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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양혜규/삼성미술관 리움> 코끼리 전시에 코끼리가 없다...150321

 

 

 

 

 

1.

 

아티스트와의 토크란 이런 거였을까?

충분하지 못했던 개별 조각들에게 사연을 덧붙여 생명을 불어 넣어주고,

너무나 개별적이어서 고립된 각각의 조각들을 연결시켜 큰그림으로 묶어주고,

관람객으로서 느껴야 하는 생소함과 어딘지 부족했던 느낌을 채워주면서

또한 관람객이기 때문에 어설프게 치장하기 쉬운 과장은 덜어주는...

 

어쩌면 낯선 공간임에도 목적지까지 안내해야 역할이 끝나는 가이드의 책임성과,

빈약한 뿌리와 막연한 꿈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이들을 조율하는 선각자의 여유,

그리고 한정된 공간을 연출하여 새로운 구조물을 구축하는 건축가의 전문성까지,

작업과정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대중적으로 확인하려는

전시회 이후 아티스트와의 만남에서 느끼는 진지한 수위조절은 참신하고 즐거웠다.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있었던 양혜규 작가와 만남에 참여했던 느낌이다.

 

<전시장 입구... 천장에는 '솔 르윗 뒤집기 - 23배로 확장된, 세 개의 탑이 있는 구조물(솔 르윗이 만든 구조물을 23배로 확장해, 거꾸로 뒤집어서 천장에 매달았다는 의미)'이 있고, 오른편에 '소리나는 의류'를 입어보는 관람객들이 보인다... 처음엔 이게 작품인지도 몰랐다...^^>

 

 

 

2.

 

국내에서 5년만에 열린다는 양혜규의 전시회는 리움의 2015년 첫 전시이기도 하다.

<코끼리를 쏘다 象 코끼리를 생각하다>란 제목이 붙은 이번 전시회는

2006년 <사동 30번지>에서 선보인 <광원조각> 시리즈에서부터,

그녀를 세계적 작가의 반열로 끌어올려준 <블라인드> 조각,

그리고 원시적 토템과 현대적 기호가 어우러진 다양한 양식의 작품들이 포괄되었다.

그래서 짚풀이 처음으로 사용된 작품들이 소개됐음에도 회고전 양식을 띠었겠지.

 

<이번 전시회의 로고라고 해야할까, 이니셜(?)이라 해야할까?...>

 

 

그러나 <조지오웰>과 <로맹가리>의 소설, 문학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번 전시 <殺象思象> 어디에도 코끼리는 없다.

코끼리 형상은 물론 코끼리의 이미지,

코끼리가 뛰어다닐만한 아프리카나 인도의 초원을 연상시키는 어떤 장치도...

그리고 순수해서 연약한, 혹은 강인해서 파괴적인 인간과 자연의 역설적인 공조는

물론, 주제와 무관하게 배열된 작품들에서 나는 그 어떤 연관도 찾아보지 못했다.

 

영감을 주는 작품이나 인물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통해 측정불가의 상상력으로

이를 차용하고 해체해 자신만의 소재와 추상으로 재해석하는 게 그녀의 작품세계인데,

전시주제인 코끼리를 찾는 나같은 이가 당황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고,

만드는 이 따로, 기획하는 이 따로, 느끼는 이 따로따로일지도 모르는 현대미술에서

다양한 해석과 평가의 공백을 메워주는 장치가 없다면 그 낯선 경험은

막연한 공상 속에서 짧은 자극만 남긴체 곧바로 망각의 공간으로 흩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 아티스트 토크에서 형성된 얕은 공감과 함께, 사라진 코끼리가 부활했다.

 

<리움 도록에서... 왼쪽에 보이는 작품은 코끼리가 아니라, '외발 사자춤'이란 작품이다... 인조짚풀로 만들어 작가에 의해 중간유형이라 이름 붙여진 9개의 작품 중 최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3.

 

물론 코끼리를 잊어버리면 우리에게도 작지 않은 것들을 추정해볼 자유가 주어진다.

캐릭터로 불리기엔 너무 변화무상하고 단조롭지 못하게 치장된 형상들은

작가가 의도한 이름을 부여 받으면서부터, 해석하려는 이들의 어설픈 상상을 자극하고,

규칙적이지 않고 균질적이지도 않은 개체들이 집단을 이루면서 한 공간을 차지하면

우리들 스스로 작품속에 존재해야만 작가가 기획하는 작품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중간유형 - 삼족 광주리 토템'... 작품 오른편에는 'VIP 학생회'라 이름 붙여진 작품군으로 관람객들의 휴식공간이면서, 이번 전시를 위해 작가와 미술관에 의해 선택된(?) 이들이 대여한 의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연약한 짚풀들이 꼬여, 영원히 파괴되지 않을 것 같은 건축물들로 재구축될 땐

단순한 역설을 뛰어넘는 통쾌한 반전을 느끼기도 하고,

사각, 표준화되지 않아 잘려나간 짜투리 구석들도 엄연한 작품공간으로 채워질 땐

과거를 떨쳐 버리지 못한 배고픈 이들의 무분별한 욕망 같은 걸 느끼기도 하고...

