성이 있다.

 

<제천 월악산 사자빈신사지 사사자석탑...>

<석탑 내부의 인물상은 화엄사의 입상과 달리 좌상이지만 여성상이다... 여기에도 공양상 석등이 있었을까?...>

<내부 좌상은 두건을 쓰고 있다... 후면의 매듭... 화엄사 사사자탑처럼 내부 인물상은 석탑을 직접 지지하지 않는다...>

<이 사사자탑의 사자들도 아흠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귀엽지?^^>

<금강산 금당암지 사사자석탑 및 공양석등/석등 같은 책에서... 자료를 한 곳에 모아 본다는 의미로 사진으로나마 소개한다...>

 

 

 

 

그렇게보면 사사자좌대와 사자빈신 비구니를 갖춘 화엄사와 금강산 금장암지, 사찰 이름부터 사자빈신사인 월악산 사사자탑을 비롯해, 내부 인물상을 망실한 함안 주리사지, 홍천 괘석리 사사자탑의 탑신은, 모든 보살과 대중들을 삼매에 머물게 하기 위해 광명을 발하며 마지막 사자빈신 삼매경에 든 비로자나불이 연화장사사좌에 앉은 법신의 모습으로 완성된다(신용철/즉 내부 인물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탑신 자체가 법신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교리적 측면에서는 최고의 완성도를 갖춘 화엄경이고 이를 근거로 화엄종이 크게 성행했지만, 화엄경에서 중시한 연화장세계 신앙은 미륵정토신앙이나 도솔천왕생설에 비해 민간에서는 크게 전승되지 않았다고 한다. 연화장세계가 법계 연기설이란 고난이도의 체계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NAVER)는 주장이 내게는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린다.

 

<홍천 괘석리 사사자탑... 사사자탑 중 완성도에서는 가장 떨어지지만, 고려시대까지 이 양식은 전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리산-금강산-월악산-함안... 화엄종 교리에 입각했겠지만, 모두 낙동강 바깥에 있었다...^^>

<현재는 사사자만 보이지만, 내부를 보면 원형의 괴임이 있어 여기에도 인물상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 번째, 사사자탑의 가공기법과 세부양식을 통해 석탑의 제작시점을 검토하여 755년 화엄경사경과 동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렵다는 후자 입장에서, 하층기단부 지대석에 있는 3단의 각호각 괴임, 하층기단부 안상과 공양상들의 표대 양식, 그리고 사사자의 다리가 일자로 뻗어 경직되어 있고 목걸이 장식의 문양과 사사자 위에 탑신을 받치고 있는 상층기단부 갑석의 경사와 괴임형태 및 일층몸돌의 문비와 각층 지붕돌 등의 양식은 750년대 석가탑 전후의 석탑들과 친연성이 떨어지거나 퇴화 및 장식화 된 800년 전후부터 등장하는 양식이기 때문에 경덕왕대에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렵고, 결국 700년대 후반 ~ 800년대에 만들어졌을 수밖에 없다는 반론 등이 그것이다.

 

<사사자탑이 750년대 만들어졌다고 보기에는 당대의 석탑과 양식적이나 치석수법에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상 세가지를 종합하면 화엄사 사사자탑은 연기조사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고, 효대와 연기조사의 어머니라는 주장은 후대에 각색된 설화라는 점과, 사자빈신삼매경과 연결된 비로자나불 사상 즉 화엄경과 연결됨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 사사자탑의 세부 치석수법과 양식은 700년대 중후반보다 800년대 초반으로 느껴져 이런 후자의 주장에 더 무게를 두게 한다. 실제 내가 700년대 전성기 석탑과 780년 이후 과도기 및 800년대 초반 이후의 석탑에서 느끼는 가장 큰 차이점은 치석수법이다. 단적으로 청도의 봉기동탑이나 미탄사탑의 층급받침이나 일층몸돌 괴임에서 느끼는 원시성에 가까운 강렬한 기운은 780년대 이후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매우 주관적인 시각일지 모르지만, 석탑이라는 조각과 공예에서 강직하면서 정연한 기운을 주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한눈에 비교가 되는데, 화엄사의 사사자탑에는 그런 기운이 없다.

 

<봉기동탑을 비롯 전성기 석탑들은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물을 직접 보는 것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규모 외에는 사진으로 보는 거나 실물을 직접 보는 거나 큰 차이가 없는 부석사 삼층석탑이나 화엄사 사사자탑 등부터 800년대 이후 석탑들이 주는 느낌과 전혀 다르다는 말인데, 700년대 전성기 석탑들은 가까이서 세부 디테일을 보면 꿈틀거리는듯 매우 강렬한 생동감을 느낀다... 나는 그렇다는 말이다...^^>

<잔다듬이지만 일견 거칠게도 보이는 표면 가공은 원시적이면서 매우 강인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괴임과 층급받침이...>

<그리고 기단부 등의 정연함은 한치 흐트러짐 없는 엄정함을 주고...>

<또 기단부 갑석의 부연과 마구리면의 비례를 보면 화엄사 사사자탑과 동질성을 느끼기 힘든데, 이때까지 갑석의 마구리면은 돌출된 부분과 부연이 거의 1:1의 비례로 나뉘어 있다(화엄사는 3:1의 비례다)... 봉기동탑과 사사자탑은 최소 5~60년의 시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사사자탑의 세부 결구방식이나 디테일에 대한 몇가지를 검토해본다. 먼저 사사자탑은 지대석 위에 하층기단부가 건축적인 일체식 결구방식이 아니라, 석탑의 압축력에 의해 기단부 면석들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출된 상태에서 측면을 보강한 구성으로 기존처럼 지대석이 매립된 방식과 다르다. 또 공양, 비천, 주악상 등 다양한 조각으로 장엄된 하층기단부에는 탱주가 없이 안상만으로 탱주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어 기성동탑이나 무장사지탑 기단부와 같은 양식이고, 이 기단부의 갑석은 700년대 중반까지의 전성기 석탑이 아닌 부연이 매우 퇴화 약화되어 있어 80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비례를 보이고 있다.

