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문양(안상/연화문)을 중심으로... 5
불교와 등, 석등
- 배례석과 관련하여 석등에 대한 기본 이해가 필요해 첨부한다. - 여기에서는 석등의 탄생과 한-중-일의 등에 대한 접근과 간단한 비교, - 가람배치에서의 석등의 위치와 양식적 흐름과 크기의 변화에 집중하고자 한다. - 개인적 의견이겠지만, 장명등도 우리나라 석등의 큰 흐름에 포함했다. - 다음 기회에 석등의 구조와 양식적 변화에 대해 추가로 정리할 예정이다. |
○ 불교에서 불을 밝힌다는 말을 연등(燃燈)이라 하는데, 여기서 연등이란 연꽃처럼 생긴 등이 아니라(우리나라는 발음이 같아선지, 연등(燃燈)을 연등(蓮燈)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욕심과 집착으로 어두운 무명(無明)의 세상을 밝히는(明) 지혜의 등에 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 불법을 대를 이어 전수하는 것을 전등(傳燈, 강화에 전등사도 있다), 폐사된 사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법등(法燈)이 꺼졌다는 표현을 쓸 만큼, 등(燈)은 불교에서 상징적 의미가 크고, 또 향공양(香供養), 차공양(茶供養)보다 등(燈)공양(초파일-부처님 오신 날의 가장 큰 행사는 연등회(燃燈會))을 우선시 하기도 한다(절에서 제일 많이 돈 받는 게 등에 이름표 다는 것이지??).
- 그리고 공양 중 오체투지와 함께 왜곡된 것이 소신공양(燒身供養, 김동리의 ‘등신불’이란 소설도 있다)인데, 고승이 순수하게 자신의 몸을 공양하는 행위는 있을 수 있지만, 분신-소신공양은 극단적인 자살일 뿐(최후의 수단일 뿐, 최고의 공양은 아니라는 말) 불교교리에도 맞지 않다. 이렇듯 불교에서 중시되었던 등과 공양 등의 개념은 종교적 틀을 벗어나 대중적인 문화와 전통으로 정착되어 있다.
○ 또 연등회는 5세기 이후 인도에서부터 시작하여 대표적인 불교행사(중국에서는 등광제라 불린다) 중 하나가 되었지만, 특히 우리나라 연등회가 유명하다. 한국의 연등회는 조선시대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551년(신라) 기록부터 면면히 - 전국적으로 이어져, <연등회(燃燈會), 한국의 등 축제>란 명칭으로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인류의 대표적 문화로 자리 잡았다.
○ 불교의 등과 관련된 대표적인 문화 중 우리나라는 연등회와 석등이 발전했는데, 불교의 등에 대한 개념을 가람-사찰이라는 공간에 형상화(불교의 세계를 금당-불전에 형상화하듯이)한 석등이지만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불교의 공통된 문화는 아니다.
인도에는 석등이 없고, 중국은 홍등이, 일본은 초칭(제등/提燈)과 등롱(燈籠)이 석등과 섞여 있고, 한반도는 중국에서 시작한 연등석탑(燃燈石搭)을 사찰의 가람배치에 적용했지만 독창적인 흐름과 변천을 이루며 석등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결국 사찰-가람에 불을 밝히는 방식과 도구는 각 문화적 취향에 따라 전통과 습합, 독자적으로 발전-분화되었다는 말이다.
- 이렇게 보면 중국의 홍등이나 일본의 초칭 등과 비교해 한반도만 유일하게 공중(처마 밑)에 매단 등기구가 발전하지 않았다.
- 그리고 석등의 양(量)만 이야기한다면, 한국보다 일본이 훨씬 많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일본은 신불습합을 통해 불교의 모든 문화들이 무속성으로 빠르게 확장되었지만, 석등의 경우 다양하지만 작다(우리나라 장명등이 철저히 다이어트된 무게)는 특징이 있다. 디딤돌-배례석이 필요 없는 딱 등신대 크기다.
- 결국 중국은 주불전 앞에 <향로>가 발전했고, 일본은 청롱등의 화려함과 함께 신사 등에 걸린 초칭의 크기가 발전했고, 한국은 규모 있는 석등이 발전했다고 생각된다...
○ 가장 오래된 석등의 유구와 부재가 출토된 곳은 600년 전후 부여 가탑리 등 백제였지만, 100여년이 지나 통일신라 경주 불국사에서 양식이 정형화되고, 700년대 중후반부터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석등이란 용어가 처음 사용된 시기는 그보다 100여년이 더 지난 담양 개선사지 석등(보물 111호 / 868년)의 명문이다.
○ 석등은 간주석과 화사창을 기준으로 분류하는데, 간주석을 기준으로 팔각형에서 출발해 사자형 등 몇차례 실험이 있다가,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복형, 공양상형 등으로 다양화된다. 팔각형이 주류를 이루지만, 조선시대에는 장명등이 주류를 이루며 사각형이 유행한다.
또 화사석을 기준으로 접근하면 팔각형에서 출발해 육각형 등의 실험이 있다가 고려시대 사각형으로 바뀌고, 화사창도 4면에만 구멍이 뚫리다가 고복형으로 화사석이 커지면서 8면에 창이 만들어지고, 고려시대 사각 기둥식으로 화사석이 바뀐다.
-기둥 하나에 의지해 구조적으로 취약했던 팔각간주석 석등을 기둥의 입면적이 넓은 장구형(고복형)으로 바꿔 석등의 규모와 함께 안정성을 높이면서, 화사창 역시 불꽃이 외부로 노출될 면적을 극대화하기 위해 4개의 창을 8개로 넓히고, 아예 4귀 기둥으로 대체한 것이 석등 변천의 핵심요소가 된다.
<종류별 석등을 다 올릴지 고민중이다... 다음 기회에 한꺼번에 올릴지???>
- 고려 초기, 규모와 화사창을 키우기 위해 사각등이 유행했으나 이후 급격하게 단절되었고, 불교의 장엄도구인 석등은 고려말 1366년 공민왕대를 전후로 유교적 관습인 능묘제와 융합되면서 왕릉 앞에 독특한 석등이 전형화되는데, 불대좌 위에 석등 화사창이 얹혀진 형태다. 려말선초에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승탑 앞에도 석등이 조성되기 시작하고 조선시대 품계를 기준으로 한 능묘제도에 접합되면서 사각 기단과 화사창을 갖춘 장명등(長明燈)이 석등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 하나 더, 석등의 규모를 생각해보면, 600년대~700년대까지 초기 팔각간주석 석등은 그 크기가 2~3m 내외였다. 디딤돌 없이 불을 밝힐 수 있는 최소의 높이였다. 사찰의 중심공간인 마당이 커지고(가장 큰 규모인 경주 감은사지를 기준으로 실상사와 비교해보면, 석탑이 크다고 해서 금당 앞 마당이 넓은 것은 아니었다) 장식이 화려해지면서 석등 규모를 키우는데 한계를 느끼자, 800년대 중반 이후부터 팔각간주석을 대신해 고복형 석등(담양 개선사지, 임실 진구사지, 남원 실상사, 구례 화엄사 등)이 등장하면서 5~6m 규모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한동안 석등이 단절되다가 1300년대 중반 사각형 석등이 고착될 때는 3m 전후 석등이 만들어지고, 조선시대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등에 의해 규격이 고착된 시기 장명등은 3m →3.5m→2m 전후로 규모가 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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