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68> 국보130호 - 이형석탑의 대미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1312

 

 

 

 

 

 

 

 

      3)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 기념비적 이형석탑의 대미와 전성기 석탑양식의 해체

 

 

 

김헌창의 난 진압 이후 흥덕왕은 의성 빙산사지탑 외에 또 하나의 기념비적 스케일을 가진 석탑을 조성하니 그것이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이다. 이런 분명한 시대배경과 건탑의 목적에도 불구하고, 양식적으로 접근하면 석탑의 제작 시점을 설정하는데 가장 애매모호한 것이 죽장동탑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탑리리탑 양식이지만 상하층 이단의 기단부를 갖췄고, 이단 기단부이지만 경사형 갑석에 상하층의 양식적 일관성이 없으며, 상층기단부 탱주와 괴임은 별석으로 가공해 고식이지만 층급받침과 낙수면 층단은 일정한 규칙이 없고, 여기에 각층 몸돌은 우주도 없으며 장대한 석탑 규모에 맞지 않은 부드러운 기운으로, 전체적인 체감을 초기 형태의 불안정이나 중기의 다양한 실험, 혹은 후기 석탑의 퇴화와 약화로 설명해야 할지 모호한 점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높이 10m... 석탑의 편년 설정에서 가장 어려운 석탑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가장 큰 규모의 국보탑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연구성과는 미비하다고 생각된다...>

 

 

 

그런 이유로 탑평리탑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인 600년대 후반에서 말기인 900년대 초반까지 뜬구름 같은 편년설정만 있을 뿐 국보탑임에도 특별한 연구성과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내가 그걸 보충할 수는 없고, 눈에 띄는 몇가지를 조금 더 메모하면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먼저 죽장동탑이 고식이라는 근거로 제시된 것 중 하나가 상층기단부 탱주를 면석에 모각한 것이 아니라 별석으로 가공해 조립했다는 점인데, 탑신을 떠받치는 하부의 우주나 탱주가 별석으로 가공된 경우는 정림사탑과 미륵사탑(일층몸돌이다), 탑리리탑이 유일하지만, 일층몸돌까지 범위를 넓히면 탑리리탑에서 감은사탑/고선사탑, 그리고 탑평리탑까지 편년이 넓어지고, 죽장동탑은 탑리리탑과 같이 감실이 있음에도 일층몸돌에 우주를 별도로 구성하지 않았다.

 

<죽장동탑... 생각보다 매우 육중하고 우람한 체격을 갖췄음에도 장쾌하거나 시원시원하다기보다, 부드러운 기운이 앞선다...>

 

 

 

 

즉 상층기단부 탱주가 별석이라는 점은 초기 석탑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축적 결구가 사용됐다고 주장하기에 적용된 범위가 극히 한정적이라는 말이다. 또한 이런 주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하층기단부에도 탱주가 있어야 하고, 그 탱주 역시 별석으로 가공되어야 하지만, 죽장동탑의 하층기단부로 보이는 장대석에는 탱주가 아예 없다.

 

<죽장동탑 기단부... 본래부터 있었던 석재와 후대에 교체한 석재가 완전히 다르다...>

<의성 탑리리탑 기단부... 800년대 사람들의 시선에 이 탑리리탑의 기단부는 오히려 불안정하거나 불완전하다고 생각됐을지 모른다... 즉 죽장동탑의 현재 2층 기단부는 후대에, 당시의 미감과 체감을 고려해 의도적으로 높이기 위해 갑석을 경사형으로 마무리했다는 생각이 짙다...>

 

 

 

 

 

또 하층기단부 갑석을 제외하면 면석으로 가공된 것이 아니라 두툼한 장대석을 통돌 형태로 구성하여, 갑석과 면석을 통돌로 가공한 영양 화천동탑이나 현일동탑과 같은 방식으로 800년대 전반기에 이 두 탑에 한정해 나타났다가 사라진 양식이다. 때문에 가장 앞선 고식을 기준으로 하는 것보다, 가장 늦은 양식이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있는 (석탑의) 편년설정에서, 하층기단부 구조가 면석을 조립한 건축적 결구방식이 아니라 석탑이 전성기 이후 800년대 초반의 적층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은 죽장동탑의 편년설정에 매우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생각된다.

