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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신라시대 삼층석탑 67> 보물327호 -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1312

 

 

 

 

 

 

 

 

      2)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 탑리리 오층석탑을 계승한 기념비적 이형석탑

 

 

그럼 이제 석탑의 편년으로 들어가 본다. 먼저 빙산사지 오층석탑에 대해 살펴보면, 이 탑은 누가봐도 탑리리탑을 모본으로 한 모방/계승 양식이다. 단층기단에 오층탑신으로 이루어져 있고, 낙수면도 층단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층몸돌에는 감실이 있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각각 4단이고, 낙수면은 5단의 층단으로 구성되었지만 5층 낙수면에는 노반받침 일단이 더 있다. 또한 일층몸돌 괴임은 별석 각형 1단으로 구성되었고, 기단부 갑석은 부연이 없으며, 노출된 지대석도 1단으로 마무리되어 있다. 이중 탑리리탑과 다른 가장 중요한 점은 탑의 규모가 9.6m에서 8.2m로 줄었다는 점일 거 같은데, 이런 영향 때문인지 층급받침과 낙수면 층단이 각각 1단씩 줄었다. 1층몸돌을 비롯해 각층 몸돌에는 우주와 탱주가 없으며, 기단부 탱주도 1개로 줄어있고, 감실하단의 신방석이 돌출없이 민자로 가공되었다는 점이다.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 90년대 후반, 처음 이 석탑을 보면서 당황했던 적이 있다... 주어진 정보가 한정되고 내 관심이 짧았던 시절이었던 것만큼, 나는 '모방'이나 '후기'라는 너무 몇가지 개념에 막혀 이 석탑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오늘은 그걸 조금이라도 풀어보려 한다...>

<빙산사지탑 뒤쪽으로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1탑 1금당의 정형적인 가람배치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고려초라는 설명이 맘에 들지 않아 시작한 글이기도 하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탑리리탑 보다 후대가 분명하지만, 같은 계통의 낙산동탑이나 죽장동탑, 그리고 여타 기본형 석탑과의 선후가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2층 기단부에 하층기단부 탱주 3개, 상층기단부 탱주가 2개인 낙산동탑에 비해 빙산사지탑이 앞선다 말하기 어렵고, 죽장동탑이나 기본형 석탑과 선후를 비교할 논점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검토된 사항이 빙산사지탑에서 출토된 사리갖춤이 아닌가 싶다. 먼저 작은 녹색 유리병과 전반적으로 단순화된 사리함을 근거로 신라말 고려초기 제작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거 같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왜냐하면 이와 비슷한 사리갖춤이 출토된 곳이 더 있고, 이들과 친연성이 높다면 그 석탑이나 사리갖춤이 오히려 편년의 기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생각보다 장대한 규모에 매우 정연하고 치밀한 구성으로 한치 흐트러짐이 없는 매우 좋은 탑이다... 다만 아쉽다면 절제된 힘과 생동감인데, 과도기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것만 극복했다면...>

<빙산사지탑 기단부와 일층몸돌...>

 

 

 

석탑뿐만 아니라 불상에도 양식적 흐름이 있듯이 사리갖춤과 사리기도 시대적 흐름이 있다. 이중 사리외함만 살펴보면 현존 최고(最古)의 사리함은 567년 부여 능사지 목탑 심초석에서 발굴된 창왕명 석조사리감이지만, 온전한 사리갖춤이 발견된 곳은 익산 미륵사지서탑(639년)으로, 기하학적 무늬와 넝쿨무늬가 어우러진 화려한 기법에 뚜껑이 있는 금제(金製)사리호(항아리가 아니라 꽃병 모양이다)였고, 왕궁리탑에 이르면 사각형 금제(金製)함(사리내외함)으로 바뀌어 600년대 후반 감은사탑(682년)/나원리탑/황복사탑(692년)의 금동사리함으로 이어지다가, 80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황룡사목탑(872년)/선산 도리사탑/문경 내화리탑 등에서처럼 다각원당형함으로 바뀌고 이후 고려시대에는 매우 다양한 양식으로 변한다.

