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820년대 이후 통일신라 석탑의 변화
1) 822년 김헌창의 난과 흥덕왕, 그리고 선산과 의성...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이 완성된지 얼마되지 않아 통일신라는 중대한 변화에 직면하게 된다. 소위 김헌창의 난이 그것이다. 태종무열왕계인 아버지 김주원이 왕위를 원성왕에게 빼앗기고 자천타천으로 명주에 반독립적 군주로 옹립된 이후 웅주(공주)도독에 부임한 그 아들 김헌창이 구백제 지역을 일시에 장악하고 왕실을 압박하다가 결국 진압되고, 다시 몇 년후 그 아들 김범문이 여주 고달산에서 다시 반란을 주도하며 한주로 진격하다가 제거된다. 이로써 통일신라는 두가지의 큰 변화에 직면하게 되는데, 하나는 반란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통일신라의 전제정치가 흥덕왕을 마지막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앞선 글에서 이미 소개했지만,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올린다... 이 글에서 참고로 올리는 부도들은 '지도로 보는 한국사'에서 스크랩하여 재인용한 것들이다...>
즉 기존의 반란은 진골그룹이 중심이 되어 수도 경주를 장악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왕위다툼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군사력에 행정력과 조세권까지 갖춘 5소경 9주에 파견됐던 진골그룹이 해당지역을 발판으로 경주와는 다른 지리적 장악력을 근거로 반신라의 기치를 내걸며 새로운 국가창업을 선포했다는 것으로, 이는 지배층 내부에서 신라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했다는 의미이며, 이후 왕실과 경주의 국정 장악력은 해체되고 통일신라는 급격한 혼란에 빠짐을 의미하게 된다. 또한 태종무열왕 이후 선덕여왕에서 시작된 전제정치의 꿈은 문무왕과 신문왕에 의해 체계를 갖추고 성덕왕과 경덕왕 초기까지 굳건한 체계를 이루며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열었으나, 경덕왕 사후 원성왕과 헌덕왕, 흥덕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한체 해체된다는 사실이다. 즉 흥덕왕은 통일신라 전제정치를 꿈꾼 마지막 군주가 된다.
결국 800년대 통일신라의 석탑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게 되는데, ①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이후 소위 전제군주가 주도하는 기념비적 석탑 조성시대가 완전히 막을 내리면서 더 이상 조성되지 못했다는 점, ② 이의 연속선상에서 석탑의 발원자가 지방호족과 불교교단의 연합으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 ③ 다양하게 진행되던 이형석탑에 대한 실험이 중지되고 다시 경제적이고 기술적인 이유로 전통적 방식인 삼층석탑으로 약화/퇴화되어 가며, ④ 역시 그 흐름을 반영하여 각 지방의 문화적 전통이 석탑조형에 유입되면서 경주 중심의 보수적이며 일관된 양식이 흐트러진다는 점, 그리고 ⑤ 석탑을 중심으로 한 사찰과 불탑의 장엄이 흔들리면서 석불좌상(30여년이 지나면 철불이 새로운 유행으로 등장한다)과 승탑 및 선승들의 부도탑비 조형으로 무게중심이 완전히 이양되고, 석탑의 양식적 완결성은 더욱 급하게 해체되어 간다는 점이다.