이미 있었던 작품들이 키워지고 새롭게 옷을 입을 땐 째즈의 향연으로도 보이고,

편지봉투를 콜라주한 작품을 그래픽에 덧댔을 땐 허전함을 참지 못하는 집착도 보이고

아무런 관련없는 괴목에 바둑판이 새겨지면 그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기도 하고...

 

<뒤쪽 벽면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사자춤 - 신용양호자 #240'이고, 앞에 보이는 괴목은 '정지井址'이다... 물론 이게 작품인지 무엇인지 한참 몰랐었다...^^>

 

 

 

그렇다고 양혜규의 작품과 전시들이 모두 난해하고 낯선 건만은 아니다.

에스켈레이터를 타고 오르는 길에서 바라보이는 아래층 전시들이 산만(?)한데 반해,

렘 쿨하우스란 건축가가 블랙 콘크리트를 사용해 공중에 띄워 블랙박스라 명명한

위층의 전시, <성채>와 <상자에 가둔 발레>는 담백하고 명징하다.

금속방울을 이용한 발레는 심플하고, 블라인드로 만든 성채는 장중하다.

 

<'상자에 가둔 발레'/리움 도록에서... 위층 블랙박스 전시장의 '소리나는 인물' 시리즈 작품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은 어지럽다.

다양한 소재들이 어우러진 배열엔 규칙이 없고,

설혹 같은 제목아래 군집을 이룬 작품들도 균질하지 않다.

민속적 소재로 전락한 지푸라기 조형물들은 때론 무겁고 정적인 반면,

현대적인 소재이면서 무거운 금속재질의 조형물들은 가볍고 동적이다.

빛과 바람이 통해 가벼울 수밖에 없는 블라인드 조각은 장중하고 견고하게 보이며,

중층 벽면을 꽉채운 그래픽 사자과 벽지작품은 작품인지 본래 벽면인지 모호하다.

 

이 모든 낯선 경험과 방황은 작가의 강연이 시작되면서 정리된다.

그라운드라 명명된 전시장에서 어지럽다고 느꼈다면 정상이란다.

그 혼란까지 계산했다는 말이다.

빛이 차단된 블랙박스에서 오감을 열었다면 정상이란다.

어머니의 자궁속처럼 편안한 환경에서 소리와 냄새까지 맡았으면 더 좋았을 거라며.

그러면서 웃는다.

경험과 나이만큼 사기 치는 것만 늘었다고...

 

 

4.

 

생각해보면 이번 전시는 숨겨진 의도를 찾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즐길 때 완성된다.

인공조명을 배제하고 스며드는 자연광으로 채운 그라운드전시장에서는 빛을 연출하고

평범한 빛들은 차단하고 작품만 비추는 블랙박스 전시장에서는 어둠이 공존하며,

가볍고 여린 짚풀과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 소재가 반전을 이루며 뒤섞이고,

정적인 전시가 있는 반면, 움직이는 심지어 관람객이 입어야 완성되는 작품도 있다.

 

<인조짚풀 조각의 세부 모습/리움 도록에서...>

 

 

 

돌을 대신한 지푸라기와 섬유를 대신한 금속이 역설적 대비를 이룰 수도 있으며,

의자는 바라만 봐야하고, 굳게 닫힌 거 같은 성채 안에는 들어가 봐야하며,

고급스런 인형들은 흔들어 봐야 하고, 방울 옷은 입고 소리를 들어 봐야한다.

전시된 작품 속에서 관람해야하고, 전시장 안에 관람객이 들어가야 작품은 완성된다.

 

<소리나는 인물의 세부모습/리움 도록에서...>

 

 

바퀴달린 행거에 건성건성 걸쳐놓은 전기줄 속에서 우리는 서울생활을 추적해야 하고,

한올한올 꼬아 만든 집채만한 짚풀 건축물에서는 무너지지 않을 신념을 읽는다.

사용된 소재들은 생활속 작은 소품들이지만 그녀가 담으려는 주제는 거대하다.

블라인드로 신자유주의를 논하고, 조지오웰에서는 제국주의와 식민지를 논하며,

코끼리와 사자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짚풀에서는 민속과 토템의 복원을 상상한다.

극적이지 않지만 하나하나 진지한 반전과 적극적인 대비들이 스며있고,

차용과 해체를 포스트모더니즘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충분히 철학적이고 전통적이다.