 

  * 사리함의 변화...

사리함에 대해서는 이미 <나원리탑과 황복사지탑>에서 이미 살펴봤고, 여기에서는 대표적인 몇가지 자료만 살펴보기로 한다. 사진 외에 자료는 <적멸의 궁전 사리장엄/신대현/한길아트>에서 스크랩했다...

 

<백제 창왕명 석조사리감/국보288호/567년/높이75cm/부여국립박물관에서... 감실형으로 제작된 석조로, 현재 부여의 백제문화단지에 재현되어 있는 능사지 목탑의 심초석에서 발굴되었다...>

<익산 미륵사지서탑 금제사리호/639년/미륵사지 유물전시관에서... 미륵사지 서탑 해체과정에서 발굴된 금제 사리호다... 완벽에 가까운 비례와 체형, 부드럽고 세련된 문양을 갖춘 이 사리함은 금동이 아니라 금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외함으로 보이는 이 호와 내함으로 보이는 또 다른 호가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 출토 금제 사리함과 유리병/국보289호/전주국립박물관에서... 사각 상자형으로 바뀐 왕궁리탑 사리함 역시 금제다...>

<왕궁리탑 사리갖춤 중 금강경판이 보관되었던 금동함... 645년 전후 백제의 사리함이 사각형으로 바뀐데는 금강경판 봉안 및 사리공이나 사리함의 제작 편의를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감은사지 동탑 사리외함/보물1359호/682년/리움 삼성미술관에서... 감은사탑에서 발굴된 사리외함은 보물1359호(동탑), 보물366호(서탑)으로 별도 지정되었는데 동탑 게 최근에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외함에 환조에 가까운 사천왕상이 덧붙어 있고,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사리내함이 별도로 있다...> 

<나원리 오층석탑 사리갖춤/600년대 후반/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사각 상자형 사리외함은 금동제다...>

<산청 내원사 석남암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제 사리호/766년... 석탑 외에 석불좌상에도 사리함이 봉안된 예이며, 금제나 금동판 외에 납석제 항아리형으로 만든 사리함도 많이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부산시립박물관에 있다는데 직접 보지 못했다...>

<황룡사지 구층목탑 사리외함/872년... 사각형으로 조형되던 사리외함이 팔각당형으로 바뀐 예다... 같이 출토된 찰주본기는 친견했지만, 이 사리외함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700년대 중후반에 두가지의 다른 형태가 등장하는데 하나는 청동제와 납석제로 만든 항아리 모양 외함으로 김천 갈항사지동서탑(758년,청동제)/석남사지불상(766년,납석제)/포항 법광사탑(828년)/봉화 서동리동탑(납석제)/청도 장연사지동탑(목제)/동화사 비로암탑(83년,납석제)/봉화 축서사탑(867년,납석제) 사리호가 있고, 또 하나는 석가탑과 남원출토, 그리고 빙산사지탑에서 출토된 투각 사각형 사리함이 그것이다. 결국 사리외함은 크게 상자형과 항아리형으로 나눌 수 있고, 다시 상자형은 금판, 금동판, 석함(영양 삼지동 모전석탑)과 사각형, 다각형, 투각형으로 나뉘어지는데, 빙산사지탑 사리갖춤은 청동판을 가공한 사각상자형 중 투각한 형상이 되고, 이 양식은 석가탑에서 출발 잠깐 유행하다 단절된 양식이다(고려시대 수종사 등에서 다시 투각형이 만들어지는데, 이때는 14세기이며 소재도 은제이고 정밀한 세공으로 조형된다).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사리함과 사리갖춤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변하는데, 소재와 형상 등이 매우 다양하다...리움 삼성미술관에서...>