 

 

<사사자탑 기단부 배치도/통일신라시대 화엄사에 관한 연구/윤정혜/영남대 석사/2005년/P40에서...>

<기단부 동측 정면... 조각상들이 매우 활달하다...>

<기단부 북측 후면... 괴임과 부연, 그리고 탱주가 없는 구조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기단부 남측 왼쪽... 700년대까지 대부분 석탑의 지대석은 땅속에 매립되어 있다. 하지만 사사자탑의 지대석은 외부로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두껍고 육중한 장석으로 가공되었는데, 석탑의 하중으로 기단부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구조적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즉 지대석 위에 건축적 결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기단부 북측 오른쪽...>

 

<그리고 내부 인물상은 사사자와 달리 상부 갑석에 직접 닿지 않아, 석탑의 상부구조를 떠받치지 않은 독립적 구조다... 때문에 갑석은 두꺼워질 수밖에 없었고, 마구리면의 둔중함을 상쇄하기 위해 갑석을 경사형으로 다듬은 거 같다... 800년대 석탑의 갑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이다...>

<물론 우리들이 사사자탑을 보면서 이런 구조적인 면까지 확인하지는 않는다... 이 사자의 미소를 보면 족하니까...^^>

 

 

 

 

그리고 사사자좌대의 상층기단부 갑석은 급한 경사면으로 가공되어 탑신의 하중을 받치고 있지만, 탑평리탑의 기단부 갑석에서부터 보이는 경사보다 매우 심한 경우로 구조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 이후 조성되는 경사식 마감의 기단부 갑석에 시원이 된다고 생각한다. 또 여기에 모각된 2단의 괴임이나 각층 지붕돌의 층급받침, 그리고 급하게 체감된 몸돌과 노반의 비례는 700년대 전성기 석탑과 차이를 보이지만, 5단의 층급받침을 유지하는 등 800년대 중후반에 조형했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동의되지 않고, 8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이라는 생각이 더 확고해진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앙련과 복련을 동시에 갖춘 연화장좌대에 앉은 사자들보다 복련만 조형된 연화좌대에 서있는 인물상은 탑신보다 낮은 서열을 보이고 있어, 탑신이 인물상보다 중시되었다는 점에서 비로자나불의 법신으로 조형됐을 것이라는 신용철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일층몸돌에는 다양한 부조상이 배치되어 있고,  하부를 액연이 없는 신방석으로 마무리한 문비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완전히 별개로 구성했다... 이것도 석탑 편년에 주요한 지표가 된다...>

<사사자탑 일층몸돌 부조상 배치도/위 윤정혜 논문/43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금강역사상/위 윤정혜 논문 P42에서... 이것도 자료를 한 곳에 모아본다는 의미로 같이 소개한다...>

 

 

 

 

 

경덕왕 사후 원성왕과 흥덕왕은 재차 왕권중심의 전제정치를 실현하고자 애를 쓰지만 이들의 시도는 무위로 끝나게 되고, 다보탑 이후 문화와 신앙에서 독자적 자신감에 충만했던 통일신라는 다양한 형태의 이형석탑을 조형하면서 다양성을 확대해나가지만 사사자탑에 이르러 다시 삼층석탑 양식으로 귀결되고 만다. 다만 통일신라 이전 구 신라 영역에서 조형된 낙산동탑/정혜사지탑/죽장동탑/빙산사지탑 등과 달리, 탑평리탑과 사사자탑이 조형된 충주나 지리산 일대의 무주(광주)와 남원 일대 등 구백제와 구고구려 지방에서는 지역색이 강조된 독자적인 문화를 열게 된다. 즉 이들은 800년대 이후부터 경주와 다른 문화와 신앙을 갈구했고(구산선문의 등장과 화엄종에 대응한 법상종의 부흥), 탑평리탑과 화엄사의 사사자탑은 이를 열어가는 신호탄이 된 것으로 보인다. 800년대 중반 이후 통일신라의 석조예술의 무게중심은 경상북도와 전라남도 지방으로 분산되는 계기가 됐다는 말이다. 

 

<8~9세기 석조유물 도별 통계/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에 관한 연구/이순영/단국대 석사/2007년/P60에서... 사실 이 표는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을 소개하면서 사용하려했는데, 그럴 겨를이 없어 화엄사편에서 같이 올린다... 박경식선생의 논문에서 재인용한 이 도표를 보면, 700년대까지 구신라지역이라 할 수 있는 경상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지역에는 석조유물이 하나도 조성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어, 경주와 통일신라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800년대 들어오면 석탑을 비롯해 승탑과 탑비, 석등 등에서 전라남도 지방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데, 이는 선종의 확산과 직결될 수 있는 지표가 되고, 전라북도 지역도 남원과 임실 등 지리산에서 멀리 않은 남원경까지를 한계로 두고 있어, 전라북도와 충청도는 금산사와 법주사 등이 주도한 법상종의 미륵신앙이 훨씬 중시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 주관이 많이 작용할 수밖에 없지만, 사실 사사자탑은 통일신라 석탑의 생동감이나 정연함, 혹은 절제된 엄정함을 느끼기에는 거리가 있다고 보인다... 다만 그 형태의 독창성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난다고 생각하며, 특히 안마당의 공간경영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겠다 싶어 그 부분에 집중했다... 참고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