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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3

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몇가지 메모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문양(안상/연화문)을 중심으로... 3

 

배례석의 명칭과 용도의 불일치

 

   ○ 배례석이 격식을 갖추고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시기는 700년대 중반부터 1000년대 중반까지다. 또 이 300년 간이 우리 역사에서 당간지주를 포함해 석등, 석탑, 석불(좌상), 승탑, 탑비 등이 가장 많이 집중적으로 조성되던 시점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 한반도의 석조예술이 가장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점이기도 하다. 여기에 배례석도 엄연한 하나의 영역을 가지고 발전했음에도 배례석의 명칭과 용도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이 없었다는 것이 내가 이렇게 설을 길게 푸는 이유다.

 

   - 먼저 우리는 금당, 석탑, 석등 등 앞에 놓인 석재를 배례석이라 부르고 있지만, 배타적이지 않고 범용적 개념인 배례석임에도 불구하고 금당과 불상을 비롯해 석등, 석탑, 승탑, 석비 등 모든 곳에 일률적이고 일관되게 사용됐던 사례가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가장 많은 배례석이 놓인 구례 화엄사... 다양하게 배치되었지만, 배례석은 석탑, 석등, 그리고 금당 앞에 배치되었다.
조선고적보-일제강점기 화엄사... 현재와 비교해보면 동오층석탑 앞 배례석은 석탑에 바짝 붙여서 배치되어 있고, 대웅전과 명부전 앞에는 얇고 작은 등이 설치되어 있다. 전기불일까?... 아무튼 현재 대웅전 앞 배례석과 직접 관련이 없을지 모르겠지만 같이 비교해 본다...

 

 

 

 

   - 또 존숭(尊崇)예배(禮拜)의 대상인 금당을 비롯해 석탑, 석불, 승탑 등은 당간지주, 석등, 탑비와는 카테고리가 구분된다. 즉 상징적인 의미가 작지 않음에도 당간지주와 탑비, 석등은 그 자체로 존송배례의 대상은 아니었으며, 존숭예배의 대상 모두가 별식의 배례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점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불상-불신과 탑-법신-사리탑, 금당 등은 이미 배례를 위한 금강좌, 연화장 또는 수미단 형식을 갖춘 좌대 위에 조성되기 때문에, 별식의 배례도구는 중복이거나 사족일 수도 있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조여래좌상(보물 187호 / 750년경)... 3단의 원반형으로 만들어진 대좌식으로, 형상화된 수미단으로는 가장 빠른 경우에 해당하며, 통일신라 석불좌상 시대를 만들어가는 최초의 작품에 해당한다... 자세히보면 대좌 앞쪽에도 별도의 단이 만들어져 있다... 이걸 제단이라 부를까? 상석? 봉로석? 이것도 배례석이라 부를 수 있을까?
김천 직지사 대웅전, 삼존불탱화, 수미단... 각각 보물 1579호, 보물 670호, 보물 1859호로 지정되었다... 탑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불상의 경우 실내든 실외든 이미 격식을 갖춘 단이 있다. 물론 우리가 이야기하는 배례석과 결이 다르겠지만...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미 수미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상은 별식의 대좌 위에 안치되었고, 수미단 앞에도 또다른 단 혹은 상들이 만들어져 있다... 존숭배례의 과잉 중복일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배례석은 어떤 명칭과 용도를 가지고 사용되기 시작해 범용화 되었을까? 사실 배례석의 연원을 알고 싶어도 법식화된 지침이 없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배례석들은 일단 제짝인지부터 불분명하고, 현재의 위치가 원래의 위치라고 보기도 어려우며, 상태도 일정하지 않아 본질에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문제가 크다.

