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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1

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몇가지 메모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문양(안상/연화문)을 중심으로...

∐. 序
  3. 건축공간과 공예
    4) 길목에서 놓치기 싫은 공간과 건축과 공예
      (2) 부족함도 없고, 넘침도 없이...
        ②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에 대해 정리하다가...


○ 배례석을 대표할 수 있는 논산 관촉사 오층석탑 앞 배례석을 생각하며 메모한다. 배례석에 대해, 명칭, 문양, 시원과 현황, 그리고 의미까지...

○ 배례석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①석탑과 석등 등을 장엄하기 위한 한정적-보조적 역할로 인식한 태생적 한계로 법식화된 지침이 없고, ②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훼손되고, ③위치이동이 어렵지 않은 작은 크기로 손망실이 가속화됐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 현존하는 것을 기준으로, 740~1020년대 통일신라 전성기부터 고려초까지 300여년 유행했다. 호족에 이어 문벌귀족이 득세하면서부터 사라지기 시작하여 려말선초에 간헐적으로 등장하지만 이후 맥이 끊겼다.

○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겠지만, 역사와 품격을 담지 않은 형식-표식일 뿐 더 이상의 깊이는 없어 안타깝다.





○ 현재 남아있는 배례석은 60~70개라 하는데, 내가 본 걸 기준으로 석탑(30~31개), 석등(13~14개), 금당(7개), 승탑(1~3개), 석불(2개) 앞과 박물관 등에 배치되어 있다.

○ 온전한 형태로 남은 최초의 사례는 740년대 불국사 석등(대웅전, 극락전) 앞이고, 마지막 사례는 1460년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앞 배례석이다. 다만 배례석의 위치와 명칭, 그리고 의의를 전제로 시원을 생각할 때, 601~711년대 일본 나라현 호류지 오중탑(법륭사 오층목탑) 앞 배례석(자연석)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 배례석 – 이 명칭은 조선불교와 근현대를 거치며 고착돼, 배타적이지 않고 일반적 의미여서 그대로 사용했고,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앞의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에서 유례한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봉로석, 정중석이란 표현도 있지만 당초의 명칭과 용도는 아니었다는 게 내 생각이다.


○ 이를 종합해 배례석의 탄생을 추적하면, ①약식화된 제단, ②600년대 전반까지 이어진 수호석의 변형, ③석가모니 사후 5~600년 지속된 인도 무불상시대 불족적의 재해석 또는 이들의 혼용이 아닐까 생각한다.


○ 우리나라 배례석 역사를 생각하면 대표적으로 다섯 개를 꼽을 수 있을 거 같다. 경주 불국사 정착 – 대구 부인사, 포항 법광사지(삼척 흥전리사지) - 논산 관촉사의 변화 - 마지막 남양주 수종사 배례석에서 종결이 그것이다.






○ 배례석은 높이와 넓이 등 크기가 다양하며, 주요 문양은 윗면의 연화문과 단부측면의 안상이다.

○ 부연이지만, 배례석의 주요 문양인 연화문과 안상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봤다. 연화문은 연꽃 외에도 차크라(바퀴)와 연결하고, 안상은 실천행이라 의미와 연결하고...


○ 아울러 사자상과 코끼리, 그리고 연화문 등이 사용된 여러 기물들을 모아봤다.


○ 배례석의 문양을 생각할수록 인도불교 초창기 – 무불상시대의 불족적이 배례석에 깊이 연관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강해진다. 무불상시대를 상징하는 아소카의 기둥과 불족적의 상징 및 문양들이 배례석에서도 연속되기 때문이다.






○ 배례석의 시작이 무엇이었든, 이를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능케 한 것은 통일신라, 김대성과 경덕왕의 덕이 아닐까 생각된다.

○ 불국사와 석굴암이 만들어지던 시기, 통일신라는 다불전시대를 열었다.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외부 문화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머뭇거림이 없는 자신감, 동서고금의 다양성을 수용하여 조화와 융합을 통해 통일성을 관철할 수 있는 안목, 현재를 집대성하면서 미래의 가능성까지 활짝 열 수 있는 유연한 역동성까지... 불국사와 석굴암은 정신적 영역과 공예적 기능을 완성된 공간으로 구현한 위대한 흔적이다.