 

<영양 화천동 삼층석탑... 800년대 전반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화천동탑의 하층기단부는 갑석과 면석이 통돌로 가공되어 있다... 즉 지대석과 같은 장대석이 기단부로 사용됐다는 말이다... 이는 기존의 하층기단부까지 건축적 결구방식이 사용됐던 것에 비해, 한단계 공예적으로 변모하는 매우 주요한 단서가 된다...>

<영양 현일동 삼층석탑으로 화천동탑을 계승한 양식이다... 그리고 자세히보면 이 두탑의 지대석은 땅에 매립된 상태에서 하층기단부를 떠받치는 게 아니라, 지상에 노출되어 화엄사 사사자석탑과 동일하게 하층기단부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측면지지 역할을 병행하고 있다... 석탑의 구조적 취약점을 개선하면서 보존에 용이한 방식을 찾아낸 것이다... 나는 이런 변화과정을 공예화의 완성이라 생각한다...>

 

 

 

 

 

 

두 번째로 부연이 없는 상층기단부 갑석과 상하층기단부 괴임돌은 2단의 별석으로 가공되어 있어 분황사탑과 탑리리탑에서 보이는 고식이 적용됐지만, 상하층기단부 갑석은 화엄사 사사자탑에서 보이는 경사형으로 가공되어 있어 800년대 이후 양식이 분명하다. 결국 이 점도 고식과 후대의 퇴화된 양식이 혼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관성이 없고, 일층몸돌을 비롯 각층 몸돌에 우주가 생략된 것을 감안한다면 초기 양식보다는 전성기 이후 기법이 주요하게 사용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별석으로 가공된 탱주와 괴임돌 등은 탑신에 사용됐던 석재와 질감이 완전히 달라 후대에 교체 혹은 추가된 것들로 보인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죽장동탑의 지붕돌과 몸돌... 그나마 지붕돌의 일정한 규칙은 몸돌을 조형할 때는 고려하지 않은 듯 싶다...>

 

 

 

 

그리고 죽장동탑에 고식이 사용됐다는 세 번째 주장이 지붕돌 구성방식이다. 지붕돌을 자세히 보면, 1층부터 3층까지는 각각 낙수면과 층급받침을 4매씩 2겹으로 8조각을 조립해 지붕돌을 만들었지만, 4층은 2매, 5층은 하나의 돌로 가공했다. 3층까지 8조각으로 나눠 지붕돌을 결구한 것은 초기석탑인 감은사탑과 비슷하지만, 4층 위부터 일관된 숫자를 유지하지 않고 부재의 개수를 줄인 것은, 낙산동탑과도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이 석탑에 들인 정성과 공력이 이전 석탑보다 못한 결과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삼층석탑이란 차이가 있지만 감은사탑/고선사탑이나 낙산동탑은 일관된 결구방식을 위해 부재의 규모가 작더라도 갯수를 줄이지 않았는데, 죽장동탑은 각 부재의 규모가 작아지면 곧바로 쉬운 방법을 선택했고, 하부 지붕돌의 가공과 인양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이해하고 싶어도 나원리탑에서는 더 크고 넓은 지붕돌을 하나 혹은 둘로 나눴는데 이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장동탑 탑신... 오층까지 올라가기 위해선지 탑평리탑처럼 각층 지붕돌의 층급받침은 엷다...>

 

 

 

또한 각층의 층급받침은 6단-5단-4단-3단-3단, 낙수면은 7단-6단-6단-5단-6단으로 만들어져 리듬감이 있지만 뚜렷한 규칙도 없고, 층급받침에 비해 낙수면의 층단은 균일하지 않다. 층급받침이 균일하지 않는 것은 전형양식이 해체되는 820년대 이후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감은사탑 이후 700년대 전성기 석탑에서는 한번도 나타난 예가 없으며, 탑리리탑처럼 낙수면까지 층단으로 조성한 낙산동탑과 빙산사지탑도 이런 불규칙한 변화는 없었다. 즉 부재수와 층급받침, 낙수면의 층단 수를 보면 죽장동탑은 낙산동탑은 물론 빙산사지탑에 비해서도 양식적인 해체가 더 뚜렷하다는 말이다.

