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
(3)
이처럼 낙산동탑에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선산과 의성지역에 대한 사회지리적 배경과 시대적 흐름을 우선 다루면서 4기의 탑을 같이 비교했던 이유는 나의 오랜 선입견을 깨기 위함이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낙산동탑을 평가하는 기준과 잣대는 죽장동탑이었다. 탑리리탑의 모방이 빙산사지탑이라면, 죽장동탑의 모방이 낙산동탑이라는 시각이다. 규모도 훨씬 작고, 게다가 국보와 보물의 차이에서 오는 무게가 낙산동탑을 독립적이고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시선을 흐려놓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만의 시선으로 낙산동탑에 대해 몇가지 메모를 정리해 본다.
<나는 낙산동탑이 죽장동탑의 모방이나 축소판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죽장동탑 보다 최소 30년 정도 앞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이미 결론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낙산동탑을 죽장동탑의 축소판이나 모방 흉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두 탑은 층단이 있는 낙수면과 감실을 갖춘 양식이라는 공통점 외에 미감이나 체감만 따지면 차이점이 훨씬 많으며, 죽장동탑은 낙산동탑의 웅지를 따르지 못한다. 그래서 낙산동탑을 탑리리탑과 감은사탑, 혹은 왕궁리탑과 고선사탑의 절충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통일신라 전통적 양식의 삼층석탑에 백제식 미감이나 전탑의 낙수면을 융합한 새로운 이형탑으로 본다는 말이다. 이층 기단부는 완벽한 삼층석탑에서 차용하고, 가장 초기형태 석탑에서 사용했던 감실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으며, 지붕돌은 탑리리탑이나 왕궁리탑에서 차용했다. 즉 이층기단부의 안정감과 삼층양식의 상승감, 그리고 여러부재로 가공된 지붕돌의 원시적인 힘이 강조되었다. 기존의 성과와 양식을 취합한 새로운 실험이었다는 말이다.
<낙산동탑과 죽장동탑은 3층과 5층이란 구조와 형식에 따른 차이보다, 추구하고 표현하고자 했던 미감이 질적으로 다르다...>
<내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낙산동탑에서 고선사탑의 기운을 느낀다...>
사실 여러 층단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는 전탑의 낙수면은 아무런 중량감과 안정감을 주지 못한다. 가벼운 돌들의 조합이란 관념적 선입견은 법흥사전탑이나 탑평리탑에서처럼 실질적 무게까지 상쇄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돌들이 몇 개의 돌로 정돈이 되면 석재의 무게는 우리들에게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아무리 커다란 건축물이라 할지라도 그 마감이 목재나 철판, 혹은 아스팔트 슁글로 마감되었다면 우리는 그 지붕에서 중량감을 느끼지 못할 수밖에 없다. 또 하나하나 쪼개진 기와지붕에서 괴체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부공간에서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시공의 편의성과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선택할 수밖에 없던 조각조각 분절된 자재의 조립은 작품의 규모와 상관없이 레고공예를 보듯 건축의 체감에 전혀 다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법흥사지 전탑 지붕과 왕궁리탑 지붕돌의 비교... 탑 전체의 규모에서 법흥사지전탑과 왕궁리탑은 두배 가까운 차이가 있다. 그러나 지붕돌과 부분만을 본다면 어느쪽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지 금방 비교된다...>
<또 비슷한 규모라 할지라도 부재들의 가공치수가 달라지고, 소재의 질감이 달라지면 탑의 미감은 완전히 달라진다... 즉 석탑의 체감과 미감은 전체를 이루는 규모와 형상, 그리고 소재의 질감만이 아니라 이를 가공하는 규격과 치수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또 역으로 수덕사 대웅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의 지붕이 석재로 돼 있었다면 어떤 체감으로 느껴졌을까? 장중하거나 답답했을 것이다. 일례로 아파트 외벽을 보면 알 수 있다. 요즘 아파트 외벽은 대부분 문양 거푸집을 사용하여 철근콘크리트가 일체화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중량감을 느끼지 못한다. 단순한 디자인적 요소로 보이지만 우리에게 내부 구조가 익숙하게 노출되어 있고, 소재의 질감을 시각적으로 조율 가공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목탑에서 시작한 석탑의 조형에서도 소재의 질감과 시각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많은 장치들이 고려되었고, 석탑의 지붕돌 역시 당대의 장인들은 상당한 고심과 연구를 계속했다고 생각한다.