* 822년 이후 석탑과 석불좌상, 승탑 등의 변화
<광주 지산동 오층석탑/보물110호/높이7.24m... 나는 이 석탑이 구백제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통일신라계 석탑으로 보며, 흥덕왕대 김헌창의 난 진압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광주 지산동탑 상층기단부의 일층몸돌 괴임...>
<828년 이전 조형됐다고 생각하는 근거는 상하층 기단부를 이루는 2개씩의 탱주와 기단부 갑석의 부연과의 비례, 그리고 상하층기단부의 괴임 양식이 전성기의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666호/700년대 중반/불상높이 0.96m... 앞서 연화장대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700년대 중반까지 석불좌상 하대석은 연화대석이 아니었고, 초기 석불좌상들의 공통된 특징은 좌대가 석불좌상보다 낮고 넓으며, 광배가 상대적으로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감은사탑 등 초기 석탑의 낮고 넓은 기단부와 공통된 요소다...>
<염거화상탑 부분/국보104호/844년/높이 1.74m... 흥덕왕 이후 승탑 조형이 본격적으로 가람배치에 등장하는데, 역시 초기 좌대 하대석은 연화대석이 아니었다...>
<의성 고운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246호/높이 79cm... 700년대 석불의 얼굴표정, 신체비례, 옷주름 등이 완전히 달라진 800년대 석불의 특징을 고르게 갖추고 있다... 그중 초기 작품으로 좌대가 아직은 높지 않고, 광배가 좁아졌지만 여전히 크다... 물론 이후엔 좌대가 기존 비례와 달리 장식적, 공예적으로 강조되면서 좌상 석불에 비해 높고 화려해지며, 광배는 좁고 낮아진다. 관리를 위한 구조적 안정성과 경제적 이유, 그리고 이를 반영한 미감의 퇴화 때문이라 생각한다...>
<고운사 석가여래좌상 부분... 불상의 위축되고 경직된 모습과 달리 세련되고 활달한 문양의 연화좌대를 볼 수 있는데, 석굴암 본존불 대좌처럼 중대석에는 아무런 장식없이 우주만 모각되어 있고, 연꽃잎 끝부분에 귀꽃이 등장하지 않은 800년대 초중반 양식이다...>
<보림사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국보117호/858년/높이251cm... 선종의 유행과 철불의 등장을 연관시키는 많은 말들이 있으나, 철불이 조성된 최초의 형태는 보림사와 도피안사(865년/국보63호/좌상높이 91cm)의 비로자나불로 이는 화엄종의 주존불이었다... 즉 신성을 장엄하는 소재로 석불을 대신해 철불이 새롭게 유행한 것이지, 선종 때문에 철불조형이 시작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전제군주를 꿈꾸던 흥덕왕이 주도한 통일신라의 마지막 기념비적 석탑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나는 그것이 빙산사지 오층석탑과 죽장동 오층석탑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석탑들은 경주와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그에 걸맞는 규모를 갖추게 됐고,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의성과 선산에 조형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 시대배경 이해를 위해 흥덕왕과 김헌창의 난에 대해 조금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는 거 같다. 826~836년까지 집권했던 흥덕왕은 원성왕의 손자로, 원성왕(785~799)에 이어 왕위에 오른 증손자 소성왕(799~800년)과 애장왕(800~809년) 형제의 삼촌이다. 직계로 대물림되던 왕권이 역행했다는 말인데, 엄밀히 말하면 소성왕과 애장왕의 막후 권력자는 처음부터 헌덕왕(809~826년)과 흥덕왕 형제였다고 보는 게 맞을 거 같고, 이렇게보면 섭정이 시작되던 800년대 초반부터 이들 형제가 원성왕의 유지를 이어 왕권강화를 위한 대내외 정책을 주관했다고 봐야할 거 같다.
흥덕왕이 그의 형이던 헌덕왕과 함께 일관되게 추진했던 것은 바로 전제정치의 부활이었다. 당연히 친당정책을 중시하면서, 남해안 일대의 해적소탕과 일본과 국교 재수립을 병행하고 사신을 교환하는 등 국제관계에도 눈을 돌린다. 즉 이미 교토로 천도한 이후 내치로 시선을 돌린 바다 건너 일본과 갈등을 외교적으로 완화시키고, 발해의 성장에 대응하기 위해 한강과 예성강을 넘어선 북방개척을 다시 중시하면서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하고 부활시키며 명분과 실리를 찾으려 했다. 그런 일련의 정책속에서 왕권과 골품제 강화를 추구하고, 김헌창의 난을 비롯해 진골그룹의 반란을 진압하지만, 그의 전제정치 부활은 통일신라의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한 근본적인 개혁보다 진골그룹으로부터 그의 형제를 중심으로 한 왕실의 정치 경제적 기반을 재구축하는 방어적 성격에 집중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 괘릉과 흥덕왕릉의 석조유물 비교
한 시대의 석조예술의 경향과 수준, 그리고 양식 등을 파악하는데, 편년이 확인된 왕릉보다 좋은 곳은 없을 거 같다. 또 흥덕왕 시절의 석조유물들이 따로 기록되지 않은 상황에서 경주 안강에 있는 흥덕왕릉은 당대의 석불이나 석탑 등의 조형양식과 치석수법, 그리고 예술적 완성도를 평가하는 기본 잣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836년경 조성됐을 것으로 보이는 흥덕왕릉은 799~800년 경에 조성된 괘릉(원성왕릉)의 봉분 및 난간, 면석과 기물 등 모든 양식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어, 800년대 초반 통일신라 왕릉-묘제의 양식변화를 추정하고는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특히 사자상과 무인상 등 똑같은 주제의 석조유물들이 있어 원성왕과 흥덕왕대의 석조예술을 비교하는데 기준점이 될 수 있을 거 같다... 왕릉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어 충분한 식견은 없겠지만, 괘릉의 사자상과 무인상을 Daum 카페에서 스크랩한 흥덕왕릉의 조각상과 비교하면서 한 세대 혹은 30여년의 차이란 무엇인지, 당시의 사자상과 인물상은 어떤 느낌인지 확인해 보고자 한다...
