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780~828년, 과도기 석탑의 공통점 - 시대정신을 반영한 미감과 체감을 중심으로...
주관이라는 점을 전제로 ; 문화는 정착과 여가에서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즉 특정 공간과 여유로운 시간에서 출발한 문화는 미술/음악/문학/조각/연극 등 무엇으로 표현되든 의/식/주생활 및 신화/종교/철학체계와 결합하여 한차원 높은 예술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일체감과 세대를 뛰어넘는 역사성, 그리고 체계적이며 밀도있는 완성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경제력(어쩌면 경제력은 문화적 욕구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경제력이기 때문이다)과 능동적인 연대의식(자신이 속한 계급과 계층, 신분 등에 대한 성찰과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휴머니즘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문화란 공감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진취적인 표현 욕구다(가치의 생산과 잉여가치의 소비, 그리고 인간 내면과 외연에 대한 적극적인 확대재생산 의지와 욕구가 없었다면, 문화예술의 변화와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문화예술이란 자기만족이 아닌 인간관계의 교감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으로, 창작자의 표현과 과시욕구는 관람자의 감동을 필요로 하고 창작자 내면의 정화는 시대정신을 반영했을 때 생명력을 얻는다.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경북대 박물관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그려진 이 암각화는 현대인인 우리들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점들이 있다고 한다. 즉 창작자란 개념도 표현욕구도 과시욕구도 없다는 말...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그렸다면 이미 그려진 그림 위에 또 다른 그림을 중첩시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이 염원하는 의지를 담아, 자신들이 사냥했거나 사냥하고자 하는 고래 등의 영혼을 이 바위에 새겨놓았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조금더 부연하면 현대의 인류는 선사시대의 그림을 재생하지 못한다고 한다. 심지어 이 그림이 아이들이나 원시부족민들의 그림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그들의 그림은 선사시대 그림과 절대 같을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림은 감각(感覺)의 소산이지 이지(理智)의 소산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들의 그림은 동작묘사만 있을뿐 아무런 관념적 요소가 없어 가장 원시적인 자연주의에 속한다고 한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아르놀트 하우저 지음/백낙청 옮김/창작과 비평사)>
내 생각이 맞다면 700년대 후반 변화하는 시대배경에서 새로운 문화예술을 과시하려는 주체가 누구였고, 그들이 가용할 수 있는 경제력과 그들이 설정한 관람자는 누구였는가는 문화예술의 완성도를 평가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기준이자 접근방법이라 생각된다. 나는 이 시기 문화권력은 소규모 수공업자로 전락하거나 교단조직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해체된 관소속 장인조직들을 가동할 수 있는 재력과, 기존 사회질서에 반발하는 승려와 유학의 세례를 받은 지식인 흡수를 목표로,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유행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하고자하는 집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한편에서는 경주의 문화양식을 계승하려는 집단과 경주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려는 집단사이의 갈등이 공존하면서, 상당히 혼란스럽게 전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785년 경주 북천 범람을 이유로 김주원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원성왕은, 김주원(그의 아들이 김헌창이다)을 명주(강릉)군왕으로 봉한다. 즉 강릉을 중심으로 오늘날 영동지방을 포함해 북으로는 원산에서 남으로는 영양과 청송, 영덕까지 포괄하는 명주지역은 오래전부터 신라인과 뿌리가 달라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한데다, 이제는 중앙집권에서 더 멀어져 반독립적인 소왕국체계를 갖추게 된다. 결국 통일신라의 분열은 왕실이 용인한 것이며, 소왕국의 존재는 여타 지방에 정착하려 했거나 경주 중심체계에 반발하고 왕위계승을 도모하려 했던 상당수 진골그룹에게 새로운 비전으로 등장했을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이 고대 중국의 통치방식으로 고착되거나 중세 유럽과 일본에서처럼 완전한 봉건제로 치닫지 못했던 것은, 자율화된 지방권력이 주종관계에 만족하기 힘들 정도로 체계화되지 못했거나, 최고권력자로 군림해야할 왕실과 왕위 신분에 대한 권위가 깨져 여전히 중앙집권의 가능성이 늘 열려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지방의 군왕으로 성장하려는 이들에게 부가된 새로운 과업은 경주와 다른 문화를 그들 스스로 만들어 당대 지식계층과 백성들에게 인정받아야만 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이 시기 석탑들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형되어야만 했다.