 

<죽장동탑 탑신... 아래서 올려다보면, 일반적인 조화와 비례에서 비켜나 있어 언듯 거칠거라는 선입견은 사라지고, 매우 정연하며 세심한 손길이 살아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지붕돌 결구방식에서 전통적인 건축적 결구방식이 해체된 퇴화된 양식이란 결정적인 증거는 낙수면 부재와 하부의 층급받침을 이루는 부재의 규격 차이다. 죽장동탑은 지붕돌을 2겹으로 결구한 감은사탑/고선사탑/나원리탑과 반대로 낙수면의 폭이 층급받침보다 좁다. 즉 건축으로 이야기하면 공포구조가 지붕보다 넓다는 말이다. 이런 역행은 탑의 규모 때문에 눈에 보이는 층급받침을 우선시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빗물이 흐르면 표면장력으로 끝에 고인 물은 낙수면과 층급받침 부재 틈새를 통해 내부로 흘러 감실로 유입되거나 몸돌을 타고 흐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기 때문에, 석재의 풍화와 열화를 촉진시키거나 감실내부에도 이끼가 끼는 등 구조적으로 절대 안정적이지 않은 수법이다. 올려다보기에는 이음새가 없어 단정하게 보일지 몰라도, 건축적 상식이 있다면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방식이다.

 

<햇살이가 만든 소원의 탑... 수년전 초등학교 다닐 때 햇살이가 만든 탑을 보면서 깜짝 놀란적이 있다. 아이의 눈에 비친 탑에 지붕이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키가 아주 작은 그녀의 시선에 낙수면은 보이지 않았을 수 있고, 또 그럴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소위 공포구조가 번안된 층급받침만 보이고 낙수면은 아예 생략했다. 어려웠을까? 아니면 개념이 없었을까? 둘 다가 아니었을까??... 나는 죽장동탑을 보면서 햇살이의 시선을 생각한다. 죽장동탑을 만들었던 석공들에게 지붕의 낙수면은 굳이 층급받침보다 넓어야 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탑은 이미 건축이 아니라 모형이었기 때문에... 나는 건축의 기능과 상식과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모형화된 탑의 대표적 형상이 죽장동탑이라고 생각한다... 죽장동탑은 건축과 모형의 절묘한 조합이지, 이미 건축이 아니었다... 아무튼 햇살이가 만든 소원의 탑은 3층이었고, 감실이 있으며, 또 우주와 창방이 있다... 죽장동탑을 만든 이들과 햇살이는 불탑에 대한 똑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었을 거 같다...^^>

<층급받침 위에 올려진 낙수면...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자꾸 어색해 보이는 건, 내가 너무 건축적 결구를 강조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비겁함이라고까지 표현할 필요는 없는데 말이다...>

 

 

 

물론 이런 이유 때문에 낙수면을 여러개의 부재를 나눠 층단으로 적층한 모전석탑 방식의 지붕돌은 관리 등의 문제로 유행하기 힘들었고 결국 하나의 통돌을 가공하는 방식으로 바뀌지만, 죽장동탑은 탑리리탑/낙산동탑/빙산사지탑에 비해 지붕돌을 2겹으로 단순화했음에도 건축의 상식에 역행한 것은 제작에 투입된 석공들의 경험미숙이나 전통기법의 단절로 밖에 이해할 수 없어, 석탑조형에 들인 공력과 정성의 약화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그 외 죽장동탑을 초기 석탑으로 볼 수 없는 이유로 감실 마감이 눈에 띄는데, 좌우와 상부에 액연을 두고 별석으로 만든 하부까지도 장식용 액연을 연장, 탑리리탑에서 사용된 목조건축의 문지방과 신방석 양식이 사리진 형태로, 고선사탑/장항리탑은 물론 간월사지탑의 문비보다 시대적으로 떨어진 것으로 보이며, 무엇보다 일층몸돌에는 안쏠림도 적용되지 않았다.