<괘릉 사자상... 화엄사 석탑의 사자상과 비교해볼만 하다...>
<흥덕왕릉의 사자상... Daum 카페 호산광인에서...>
<괘릉의 무인상... 서역인상으로도 불리는 이 조각에서 설화에 등장하는 처용이 아라비아 중동계 이미지라 추정하는데, 처용설화는 880년 헌강왕대 사람으로 원성왕이나 흥덕왕과는 직접 관련이 없다... 아무튼 활달하고 역동적인 자세에 생동감이 살아있다...>
<흥덕왕릉 무인상... 움추린 어깨와 위축된 모습, 게다가 너무 경직되어 부자연스럽고 조화롭지 못한 모습? 너무 악평인가?? 고운사 석가여래좌상과 느낌은 비슷한가??? 왕릉의 기물로 관에 소속된 최고의 석공들이 동원되었을텐데 836년도 현재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원성왕과 흥덕왕은 30여년 차이지만, 모든 게 달라지는 시간 이상의 거리가 있다... Daum 카페 경주한옥연구회에서...>
또 애장왕대부터는 사찰의 창건과 신축을 불허하고 수리만 허가한다. 당연히 왕실에서 주도하던 석탑 조형은 급격히 감소하고, 독립적 세력으로 등장하던 지방호족의 불사와 석탑 조형만 조심스럽게 진행되던 시기다. 또한 불사에서 금은(金銀)사용을 금지한데서 확인되듯 더 이상 일정 규모의 석탑이 만들어질 왕실의 재정적 지원은 중단됐음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내부의 사치와 향락적 요소를 통제하면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국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벌이지만 그렇지만 또 그것으로 끝났다. 그의 치세기간 동안 지방관으로 파견된 진골그룹이 군진과 경제권까지 장악하면서 약화되던 왕권은 더 이상 회복되지 못했고, 사후에는 장보고 같은 평민출신 지방호족이 왕실혼사를 좌우하는 걸 통일신라 왕실은 지켜봐야만 했다. 왜냐하면 골품제와 6두품 등 고질적인 신분제의 폐해와 백성들의 민생고 해결과 국부를 증대시킬 수 있는 토지제도의 개혁까지 손을 대지 못한채 당나라식 제도에만 의존하려했던 사대성의 한계와 독재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김헌창의 난이라고 생각한다. 발해와 일본과의 관계가 재정립되는 순간 822년 통일신라 정국은 김헌창의 난에 휩싸이는데, 그 원인은 원성왕에 대한 무열왕계의 반발로 헌덕왕과 흥덕왕 형제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 김헌창의 난은 삽시간에 옛 백제지역 지방관 대부분의 적극적인 호응으로 번졌고(삼국사기에 무진주, 오나산주, 청주, 사벌주 4개 도독과 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사신과 여러 군현들을 위협해 자기 소속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김헌창은 나라이름을 장안(국호를 당나라의 수도 長安이라 칭했다는 것도 음미할만하다) 연호를 경운이라 칭하며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확산된다(난은 곧바로 수습되지만 다시 그의 아들 김범문은 825년 여주 고달산에서 재차 반란을 일으켜 한주(경기도 광주)로 진격한다).