 

 

주요 배례석

경주 불국사 대웅전, 극락전 석등
741 -
안상 2+1
통일신라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국보 35 780년경 안상내 불상
3+2
통일신라
대구 부인사 석등
800년경 연화문 1
앙련(연판문)
통일신라
인제 한계사지 남삼층석탑 보물1275 810년경 연화문 4
안상 2+1
통일신라
포항 법광사지
828 연화문 1
안상 3+2
통일신라
경주 읍성 석등
828년경 연화문 1
안상 3+2
통일신라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 보물 133 830년경 연화문 3
안상 2+1
통일신라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840년경 연화문 1
안상 3+2
통일신라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
850년경 연화문 1
안상 3+
통일신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국보 17 850년경 연화문 1
안상 4
통일신라
영주 비로사
860년경 연화문 1
안상 2+1
통일신라
삼척 흥전리사지

연화문 1
안상 3+2
통일신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보물 518 900년경 연화문 1
안상 2+1
통일신라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 석관 보물 365 940년경 -
안상 2+1
고려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
940년경
고려
논산 관촉사 오층석탑
968 연화문 3
줄기문양
고려
개성 헌화사 석등
1020 연화문 1
안상 2+1
고려
황해해주 북숭산 신광사

연화문 2
운기문양
고려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국왕배례지석
보물1471

(840년경)
1085
연꽃잎 16

고려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 사자석등 국보 197
보물 656
1394 - 조선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1460 -
당초문
조선
창녕향교 배례석 1,2,3 (연화문+안상), 그 외 1~2 통일신라
고려

 

 

배례석 현황

 

○ 현재 남아있는 배례석은 70개 전후라 하는데, 내가 답사여행 중 친견한 배례석은 대략 55개 전후다. 내가 본 걸 기준으로 석탑(30~31개), 석등(13~14개) 앞에 집중되어 있고, 금당(7개), 승탑(1~3개), 석불(2개) 앞과 박물관 등에 배치되어 있다.

 

○ 개인적 추정이지만, 이런 양식은 740년대 통일신라시대 불국사 석등 앞에 본격적으로 배치되기 시작해 1460년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앞에 조성된 조선시대 배례석을 끝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잃어버렸다고 생각된다.

< 경주 불국사 극락전 석등과 배례석 : 제 짝이 맞다면 현존하는 배례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원형에 가깝다... 연화문이 없고, 측면 단부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별도의 지대석이 없고, 호각형의 2.5단 괴임을 통석에 가공했다... 그리고 안상을 음각한 (판)면 위는 노반처럼 1단으로 돌출마감했다... 지대석을 따라 두지 않은 것은 규모 때문이겠지만, 이 이유 때문인지 배례석은 원위치를 추정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웅전 석등 앞에도 동시대에 만들어진 배례석이 1기 더 있다...>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과 배례석 : 통일신라와 고려를 뛰어넘어 조선초기에 만들어진 배례석... 이후 가공되지 않은 배례석이 조성된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격식을 갖춘 배례석으로는 마지막 작품이다... 팔각오층석탑 탑신 아래를 받치고 있는 앙련과 복련을 갖춘 석불대좌식 기단부 역시 1000년대 초반 - 고려의 양식을 재현했다... 그리고 좌대식 기단부 앙련과 복련의 상하부와 기대석, 지대석의 안상과 비슷한 문양은 600년대 금동불 좌대에 사용된 문양과 비슷하다... 배례석 단부측면을 장식한 (당)초문까지 생각하면, 이 석탑(사리탑)은 나름 근원으로 돌아간 느낌이 있다...>

 

 

 

○ 앞서 소개한 주요 배례석을 제외하고 몇 개를 더 골라보면 ;

○ 석탑 앞 배례석으로는 양양 선림원지 삼층석탑(보물 444호/800년경),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 122호/820년경),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보물 188호/840년경),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보물 674호/880년경), 예천 간방리 삼층석탑(880년경), 울진 불영사 삼층석탑(900년경), 거창 소야탑골 삼층석탑(930년경), 창원 성주사 삼층석탑(950년경), 영암 도갑사 오층석탑(보물 1443호/970년경), 강릉 등명사지 오층석탑(1000년경),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국보 332호), 홍천 괘석리 사사자삼층석탑(보물 540호/9880년경) 등이 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곳만 소개한다... 좌측부터 양양 선림원지, 양양 진전사지, 예천 간방리 삼층석탑이고, 우측 위는 영덕 유금사 아래는 울진 불영사 삼층석탑과 배례석이다... 양식적 변화와 흐름은 아니지만, 후대로 내려가면 좁고 높아지고, 연화문이 자리잡게 된다...>

 

 

○ 석등 앞 배례석으로는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앞 석등과 구층암 석등(900년경), 경주 박물관 석등 등이 있다.