 

<각층 몸돌의 배열과 구성을 보면, 자꾸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이나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이 생각난다...>

 

 

 

그러나 또 이런 이유 때문에 죽장동탑 조형시점을 900년대 이후로 늦춰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먼저 몸돌 구성에서 통돌도 아니고 면석도 아닌 어중간한 구성에 우주가 없지만, 지붕돌의 복잡한 구성에 대응한 단순한 처리로 이해할 수 있고, 부연없이 지나치게 돌출된 층단으로 마무리된 노반도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면 크게 의미를 부여할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했듯 800년대 말에서 900년대 초반에는 5~6m 규모의 석등이나 선승들의 탑비는 조성했을지언정 이런 규모의 석탑을 조성한 예가 드물고, 선산지역은 후백제와 고려, 그리고 통일신라의 전략적 요충지였던만큼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또 950년대 후삼국의 쟁패가 완료되고 고려왕조가 공을 들인 불사는 개경에 집중되었고, 법상종과 화엄종, 선종이 근거한 지역에서 조성한 7m 이상의 거탑(보원사지탑/무량사탑) 양식과 비교할 때 죽장동탑은 완연한 통일신라 석탑의 체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실 용암리 석등... 800년대 후반, 지리산을 근거로 한 무주와 남원일대에는 새로운 석등이 등장한다. 고복형에 화사창의 개수가 늘어나고 복련 뿐만 아니라 지붕돌에도 귀꽃이 솟아 있으며, 무엇보다 그 규모가 석탑에 버금갈만큼 장대하면서 장중한 기운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담양 무등산의 개선사지를 비롯해 남원 지리산 실상사, 구례 지리산 화엄사를 통해 양식적으로 정립된 이 석등들은 다시 승탑양식과 함께 변화된 양식을 주고받으며 발전하지만 더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합천 매화산 청량사와 영양 미천골 선림원, 여주 고달사 등에 고복형 석등을 남기며 단절된다... 상륜부가 결실된 상태에서 5.2m인 세련되고 우아하면서 장중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석등 중 하나다...>

 

 

 

 

해서 나는 전성기 석탑의 양식적 퇴화 과정에서 마지막 전제군주를 꿈꾸던 흥덕왕 형제가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이후 전략적 거점이던 선산에 의성의 빙산사지탑과 같은 의도로 죽장동탑을 건립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추정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이 죽장동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역시 사견임을 전제하다면 탑리리탑이나 빙산사탑과 같은 단층기단부에 오층으로 조형됐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재건하면서 지금의 모습으로 변형됐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18매로 이뤄진 하층기단부는 건축적 결구와 무관한 방식의 지대석에 가깝고, 상하층기단부 갑석과 탱주는 기존 석재와 색감과 질감이 다른 바위로 가공돼 후대에 교체됐으며, 하층기단부 갑석이 상층기단부 면석 밑으로 들어간 것은 원형을 유지한 체 외부에서 보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해체한 후 재건립(최근 석가탑 재건처럼)한 흔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죽장동탑 기단부를 볼 때마다 재건하는 과정에서 원형이 변한 걸 아쉽게 생각하는 입장이다...>

 

 

 

