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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 序 3. 건축과 공예 3) 내가 좋아하는... (16) 당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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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건축공간과 공예

      3) 내가 좋아하는 미감들...

 

(16) 당당함... ① 석탑, 석불

장후장대함의 기념비적 스케일은 아니고, 그렇다고 탄탄하거나 의연함만으로는 충만한 에너지를 모두 설명할 순 없고, 남성적이기는 하지만 호쾌 투박함으로 설명하기에는 품과 격을 갖추고 있는... 그런 미감을 당당함이라 정립하고 골라봤다... 봉화 북지리 좌상이나 영주 가흥동 삼존상은 모두 마애불임에도 불구하고 환조에 가까운 입체감을 가져, 회화의 평면성을 느끼기 어려운 생동감이 넘치고, 위축된 맛이 하나도 없는 당당한 기운을 충분히 드러내고 있다... 북지리 좌상은 조금더 너그럽게, 영주 가흥동 삼존상은 조금더 활기차게... 특히 두광과 신광에 각각 화불을 배치한 북지리 좌상은 암반을 감실처럼 파낸 상태에서 4.5m의 규모를 가지고 있어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장중한 카리스마를 드러내고 있다.  안동 조탑리 전탑은 전탑의 질감에도 불구하고 주변 공간과 어울리면서 당당한 맛을, 청송사지탑은 약화된 기단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화달리탑과 금곡사탑은 상층기단부 갑석의 돌출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만큼의 당당한 기운을 잘 살렸다... 그리고 공주 상신리 당간지주는 많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중후한 맛과 묘한 귀기가 어우러져 당당한 느낌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국보 201 670년경 물야면 지림사 통일신라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보물 221 670년경 암각화, 마애불좌상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 보물 57 760년경 안동 일직면 통일신라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 보물 382 800년 전후 청량면 율리 통일신라
상주 화달리 삼층석탑 보물 117 840년 경 사벌국면 통일신라
공주 상신리 당간지주   930년경 상신리구룡사지 고려초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 보물 829 930년경 강진군 군동면 고려초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영주는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가는 길목 중 울진 - 동해안을 따라가는 경로를 제외하면 소백산을 넘어 단양과 제천을 거치면 원주에 이르는 가장 동북쪽에 자리한 곳이다... 교통 및 군사의 요충지 - 이 길목을 지키는 불상이 마애삼존상이다... 660년대... 고구려와의 마지막 전쟁을 치르거나 끝나가는 시점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마애삼존상은 봉화 북지리 마애불좌상, 경주 서악동 마애삼존상, 영주 신암리 마애삼존상, 군위 삼존석굴, 영동 신항리 삼존입상 등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촛불형 광배(두광)는 물론 가사의 주름, 정읍 보화리 입상과 비슷한 눈처리 등은 백제인의 솜씨를 느끼게 만든다... 물론 군위에서 달라지고, 경주 서악동에서는 많이 달라지지만... 그런 연유인지 전체적으로 백제의 부드러운 선에 전쟁에 승리한 신라인의 당당한 기운에 잘 어우러져 있어 보인다... 환조에 가까운 조각, 상당한 공력을 투입해 만든 이 삼존상은 길목을 나서는 이들에게 때로는 행운의 가호를, 때로는 죽은이들을 위로하며 시대의 영광과 아픔을 같이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

600년대를 관통하는 한반도의 전쟁은 당나라와 일본까지 참여한 국제전이었고,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자리에는 당나라가 만든 안동도호부가 생긴다... 물론 그 안동도호부와 안동은 지리적으로 무관함에도 나에게는 지명적인 연관성이 늘 떠오르는 곳.. 그래서 혹시 신라에 파견된 당나라의 관인(신라인들이 경주에 그들을 거주하게 했을리 만무할테니...)이나, 조금더 후대 - 전쟁의 여파로 생긴 당나라 군병들의 포로를 수용한 곳이 안동이 아니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전탑은 안동에 집중되어 있다... 이중 조탑리 전탑은 한반도의 화강암과 중국식 전돌이 버무려져, 절충 혹은 융합된 양식이며, 전탑의 체감률 역시 중국식이 아닌 통일신라 석탑식이라는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기단부는 토단에 석축을 둘러 고식을 나타내고, 계단은 안쪽으로 들여 만들었으며, 일층몸돌에는 문비와 좌우 인왕상, 감실 내부에는 적심이 남아있다... 8.7m... 기념비적 스케일에 안정감과 상승감을 함께 살려, 너른 들판을 아우르는 당당함이 살아있는 전탑이다... 권정생 선생님 생가 인근에 있다...