<고선사탑과 낙산동탑 지붕돌의 비교...>
먼저 백제석탑보다 체감률이 작아 위로 올라갈수록 급격히 작아지는 몸돌과 지붕돌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그들은 낙수면을 과감하게 층단이 없는 경사면으로 처리했다. 너무 커서도 작아서도 안 되는 균형감과 비례를 맞추기 위해 조절할 수 있는 건 지붕돌의 두께뿐이었다. 당연히 초기 석탑인 염불사지탑이나 원원사지탑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과중하다 싶을 정도로 두껍다. 이를 줄여 나간 것이 석가탑 일층지붕돌이나 간월사지탑 등에서 보이는 얇게 조정된 지붕돌이다. 이에비해 여러개의 돌들로 이루어진 백제석탑은 자체의 중량감을 줄이기 위해 지붕돌 낙수면을 최소의 두께로 가공하되 몸돌보다 넓게 빼냈다. 백제석탑이 가볍고 날렵하게 보이는 이유다. 역시 신라석탑에서도 이 방식은 응용된다. 장항리탑은 이전 황복사탑이나 나원리탑 비례보다 깊은 처마를 만들어내 시각적 중량감을 해소했다.
<왕궁리탑과 나원리탑, 장항리탑의 몸돌과 지붕돌의 비교...>
<똑같은 오층석탑이지만, 지붕돌의 두께와 처마의 깊이에 따라 석탑의 미감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석탑 지붕돌의 두께와 몸돌 폭에 대응한 비례의 조절은, 소재의 질감이 주는 특성을 살리면서 중량감과 상승감을 제고하거나 상쇄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시각적 디자인 요소다...>
즉 일반 건축에서 의장적 요소가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되는 것이 현관과 지붕(기능과 목적에 충실해야 하는 벽체는 연속된 평면의 구획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기둥과 수평재를 사용한 면분할과 창호의 형식과 문양, 그리고 재료분리대를 가공한 디자인만 남는다)이듯이, 석탑에서 고려할 수 있는 가장 큰 의장적 요소는 지붕돌과 상륜부에 불과하다(우리는 상륜부가 없는 누각건축을 목탑이라 부르지 않는다. 또 상륜부가 유실된 대부분의 석탑에서 볼 수 있는 최대 미감은 2/3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상륜부가 있는 석가탑과 그게 없는 술정리동탑을 생각해보라). 그런 점에서 기존 삼층석탑 양식에 지붕돌의 적극적인 변화를 실험했던 낙산동탑은 780년대를 전후한 시점에 진행된 다양한 양식의 석탑 개발에서 선도적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법주사 팔상전과 쌍봉사 대웅전을 전각이라고 한정시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불탑에서 적용했던 상륜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탑에서 가장 의장적 요소가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은 지붕돌과 상륜부였다...>
<780년대와 870년대, 90여년의 차이만큼 지붕돌에 의장적이며 장식적 요소를 치장하는 수법과 관점은 낙산동탑과 보림사탑만큼 달랐다...>
이미 이야기했던 바대로 700년대 후반은 가장 다양한 석탑 양식이 등장 확산된 시점이고, 당대 통일신라인들에게는 그만큼 파격을 향한 로망 같은 게 있었다고 생각된다. 석탑의 근본인 모목석탑을 지향한 다보탑/ 정혜사지탑/ 백장암탑, 기단부에 변형을 꾀한 석굴암탑/ 정혜사지탑/ 화엄사 사사자탑, 삼층이란 층수에서 벗어난 정혜사지탑/ 탑평리탑/ 죽장동탑/ 빙산사지탑/ 지산동탑, 사각 방형을 깨뜨린 천관사지탑, 그리고 지붕돌을 변형시킨 낙산동탑/ 남산동 동탑/ 죽장동탑/ 빙산사지탑, 여기에 단층기단의 봉암사탑/ 직지사탑/ 천룡사지탑까지, 그 실험은 감은사탑/고선사탑과 황복사지탑에서 정형화 통일신라의 전통적 양식을 완전히 깨뜨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대부분의 실험은 실패하지 않았고 다양해질 수 있는 석탑의 변화를 증명했다고 생각한다.