< 왼쪽부터 경주 불국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앞, 경주 박물관, 개성 헌화사지 석등과 배례석이다... 구례 화엄사에서 눈여겨 볼 점은, 석등과 석탑 앞에 각각 배례석이 놓여있다는 점, 이럴 경우 정면 방향과 배례석의 위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 석탑, 석등과 함께 있는 배례석의 위치는 다양하다. 이런 경우를 모아보면 대구 부인사 석등과 동서삼층석탑(800년경)을 비롯해 경산 불굴사 석등과 삼층석탑(보물 429호/840년경),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840년경)과 석등,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보물 518호/900년경)과 석등, 합천 청량사 석등(보물253호/921년경)과 삼층석탑(보물266호/800년경) 등이 있다.

<석탑, 석등과 함께 있는 경우 배례석의 위치는 모호하거나 다양해진다. 좌측부터 경주 불국사와 대구 부인사, 합천 해인사와 경산 불굴사, 그리고 합천 청량사와 창원 성주사의 배례석이다... 먼저 불국사와 대구 부인사는 쌍탑이 있는 경우로 석등 앞에 1개가 놓여 있다. 그러나 김천 직지사는 쌍탑과 석등 사이에 배례석이 2개가 놓여있다(아래쪽에 사진 참조)... 가운데 합천 해인사와 경산 불굴사는 배례석이 가운데 또는 금당으로 향하는 진입방향 맨 앞쪽이다... 오른쪽은 비교가 조금 애매하지만-원위치 추정이 어렵고, 후대의 변형과 추가가 있는 경우이기 때문에- 합천 청량사는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앞과 비슷하게 석탑과 석등에 각각의 배례석이 놓였고, 창원 성주사는 석탑과 본래의 석등 및 새롭게 만든 석등이 배례석과 어설프게 모아져있다... 그냥 참고하자는 의미...>

 

 

○ 금당 앞 배례석은 혼용이 있을 수 있지만, 인제 한계사지(남삼층석탑), 김천 직지사 대웅전 앞 공간(대웅전/보물 1576호/1649년, 석등, 동서삼층석탑/보물 606호/830년경)에 2개, 대구 동화사 극락전(보물 2132호/1622년, 금당 좌우로 동서삼층석탑/보물 248호/832~863년이 있다)과 대웅전(보물 1563호/1727년, 대웅전과 영산전 사이에 삼층석탑/832년경이 있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국보 67호/1700년)과 석등(국보 12호/930년경) 사이,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국보 13호, 1430년),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보물 790호/1643년) 등을 찾을 수 있다.

<좌측부터 인제 한계사지, 아래가 강진 무위사, 우측 위가 대구 동화사 극락전, 아래가 김천 직지사 대웅전이다... 이런 경우 배례석의 원래 위치와 용도가 모호해진다. 또 그런 이유로 금당앞 배례석으로 모아서 분류했지만... 인제 한계사지는 남북 삼층석탑이 있지만 조성된 시대도 다르고 처음부터 쌍탑배치와 관련이 없다. 그런데 배례석은 금당 마당의 한가운데 위치로 복원했다. 강진 무위사처럼... 강진 무위사 배례석도 이 위치가 맞을까? 아니면 극락전 좌측의 삼층석탑 자리가 맞을까? 대구 동화사 극락전 앞의 배례석도 마찬가지... 800년대 중반이라면 현재의 극락전은 동서삼층석탑과 삼각형 꼭지점으로 이동해야 맞다. 김천 직지사처럼... 그때도 배례석은 이 위치였을까? 동탑의 석등과 함께 고민할 문제다... 김천 직지사 대웅전앞 마당은 문경 도천사지 석탑을 쌍탑처럼 옮기고, 가운데 길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례석과 석등을 배치했다... 대구 동화사 대웅전 마당의 배례석은 이동용 판석을 깔기 위해 중심에서 빗겨 옮겼는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물론 김천 직지사 배례석은 일제강점기 때에도 있었으니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은 아니지만, 위치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거 같아 첨부한다...>

 

 

○ 승탑 앞 배례석으로 충주 청룡사지 외에 의정부 망월사 혜거국사부도와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1362년) 등이 있지만, 정확히 배례석인지 그리고 제 짝인지는 모르겠다.