 

 

울주 청송사지 삼층석탑

경주에서 바다로 나가는 길은 크게 4개 정도가 있다... 영일만이 접한 포항쪽, 울산만이 있는 울산-울주쪽, 그리고 부산 또는 낙동강을 타고 들어와 접할 수 있는 양산쪽... 700~800년대, 백제와의 전쟁이 끝난지 3세대, 100년 전후 시점까지 신라는 항상 일본으로부터의 기습공격을 염두에 둬야했고, 일본이 전쟁을 포기하고 독자 노선을 걷는 770년대 후반까지 울주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이다... 그 시대, 그 곳에 야전사령과처럼 당당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게 청송사지탑이다... 하층기단부가 지나치게 낮게 조성되 조금 더 장중한 기운을 살리지 못했으나, 기단부에 비해 넓고 높은 일층몸돌과 안쏠림이 살아 있으며, 하층기단부 탱주가 2개라는 점 등은 전성기 석탑의 전형성과 맛이 아직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노반도 고선사지탑 처럼 층급받침 부위가 안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지붕돌 낙수면의 직선이 사라져 굴곡이 커졌고, 일층몸돌과 상층기단부의 호각형 2단 괴임이 깨진 것은 경주에서 만들어 공급되던 시스템이 깨지고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제작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중후한 느낌과 당당한 기운...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

장보고 세력의 몰락 이후 100여년... 통일신라의 중앙집권이 해체 되어 가면서 득세한 선종과 지방호족들... 이쪽 강진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해적들도 자주 출몰했을 수 있다... 이 3가지 요구에 조응한 것이 금곡사탑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과감하고 당당하며 굳센 의지를 표방하는... 전라남도 지방의 삼층석탑 치고는 드물게 단층기단부고, 화달리탑처럼 기단부 갑석이 지나치게 넓어 안정감과 균형미를 깨드린다... 신라말 고려초 석탑의 특징인지,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 안동 하리동 삼층석탑, 영암 월출산 용암사지 삼층석탑 등처럼 일층몸돌이 하나의 통돌이 아니고, 일층몸돌 2단 괴임도 하동 탑리삼층석탑처럼 별석이다... 각층 지붕돌 층급받침은 6-5-4로 전형이 깨졌고, 낙수면보다 층급받침이 높아 백제계 정림사탑계로 분류되기도 한다... 규모가 주는 중후함에 층급받침으로 넓어진 지붕돌로 날개를 활짝 편것처럼 호쾌한 맛이 있어, 급격히 좁아든 삼층탑신과 지붕돌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인상을 준다...

 

 

 

 

(16) 당당함... ② 건축

돈암서원 응도당을 제외하면 규모가 크지 않지만, 자태에서 드러낸 기운들은 당당하기 그지 없는 건축물들이다... 응도당은 겨울잠을 자는 곰같다는 생각이, 장곡사 상대웅전은 절벽 위에서 가슴을 내밀고 포효하는 표범이나 늑대 같다는 생각이 들고, 통도사 극락전과 용무사 대웅전은 주변의 전각들에 압도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가치를 당당히 뽐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비지정 문화재들이지만, 독락당 솟을삼문은 철저히 장식이 배제되고 포작까지 생략된 매우 단순하고 간결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살림집은 물론, 서원과 향교 등의 삼문을 통털어서도 가장 당당하다. 위압적이지 않고, 초라하지 않은 그 맛은 절묘한 안배 덕분이 아닐까 싶다... 마지막 북장사 일주문은 천주산을 올라가는 길 중턱, 길과 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이 너무나 시원시원하고 상큼한데다 힘차게 느껴지기에 같이 꼽아봤다...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보물1569 1634   조선
양산 통도사 극락전   1369년 창건
1704년 중수
  조선
남해 용문사 대웅전 보물1849 1773 호구산 조선
청양 장곡사 상대웅전 보물 162 1777년 중수 장곡리 칠갑산 조선
경주 독락당 솟을삼문   1532년 창건 안강읍 옥산리
자옥산 자계천
조선
상주 북장사 일주문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

