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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Ⅲ. 부록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4 석탑과 석등앞 배례석

의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몇가지 메모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문양(안상/연화문)을 중심으로... 4

 

 

 

석탑과 배례석

 

   ○ 지금까지를 종합하면 배례석은 처음부터 금당, 불상, 승탑, 탑비를 비롯해 석탑 등을 위한 배례도구가 아니라, 석등을 위해 - 석등의 보조적 기물로 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현재 남아있는 사례는 석등보다 석탑 앞 배례석이 훨씬 많지만, 이는 후대에 관리의 편의, 의미의 재해석을 통해 변경된 것이고,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하기 시작한 초기의 배례석은 석탑이 아닌 석등 앞에만 놓였다고 생각한다. 석탑 및 석등과 관련된 배례석의 사례를 더 살펴보면 ;

 

   - 먼저 700년대 중반 불국사의 배례석은 석가탑과 다보탑 - 쌍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석등 앞에 놓였다. 만약 각각을 위한 배례석이 있었다면 석가탑과 다보탑 앞에도 배례석이 있어야 하지만 (아무리 많은 이동과 변형, 재해석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석등 앞에만 배례석이 놓여 있다. 그것도 석등에 바짝 붙어서...

 

<경주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과 배례석...>

 

 

   - 또 하나는 828년 조성명기가 확실히 남아 석탑의 편년 기준 중 하나인 포항 법광사지의 경우, 금당-석탑-석불-석등-당간지주 등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가람배치가 남아있다.

   여기서 석탑은 별원(700년 전후 가람배치를 보여주는 고선사, 황복사, 나원리 등은 석탑이 금당과 완전히 떨어진 곳, 금당보다 높은 곳에 조성됐다)에 존치되어 있지만, 이때 석탑 앞에 배례석은 놓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불국사에서 만들어진 이후부터 법광사지까지 배례석은 석탑 앞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됐다는 말이다.

 

<포항 법광사지 석탑과 배례석... 석탑은 최근 조성한 것이다...>

 

 

   ○ 이렇게 접근하면, 현재 석탑 앞에 배례석이 놓여 있는 양양 선림원지와 진전사지, 의성 관덕리, 영덕 유금사, 예천 간방리, 울진 불영사, 화엄사 서오층석탑, 거창 소야탑골 등의 석탑 앞 배례석은 유물의 수습과정에서 관리의 편의를 위해 모아 놓은 것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거창 소야탑골 삼층석탑과 배례석, 930년경, 거창박물관...>

 

 

   그리고 상주 북장사, 경주 마석산,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 배례석은 후대에 약식으로 추가한 것들이고. 다만 통일신라말 고려시대에 들면서 배례석의 이해가 달라졌다면 홍천 괘석리, 강릉 등명사지, 정선 정암사 탑 앞의 배례석은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다.

 

<경주 마석산 삼층석탑(850년경),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930년경/보물 829호)과 배례석...>
<홍천 괘석리 사사자 삼층석탑(950년 경/보물 540호)... 앞쪽 큰 돌을 배례석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은 또 변했겠지만, 처음 본 이후 다시 갔을 때는 주춧돌이 같이 놓여있다... 괘석리 석탑 사지에서 발굴된 것인지, 아니면 인근에서 발굴된 것인지 불분명하다... 그렇게 발굴이 계속되고, 또 관리의 편의를 위해 후대에 추가 된 것들이 많게 된다. 제 짝인지, 아닌지는 더욱 모호해지고...>

 

 

   - 그 외 석탑과 석등이 함께 있어 후대에 석탑 앞으로 배례석을 옮겼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는데, 경산 불굴사, 합천 해인사, 군위 인각사, 합천 해인사 원당암, 창원 성주사, 논산 관촉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850년경)... 이 곳도 석등의 위치가 석탑 앞에서 바뀌었다... 즉 금당-석탑-석등과 금당-석등-석탑의 배치는 생각보다 중요할 수 있다... 현재 배례석은 석등쪽이 아닌 석탑 앞쪽에 놓여있다... 참고로 석탑의 조성시기에 대해 "나말선초"라는 표현이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과 위키백과에 기록돼 있는데, 어이가 없다. 나말려초가 있고, 려(여)말선초가 있지만, 나말선초는 어느 시기지??? 나는 850년경 석탑으로 확신한다...>

 

 

   - 다만 석탑을 위해 만든 배례석의 사례가 있는데, 이 경우 배례석은 석등 앞 배례석과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 제짝으로 보이는 것 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만 석등용 배례석과 비슷한 양식을 갖추고 있을 뿐, 봉암사 삼층석탑, 동화사 금당앞 동삼층석탑은 기단부 지대석의 변형이고, 비암사와 통도사 삼층석탑은 석탑을 위한 배례석으로 본래의 흐름이나 양식이 다르다.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배례석... 배례석 아래 사진은 조선고적도보에서 인용... 석탑을 위한 배례석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탑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와 현재 배례석은 완전히 다르다... 조선고적도보/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의 일제강점기 사진을 보면 배례석 하부에는 사사자석탑처럼 네 귀에 사자처럼 가공된 받침돌이 보인다... 어느 것이 원형일지... 궁금하고 재밌다...>

 

 

   결론적으로 석탑 앞에 놓인 배례석과 석등 앞에 놓이던 일반 배례석은 결이 다르다는 말이다.