물론 죽장사 주변으로 뚜렷한 하천도 없고, 통일신라 창건 당시 서황사의 뒷산 비봉산(지도에는 형제봉이라 나온다)도 해발 50m 정도에 불과해 상시적인 호우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돼, 약간 비약일 수 있지만 집중호우 등을 감안한다면 가능한 추정이다. 또 몸돌이나 지붕돌이 고선사탑이나 낙산동탑만큼 붕괴에 의한 파괴 흔적도 없고, 열화와 풍화에 의한 표면 탈락 정도만 보이기 때문에, 장마나 홍수로 인해 상부토층이 유실되거나 정혜사지탑에서 보이는 낮은 토단이 걷히면서 지대석이 노출된 상태에서 재건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현대 들어와 보수되기 전에는 내부의 적심층 골재들이 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현재의 상층기단부 면석들이 왕궁리탑이나 감은사탑처럼 자중에 의해 기울어지거나 벌어지는 현상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죽장동탑은 현재의 대웅전 정면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우측 야산의 경계에 상당히 가깝게 붙어 있다... 그런면에서 보면 여기 가람배치는 송림사처럼 左금당 - 右석탑 - 後강당 구조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석탑의 오른쪽 뒤편은 깊지 않지만 경사지와 근접해 호우 등에 의한 지속적 침식과 토사유출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흘러들고 퇴적된 자양분을 근거로 선산은 분지임에도 넉넉한 터전을 가졌을지 모르겠고... 아무튼 비봉산 서황사. 죽장리라는 마을이름 때문에 죽장사로 불렸지만 고전되는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한마을이 아니라 격변하는 통일신라를 담고 싶어했을지 모를 규모임에도, 그 품까지 넉넉했는지는 모르겠다...>

 

 

 

 

 

 

 

결국 나의 추정은 ① 최초, 탑리리탑과 같은 의도와 양식으로 넓고 낮은 1단의 기단부만 갖추고 있었는데, 상부토층이 유실돼 매설됐던 지대석이 노출되었거나, ② 처음부터 화천동탑처럼 하층기단부를 통돌로 가공한 2단의 기단부로 구성했을 두가지의 가능성에서 출발한다. 이후 1530년대까지 서황사로 유지되다가 페찰된 다음, 1950년대와 1990년대 추가 보수하는 과정일지 또는 그 이전 언제일지 모를 시점에 죽장동탑을 전면 해체 복원하면서, 원래의 탑신과 다른 석질의 바위를 가공하여 경사면 양식의 갑석으로 교체하거나 추가하고, 일부 파손된 기단부 면석의 탱주와 상층기단부 갑석도 경사형으로 교체, 괴임도 추가하면서 원형이 변형됐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데, 죽장동탑은 탑리리탑이나 빙산사지탑처럼 하층기단부를 제외하고 볼 때 오히려 완성도가 살아나고 제대로 된 위용을 갖춘다고 보인다.  

 

 

 

 

 

<나원리 오층석탑 구조도/솔뫼님 블로그에서... 나는 죽장동탑의 하층기단부는 이처럼 매립된 지대석이 노출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 석탑이나 당간지주 등 입면이 강조된 석조유물들은 지반개량이 구조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요하다... 때문에 정림사지탑이나 미륵사지탑, 황룡사지탑 등도 판축기법, 소성기법 등 지반개량에 상당한 시간과 공력을 투입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를 한번 더 보강하는 게 지하에 통돌을 매립하여 상부하중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상부토층이 유실돼 지대석이 노출된 경우가 있는데, 이는 전체적인 입면의 조화를 비례를 깨뜨려 어색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기단부의 비대가 오히려 눈에 거슬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죽장동탑을 볼 때 하층기단부를 가리고 보는 게 애초의 의도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탑리리탑이나 빙산사지탑처럼 목조건축에서 사용되던 석단을 번안한 형태가 더 조화롭게 보인다는 말이다... >

 

 

 

 

 

 

다만 문제는 탑신에서의 지나친 간소화와 유약함이다. 각층 몸돌의 우주도 사라지고 층급받침이 낙수면보다 넓다는 점 등 규모를 위해 투입한 공력에 비해 건축적 구조적 완성도가 떨어지고, 장대한 크기에 비해 긴장감이나 위압적인 느낌도 떨어진다. 사실 설화와 두탑의 선후 및 완성도는 별개의 문제겠지만, 인근 낙산동탑과 묶어 오누이가 힘자랑을 할 때 이겼다는 누이가 쌓은 죽장동탑은 설화의 상징처럼 중후한 느낌보다 여성적인 부드러움이 앞선다. 여기에 하층기단부의 비대로 깨진 비례는 구조의 과대와 과소가 주는 지나친 안정감과 빈약함이 때로는 비겁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왜 이런 불편함이 820년대 통일신라의 상황과 오버랩 되는지 모르겠다.

