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2) - 호국적 비보풍수 석탑의 등장
<신라와 통일신라시대 풍수비보의 목적으로 건립된 몇기의 탑을 찾을 수 있다... 그중 634년 분황사탑이 경주북천의 범람을 제어하기 위한 치수목적이 컸다면, 645년 황룡사 구층목탑은 대외적 역량과시를 위한 비보의 목적이었고, 700년대 후반의 탑평리탑은 각 소경의 지방 분권화를 제어하기 위한 대내적 왕실의 위엄과시용 목적이 컸다고 생각한다...>
(3) 탑평리 칠층석탑의 세부비례와 체감 검토
이제 탑평리탑의 세부비례와 체감에 대해 몇가지를 더 알아보자. 통일신라의 유일한 칠층석탑으로서 탑평리탑을 다른 석탑들과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삼층석탑에서 확인되는 기본적인 체감과 오층석탑들과 미감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먼저 탑평리탑의 지붕돌과 몸돌의 폭 비례를 확인해보면 상당히 도식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지붕돌과 몸돌 폭의 비례를 감은사탑부터 확인해보면, 1층 1:1.65, 2층 1:1.89, 3층 1:2.15로 변화했고, 석가탑은 1층 1:1.66, 2층 1:1.78, 3층 1:1.78로 변화의 폭이 줄어들다가 경주 남산 남산동서탑에 이르면 1~3층의 비례가 1:1.79로 균일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초기에는 삼층몸돌을 줄이되 지붕돌의 비례를 유지하여 석탑의 중량감과 긴장감을 함께 구현했다면, 석가탑에 이르러서는 각층의 비례 차이를 줄여 상승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하다가 800년 전후 조형된 남산동탑에서는 완전히 도식적인 비례를 적용하여 안정감과 상승감은 살렸지만 중량감과 긴장감이 떨어지는 비례를 선호했다는 말이 된다.
<탑평리탑의 기단부를 제외하고 탑신만 본다면 나원리탑보다 더 둔하게 보인다... 그만큼 지붕돌이 얇고 몸돌이 넓으며, 지붕돌의 처마가 깊지 않다는 말이다...>
<부분적으로 탑신을 잘라봐도 감은사탑과 탑평리탑의 비례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감은사탑(↑)과 탑평리탑(↓)의 비교...>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선지 시대 흐름에 따른 퇴화일지 모르지만, 각층 몸돌의 우주는 빈약하리만치 얇고 가늘어졌다...>
이에 반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탑평리탑의 1층몸돌 폭이 2.3m, 2층몸돌 폭은 2.03m인데 반해 1층 지붕돌은 3.45m, 2층 지붕돌은 3.1m, 3층은 2.84m로 대략 30cm씩 줄어 7층에 이르면 1.6m가 되는데, 1~2층의 몸돌과 지붕돌 폭의 비례는 1:1.5로 균일하다. 같은 비례를 장항리탑에서 찾아보면 1층이 1:2로 시작하여 대략 1:1.67~1:1.9로 줄어들고, 나원리탑은 1층 1:1.46에서 출발해 1:1.54~:1.74로 지붕돌 폭이 줄어드는 것보다 몸돌 폭이 줄어드는 비례가 더 크며, 백제의 왕궁리탑은 1층 1:1.78로 시작해 1:1.83~1:2.12로 상부로 갈수록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넓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탑평리탑의 비례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으로 지붕돌의 체감은 유지하면서 몸돌만 급격히 줄여나가는 방식에서 두가지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탑평리탑의 몸돌과 지붕돌의 체감은 너무 기계적이라고 생각될만큼 도식적이어서 리듬감이 전혀 없다...>
하나는 백제계와 통일신라 초기 석탑이 장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경쾌한 리듬감과 장중함이 함께 살아나는 것은 지붕돌과 몸돌의 축소비율을 달리 조정했기 때문이지만, 정형화된 이후 통일신라 석탑은 비슷한 규모와 층수에도 불구하고 지붕돌 처마의 깊이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조형했기 때문에 안정감과 상승감이 더 돋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넓으면 리듬감과 함께 긴장감이 살아나지만 지붕돌과 몸돌 폭을 같은 비례로 줄여나가면 리듬감이 떨어질뿐만 아니라 매우 도식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800년대 이후 석탑들의 공통점이다). 한편으로는 이 점들 때문에 통일신라 석탑의 정연함이 더 살아날 수 있겠지만, 탑신만을 본다면 상당히 둔중하거나 답답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실제 탑평리탑에서 기단부를 빼고 탑신만 바라보면 고려시대 석탑이나 나원리탑에서 느끼는 둔중함이 보일 수밖에 없어 답답한 게 사실이다.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좁게 빼어졌거나, 지붕돌에 비해 몸돌이 너무 넓다는 말이다.