<파격의 수용... 문화와 사회가 다양해질 수 있는 것은 공동체의 정체성에 사상적 자신감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사상적인 자신감이 없다면 편협해지고 독선적이 되며, 차이를 용인하는데 매우 지루하고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사상검증과 자아비판, 인종청소, 매카시열풍, 마녀사냥도 그 단면일테고...>
만약 이 시기에 이런 석탑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불교미술과 석탑은 얼마나 단조로웠겠는가? 황복사지탑과 석가탑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그 무엇도 감은사탑을 뛰어넘지 못했을 것이다. 풍부해질 수 있는 것, 개방적일 수 있는 것, 자유스러울 수 있는 시대가 열리면서 그 변화를 석탑에 반영할 줄 알았던 통일신라인들의 깊이 있는 문화적 저력이 잠재되어 있었음을 함께 증명했다. 그리고 또 아쉽다면 이때의 실험은 새로운 전형 창출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창작의 중압감과 시공기술의 한계는 전통적 양식으로 회귀로 귀결됐고, 그들은 결국 석재표면에 조각을 가미하는 것으로 타협하고 만다. 800년을 전후한 시점의 다양한 석탑들이 체격과 체질 개선으로 새로운 미감을 창출하려 했다면, 그 이후의 석탑들은 화장과 성형미인으로 만족했다는 말이다. 미래의 비전을 잃어버리고, 이를 뒷받침할 권력의 의지와 그런 미감을 선호하는 집단의 재정적 후원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다양한 실험의 경험이 누적되어 새로운 양식을 창출했다면 또 어떤 경지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 어쩌면 세모, 네모, 원이란 가장 기본적인 도형으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해버린 통일신라의 석탑을 우리는 아직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4)
이제 낙산동탑의 주요 부분을 정리하면서 편년에 대해 살펴보자. 역시 낙산동탑의 양식적 특징은 지붕돌이다. 감은사탑의 4매 x 2겹 구성이나 나원리탑의 1매 x 2겹 구성이 아니라, 낙산동탑의 1~2층 지붕돌은 6매 x 4겹으로 구성돼 탑리리탑과 빙산사지탑 다음으로 많은 부재와 복잡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정한 규칙과 구조를 감안한 배열이 있는데, 그 양식은 정림사탑(1~4층)과 왕궁리탑(1~3층까지)의 지붕돌 적층방식이 사용됐다. 그리고 3층 지붕돌 역시 4겹으로 층적해 지붕돌을 구성했으나 작아진 크기만큼 각 4매로 가공하여 왕궁리탑/감은사탑처럼 분절면을 엇갈려 배치해 구조적 안정성을 담보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다시 낙산동탑의 지붕돌을 자세히 보자...>
각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1~2층이 5단, 3층이 4단으로 구성되었고, 낙수면의 층단은 각 6단으로 구성됐다. 여기서 각 부재를 분절한 부위는 1~2층은 4단까지 층급받침을 하나로 가공하고, 다시 1단 층급받침에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절단면을 기단부 갑석의 부연처럼 만들었으며, 낙수면은 각 3단씩 2겹으로 나눴는데, 이중 몇 개의 단은 몸돌 괴임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층급받침의 가장 큰 특징은 각각의 단이 마무리된 부분을 직절하지 않고 곡선처럼 보이게 가공했다는 점인데 1층에서 3층으로 올라갈수록 직절면이 짧아지고 곡선이 길어져, 3층 지붕돌 낙수면은 완전한 오목곡선으로 보인다는 점일 거 같다. 석재의 중량감과 여러부재로 나뉜 결구방식 때문에 더더욱 무겁게 보이는 것을 상쇄하기 위한 배려였을까? 그런점에서 낙산동탑은 장대한 기운이 넘침에도 위압적이거나 날카롭지 않다.