 

 

 

<원성왕은 당대의 진골과 육두품에 대해 많은 한계를 느끼면서 독서삼품과 등 개혁조치를 실시한다...>

 

 

학문을 연마한 뒤에 벼슬을 하는 자는 사물에 대하여 근본을 먼저 바르게 처리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물의 벼리 하나를 들어 올리면, 만 개의 그물코가 바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학문을 연마하지 않은 자는 이와 반대로, 사물에 선후와 본말의 순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구구하게 지엽적인 것에만 정신을 빼앗기게 되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이익을 삼기도 하고, 백성을 까다롭게 감찰하는 것만으로 높은 체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고 해도 도리어 해치게 된다. 그러므로 『예기』의 「학기(學記)」편에서는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상서』에도 또한 “배우지 않으면 벽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같이 답답하며, 오직 일을 처리하는 것이 번거롭기만 하다.”고 하였으니, 집사 모초의 한 마디 말은 만대의 모범이 될 만하다 ’

[네이버 지식백과] 원성왕 [元聖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2012.8.20/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인용...)

<흥덕왕은 원성왕의 의도를 충분히 감지하고 실행에 옮길만큼 야망도 크고 정략적이며 적극적인 행동파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결과론적 이야기지만 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까지는 갖추지 못했던 거 같다...>

 

 

 

유학적 체계를 갖춘 인재등용을 위해 독서삼품과를 실시(788년)해 골품과 신분제의 폐해를 극복하고 분위기를 일신하면서 경덕왕대 무너진 전제정치를 복원하려던 원성왕의 노력은 40여년 후 그 손자 흥덕왕 형제를 끝으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죽장동탑을 보면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백성들의 염원에서 벗어나 신분제의 질곡은 해소하지 못하고 자꾸 군더더기만 하나씩 늘린 거 같아 왠지 거북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다. 탑리리탑을 닮고 싶었던 흥덕왕의 염원, 그러나 통일신라 초기 석탑들에서 느끼는 질박함이 주는 강렬한 기운과 절제된 미감을 죽장동탑은 살리지 못했다. 또 정형에서 벗어나려는 일탈이 과거의 영광에 기대 더 커진 그릇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응축된 힘과 자신감을 살려내지 못한 것은 문화적 성숙만큼 미래를 지향하는 방향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흥덕왕이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이후 이 석탑을 세웠다면, 그는 이 석탑에 완성의 의미를 담았을까? 새로운 도전을 담으려 했을까? 전자에 가깝지 않았을까?...>

 

 

 

 

다양성을 확산하고 경주를 벗어난 공간적 확대에도 불구하고 800년대 초반 이후 통일신라는 형식만 남긴체 퇴화된 형태로 과거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다. 거석신앙이 불교와 풍수비보의 염원을 담아 석탑으로 정착했을 때의 긴장감과 정제된 엄정함은 불교라는 옷과 기복신앙이 두터워질수록 약화되고, 눈에 보이는 장식적 화려함과 거대한 규모에 안주하고 말았다. 흥덕왕은 통일신라, 결국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 있는 석탑을 세웠지만 그들의 리듬은 이미 느슨해졌고 유약해 미래를 추동할 힘을 만들지는 못했다. 사회가 갈등을 내부에서 해소하고, 새로운 에너지를 미리 만들지 못하면 활력을 잃고 싶게 노령화된다. 죽장동탑의 부드러움이 우아함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장대한 위용이 노쇠하게 보이고, 일관성을 잃고 타협하고 후퇴한 게 비겁함으로 느껴지며, 텅빈 감실에 앉은 불상이 정겹게만 보이지 않고 마냥 작아 보이는 이유다.

 

 

 

<이제 죽장동탑까지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에 대한 소개는 끝나고, 이제 마무리만 남겨 놓은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