<김헌창의 난/지도로 보는 한국사에서 재인용... 김헌창의 난은 규모에 비해 1년이란 짧은 기간 내에 진압되었지만, 통일신라 하대와 말기 폭발한 정치적 격랑의 성격을 규정하는 좋은 사례다...>
김헌창의 난은 단순한 왕위계승 반란이 아니었다. 진골출신이 내건 기치가 왕위찬탈이 아닌 새로운 나라의 선포였고, 9주 중 4개주 도독이 이에 호응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기 때문이다. 각 지방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왕실은 더 이상 권위를 인정받지 못할 정도로 지방권력의 파워가 입증됐을 뿐 아니라, 400년대 이후 통일신라를 유지하던 골품제와 6두품 등 신분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확산시켰다는 점이다. 즉 700년대 후반부터 관념성과 이상주의가 쇠퇴하면서 곧바로 부각된 운명론의 해체는 통일신라의 근간을 흔들었다. 또 그 끝은 왕실에 대한 반란이나 왕위계승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국가체제를 유지하던 정체성이 무너지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운명론과 신분제에 대한 반발과 갈등은 통일신라의 멸망과 직결된다. 진평왕 사후 등극한 선덕여왕(632년)은 집권 초기부터 반란에 직면한다. 표면적 이유는 여성이라는 점이었지만, 그 내용은 성골의 단절 때문이다(888년 진성여왕 때도 성골논란이 일어난다). 이후 진덕여왕을 거쳐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성골은 완전히 사라지고 진골이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부여 받는다. 성골의 단절은 많은 진골그룹에게 왕위계승과 관련한 새로운 갈등을 부추겼고, 그 갈등은 백제/고구려/당나라와 전쟁과정과 영토확장으로 해소되는 듯 보였지만, 선덕왕(780년)대에 이르러 태종무열왕계의 단절과 정복전쟁의 중단은 내부의 모순을 더 이상 대외 긴장관계로 대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통일신라 하대와 말기에 등장하는 지방호족들의 대부분은 낙동강 밖에 분포하고 있다... 지도로 보는 한국사에서 재인용...>
그리고 그 갈등이 누적된 800년대 초반 김헌창의 난은 신라의 개혁이나 왕권 쟁탈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당장 김헌창/김범문 부자의 난이 진압된 15년 후 지방호족이라 할 수 있는 장보고 세력을 등에 업은 진골 김우징에 의해 민애왕이 살해되고 그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 왕권쟁탈에 지방호족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50여년 후인 892년 지방호족출신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고, 이에 자극받은 진골출신 궁예는 북원경(원주)에서 발호한 양길을 이어 901년 후고구려(고려)를 개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무너진 정체성을 보완하려 안간힘을 써야하는 흥덕왕과 아예 새로운 정체성을 주창했던 김헌창의 대결은 짧게 끝났지만,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체제는 이 고비를 넘지 못하고 서서히 지방호족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한다. 모호한 기준으로 나뉘었던 성골/진골에 근거한 운명론이 공격받으면서 6두품제도의 기강과 권위까지 무너지고 결국 나라의 정체성까지 해체됐다는 말이다.
<892년 등장한 견훤의 후백제 세력권은 822년 김헌창의 난 당시와 비슷하다... 물론 주요 대척지역도 비슷하다...>
<견훤보다 후발로 등장하는 후고구려 세력은 북원경이던 원주를 기점으로 시작한다... 군사적 목적으로 성장했던 지역임에도 다수의 석불좌상과 철불, 석탑 등이 분포했던 원주는, 양길의 발호 이후 궁예를 거쳐 왕건의 군사 거점도시로 부상한다... 이후 고려초기 흥법사, 거돈사를 비롯해 1080년대 법천사지까지 당대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석조유물을 남겼다...>
이제 다시 의성과 선산지역의 지리적 위상에 대해 정리해보자. 김헌창의 난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잠깐 일어났다 사라진 찻잔속의 회오리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옛 백제지역 대부분에 소백산맥 안쪽의 전통적인 신라의 기반이었던 상주와 김해, 즉 사벌주와 금관경까지 포함됐다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경주의 외곽 방어선이나 다름없는 대구와 청도 경계까지 김헌창이 진출했다. 소백산맥이 아닌 낙동강이 전선이 된 것이다. 그러면 이 난을 진압했던 신라군의 진출로는 어디였을까? 자연스럽게 김해에서 함안-진주를 거쳐 지리산 남로를 통해 무진주를 장악하고 남원으로 올라간 2군과, 구미를 통해 영동으로 올라가 공주로 올라가는 5군, 그리고 의성을 통해 안동이나 영주에서 상주로 진군하여 보은으로 넘어가는 1-4군, 마지막 충주까지 올라가 공주로 내려가는 3군 등 600년대 중반 개설된 교통로를 통해 진군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600년대 중후반 통일신라의 주요교통로/재인용... 본문에서 1~5군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임의로 붙여 본 구분이다...>
나는 이 전투의 향방이 결정된 곳이 바로 선산과 의성이라 생각한다. 즉 상주까지 김헌창의 영향권에 들어간 이상 대구 진출을 막는 길목인 선산 전선이나, 선산을 피해 상주로 향하는 우회로인 의성과 안동전선이 무너지면 경주는 버틸 수 없다. 그리고 웅진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상주를 장악해야만 한다. 역으로 상주까지 진출했던 김헌창의 부대는 이 선산과 의성을 뚫지 못해 패배했다는 말이다. 결국 삼국통일전쟁 때부터 병마의 집결지이면서 동시에 전쟁이 끝나면 중앙군 해산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대구의 양대 길목에 위치한 의성과 구미 선산 지역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부각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지리적 여건과 교통로가 전략과 전술을 좌우하는 육상 전투에서 전략적 요충지라는 게 시대나 사람에 의해 쉽게 바뀌는 건 아닐테니까.