 

<'서울 근성' 광원조각 세부모습...>

 

 

 

 

5.

 

그러고보니 이번 전시에서 현대미술, 설치미술에 대해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물론 양혜규란 작가에 의해서, 그녀가 의도한대로...)

지금까지 우리들은 만질 수 없는 회화나 조각을 근엄하게 관람하는데 익숙하며,

노래와 연주, 춤을 딱딱한 의자에 앉아 감상하면서

박수로만 감동을 표현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작품의 소재와 주제의 속성, 그리고 전시장의 특성과 무관하게

우리는 늘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넘지 않았고, 엄밀히 작품의 객체에 불과했다.

그게 교양이며, 그게 품격이라고 교육받았고, 그렇게 세뇌되어 왔는데,

이번 전시에서, (엄밀히 이번 토크에서)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속에 뛰어들길 원하며,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 않은 전시물의 대여자까지 작품에 끌어들인다.

그리곤 공간을 대관한 주최측에도 참여를 요구한다.

 

<리움 도록에서... 아래층 그라운드 전시장 전경...>

 

 

그러면서 작품이 전시된 공간, 일정한 기간이 끝나면 작품이 치워질 그 공간에서

관람객과 작업자와 작가가 일시적이나마 공동체로 완성되기를 바란다.

심지어 자신의 작품이 전시됐던 그 공간까지 자기작품의 소재였음을 각인시키려 한다.

또 전시와 관람을 한때의 ‘시간’으로만 기억하는 우리들의 통념을 비틀어,

작품이 전시됐던 ‘공간’이 추억하는 시간을 작품세계에 끌어들이려 한다.

 

<'창고 피스'... 작가의 초기 작품 활동 과정에서, 전시에서 제외되거나 전시가 끝난 작품들을 포장한 상태인데, 이 자체로 작품으로 전시가 되었다... 후에 작품이 매매되어 생명력이 지속되었고, 한때는 이 포장을 날마다 하나씩 뜯어 전시장을 채우거나, 나무 파레트만 남겨 퍼포먼스를 하는 등 다양하게 해석되었다고 한다...>

 

 

작품을 관람했던 시간이 관람자 개개인의 소유였다면,

양혜규란 작가는 전시공간 속에서 하나가 된 기억까지 소유하려 하고 있다.

코끼리가 없는 전시에서 코끼리를 생각해야 하고,

어지럽게 나열된 작품들 속에서 소재와 공간까지 역설적으로 대비를 이룬 전시장에서

이제 작가는 시간과 공간, 주체와 대상까지 뒤틀면서 경계를 허물려고 한다.

 

물론 그 모든 완성은 작가의 육성에 담겨진다.

작가의 육성에 의해 차용은 역사가 되고, 상상은 추상으로 구현되며,

하나하나의 완성도에 집착해 놓치기 쉬운 작품간의 연관성에 스토리가 부여되고,

불규칙하고 무관심하게 나열된 전시장은 하나의 거대한 담론에 묶여 또 해체된다.

 

<리움 도록에서... 맨 앞에 보이는 작품은 '중간유형 - 바다 연꽃'이다...>

 

 

하나하나의 작품에서 받은 이미지들이 전체 전시장의 흐름과 일체되지 못하면

관람객들은 길을 잃고 분절되며, 난해함에 굴복하고 스스로 마음을 닫을지도 모르지만,

작가의 육성을 통해 그녀의 신념을 통해 주제가 일관되게 해석되면

우리는 진지해지고, 작품들은 이제야 완성되며, 그렇게 작품세계를 공유할 때

주제는 철학이 되고, 짚풀은 토템이 되고 이데아가 된 코끼리가 살아난다.

 

 

6.

 

그녀의 말처럼 우리나라에는 코끼리가 살지 않는다. 중국에도 일본에도...

또한 유럽에도 미국에도 사자가 살았던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상징이 되었고,

때로는 용맹과 지혜로, 지배의 문양으로 영웅의 징표로, 그리고 민속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신화화 된다는 역설이 작가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이번 전시가 기획되고 시작되고, 또 완성됐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몸집을 가졌으면서도 인간으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하는 연약한 처지의 코끼리,

백수의 왕으로서 위용과 용맹을 가졌지만 울타리를 벋어나지 못하는 사자의 야성.

그 기묘한 역설이 양혜규 작가의 상상력으로 믹서 되면서

동떨어진 각각의 소재와 작품과 전시장은 하나의 화두로 재통합되고 재해석된다.