 

   여기에 후대의 소극적 방치와 적극적인 훼손 과정에서 이동과 분실 등이 발생하고, 창녕향교의 사례처럼 타용도의 건축부재로 사용하기 좋은 크기인 만큼 분실도 많았기 때문에 그 본질에 다가서는 것이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개성 현화사지 석등과 배례석, 1020년, 중앙박물관... 석등앞 배례석은 제짝이 아니라고 한다... 좋은 배례석이 - 남는 배례석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석등 앞에 배례석이 있어서 함께 작을 지어 놓은 거라고... 이 배례석이 개성에서부터 함께 세트로 왔다면 또다른 이야기꺼리가 될 수 있었는데...^^

 

 

 

 

   ○ 이런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 배례석은 처음부터 그 명칭으로 불려온 것이 아니라 후대에 고착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처음에 특정 용도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후대에 여러 가지 관습과 불교외부의 예법이 가미되고, 특별한 계기를 통해 보편화되면서 습관적으로 만들어져 맥을 이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배례석이란 이름은 마음을 가다듬고 예를 올리는 그 어떤 대상과도 격의없이 어울릴 수 있는 보편적 개념이기 때문이다.

 

   - 또 현대에 이르러 배례석의 개념과 의미는 대중화됐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기물의 격식과 용도, 그리고 위상은 완전히 잊혀졌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작고 낮은 석재... 예를 표할 수 있는 딱 그만큼의 표식... 상당수 배례석이라 불리는 석재 중 무문(無紋, 연화문이나 안상, 괴임과 받침이 아예 없이 통돌로 놓인 경우)이 많고, 지금도 그런 판석을 습관적으로 놓으면서 배례석이라 부르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경산 불굴사 삼층석탑(보물 429호 / 840년경)과 석등, 배례석...
경산 불굴사 배례석... 아무리 확인해도 무문이다... 연화문이 닳아서 없어진 것보다는,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된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고, 편하고 익숙하지만 격식까진 필요없는... 손망실과 분실 후에도 배례석은 딱 그 정도로 대체되어 개념만 전승됐을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 사실 배례(拜禮)석라 일반적으로 불리지만 크기도 위치도 일정치 않고, 일부에서는 봉로(烽爐, 향로를 놓는)석, 정중(正中, 한가운데라는 표식)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왜 배례석이라 불리고 있을까?

 

   - 예를 표하는 방법으로 몸과 손을 사용한다. 그리고 손을 흔드는 정도의 표현을 넘어가면 악수나 합장, 그리고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거나 큰절을 하거나 부복(俯伏, 배가 땅에 닿을 정도로 엎드림)하는 정도다.

   그런데 배례석은 무릎을 꿇기에는 높고(의성 관덕리 삼층석탑), 부복하기에는 좁고, 그 위에 서서 합장하기엔 조금 애매하다(영덕 유금사와 울진 불영사 삼층석탑, 경주박물관 등).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보물 188호 / 860년경)과 배례석... 균형잡힌 비례, 독창적인 보살상 및 비천상의 배치와 세련된 조각솜씨, 단아하고 차분한 미감에 세련미까지 갖춘 석탑으로 많이 사랑받은 탑이다... 나는 고아한 아취가 느껴지는 미감으로 분류했고... 배례석은 시대가 조금 내려와서인지 안상의 깔끔한 조식고 달리 상부는 물끊기 홈만 파, 면과 상부 갑면을 입체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아무튼, 무릎 꿇기에는 너무 높다...
경주박물관 배례석... 이 배례석은 자세히보면 2단으로 만들어져 있다... 현화문이 조식된 상부 윗면과 안상이 새겨진 측면은 입체적으로 구분하였고, 안상 아래는 받침을 두었다. 그런데 특이하게 받침 밑으로 우주와 3개의 탱주를 양각했다... 독특하다... 이렇게 2단으로 만들어 놓았다면 그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 또 배례석의 연원으로 중국의 위진 남북조(5호 16국)시대에 조성된 석굴(윈강, 룽먼, 둔황, 병령사 석굴 등)과 부복을 상정한 예식을 감안해 향로가 놓였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배례석은 실내가 아닌 실외에 설치되었고, 제단과 배례석은 별도로 존재할 뿐 아니라, 배례석을 제단이라 칭하기에는 높이가 너무 낮고 좁으며, 격식에 어울리는 전형이 없다.