<정림사탑 지붕돌과 낙산동탑의 비교... 층급받침과 낙수면이 만나는 부분을 2개로 나누는 것과 3개로 나누는 것은 시각적으로나 미감에서 상당한 차이를 야기할 수밖에 없다... 리듬감과 구조적 안정성에서도...>
<그리고 낙산동탑 층급받침을 자세히보면, 1층과 3층의 가공수법이 조금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열화와 풍화에 의한 마모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1층엔 각이 살아있다...>
각층 몸돌은 3층까지 판석식으로 결구되어 감은사탑보다 오히려 고식(古式)으로 보이는데, 보수과정에서 기존 부재를 살리기 위한 조치였는지 처음부터 그렇게 조형했는지는 모르겠다(미탄사지탑도 그렇지?). 판식 구조가 되면서 1층부터 3층까지 몸돌에 우주가 생략됐는데 복잡한 지붕돌에 대응하기 위한 단순한 구성을 의도했기 때문이거나, 판석식 조립에서 등장하는 이음새를 줄이기 위한 연출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 이건 퇴화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천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됐을 석탑의 보수와 복원과정에서 각층 몸돌 부재들은 상당수 교체되거나 원형을 잃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각층 몸돌의 우주를 어떻게 표현했는지 추정조차 힘들다... 다만, 복잡한 지붕돌 구성 때문에 무정형한 몸돌의 구성은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 규칙들까지 살아있었다며 또 다른 정연함을 우리는 느꼈을지 모른다...>
일층몸돌에는 감실이 있는데, 탑리리탑이나 죽장동탑에서 보이는 하부 신방석이 없다. 이건 부재의 결실이라기보다 좌우 액연이 하부까지 내려온 걸 보면 애초부터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되는 것으로 이 역시 퇴화과정이 아닐까 싶다. 다만 감실문이 달렸을 것으로 예상되는 구멍이 있다. 그리고 일층몸돌의 괴임은 탑리리탑/죽장동탑/빙산사지탑과 달리 매우 낮은 호각형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괴임으로 인해 낙산동탑의 편년은 700년대 후반까지 내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전성기 삼층석탑의 일층몸돌 괴임은 높은 각형2단이 적용되었고, 양식적으로 유사한 탑리리탑과 빙산사지탑은 1단의 별석, 죽장동탑은 2단의 별석으로 가공되었을 뿐 아니라, 이처럼 낮은 괴임은 800년대 이후에 등장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나역시 양식적 퇴화의 결과라 생각하지만 다른 선행적 요소들이 많고, 650년대 왕궁리탑의 괴임에서도 이처럼 낮은 괴임이 사용된 적이 있기에 이점을 편년설정에 주요 기준으로 삼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왕궁리탑의 괴임... 괴임의 구조적 기능과 의장의 요소로 강조되기 이전, 왕궁리탑은 매우 형식적으로 괴임을 가공했다. 이는 석탑 내부에 목탑에서 사용하던 심초석 방식으로 상부 탑신을 지지하기 위한 별도의 장치가 있었기 때문이고, 내부를 통돌로 채운 통일신라석탑은 심초석이 없었기 때문에 괴임의 구조적 기능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낙산동탑 일층몸돌의 괴임과 상층기단부 갑석의 부연 등은 복잡한 지붕돌을 감안하여 의도적으로 약화시킨 것은 아니겠지만, 특히 일층몸돌의 괴임의 지나친 약화는 탑신에 비해 기단부를 상대적으로 허약하게 보이게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재 복원된 양식을 보면 상하층 기단부가 모두 판석식으로 결구되어 있어, 장항리탑과 창림사지탑과 같은 계열로 생각된다. 특히 하층기단부의 3개 탱주는 감은사탑/고선사탑을 비롯해 나원리탑, 창림사지탑에서만 적용됐던 가장 오래된 양식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매우 낮고 넓은 기단부의 비례와 역시 낮고 넓은 일층몸돌, 그리고 상층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단면적 비례는 감은사탑/고선사탑이나 나원리탑에서나 보이는 비례다. 사실 이런 비례와 기단부의 탱주 숫자, 그리고 완벽한 내부공간을 갖춘 감실과 가장 복잡한 지붕돌 결구방식 때문에 600년대 후반에서 700년대 초반에 조형된 것이 아닐까 많이 고심했지만, 상하층이 판석식으로 구성됐다는 점에서 장항리탑을 앞서기는 무리가 따른 거 같고, 낮아진 괴임과 층급받침의 변화를 고려해 700년대 후반으로 편년을 설정했다.
