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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2

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몇가지 메모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문양(안상/연화문)을 중심으로... 2

 

 

 

배례석의 문양 : 괴임, 안상, 연화문 등

 

   ○ 그러면 배례석은 어떤 격식과 유형을 갖추고 있을까? 배례석의 문양과 형태를 모아본다.

   ○ 배례석 중 가장 빠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은 경주 불국사 대웅전과 극락전 석등 앞에 놓인 2기의 배례석이다. 연화문은 보이지 않고 전면과 좌우 측면에 각각 2개와 1개씩의 안상(眼象)이 조식 되어있고, 안상의 양식은 각기 다르다. 800년 이전에는 안상만 조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되는데 불국사에서는 안상의 초기문양을 눈여겨 볼만하다.

 

<경주 불국사 극락전과 대웅전 앞 석등 배례석... 안상의 문양이 다르다... 대웅전 앞 배례석은 하부가 온전히 노출되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안상은 대부분 측면의 긴쪽에 3~2개, 좌우 짧은면에 1~2개씩 음각되었고,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국보 17호, 850년경) 배례석에는 긴쪽에 4개의 안상이 조식된 유일한 예다. 현재 안상을 확인할 수 있는 배례석은 대략 28개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배례석... 크고 높다... 연화문이 들어갔고, 긴쪽 측면단부에는 안상이 4개다...>

 

 

 

   ○ 배례석 상부에는 연화문이 조식된 경우가 많은데 눈으로 쉽게 확인되는 게 25개다. 물론 마모로 인해 확인이 명확하지 않을 수 있다. 대부분 연화문은 1개이지만,

 

   - 인제 한계사지(남삼층석탑 보물 1275호/800년경) 배례석은 연화문이 4개인 유일한 사례고, 연화문 3개는 구례 화엄사 서오층석탑(보물 133호/830년경)과 이곳 논산 관촉사 오층석탑(968년) 둘 뿐이다. 그리고 사진뿐이지만 황해도 해주 북숭산 신광사의 배례석이 연화문이 2개였을 것으로 보인다.

 

<인제 한계사지와 해주 신광사 배례석... 한계사지 하부가 궁금하고, 신광사는 예쁜 꽃살무늬가 살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 연화문 중 특이한 사례는 828년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포항 법광사지와 경주 읍성 석등 앞 배례석이다. 이들은 모두 측면단부에 전면 3개와 좌우 2개씩 안상을 음각하였고, 상부에 1개의 연화문을 양각했는데, 위치가 정중앙이 아닌 한방향으로 편중되었다는 점이다. 포항 법광사지 사진처럼 향로를 놓기위한 의도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딱 2개만 그렇게 조형됐다.

 

<포항 법광사지 배례석... 온전한 격식을 갖춘 완성태... 연화문이 한쪽에 치우쳐 있다...>

 

<경주박물관의 경주 읍성 석등과 배례석... 배례석을 보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석등의 복련과 앙련, 그리고 상하대석의 받침을 생각하면 시기가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 같다...>

 

 

 

   - 상부에 특이한 문양이 조식된 사례는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보물 1471호, 830년경)앞에 조성된 국왕배례지석(1085년)이 있고, 이외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과 논산 관촉사 오층석탑 앞, 그리고 해주 신광사 배례석이 있다.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앞 국왕배례지석... 여러가지로 유의미한 배례석이다... 당초 파손된 원형과 복원품 연화문이 다른데, 검토할 필요가 있을 듯 싶다...>

 

<세종 비암사 삼층석탑 앞 배례석... 석탑과 동시대에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재밌다...>

 

 

 

   - 측면이 특이하게 조식된 사례는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35호, 780년경)앞 배례석으로 안상 내부에 작은 불상이 각각 3개와 2개씩 양각된 경우와, 측 4면에 연판문을 앙련식으로 조식한 대구 부인사 석등 앞 배례석이 있다.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 앞에는 각각의 배례석이 다른 양식으로 놓여있다... 안상 내부에 불상이 조식된 유일한 사례다...>

 

 

 

   ○ 그리고 괴임(건축에서는 몰딩 또는 재료분리대라 부르고, 석탑에서는 괴임 또는 받침이란 호칭으로 불린다)을 두어 격식을 제대로 갖춘 배례석들도 남아있다.

 

<포항 법광사지 배례석 부분...>

 

 

 

   - 불국사 극락전, 포항 법광사지,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군위 인각사,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앞 석등, 삼척 흥전리사지, 영덕 유금사, 구례 화엄사 구층암, 논산 관촉사 배례석 등은 온전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과 석등 사이의 배례석... 온전한 격식을 갖춘 완성태다...>

 

 

 

   - 간소화시켰지만 측면단부 가운데 면을 파내고 상하부를 1단으로 돌출시켜 마감하거나, 하부가 묻혀 있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하부에 받침을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배례석으로는 불국사 대웅전,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앞 석등, 양양 선림원지, 경주읍성 석등, 양양 진전사지, 영주 비로사, 공주박물관, 합천 해인사 원당암, 합천 청량사 석등, 강릉 등명사지, 울진 불영사, 정선 정암사, 개성 헌화사 배례석 등이 있다.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영주 비로사 배례석이 맞다... 잘못 됐으면 지적을 바란다...>

 

<강릉 등명사지 오층석탑과 배례석... 하부가 온전히 노출됐다면 하는 아쉬움이...>

 

 

 