<9주 5소경/10정 5군진이 없는 지도를 올린다... 즉 780년대부터 그런 흐름들이 시작하는 것이지, 이 때 완성된 게 아니다. 대략 828년이 되면 기존의 양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부터 살펴볼 다보탑 이후에 만들어진 석탑들은, 다양한 실험과 양식적 통일성이 무너지면서 석탑의 편년 설정에도 논란이 많은 탑으로 존재한다(다보탑도 750년대설과 765~780년 제작설로 나뉘는 거 같다). 먼저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낙산동탑을 비롯해, 8세기 말에서 9세기초로 추측되는 정혜사지탑 등은 큰 편차를 보이지 않지만, 화엄사 사사자탑은 8세기 중반에서 9세기 중반까지, 탑평리탑과 죽장동탑은 빠르면 7세기 후반에서 늦으면 10세기초반 후삼국시대까지 편차가 아주 크다. 나 역시 이 글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정황과 논문들을 검토하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전통양식은 급격히 해체됐고, 전혀 이질적인 석탑도 등장한다. 그만큼 전제정치의 해체와 지방호족의 태동, 그리고 당나라의 몰락과 인도의 구법여행 등이 미친 영향은 양식적 통일성을 해체할만큼 막중했다는 말이고, 780년대 이후부터 늦어도 828년 사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은 오히려 치열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보탑... 다보탑의 편년도 김대성이 불국사에 직접 개입한 751년 설과 갈항사탑 조형 이후인 765~780년 경 제작설로 나뉘는데, 나는 석가탑보다 늦게 조성됐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740년대 불국사는 석가탑 중심의 단탑 가람이었는데, 김대성의 개입 이후 쌍탑가람으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나.
이제 이들 석탑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을 짧게 하기 위해 지방호족과 선종이 득세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에 이어, 석탑의 미감 변화에 대해 한두가지만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거 같다. 이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각각의 석탑에서 중복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석탑의 양식만 검토하는 것으로 편년설정에 분명한 한계가 있어 미리 언급하는 것이니 이를 감안했으면 좋겠다. 아무튼 780년대 전후에 조형된 것으로 보이는 구미 선산의 낙산동 삼층석탑의 지리적 배경을 살펴보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좋을 거 같다.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 다보탑 이후 처음으로 이형석탑이 등장하는 곳은 경주 북부에서 선산으로 나가는 방향이 아니었을까 싶다. 정혜사지탑→ 낙산동탑→ 탑평리탑...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기존 양식을 계승한 길이 있는데 기성동탑→ 부석사탑→ 중금리탑→ 향성사탑... 즉 한쪽은 중원경을 넘어 당항성과 예성강으로 이어지는 길목이고, 또 한쪽은 북원경을 넘어 금강산 방향에 위치한 주요 교통로다...>
경주에서 팔공산을 넘어 칠곡을 거쳐 구미에서 상주와 문경으로 올라가는 길목 초입 선산은 전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적지않은 의의를 지닌 곳이다. 이중환 택리지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말했듯이 김종직, 하위지 등이 선산 출신이고, 고구려 화상 아도가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하고 창건했다는 도리사를 비롯해,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봉안된 세존사리탑 금동사리구(국보208호)와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 3구(국보182,183,184호)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죽장동탑과 낙산동탑, 해평리 석조여래좌상 등 통일신라의 수준 높은 유물들이 짜임새를 갖춰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산 해평동 석조여래좌상 불대좌... 이 곳의 유물들은 하나하나 격이 있지만, 전체적인 구성에서도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몇 안 되는 지역이다...>
이곳 선산을 관통하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약 20리 떨어진 거리 동서에 자리잡아 남매탑으로도 불리는 낙산동탑과 죽장동탑은, 군위에서 안동으로 올라가는 길목의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을 모본으로 조형되어 있는데, 이들은 닮은꼴만큼 거의 같은 위도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서 탑리리탑과 이들 탑의 친연성에 대해 검토하는 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탑리리탑과 이들의 위치만큼 달라진 게 있으니 그것이 바로 안동으로 가는 길목과 상주/문경으로 가는 길목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즉 탑리리탑이 조형된 600년대 중후반의 문무왕대와 달리, 700년대 후반은 안동쪽보다 상주쪽의 전략적 가치가 중시되던 시점이라는 말이다. 그건 발해의 영토잠식에 대한 위협에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나라와 해상교역의 통로인 당항성에서 예성강 일대가 발해에 의해 봉쇄될 경우를 가정한 가장 빠른 교통로가 이쪽 길이었기 때문이다.