<낙산동탑처럼 하층기단부에 3개의 탱주를 적용한 석탑은 몇 되지 않는다...>
<낙산동탑을 생각하면서 고선사탑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건 부분적으로 파손된 고선사탑의 지붕돌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는 고선사탑이 구현하고자 했던 기운을 축소된 형태이나마 낙산동탑이 충실히 재현했다고 생각한다...>
780년대 전후, 새로운 변화를 추동했던 낙산동탑의 변신은 실패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존 기단부에 지붕돌의 변화와 감실의 차용에도 불구하고 장중한 기운과 당당한 미감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석탑을 만든 석공들은 그 때 그 시기, 그 지역에 꼭 필요했던 미감을 하나 부족함 없이 구현했다. 카세트테잎에 라디오를 조합한 워크맨이나, MP3와 전화기를 묶어 놓은 아이폰, 여기에 카메라와 인터넷까지 장착한 스마트폰의 성공처럼, 낙산동탑은 탑리리탑을 모방하거나 죽장동탑을 축소해 만든 게 아니라, 700년대 석탑의 보편적 성과를 하나하나 절충하고 조합하면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낙산동탑은 완성되지 않은 어색함이나 부족함 보다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은 진중함이 살아있는 탑이다.
<이젠 탑리리탑과 죽장동탑의 아류가 이류로 보이는 오해에서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런 느낌이 살아서 일까? 낙산동탑에 서면 위풍당당한 선봉장이 연상된다. 움추러듬도 없고 긴장감에 주눅든 느낌도 없다. 장중하지만 넘침이 없고, 진중하지만 정적이지 않다. 주어진 임무에 모든 걸 불사를만한 단호함도 있고, 어떤 난관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든든함이 있다. 숱하게 이 길목에서 모이고 흩어졌을 군마들을 호령하기에 어색함이라곤 찾을 수 없다. 다만 무한히 확장될 미래를 선동하기엔 어딘지 무겁고, 마냥 과거의 영화를 노래하기엔 타고난 체격이 전투적이다. 해서 문무왕의 찬란함보다는 선덕왕의 힘겨운 행군이 더 많이 떠오르고, 정복전쟁의 위업보다는 새로이 변하는 내부의 준동에 단호함을 보이고 싶어하는 쓰라림 같은 게 느껴진다. 설정한 편년에 짜맞추는 어설픈 감상이라도 내게 낙산동탑의 기운은 밝게만 보이지 않는 이유를 그렇게 찾는 것이다.
<낙산동탑의 정면성을 규정하는 감실은, 서쪽 진입로나 북쪽 마을이 아닌 남쪽의 낮은 야산을 향하고 있어 조금 답답하다... 미래를 향한 의지보다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미련 같은 게 느껴지는 이유다...>
참고로 주변에서 발굴된 부재들을 종합한 결과 당초에는 동서 쌍탑으로 조형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는데, 그랬다면 우리에게 낙산동탑은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직 접을 수 없어 꿈틀거리는 웅지로 꽉찬 강인한 의지 같은 느낌말이다.
<동서 쌍탑으로 배치되었다면 현재의 위쪽일까? 아래쪽일까?...>
<언젠가 낙산동탑에 대해 40대가 갖춰야할 기품이 있다고 말했다... 조급하지 않고 안정적이면서, 당당함과 중후함을 함께 갖춰 흔들림이 없는 모습을 닮고 싶다고 말이다... 얼마 남지 않고 저물어가는 나의 40대도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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