   ○ 배례석의 문양과 형식을 정리해보면 ; 경주 불국사에서는 받침과 괴임을 두고 안상을 조식한 것으로 시작하여, 포항 법광사지와 삼천 홍전리사지 등에서는 상부판면에 연화문을 새겨 통일신라 배례석을 완성했고, 이후 영덕 유금사와 정선 정암사처럼 폭도 좁아지고 규모도 작아지게 간소화되다가, 고려시대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과 조선시대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배례석처럼 완전히 달라졌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경주 불국사 극락전 앞 석등 배례석... 분명 상부에는 연화문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삼척 흥전리사지 배례석과 유물들/tksgk님 블로그와 new1에서 인용... 배례석의 원형이 온전히 살아있는 귀한 사례여서 인용했다... 배례석의 완성태라 생각된다...>

 

<800년대 후반부터 고려초까지 배례석은 폭이 좁아지거나 높아지면서 많이 간소화된다... 좌측부터 영덕 유금사 삼층석탑, 합천 청량사 석등, 울진 불영사 삼층석탑의 배례석들이다...>

 

<정선 정암사 수마노탑과 배례석... 역시 작아지고 간소화됐다...>

 

<다시 양산 통도사 국왕배례지석... 내 눈에는 아무리봐도 연화문이 달라졌다... 즉 연잎이 16개에서 10개로 줄었다... 그리고 가운데는 연꽃의 씨방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고구려 고분 안악2호분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아직 불교가 정착되지 이전인 300년대 고구려와 1085년의 고려가 인식한 문양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연결된다... 재밌다...>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 배례석/야초의 사진첩 블로그에서 인용... 배례석의 중요한 터닝포인트다...>

 

 

 

 

 

배례석 답사 추천지

 

   ○ 격식과 완성도를 함께 갖춘 배례석을 추천하자면 대구 부인사 석등앞(800년경), 포항 법광사지(828년), 삼척 흥전리사지, 논산 관촉사 오층석탑이다.

 

<대구 부인사 삼층쌍탑과 석등 사이의 배례석... 거의 유일하게 앙련이 조식되어 있다... 불국사에서 포항 법광사지나 삼천 흥전리사지 배례석으로 넘어가지 건 다양한 실험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깔끔하고 멋지다...>

 

<논산 관촉사 오층석탑 배례석... 크고 높고 과감하다... 그리고 연화문을 잇는 줄기는 과감하면서도 힘이 넘친다... 안상에도 중간에 귀꽃을 올렸다...>

 

 

 

   - 앞서 소개한 배례석을 제외하고 추천하면, 합천 해인사 삼층석탑앞(840년경),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앞(850년경, 파손품이지만), 영주 비로사(860년경),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보물 518호, 900년경), 개성 헌화사 석등앞(1020년) 등이 있다.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과 배례석... 파손품이지만 완성태다... 깜찍하고 정교하고 멋있을 거 같다...>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과 석등 배례석... 하부가 온전히 노출됐다면 하는 아쉬움이...>

 

<개성 헌화사지 석등 배례석... 정교함도 떨어지고 약식화됐지만 정갈한 느낌... 상부 모죽임이 특이하다...>

 

 

 

   ○ 배례석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구례 화엄사다. 사사자 삼층석탑과 석등에 각각 1개씩, 동서오층석탑에 각각 1개씩, 구층암 석등앞에 1개, 그리고 각황전 석등 주위에 4~5개... 기물마다 하나씩 9~10개의 배례석이 남아있어, 문양과 배치에 대해 780년대부터 900년대까지와 그 이후의 변화까지 읽어볼 좋은 공간이다.

 

<구례 화엄사는 지속되는 불사과정에서 배례석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다양하게, 시대의 변천과 의식변화를 추적하며 볼 만하다...>

 

<구례 화엄사 구층암 석등 배례석... 작아졌지만 멋스러움이 살아있다... 귀엽고 앙증맞은 크기는 아니지만 불편함이 없는 편안한 느낌이다...>

 

 

 

   ○ 그리고 배례석이 어떻게 사라지고 훼손됐는지 읽을 수 있는 곳으로 창녕향교가 있다. 창녕향교는 조선초 창건되어 1670년 중건되고 1900년대 들어와서도 20년대, 60년대, 70년대, 80년대까지 지속적인 중건과 복원이 있었다. 그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지만 창녕향교 외삼문에 해당하는 추한문 앞 석단에는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배례석이 4기나 있다.

 

<창녕향교에는 여기저기 배례석이 많이 있다... 건축부재로 쓰기에 적당했기 때문일듯... 화가 났던 것은 배례석이나 기타 석탑 등의 부재를 재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었다... 무관심이었을까? 게으름이었을까?? 천박한 과시욕이었을까???>

 

   - 조선유교의 편협하고 의도적인 훼손과 폄하목적(숭유억불을 위해 불교유물 등을 부수고, 발로 밟고 다님) 때문인지, 적당한 건축부재를 손쉽게 조달하기 위한 무지의 소산인지 모르지만, 과거 어느땐가 수많은 이들의 염원과 존숭의 상징이던 배례석은 어느 시대 누군가에 의해 석축의 부재로 전락하게 되었다. 향교의 기반과 축대가, 파괴와 갈취의 현장이라는 게 말이 되나? 그 교육현장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이것도 우리네 역사의 한 단면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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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향교는 배례석만 보이는 게 아니다... 계단을 비롯해 여기저기 축대와 주춧돌, 계단에도 파손된 부재들이 많다... 아마 인근 사찰 몇개는 부수고 털었을 거 같다는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