 

대구 동화사 금당암 동서삼층석탑(보물 247호 / 832년경) 중 동탑 기단부와 제단, 석등... 서탑과 동탑은 상하층 기단부를 비롯해, 지대석과 주변 판석이 완전히 다르다. 당연히 후대에 보수하는 과정에서 변경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 시기를 수마제전이 건립된 1465년, 극락전이 건립된 1622년 보다 늦은 1702년 이후(수마제전 중창 시점)로 생각한다... 특히 하층기단부와 제단 모서리에 장식된 영락식 부조를 보면 현대에 사용한 전기 그라인더가 생각나 거의 최근에 보수된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석탑 앞에 제단... 그리고 사방에는 돌출 판석... 옆으로 비켜선 석등...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모든 존숭배례의 기물들이 총집합된 곳이다...

 

 

 

 

   - 그리고 일부에서는 정중석이란 말도 하지만, 한반도의 불교역사 1500여년 동안 만들어진 수천개의 사찰 중, 주요 전각 앞마당에 배례석 같은 표식을 둔 공간은 10곳 미만에 불과하다.

   사찰 – 가람배치의 중심 또는 중심축선을 표시하는 정중이란 유의미한 개념에도 불구하고, 또 배례의 위치와 상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명칭이나 용도와는 거리가 있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보물 790호 /  1643년)... 조선후기 수미단을 대표하는 작품이 함께 있다...
일반적인 사찰 가람배치는 대부분 주불전을 중심으로 남북방향보다 동서방향이 긴 직사각형을 유지한다... 2:3, 3:4, 1:1.414, 1:2 등등... 가장 큰 이유는 주불전에 도달했다는 안정감과 좌우 시선의 개방감에서 남북방향보다 동서방향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백흥암은 남북방향이 동서방향보다 2배 정도로 깊다.  그로인해 보화루의 좁고 가파른 계단 끝에서 느끼는 극락전 처마의 경쾌한 상승감은 일품이지만, 막상 중심공간인 마당에 서면 답답함이 가시지는 않는다... 아무튼, 그 중심에 돌이 있다. 배례석이겠지??? 혹, 석등은 없었을까?

 

 

 

 

 

위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배례석의 용도

 

   ○ 그렇다면 배례석의 정확한 명칭과 용도 등을 추정하기 위해 배례석이 놓여있던 위치를 다시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명칭은 용도에서 시작하고, 용도는 기능에, 기능은 해당 기물이 자리하는 위치에 구속되기 때문이다. 존숭배례의 대상이던 불상과 금당, 승탑과 석탑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 먼저 배례석이란 의미만 생각하다보면 불상과 승탑 앞에는 무조건 있어야 제격일 거 같지만, 그런 사례는 극히 드물거나 후대의 추존에 불과하다는 점은 충분히 확인된다.

   즉 앞서 소개한대로 불상 앞 배례석은 당진 안국사지 석조여래삼존입상과 논산 덕평리 (운제사지) 석조여래입상, 구례 대전리 석불입상 3곳이 있지만, 제 짝인지 - 배례석인지도 불분명하며 그것도 최근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논산 덕평리 (운제사지) 석조여래입상/ 스크랩...
<구례 대전리 석불입상과 배례석... 두산백과 두피디아에서 인용>

 

 

   - 그리고 승탑 앞에도 배례석은 놓이지 않았다. 구산선문이 득세하던 신라말 고려초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된 그 많은 승탑 앞에 배례석은 없었다.