<좌측이 보은 법주사과 우측이 의정부 망월사다... 본래의 짝인지, 배례석의 용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어 올린다... 의정부 망월사 사진은 인용했다...>

 

 

○ 석불 앞 배례석으로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100호/1070년경)과 논산 덕평리 석조여래입상이 있지만, 제 짝인지 모르겠다.

<당진 안국사지다... 우측, 예전 사진을보면 없었던 배례석이 좌측 상단처럼 지대석을 돌출시키고, 경계휀스를 치면서 배례석이 놓였다... 발굴과정에서 배례석을 찾았다면 다행스런 일이지만, 석불 앞에 격식을 갖춘 배례석이 놓인 유일한 경우일 수 있다... 배례석의 의미와 용도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래 석탑앞에 놓여야 정상일까?...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다...>

 

 

-  참고로 최근에 배례석이 추가된 경우로는 대구 동화사 대웅전 옆 삼층석탑(832년경), 경주 마석산 삼층석탑(850년경),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과 석등(840년경) 등이 있고, 기타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보물 829호/930년경), 상주 심원사 삼층석탑 등도 있다.

<좌측은 대구 동화사 대웅전과 영산전 사이, 우측은 강진 금곡사다... 대구 동화사는 위쪽 사진처럼 있었는데, 언제부턴지 탑 주변을 정비하면서 잔디와 배례석이 놓였다...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닌만큼, 일단 현재 우리들의 의식과 흐름을 추적해볼 자료들이라 첨부한다...>

 

 

○ 드물지만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보물 365호, 940년경)에는 석관이 놓여있고, 제 짝일지 모르겠지만 음성 모전 오층석탑(950년경) 앞에는 석관과 유사하지만 비석받침으로 보이는 석물이 놓인 경우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의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서관이다... 배례석과는 또 다른 이해와 흐름이지만 용도와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아 비교해 본다...>
<음성 모전 오층석탑과 앞쪽의 석물이다... 아무리봐도 비석 받침이 아닌가 싶다... 같은 곳에서 발굴됐을지 모르지만, 일단 조성시대가 맞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잠재의식에는 이런 구도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어 올린다...>

 

 

○ 그리고 배례석의 위치와 관련해 배례석의 격식을 갖춘 문양없이 사방을 점한 경우도 있는데,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 대구 동화사 금당앞 동삼층석탑(서탑과 지대석 주변 판석의 구성이 완전히 다르다), 구례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배례석이다.

<상주 북장사 삼층석탑이다... 옮겨온 탑이고 또 충실하게 복원한 800년 전후의 석탑이다... 여기에는 사방에 판석을 놓았다... 배례석에 대한 또 다른이해가 아닐까 싶지만, 사실 이런 예는 오래된 관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래를 보면...>
<대구 동화사 금당앞 동서삼층석탑 중 동탑이다... 두 탑의 조성시대가 약 30년 시차가 있을 수 있고, 또는 후대 보수과정에서 기단부가 완전히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두탑의 미감은 완전히 다르다... 특히 하층기단부 주변 - 기대석과 지대석 주변의 판석이 완전히 다르고, 동탑에는 사방에 돌출된 판석을 놓았다... 나는 이것이 또 다른 배례석이라 생각한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도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문경 봉암사에는 한개만 남아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구례 화엄사 각황전앞 석등 주변에도 있다... 물론 여기도 4방에 놓였었을 거 같은데 하나는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 제 위치와 무관하게 방치(? 그런 경우가 너무 많지만...)된 배례석으로는,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보물 1656호/800년경, 당간지주 옆 당산나무 뿌리와 함께...)와 청도 장연사지(동서삼층석탑/보물 677호/840년경, 은행나무 옆 비석처럼 세워서...)가 있다.

 

<좌측 위아래는 성주 법수사지, 가운데는 공주박물관, 우측 위는 청도 장연사지, 아래는 산청 지곡사지 배례석이다... 성주 법수사지 당간지주와 공주박물관 사진을 제외하고, 각각 한국향토문화 전자대전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스크랩했다... 아무튼 법수사지는 당간지주와 함께 묵은 나무 뿌리에 갇혔고, 청도 장연사지 배례석은 마을 은행나무와 함께 비석처럼 서있고, 또 박물관에도 있고... 배례석의 전반적인 현황을 살펴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