나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흥덕왕이 세운 석탑이 바로 의성 빙산사지와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산과 의성은 9주 5소경 10정 5군진에 속한 지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이 선택된 이유는 9주 중 상주의 중심지이면서 10정 중 음리화정이 있었던 상주의 이반을 견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결국 상주는 900년대 초반 궁예의 세력권에 포섭된다. 반경주 반신라 정서는 뿌리 뽑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선산과 구미는 후백제 세력권으로 넘어간다), 당시 상주와 삭주 그리고 명주의 경계에 위치해 뚜렷한 정치력을 보이지 못한 안동지역보다 군사적 요충지인 의성을 선택한 것으로 생각된다(안동이 정치군사적으로 부각된 것은 왕건과 견훤의 전투에서 등장한 안동권씨부터다. 즉 지방호족으로 태동하고 있었으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지 못해 경주로부터 특별히 경계대상이 되지 못했던 안동은, 이때부터 독립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면서 900년 전후 즉 고려초기부터 지방호족으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국보130호/높이 10m... 의성 탑리리탑의 아류인 죽장동탑과 빙산사지탑의 체감과 결구방식, 양식과 규모는 700년대 전성기와 다르고, 800년대 중후반 석탑들과 전혀 다르다고 본다...>
사실 높이 10m의 죽장동탑과 8.2m의 빙산사지탑 정도 석탑이 들어서려면 그에 합당한 명분과 시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800년대 중반부터 900년대를 통틀어 이만한 체계를 갖춘 기념비적 스케일의 석탑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실제 화엄사 동서오층석탑과 성주사 오층석탑의 규모가 상당할 거 같지만 6.4m 정도에 불과하고, 불륨과 체적에서 이들과 비교되지 않는다. 또 900년대 들어와 상당한 규모의 석탑이 일부 선종의 발흥지에 조형되는데 900년 전후로 보이는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과 970년대로 보이는 부여 무량사지 오층석탑도 7.5m에(보원사지탑은 찰주를 제외한 크기다) 불과하며, 후삼국을 통일하고 950년대 수도 개경에 조형된 불일사 등의 석탑도 오층이지만, 기단부와 기단부 갑석, 지붕돌의 체감과 비례, 미감 등은 통일신라 석탑 양식과 완전히 다르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104호/9m/900년 전후... 찰주까지 포함한 높이로 탑신만으로 10m인 죽장동탑과 규모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보물185호/7.5m/970년 전후... 보원사지탑과 달리 고려 초기 석탑의 부드러운 마감과 중후장대한 백제풍 체감을 갖춘 무량사탑을 보면 죽장동탑의 규모를 비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죽장동탑과 양식적 친연성이 없다...>
물론 기념비적 석탑이라고 해서 모든 연원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추정할 수 있는 합당한 근거는 있어야 하는 것이고, 건탑지역과 흥덕왕의 존재를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이유를 나는 찾지 못하고 있다(당시 조형된 칠곡 기성동탑 - 의성 빙산사지탑 - 영주 부석사탑(1군), 구미 직지사탑(청풍료) - 선산 죽장동탑 - 상주 화달리탑 - 문경 봉암사탑 - 충주(3군), 창녕 술정리서탑 - 구례 화엄사사자탑 - 남원 백장암탑/광주 지산동탑(2군), 그리고 성주 법수사탑 - 합천 청량사탑(2군) 등은 김헌창의 난 진압군의 진격로에 위치하고 있다. 흥덕왕대 이전부터 조형되고 있었지만,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었다). 또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전승기념탑은 수도나 전승지에 세워지는 것이지 정복지에 세워지지 않는다. 멸망한 백제의 수도 부여와 공주에 기념탑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고,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며 성장한 로마제국의 전승비는 모두 로마의 수도에 세워졌다는 말이다.
<트라야누스 원주/로마 포로임펠리얼리/113년/높이 35m... 트라야누스 황제가 다키아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로마의 포룸에 세운 기념비로, 총 길이 190m에 이르는 부조가 탑신을 23바퀴 감고 올라간다... 로마 동전에는 원주 상륜부에 독수리가 있지만, 트라야누스 황제상으로 대체됐다 하고 현재 모습은 1587년 복원한 청동상이다... 아무튼 로마는 정복민들이 반발하거나 재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철저히 기존 문명을 파괴 응징했고, 현재 유럽의 주요도시들은 로마군단이 주둔했던 곳을 중심으로 건설된 당시로는 신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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