   구산선문의 영향으로 통일신라말에서 고려 초기를 거치면서 가람배치의 중심에는 석탑 대신 탑비가 놓이는 경우도 발생하고, 석탑의 위상은 승탑으로 대체된 시기다. 그럼에도 석탑 앞에 석등이 놓이고 그 주변에 배례석이 따라오는 전통적 패키지가 있음에도, 탑비와 승탑 앞에는 석등이나 배례석이 배치되지 않았다.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 57호 / 868년)과 철감선사탑비(보물 170호)... 대웅전 서북쪽 별원에 함께 있다... 나는 이 당시, 승탑과 탑비 등에 배례석이 설치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현재 남아있는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봐도, 승탑/부도탑/사리탑 앞의 배례석은 고려말 조선초 4개(940년 흥법사 진공대사탑앞 석관을 제외하면,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의정부 망월사 혜거국사부도 등) 뿐이며, 그나마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과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에 놓은 석재만 제짝으로 보인다.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과 배례석(1362년)... 연화대좌의 상대석이라 하기에는 얇고, 직사각형인데 배례석으로 보기에는 깊이가 있고...

 

 

 

   - 배례석이 처음 정착되기 시작한 시점, 불상 앞에도, 승탑과 탑비 앞에도 배례석이 놓이지 않았다면, 배례석은 석탑 또는 석등 앞에 놓였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 선종의 득세 이후 승탑과 탑비가 가람배치의 중심에 설 정도로 석탑의 위상이 축소조정되고, 승탑의 위상이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배례석이 없었다는 말은, 가람배치의 중심 또는 석탑과 승탑을 위한 목적의 배례석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 된다.

 

하동 쌍계사 진감국사탑비(국보 47호 / 887년)와 대웅전(보물 500호 / 1641년)... 쌍계사는 서쪽으로 열린 대웅전 중심의 동서축과 남북방향의 팔상전이 직교하는 독특한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다. 기록을 종합해보면 724년 팔상전 축으로 건립되고, 840년 진감선사가 중창하면서 동서축이 생성된 것으로 보이며, 887년 진감국사탑비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팔상전-청학루-진감선사탑비는 남북방향으로 직선축을 이루고, 대웅전-팔영루-천왕문-일주문 축과 탑비는 엇갈리게 된다... 아무튼 조금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쌍계사 배치는 그렇고, 문제는 어느쪽으로든 탑비가 쌍계사의 중심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석탑이 있어야 할 자리에 탑비가 놓인 경우다... 그리고 계단과 판석보다 낮은 탑비로, 세월만큼의 퇴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사찰의 중심이라고 하지만 탑비 앞에 배례석이 있지는 않았다고 생각된다...

 

 

   - 결국 부처의 무덤이며 법신이기도 한 석탑과 관련된 법식이 승탑에 계승되지 않았고, 존숭과 배례를 위한 가장 구체적 대상인 금당과 불상, 그리고 승탑 등에 배례석을 놓지 않았다는 말은 초기 배례석의 출발은 존숭 및 배례의식과 무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6호 / 975년)와 고달사지... 고달사지 가람배치는 탁 뜨인 공간에 비해 상당히 어렵다... 먼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완만한 구릉지에, 최소 3단의 축대로 공간을 구분하였고, 아래쪽까지 생각하면 5단 정도의 단차이를 두고 조성됐다... 두번째는 탑비의 방향을 보면, 고달사지는 남향으로 배치되었다... 세번째 석조대좌가 자리잡고 있는 남북에 각각 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탑지가 발굴됐다... 네번째로 원종대사탑(보물 7호 / 977년)이 탑비의 서북쪽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가람배치가 남향을 주축으로 생각했겠지만, 동쪽으로 트인 주변지형과는 뭔가 엇박자가 있음을 분명하다... 또 뒤쪽, 위면에 중심공간을 만든 것까지 고려하면 그것도 모호하고... 아무튼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주 방향은 남향이지만, 동서 병렬축을 만들면서 가람이 배치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중심공간은 앞뒤로 탑이 있는 석대좌일까? 보다 높은 곳에 있는 탑비 공간일까?... 고달사지가 어려우면서 재밌는 이유다...
기단부에 이 정도 공력을 투입한 것은 경주 감은사지 회랑부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 기단부에 들인 정성봐 충분히 비교될만 하다...
아무튼 이 기물을 위한 배례석은 없었다는 말...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