<이를 백제의 직선미와 신라의 리듬감, 백제의 중후장대함과 신라의 고준한 상승감으로 접근할 수도 있지만, 특히 탑평리탑과 비교하면 긴장감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생각될만큼 도식적이다...>
물론 탑평리탑은 나원리탑과 비슷한 규모와 비례(나원리탑의 1층과 2층 몸돌 폭이 각각 2.48m, 2.1m이고 지붕돌이 3.62m, 3.25m인데 반해 탑평리탑 몸돌은 각각 2.3m, 2m, 지붕돌은 3.45m, 3.1m로 약간씩 작다)임에도 그 정도로 둔중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장항리탑에서 느끼는 우아한 미감이나 경쾌한 리듬감, 또는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역비례를 적용한 감은사탑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은 찾을 수 없다. 탑평리탑이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런 비례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한편으론 이 비례가 목탑이나 5층 이상 다층탑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951년 만들어진 불일사 오층석탑에서 출토된 9층 금동탑의 체감률과 매우 흡사하게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 상상해보면 탑평리탑의 현재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과 다른 통일신라 목탑의 가장 보편적인 양식의 번안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951년 조형된 개성 불일사 오층석탑... 기단부와 상륜부를 제외하면 앞글에서 본 금산사 오층석탑과 비슷한 체감을 가지고 있다... Daum 블로거 선유도님 블로그에서...>
<이 불일사 오층석탑에서 9층 금동탑이 출토되었는데, 나는 탑평리탑의 상부 노반이 1단만 있을 경우 이 금동탑이 가장 유사한 체감과 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즉 탑평리탑은 목탑의 체감과 비례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말이다...>
두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석탑 하부에 높게 조성된 토단이란 존재다. 애초 산지를 좋아했든 아니든 통일신라인들은 평지가람을 떠나 산지가람을 정착시켰고, 또한 주요 금당에 비교적 높은 기단부를 두어 수직성과 중심성을 강조했다. 때문에 주요한 가람과 석탑들은 극적인 장관을 연출하는 입지를 택하게 됐지만, 높은 곳에 탑을 조형하는 것과 탑의 기단부에 토단을 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또 탑평리탑 인근 남한강변 가금면사무소 일대와 오석리쪽 논밭은 퇴적으로 형성된 곳이다. 때문에 홍수로 인한 범람과 이로 인한 유실이 우려됐다면 애초 토단을 만들 게 아니라 인근 야산으로 올라갔어야 한다. 즉 탑평리탑의 토단은 건축토목적 기능과 목적 이전에 문화적 의도가 훨씬 컸다는 말이다. 나는 그 이유가 고구려와 북방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표방하기 위한 의도된 연출이라 생각한다.
<통일신라 석탑의 많은 토단 혹은 토축들 중 탑리리탑과 함께 가장 적극적으로 토단을 살려낸 탑이 탑평리탑이다...>
앞서 충분히 이야기했지만 신라의 초기 석탑인 분황사탑을 비롯해, 탑리리탑 등은 분명한 토단을 갖추고 있다. 또한 통일신라 초기석탑인 고선사탑, 나원리탑, 황복사탑, 창림사지탑 등은 금당보다 높은 곳에 위치를 하고 있었으며, 탑에 토단을 두거나 수직적 입지를 강조한 사례는 산해리탑, 정혜사지탑, 부석사탑이나 거돈사지탑 등 주로 경주에서 충주나 원주쪽으로 올라가는 방향에 더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만이 아니라 토단은 중심성과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고구려의 장례문화에서 차용하여 적극적으로 계승한 개념이라 생각된다는 말이다. 또한 칠층이란 층수 역시 신라에서 크게 유행하지 않았지만, 4~7세기까지 고구려의 문화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만큼 고구려의 28수에 기초한 천문사상은 백제와 신라에도 깊숙이 정착해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도교적 체계로 수렴된 것 중 하나가 북두신앙인데, 칠층은 그의 표현일 수 있다.