<670년 전후 나당전... 앞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육군이 주력인 전투에서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600년대 후반 백제/고구려/당나라와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700년대 후반 발해와 긴장관계가 형성되면서 재부각 된다...>
통일신라 역사에 대해 충분한 검토가 부족하겠지만, 내가 알기로 700년 이후 통일신라 왕이 직접 한강을 넘은 때가 두 번이었던 거 같다. 한번은 신문왕 사후 700년 초반의 효소왕이고, 또 한번이 경덕왕대가 몰락한 780년대 선덕왕 때다. 그리고 선덕왕은 한강만이 아니라 예성강 넘어 지금의 황해도 남부까지 시찰하고 성을 증축한다. 당나라의 간섭과 일본의 위협이 사라진 당시 가장 껄끄러웠던 상대는 발해였고, 이때 한반도 북동부에 근거를 둔 흑수말갈을 통합하고 거란족이 자리잡은 요동반도까지 진출하던 시점이다. 때문에 이에대한 통일신라의 의지를 표명하면서 군졸들의 전의를 독려하고 각 지방의 무장세력화를 촉진하기 위해 해당 지역의 지방관과 군진 등에서는 다시 남성적이고 장중한 기운을 담은 석탑 조형을 추진했다고 생각된다. 즉 600년대 후반 탑리리탑은 백제와 고구려 정복전쟁에 참여한 전승기념비적인 상징과 이 전쟁에 참여했던 전몰장병들의 추모의 성격이 강했다면, 780년대 이후 이 교통로에 조형된 석탑들은 긴장을 제고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컸다는 생각이 많다.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결국 나는 이 탑이 낙산동탑보다 늦게 조성됐다고 이야기하게 됐다... 낙산동탑은 700년대 후반, 죽장동탑은 800년대 초반... 조성 배경이 다르지만 의성의 탑리리탑과 빙산사탑이 어우러지듯, 선산 죽장동탑과 낙산동탑도 그렇게 어울린다...>
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당나라의 문물은 물론이고 인도의 풍습까지 직수입되면서 불교교리와 양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자유롭게 진행되던 시점이고, 또 원성왕 이후 흥덕왕대를 보면 신축 불사를 금지한다는 언급이 있는데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왕실이 아닌 진골그룹과 각지에 파견된 지방관이 주도했던 불사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면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정황도 확인할 수 있지만, 9주5소경을 비롯해 10정5군 등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불사신축에 대한 수요와 지원요청을 감당할 여력은 왕실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제정치의 해체와 함께 시작된 중앙집권 체계의 이완은 왕실에서 의해서 통제하던 석공조직이 해체되고 분산(불사를 주도하고 참여했던 장인들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800년대 전후부터는 직급이 사라지고 승려 등 계층만 언급된 경우로 바뀐다)됐기 때문이다. 이전 시기에 비해 불사의 주체들이 다양화 되고, 투입되는 재원과 기술력이 현저히 떨어지고, 자연스럽게 석탑의 완성도와 질적 수준, 그리고 품격에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이형탑 외에도 전통양식의 탑들도 변하게 되지만, 원성왕대부터 800년대 초반까지는 남성적이고 중후한 느낌의 석탑들 위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당시 북방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세워진 낙산동탑을 비롯해 충주 탑평리탑과 죽장동탑과, 해적들이 자주 출몰한 울산의 석남사탑과 청송사탑, 그리고 전라도 곡창지역으로 가는 광주 지산동탑 등은 장대한 규모에 남성적인 미감으로 조형되지만 전성기 시절의 긴장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또 정혜사지탑, 화엄사사사자탑 등 전통양식의 계승보다 새로운 변화를 선언하려는 파격적 형태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전통양식에 기반한 부석사탑 등으로 맥을 이어가면서 향성사탑, 단속사탑, 무장사탑, 기성동탑, 봉암사탑 등이 만들어지지만, 그 규모도 서서히 작아지고 구현하고자 하는 미감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즉 천년이 지난 오늘날 미술사적이며 조각양식적인 측면에서 이 시기 이후 석탑을 기존 석탑에 비교해 퇴화와 축소화로 해석하지만, 당시에는 기준과 표준이 바뀐 것이고 지향했던 가치가 바뀐 것이다. 한편에서는 냉전시대를 이야기하며 긴장감을 고취하려 하지만 한편에서는 미국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은 히피나 유럽의 68세대가 등장했듯이, 700년대 후반 석탑은 그런만큼 급격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나는 왜 이탑을 보면서 전혀 엉뚱한 68세대를 생각했을까? 