 

<리움 도록에서... 오른편 조각이 '중간 유형 - 보로부두르에 부쳐'다...>

 

 

이 진지한 성찰은 지푸라기 한가닥 한가닥을 꼬는 집요함과,

처음 창조된 이후 아직도 변화하고 있어 시리즈라 불릴 수밖에 없는 지구력,

그리고 시간과 공간, 주체와 객체마저 해체하려는 작가의 당돌함으로 시작했지만,

전시장까지 작품으로 끌어들여 승화시키려는 건축가적 공간 경영력과

관람객과 작품, 대여자와 작가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만 완성되는 거 같다.

 

<'삼세번 희부연이'란 작품으로, 작가가 주요하게 다뤘던 매듭공예(?) 조각이다...>

 

이런 흔적들이 차용과 실험에 그치지 않고, 밀도 있는 작품으로 완성되었기에 인정받았겠지.

그녀의 작품을 보면서 많은 평론가들이 공동체와 개인, 혹은 현대를 말한다.

또 어떤 이들은 노마드의 운명을 타고난 고독한 주체에 천착하기도 하고,

일상과 생활 소재를 부각시켜 포스트 미디엄의 첨병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 전시회에서는 자연과 인간의 양면성과 본성의 복원을 말하기도 하고.

그러면 나는?

 

 

7.

 

작가의 활동과 작품을 육성으로 사진으로 미디어를 통해보며 변화를 생각해 본다.

처음 작가의 광원조각들을 봤을 때 나는 우주목과 함께 무당(?)을 생각했었다.

빨래걸이나 행거에 어지럽게 휘둘러진 전선과 전선에 매달린 자잘한 생활소품들,

그 조각들을 보면서 공동체 중심에 서 있는 우주목이 생각났고,

현재라는 사회와 고립된 주체들을 기계적으로 엮어 놓은 작품들을 보면서,

원시적인 힘의 복원과 새로운 역할의 무당을 생각했었다.

 

<서울근성 중... 작가의 초기 작품 유형이다...>

 

 

다시, 시선은 차단할 수 있지만 빛과 바람까지는 막지 못하는 블라인드 작품들에서,

사회와 개체의 경계를 연상했고, 작품들은 광원조각에 비해 훨씬 모던하게 진보했다.

그리고 금속방울들이 소재로 등장하면서는 비까번쩍한 현대가 작품세계로 들어오고

여기에 열성적으로 아티스트 토크를 작품행위의 하나로 진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작품은 조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작가가 매개하려는 주제에 있음을 읽었다.

 

<작가의 블라인드 작품들은 생각보다 훨씬 무섭고 장중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사진으로만 봤지만 2012년 독일 카셀 도큐멘타에서의 작품이 가장 장대(100m가 넘었던 것으로 기억?)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꼭 보고싶었다...>

 

 

그리고 이제 민속적 소재의 짚풀과 토템들이 새롭게 구상되는 걸 지켜보며,

또 작가의 육성을 전시장에서 들으며 그녀가 매개하려는 새로운 신념을 읽어본다.

그 신념에는 지독하게도 고독한 주체들이 벌떡거리고 있고,

투사 같은 열정과, 공감을 향한 진지한 연대의식이 번뜩이고 있다.

 

<소리나는 인물 중 '나선형 여인'으로 보이는데... 블라인드 작품 유형 다음에 시도된 유형으로 알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주체와 주체를 매개하는 관계가 강조되고 있지만,

그 이전 근대는 이념과 주체를 매개하는 신념의 전도사들이 사회를 지배했었다.

그리고 그보다 이전, 이념이 인간화되기 이전 종교와 토템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신 또는 하늘과 개체를 매개하는 제사장이 있었고, 고대에는 그들을 무당이라 불렀다.

 

이제 그녀는 현재의 무당이 되어 공동의 복원을 꿈꾸는 듯 보인다.

자신의 신념에 대해서는 치열한 고민과 열정으로 스스로 전도사를 자처하며,

인간 주체와 주체사이에서는 공감을 통한 연대만이 살길이라며 부드럽게 손을 내밀고,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관람자가 만날 때는 탁월한 연출로 치밀하게 공간을 경영한다.

주체와 대상, 개체와 공동체,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허무는 조각가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합창으로 보여주려는 지휘자로서 말이다.

 

 <2015년 처음으로 사용한 소재로, '중간 유형 - 엘 카스티요에 부쳐'다... 그라운드 전시장에는 3개의 건축물 유형이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나는 이번 인조짚풀 조각은 이 3개의 건축물에 완성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조짚풀이면서도 전시장을 은은히 채우는 짚풀 향기도 은은한 게 좋았고...>

 

 

 

그래서 그녀의 작품은 서로 마음을 열 때 빛을 발하고,

관람객들과 작품, 그리고 작가에 의해 시간과 공간까지 밀도 있게 채울 때 완성된다.

허허롭고 낯선 구성과 산만하게 나열된 작품들 속에서

나는 그녀의 신념이 구축한 고밀도의 공간을 체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