<신라가 독자적인 천문연구를 체계화한 것은 선덕여왕 이후다... 농경문화 정착에서 천문과 관련된 과학정보는 해당 위도와 경도에 적합한 역력(달력)편찬의 기초이면서 왕실의 신성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그러나 통일신라-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천문도 정확성은 훼손되지 않을만큼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때문에 나는 700년대 후반 발해와의 긴장이 고조되고 누가 고구려를 승계하고 있는가가 부각되면서, 그때까지 방치되던 한주와 삭주 백성들을 무마하기 위해 고구려의 정통성을 통일신라가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과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이 문제는 차츰 정치적 명분이 되면서 800년대 후반 궁예는 통일신라에 고구려의 복수를 대신 하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광범위한 호응이 있었는데, 이는 오랜기간 누적된 방치와 차별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출발은 통일신라 왕실의 어설픈 수용이 오히려 명분을 확산시킬 계기가 됐다고 생각된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의 가장 전통적인 묘상건축 양식을 그대로 살려 토단 위에 석탑을 조형하는데, 역시 고구려의 북두신앙을 수렴하여 칠층으로 설정하면서 그 비례는 목탑에서 그대로 차용, 가람배치와 무관한 순수한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기념비적 거석신앙을 구현한 것이 탑평리탑이 아닐까 생각한다.
<고조선 이전의 고인돌에서 고구려의 적석총, 백제의 석탑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남아있는 거석신앙은 현대까지 이어지는데, 통일신라의 석탑은 그런 문화적 전통을 불교식으로 풀이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중 가장 큰 규모의 인공조형물이 탑평리탑이라 생각한다...>
사실 모든 불탑과 불사에 설화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설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에밀레종의 설화처럼 만들어진 시기나 발원자가 대중적으로 전달하고 싶은 숨겨진 의도를 읽어내는데 좋은 정보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920년대까지도 탑평리탑이 중앙탑이라고 불렸다는 것은, 누군가를 추복하거나 유명한 고승이 창건했다는 의미보다 원성왕대 이 탑의 상징성이 어디에 초점에 잡혔는지를 보여주는 설화라고 생각된다. 또 군막사겸 객사로 보이는 월악산 만수계곡 미륵대원지(미륵사지 미륵불도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를 후방으로 북원경인 원주와 지금의 감곡을 거쳐 10정 중 하나인 여주(골근대정)로 나가는 길목의 가금면에 이 탑이 세워졌다는 것은 사찰 가람배치와 무관하게 정치적인 목적에서 세웠을 개연성을 훨씬 높여주며, 지리적으로도 경주에서 개성(혹은 패강진)까지의 거리나, 청해진에서 북진까지의 중간지점에 탑평리탑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인도에서 출발해 중국 한반도로 이어지는 석굴의 전통과 보편성은 통일신라 석굴암에까지 이어지고, 그 마지막 흔적을 이곳 월악산 미륵대원지에 남기게 된다... 고려시대 조성된 것이 분명함에도 경주의 입장에서 북쪽을 향하는 미륵지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이곳의 객사 혹은 군막사가 북쪽을 지향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충주 탑평리탑은 당시 통일신라 영토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때문에 나는 탑평리탑이 당나라와 발해로 진출하는 가장 주요한 길목을 지키는 호국적 염원에서 시작, 독서삼품과의 실패 등 진골그룹의 반발로부터 왕실과 경주의 권위를 과시하며, 서서히 고개를 드는 구 고구려와 백제출신 백성들을 무마하기 위해 고구려 전통이 강하면서 백제/가야계 문화까지 혼재한 중원문화의 체감을 살려, 망자의 추모나 사건을 기념하는 상징이 아닌 풍수비보의 염원을 담아, 목탑의 비례를 그대로 번안하여 선덕왕의 유지를 이어 원성왕대에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탑평리탑은 선덕여왕 이후 비보풍수(裨補風水)에 근거한 석탑건립에 정당성을 다시 부여하고, 이후 밀교적 성향이 대중화되는 경향에 편승해 진골그룹/지방관/선종계열이 발원하는 비보석탑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결국 충주에 왕기가 있었는지 충주호족 유긍달의 외손자가 왕위를 계승하는데 그가 정종이고, 그의 동생은 노비안검법을 통해 개국공신이던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해 고려왕조의 토대를 갖추었는데 그가 바로 광종이다. 때문에 삼한의 중앙인 충주의 왕기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는 도참(圖讖)설화는 신라의 멸망을 아쉬워하고 광종의 즉위를 운명으로 대체하고 싶었던 호사가들이 후대에 추가한 것이라 본다^^).