너무 진지하면서 기존에 비판적이고 혁명적 낙관주의를 강조하던 그들... 그런 그들은 미국의 히피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연대감을 강조했으며 전투적이었다... 완전히 새롭게 변한 모습이지만, 정연함과 함께 진지함이 살아있어서 일지도. 그리고 약간의 가벼움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800년대 전후 발해와 타협을 이루고, 장보고에 의해 청해진이 설치된 이후로 장중하거나 남성적인 석탑은 더 이상 조형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외적인 변수가 통제되고 내부의 갈등만 표출된 과도기인만큼 석탑들은 자유롭고 다양해진다. 엄숙하지 않고 권위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발랄하거나 경쾌하지도 않다. 미래에 대한 진취적 기상과 천하를 호령하고자 하는 역발산의 기개도 없지만, 한없이 위축된 느낌에 과거의 영광에 집착하는 편협함도 없다. 한편으론 축소된 규모만큼 섬약해지지만 역으로 화려해진다. 여기에 경제력과 무력을 갖춘 지역을 기반으로 해당 지역의 문화적 정서들이 결합하니, 사상적 완결성과 건축적 의지는 사라지고 경직된 모방과 간략화된 양식, 그리고 공예화된 정형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당당한 기백과 수려한 형태는 장식이 가미되면서 문약해지고, 지붕돌 위로 팽팽하게 뻗어나온 긴강감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대체되며, 높고 가파른 체감률은 두툼해진 기단부로 안정감만 강조되고, 정연한 결구와 규칙적인 변화가 만들었던 흐트러짐 없던 리듬감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칠곡 기성동 삼층석탑... 아직은 700년대의 긴장감이 남아있는...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분위기도 이렇게 바뀌어갔을까? 어쩌면 830년대에 이르면 양극화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풍요로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석탑은 그런 것들까지 반영했을지 모르겠고...>
그리고 발해와의 긴장관계가 첨예화되지 않고 800년대 초반 일본과 재수교가 이루어지면서 통일신라의 구심력은 더욱 이완된다. 또 이를 빙자하여 성장했던 각 지방의 세력들은, 경주의 양식을 계승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뚜렷이 나뉘며 할거의 의도와 목적도 달라진다. 게다가 700년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진표율사가 창건한 김제 금산사, 청주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 등에 근거한 미륵신앙의 위세는 전통적인 소백산맥을 경계로 구신라 지역과 새로운 기운으로 재무장하려는 세력이 구획되는 계기로도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 경주를 벗어나려는 선종의 확산 등 지역의 지방색이 석탑조형에 유입될 수 있는 배경까지 형성되는 것이다.
<800년대 통일신라의 5교9산/지도로 보는 한국사에서... 후기에 이르면 5교는 의상의 화엄종과 진표의 법상종이 주도하면서 고려시대를 맞게 되는데, 이때 화엄종은 북악(태백산) 부석사와 남악(지리산) 화엄사로 양분된다... 아무튼 이것은 후대 이야기지만, 선종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교종은 주도권을 놓친 적이 없다는 말이고, 낙동강 서북쪽으로 빠르게 확산된 선종은 지방문화와 사상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히 경주와 신라로부터 원심력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말...>
결국 이 시기의 석탑들은, 세련되고 우아했던 기풍은 사라지고 단아하거나 문아 혹은 문약해진 양식에, 안정된 건축적 구조에서 변형된 괴임 등 몇가지 결구만이 확인되고, 이제는 본격적인 예술적 모형으로 발주자만 만족시키는 공예품으로 변화하는 800년대 중반 석탑이 양식화 되는데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굳이 이 이후의 변화까지를 거론하는 이유는, 이들 석탑이 함유하고 있는 양식이 한시대, 한세대로 한정시킬 수 없는 복합적 요인들이 많다는 말이고, 하나의 규격화된 양식으로 접근할 수없는 혼란스러움이 있다는 말이다.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780년대 한차례 커다란 파고가 지나가고, 다시 820년대 태풍이 불어온다... 그때의 변화는 780년대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강도로 통일신라의 내부를 흔들게 된다... 그 과도기의 마지막 석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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