<그리고 보각형 사리함도 매우 화려하게 조형된다... 리움 삼성미술관에서 은제 사리함...>

<이렇게 고려시대 사리함들이 작고 합 같은 모형으로 바뀐데는, 통일신라까지 전승되던 경판이나 사리, 그리고 소탑과 불상 등이 함께 봉안되지 않아 규모가 축소됐기 때문인 거 같다... 그리고 목탑이나 불상, 불단 등에는 오히려 1m에 가까운 청동탑들이 함께 봉안되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엔 별도의 사리외함을 만들지는 않았고, 사리외함은 청자 항아리가 많이 사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나는 빙산사지탑 사리함이 석가탑 사리함이 만들어진 시기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741년/석가탑 창건~780년/다보탑 하한연도), 800년대 중반 이후 활발하게 분포된 다각원당형이나 항아리형 사리갖춤과 완전히 다른 양식임을 감안하면 사리함을 근거로 900년 전후를 빙산사지탑 편년으로 설정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런 주장에는 석가탑 사리함에 비해 가공기법이나 문양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 이유로 제작시점을 100년 이상 뒤로 미루는 것은 너무 작의적이고 30~60년 후대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남원출토 사리갖춤과 관련성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 보각형 사리내외함의 변화

사리함 중 전각 모습을 갖춘 보각형만 몇 개를 모아보면, 그 시대적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

 

<감은사 동탑의 사리내함/국립중앙박물관에서... 앞서 보았던 사리외함 내부의 사리함으로 내부에 유리병에 사리가 봉안된다... 기단 상륜부가 없고 청동녹이 많이 쓴 서탑의 사리내외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관 상태가 좋은 동탑은 내함도 온전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데, 우리나라 사리함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내함... 감은사탑 사리함 보다 앞선 시기로 보는 입장이 있으나, 나는 750년대로 보는데, 내부 난간의 문양은 법륭사나 경주 동궁지(안압지), 그리고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의 문양과 같은 양식이다... 감은사탑 사리내함에 비해 유리병이 크고, 꽉 차있다...>

<광주 서오층석탑의 사리함... 고려 초기로 보이는 작품으로 기단부의 안상은 백제의 청동반가사유상 및 청동불에서 부터 사용된 문양으로, 이후 감은사탑 - 석가탑 - 황룡사목탑과 거의 비슷하며, 문경 내화리탑이나 조선시대 수종사탑은 이의 변형된 형태로 보인다...>

<남양주 수종사 승탑 사리갖춤/보물259호/리움 삼성미술관에서... 뚜껑이 있는 청자 항아리(청자유개호) 내부에 봉안된 사리갖춤으로 육각당형 사리내함은 투각형이며 은제다... 옆의 유리병은 은제사리내함 내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예 전각식으로 만든 사리함도 있다/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단순한 상자형이 아닌 보각형은 꾸준히 전승됐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일본과 비교하여 통일신라의 독창성이 유감없이 발휘됐다는 감은사탑 사리내함과 비슷한 양식을 보각형이라 부르는데(적멸의 궁전 사리장엄/신태현/한길아트) 그 맥을 잇는 게 석가탑-송림사전탑-남원(탑)-광주 서오층탑이고, 일반적으로 남원(탑) 사리갖춤의 편년을 8~9세기로 본다. 문제는 빙산사지탑 사리함이 석가탑-남원(탑)과 같은 양식과 기법이고, 특히 사리병은 남원(탑)과 똑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빙산사지탑 사리함은 이들과 달리 기단부가 없는 상태뿐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이런 친연성에도 불구하고 남원(탑) 사리함 편년과 100여년의 차이를 둬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투각 보각형 사리함

그리고 빙산사지탑의 사리함을 검토하기 위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가탑과 남원(탑)의 사리함만 따로 모아 보았다... 모두 사각형이고, 옆면을 투각한 형상으로 전성기 통일신라시대 한 때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국사 석가탑 사리함/국보126호...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데 직접 보지는 못했다...>

<남원 출토 사리함/국립전주박물관에서... 불상 좌대를 연상케하는 하부 기단이 매우 화려하고, 투각형 면체를 살리기 위해 신장상은 독립적으로 구성해 매우 독특한 형상을 갖추고 있다...>