1634년,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설립된지 90년 후 세워졌다... 5칸에 이만한 규모라면 당시에도 명륜당으로서는 작지 않은 규모... 1881년 홍수로 이전하고, 돈암서원의 본래 명륜당인 응도당이 이건된 건 1971년이니 상당히 긴 세월만에 돈암서원 품으로 돌아갔지만, 본래의 강당 자리가 아닌 곳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400여년의 시차가 주는 괴리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서원의 진득한 생명력을 느끼게도 만든다... 5칸 밖으로 내민 도리의 길이가 짧아 급하게 마감된 느낌이 있는데, 풍판 옆으로 눈썹지붕(영이라고도 불리며, 내림처마 등등으로도 불린다)도 짧아 완결적 느낌의 장중함은 떨어지지만, 규모에 걸맞는 당당한 기운은 숨길 수 없다... 세부 디테일을 본다면 주심포와 익공, 다포계가 혼용되었는데, 특히 첨차와 첨차를 연결하는 부위는 부안 개심사 대웅전의 연꽃형과 매우 유사하게 보일 정도로 엄청난 정성이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둔중한 규모에, 섬세한 터치가 돋보인다... 동방서실과 영... 배향한 김장생의 가례집람에 따르고 있으나, 이건시 온돌까지는 설치하지 못했나 보다... 이곳으로 옮겨지기전 돈암서원의 규모를 다시 생각해 본다...

 

 

양산 통도사 극락전

통도사 하로전, 삼층석탑과 영산전의 동측, 천왕문을 막 들어서 접할 수 있는 건축물이다... 어칸이 넓고 좌우가 좁은 전면, 측면 각 3칸에 정방형에 가까운 구성에, 맛배지붕은 영산전과 관음전에 대비해 팔작지붕을 갖추고 있다... 점유하는 공간은 넓지 않지만, 통도사의 다른 건축물들처럼 기둥이 높고 공포구조를 적극적으로 드러내 당당하고 탄탄한 기운을 보이는데, 특히 이 극락보전은 전체적인 비례와, 몸과 지붕의 균형도 잘 맞아 짜임새가 좋게 보인다... 특히 2단의 외목도리에 서까래와 부연을 충분히 빼내어, 넓은 처마로 시원시원한 느낌까지 있어, 당당함과 생동감이 살아있다... 부속 건물임에도 불쑥 솟은 듯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고, 넉넉한 넓이에 시원한 구성으로 당당함과 의연함을 함께 드러낸 멋진 건축물이다...  

 

 

남해 용문사 대웅전

용문사 대웅전 역시, 통도사 극락보전 처럼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넓은 처마에 시원한 선이 살아있는 '스스로 뽐내는' 건축물이다... 통도사 극락보전에 비하면 다포작에 살미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자칫 유약할 수 있음에도, 기단부는 높이고 기둥(건축물의 몸체)은 낮춰(통도사 극락전과는 반대로...) 올려다보면 상당히 탄탄하며 자신만만하다는 느낌을 갖는데 부족하지 않다... 내부에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닫집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커다란 내목도리를 떠 받치는 포작이 화려하며, 충량이라 불러야 할지 모를 부재에 조각된 용은, 내가 본 용들 중 가장 해학적이고 귀엽다...  

 

 

청양 장곡사 상대웅전

상대웅전 앞 마당이 넓었다면 훨씬 더 건물의 맛을 깊이 있게 느꼈을텐데... 혹은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축물이다... 외 1출목에 주심포 건물인데, 기둥 사이에 공간포작이 하나 더 있어 다포계의 혼용으로 볼 수 있고, 첨차와 소로는 고려식 - 고식인데 살미는 조선 중기 이후 양식이어, 조금 낯선 느낌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고려의 주심포 건축물이 갖는 간결함과 담백한 우아함, 그리고 짱짱한 맛을 주는 건물이다... 또 측면 두칸이지만, 통도사 영산전처럼 내부기둥의 간섭없이 공간을 100% 활용하기 위해, 내부에 고주를 두지 않고 보 위에 진주를 두어 내부공간의 개방감이 크다... 강건하면서도 시원시원해 당당하다는 느낌이 절로 드는 건축이다...