<그리고 전제정치가 해체되는 시점에서 충주의 왕기를 누르고 싶어했던 통일신라 왕실은 비보풍수 입장에서 이 탑평리탑을 건립하고, 이를 대중적으로 각색하기 위해 중앙탑의 설화를 의도적으로 유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결국 150~170년 후 고려왕실은 충주호족 유긍달의 손자가 등극하게 되지만...>
(4) 통일신라 과도기 호국염원을 담은 풍수비보 석탑
탑을 좋아하다보면 눈에 거슬리는 것도 좋아 보인다. 단점이 장점으로 보이게 되고, 차이가 독창성으로 승화되며, 불완전한 것들이 새로운 실험으로 이해되고, 부족한 많은 것들에도 이유가 합리화 되는 것이다. 그 중 하나가 동 시대 석탑들과 달리 상하층기단부 갑석의 심한 돌출이다. 하층기단부 갑석은 하층기단 탱주보다 대략 19cm 정도, 상층기단부 갑석도 부연보다 13cm 정도 돌출했는데 나는 이게 다른 석탑들과 다른 대단한 미적감각의 소산이라 이해하고 있다.
<상층기단부 갑석뿐 아니라 하층기단부 갑석을 이처럼 적극적으로 돌출한 경우는 거의 없다... 구조적 안전성 해결을 위해 디자인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고려한 결과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왜냐하면 석탑의 하중을 감당하기 위해 상층기단부 갑석을 체감과 무관하게 돌출시킨 800년대 중반 이후(보림사탑이나 운문사탑을 생각해보라) 탑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디자인적 요소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넓고 낮은 비례의 기단부가 칠층이란 높은 탑신을 떠받치기 위해 시각적 중량감을 해소하고 애초부터 강조하고 싶어했던 상승감을 살리면서, 돌출시킨 기단부 갑석으로 인해 탑신의 수직성에 대비되는 수평성 강조를 위한 의도된 연출로 보인다. 금산사 미륵전의 수직성에 대응한 대적광전의 수평성을 연상하듯, 나는 탑평리탑에서 수직성과 수평성의 조응을 생각하는 것이다.
<멀리서 바라보는 탑평리탑은 수직성과 상승감으로만 이해되지만, 가까이서 올려다보는 느낌은 상당히 안정적일 뿐 아니라 수평적이기도 하다... 기단부 갑석들의 돌출로 탑평리탑은 상당히 가벼워졌다는 말... 나는 늘 이 장치에 감탄한다...>
또 칠층이란 높이까지 올라가면서 한치 흐트러짐 없는 체감률은 완벽한 정연함으로 보이고, 생각보다 얇은 몸돌과 여기에 새겨진 무기력하리만치 가냘픈 우주는 몸돌의 수평성을 유지하기 위한 타협으로, 그리고 상층기단부 갑석의 괴임에 부가된 별석받침은 기단부와 탑신의 분절을 위한 의도된 장치로, 하층기단부 갑석의 경사는 탑신의 가파른 체감을 상쇄하기 위한 완충장치로 이해되는 것이다. 물론 후대에 추가한 것으로 보이는 한단의 노반이 없었다면 더 완결적으로 보였겠지만, 칠층이란 다층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통일신라 석탑의 정연함을 유지할 수 있고, 12m가 넘는 거대한 규모임에도 조형적으로도 안정감을 갖추고 있다. 또 그정도 수준과 비례와 품격이 있어야 이 인근을 통과하던 육로와 수로의 백성과 장병들에게 휴식과 재충전의 안정감을 주면서 호국적 의지를 표방한 비보풍수적 상징성에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꼭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노반 하나가 가려지면서 훨씬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거 같다...^^>
언젠가 탑평리탑을 바라보며 읊조렸던 생각이 있다.
거대함이 불편하지 않고
안정감이 세련됨을 숨기지도 않는다.
높음은 상승감으로 강조되고
커다람이 의연함으로 승화됐다.
언젠가는 준수한 청년을 생각해봤고
또 어느 때는 아름다운 중년을 그려보기도 했다.
청년이라 칭하기에는 그 의연함이 예사롭지 않고
중년이라 단정하기에는 그 세련됨이 너무 좋다.
노년의 관조를 말하기에는 아직 웅혼한 기상과 도도함이 녹쓸지 않았다.
<아직 녹쓸지 않은 자신감과 의연함... 준수하다고만 말하기에는 중후장대한 기상이 살아있다...>
탑평리탑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데 독선적이지 않고,
전통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도 미래를 향한 의지를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는 이전에 이루지 못했던 규모와 새로운 형식을 위한 완숙한 경지의 자신감이 있어 더 좋아 보일 거라는 생각을 한다.
<원성왕대... 과도기 석탑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체감과 미감을 잘 살려낸 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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