<빙산사지 오층석탑 사리함과 유리병/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석가탑 사리함처럼 하부에 기단을 갖추고 있다면 같은 양식이며, 사리를 담은 유리병은 남원(탑)과 역시 같은 양식이다... 이런 양식의 사리갖춤을 볼 때 빙산사지탑의 편년은 고려초보다 800년대 초반이 더 합리적인 추정이 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석탑의 규모와 치석수법, 미감에서 고려초기 석탑들과 아무런 양식적 공통점이 없으며, 김헌창의 난을 진압한 이후 흥덕왕에 의해 의성에 이 정도 규모의 석탑, 그것도 문무왕의 영광을 재현할 목적으로 앞선 시대의 탑리리탑과 똑같은 형태의 석탑을 만들 개연성이 어느 배경보다 높다. 결국 지리적 위치, 시대적 배경, 그리고 사리갖춤의 양식 등을 감안한다면 빙산사지탑의 편년을 800년대 초반 흥덕왕대에 만들었다는 추정이 그렇게 비약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매우 간결하고 담백한 미감에, 치밀하고 꼼꼼한 마무리는 어느 석탑에 투입된 정성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장대한 규모에도 불구하고 위압감을 주지 않는 것은 단점보다 장점이 아닐까 생각되고...>

 

 

 

그리고 실제 석탑의 체감과 미감에서도 빙산사지탑은 통일신라 전성기 석탑이나 이후의 여느석탑과 견주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정연하고 안정적인 구조에 정밀하고 능숙한 치석기법을 보고 있노라면 700년대 전성기 석탑에 견줄만 하다. 다만 이런 뛰어난 가공기법과 정성스러운 마감에도 불구하고 너무 오랫동안 빙산사지탑은 탑리리탑의 위명에 가려 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역으로 빙산사지탑의 형태를 모방의 가벼움이 아니라, 전통의 계승차원에서 접근하면 오히려 자랑스러울 정도로 장대한 규모에 준수한 맛을 잘 살려냈다.

 

<층단으로 구성된 낙수면 때문에 너무 엄정하고 딱딱해 보여 세련되거나 준수한 미감은 아니지만, 매우 체계적이고 단정한 기품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아무 규모가 4~5m로 축소됐다면 단아함과 경쾌한 체감을 느꼈을지 모르겠다...>

 

 

 

 

신앙의 대상이며 상징이었던 불탑의 신성은 디자인이나 공예보다 선행되는 평가개념이다. 이를 충실히 계승하고 후대에 전승하는 것은 경제적 여유나 자유스러운 실험보다 앞서 칭찬 받을 일이지 폄하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이미 전통양식 석탑들의 양식이 해체되고 소규모화 장식화 되는 흐름에서 600년대 후반의 전통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더더욱 높이 평가받을 일이라 생각한다.

 

 

<마을을 내려다 보는 높은 곳에 우뚝 서 한시대를 풍미했을 법한 규모를 갖췄음에도, 이제는 얼음골의 작고 좁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는 생각이 조금 가엽기도 하다...>

 

 

 

동네 뒷산 스레트지붕과 경량철골 기와지붕 뒤로 보이는 빙산사지 오층석탑은 여전히 마을을 굽어 살피며 그 위용을 감추지 않고 있다. 전통을 계승하면서 현재의 수준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하나 흐트러짐과 빈틈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철저함, 그러면서도 안정적인 비례와 장대한 기운으로 조용히 군림하는 빙산사지탑 앞에서면 설레임보다 경건함이 앞선다. 역사를 꾸려나가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 묻게 된다.

 

<빙산사지탑에 서면 자연도, 시대도, 주변도 모두 잊고 오로지 석탑만 바라보고 생각하며 느끼는 조금은 낯선 공간감이 형성된다... 그러나 답답하지도 움추러들지도 않은 담백한 공간감이며, 군림하거나 비교없이도 태연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고, 탄탄한 체계에 흐트러짐 없는 정돈된 마음만이 영원을 담보할 수 있을 거 같은 겸손함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