 

 

 

 

 

 

(16) 당당함... ③ 공예, 도자기

당당함이란 미감에 금속공예와 토기, 녹유 도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를 하나씩 골라봤다...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를 비롯, 귀면각 벼루와 삼족호는 모두 다리에 귀면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물론 그 점도 무시할 수 없지만, 금동향로는 빈틈이 없는 꽉찬 구성에 복잡한 장식의 하부와 단순 간결한 상부의 대비를 밀도있게 풀어낸데다, 향 연기가 피어나오는 구멍이 유쾌하리만치 즐겁게 구성된 점도 높이 샀다... 특히 아래쪽은 초문을 위쪽은 막구멍 4개씩을 각각 엇갈려 배치했는데, 이마저도 음양의 대비처럼 보여 즐겁기도 하다... 조성시점을 백년 넘게 고려한 이유는 백제, 통일신라, 중국산을 같이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당당하다... 귀면각 벼루도 벼루로 사용되는 면의 간결 매끔함에 대비되는 귀면이 장식된 7개 다리의 거친 마감이 호기롭고, 녹유 삼족호는 씨름선수 보다는 뛰쳐 나가기전의 스모선수가 연상될 만큼 힘찬 기운이 느껴져 골라봤다... 그에 비해 인화문일지 음각일지 모를 꽃문양은 기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엽고 깜찍해서 의외의 생동감을 느끼게 만들기도 하다...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 보물1753 638~760 미륵사지전시관
토제 인화문 귀면각 벼루   7~8세기 이대박물관 통일신라
도기 녹유 삼족 호   8세기 경주 통일신라
청자 음각모란 상감보자기문 유개매병 보물 342 12~13세기 중앙박물관 고려
분청사기 귀얄 삼이 호   15세기말 이홍근 기증
중앙박물관
조선
백자 철화 매죽문 항아리 국보 166 1600년경 중앙박물관 조선

 

 

청자 음각모란 상감보자기문 유개 매병

이 매병은 한마디로 남성적이다... 국화와 당초문을 흑백상감으로 그린 도자기가 입구 주변 윗면을 장식하고, 측면 모란꽃은 음각으로, 하부 굽에는 여의두형 운두무늬를, 그리고 입구와 굽 하단에는 뇌문대를 새기는 등, 하나하나 문양을 그린 수준이 높고 세련된 배치로 섬세함까지 잘 살아있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느낌은 위풍당당함이다... 영기문으로 부를지 애매한 뚜껑의 백상감은 십자형 또는 3단으로 보여, 초기 운학문 매병 등에서 보여주는 5단의 골곡이 아니기 때문에 12세기 후반, 13세기 초반까지 제작시기는 내려온다... 여전히 힘있고 당차다...

 

 

분청사기 귀얄 삼이 호

고려청자와 백자를 잇는 징검다리... 분청사기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일 수 있지만, 엄연한 하나의 장르고 어쩌면 가장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도자기의 한 분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특히 질 좋은 청자대토를 찾지 못했으나 여전히 청자를 고집했던 시대, 상감의 정교함과 많은 공력을 대신하는 백토분... 즉 청자에 백토를 바른 게 분청사기다... 또 청자보다 높지만 백자보다 낮은 온도... 1350도 전후에서 만들어진 도기와 자기 사이... 사기의 일종이기도 하고...(내 생각이지만...^^) 아무튼 순백자가 전성기를 이루고, 청화백자가 농익은 작품들을 쏟아내던 시기, 또 한편에서는 여전히 분청사기를 구워내고 있었다... 1400년대 말, 1500년대 초반... 세조의 강권을 넘겨받아 성종과 연산군 - 중종의 파란과 전성기를 맞이하던 시기... 그리고 명종과 선조로 이제는 느슨해지고 유약해지기 바로 전까지... 그 시대를 반영한 도자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커다란 붓으로 거칠게 표면을 마무리한 귀얄기법 위로, 넘치고 넘친 유약들이 대충대충 흘러내려 그 자체가 자연스런 문양이 되어버린 항아리... 조선 초기 고유의 목과 허리선이 당당히 살아있고, 세개의 귀를 붙이기 위해 높아진 구연부지만 위축됨이 없고 당당하다... 힘이 있다... 짱짱하고... 맘에 드는 도자기다... 

 

 

백자 철화 매죽문 항아리

초기 조선백자의 선과 힘이 살아있는데다, 사실성 높은 상큼한 대나무 문양과 문인화 같은 용트림하는 매화문양의 대비도 절묘하다... 당당한 어깨와 매끈하게 빠진 허리선, 그리고 적당한 높이의 목과 넓은 구연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눈에 확 뜨이는 멋지고 멋진 백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