 

<문경 봉암사 삼층석탑(820년경/보물 169호)... 기단부 지대석 주변의 판석 앞으로 전면에만 한개의 판석이 돌출되어 있다... 나는 이것도 변형된 배례석으로 보는 입장이다... 문제는 석탑조성 시기부터인가, 아니면 후대의 보수과정에서 추가된 것인가가 불분명하다는 점... 대구 동화사 금당암 삼층석탑 중 동삼층탑의 경우를 생각하면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기단부 지대석 주위에 판석을 깐 경우는 경주 감은사지에서부터 창녕 술정리 등등 삼층석탑이 정형화되고 전형화된 초기부터 있었던 기법이지만, 그 주위에 배례석을 둔 사례는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석등과 배례석

 

   ○ 배례석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접근하다 보면 석등에 대해 논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석탑과 석등의 관계... 석탑 앞에는 항상 석등이 있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대부분 석탑이 있는 폐사지에는 석등부재가 함께 남은 경우가 많다. 경주 미탄사지,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을 비롯해 청도 봉기동 삼층석탑, 성주 법수자시 삼층석탑 등 대부분 폐사지 석탑 앞에는 연화석이 놓여있고, 합천 청량사, 남원 용담사 등의 1등 + 1탑 + 1불의 흔적에 익숙하기 때문에 석탑 앞에는 당연히 석등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곤 한다.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740년경/보물 1928호)와 석등부재...>
<합천 백암리... 나는 왜 이런 그림이 좋치??>
<합천 백암리 석등(840년경/보물 381호)과 합천 대동사지 석조여래좌상... 한 곳에 있었을까? 다른 곳에 있었을까? 백암리에 백암사와 대동사 두곳이 있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석등조성 시기에 대해 대부분 9세기 후반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9세기 중반 중 850년을 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이다... 부석사 석등과 비교해 하대석 밑에 안상을 새긴 기대석이 없고, 하대석 연판문에 귀꽃이 없으며, 상하대석의 괴임이 2단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생각한다... 그리고 서천왕상도 부석사 등과 비교해 생동감이 뛰어나다... 전체적인 비례에서 지붕돌이 넓어 한편으론 시원하면서, 또 한편으론 역삼각형의 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 그러나 600년대 백제의 사찰에서도 부여 가탑리, 익산 제석사지, 익산 미륵사지(중금당과 동원 등 3곳)에서만 석등 부재가 발굴되었고, 700년대 초반까지 신라의 의성 탑리나 통일신라의 경주 감은사지, 황복사지, 나원리, 장항리사지 등은 석등이 있었는지, 또 석등 위치는 어디였는지 확실하지 않다(경주 분황사와 고선사지 석등 하대석은 8세기 이후가 분명하고).

   즉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계율종을 확립하고 가람배치의 원형을 만들면서 석조예술의 꽃을 먼저 피운 백제에서도 석등이 시도된 것은 600년대 전후 몇 곳에 불과하고, 통일신라시대인 700년대 초반까지 한반도의 사찰에 석등은 아직 보편적으로 보급되기 전이었다고 보는 게 맞을 수 있다.

<각각 400년대 초반, 639년, 645년 경 완성된 고구려, 백제, 신라의 대표적인 가람배치다... 최근에 많은 변화가 있지만, 평양 정릉사지와 경주 황룡사지에는 석등의 위치가 명시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익산 미륵사지의 경우, 석등은 금당과 탑 사이다. 즉 금당-석등-석탑의 순서... 문제는 총 3세트, 13점의 부재가 발굴되었는데, 아직 그 배치를 명확히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황룡사지 석등은 아래에서 다시...>

 

 

   -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사찰-가람의 장엄에 대한 필요가 절실했겠지만, 야외에 불을 피우고 관리하는 것은 그만한 인력동원과 관리시스템이 수반되어야 한다. 관솔대가 아닌 이상 장작이 아닌 호롱불을 사용했겠지만, 바람만 불어도 불이 꺼질테고, 아차하는 순간 목조건축물인 금당에 불이 옮겨붙거나, 산불이 날 수 있으니까...

   결국 그만한 규모와 인력 및 통제시스템을 갖춘 곳에서만 석등을 배치-유지할 수 있었고, 사찰별로 석등의 개수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필요에 따라서는 사찰과 석탑, 석불 등을 존숭하기 위한 예식의 도구이면서, 일몰 이후부터 새벽까지 실생활에 사용할 등(燈)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졌을 석등이었기 때문에 그 위치도 한정적이었을 것이다.

 

   ○ 그러면 석등이 자리 잡은 위치는 어디였을까? 먼저 600년대 가람배치의 완성태인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신라의 경주 분황사지, 일본의 나라 법륭사지에서는 사찰 – 가람배치의 중심에 석등이 놓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당대 사찰 – 가람배치의 중심에는 석탑 또는 금당 등이 배치되기 때문에 당연히 그곳에 석등이 함께 조성되었을 것이고.

 

<일본 나라현 호류지(607년,670년,711년)와 익산 미륵사지(639년)... 가람배치에 석등이 배치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가람배치의 중심에 석등이 있었을 거으로 추정된다... 다만 호류지의 청등롱은 1698년에 제작된 것으로 원래 석등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이곳이 본 자리인지 불분명하다... 아니면 호류지는 석등이 아직 정착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없었을 수도 있고, 몇차례의 중대한 화재 후 동원과 서원의 석등만큼은 없앴을 수도 있다... >

 

 

   그렇다면 석등은 석탑을 존숭하기 위한 용도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가람배치의 상징적 중심지에 있었다는 말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이유? 전기가 없던 그 시대, 실내의 촛불이나 들고다니는 호롱불(청사초롱 등) 외에 실외에 불을 켜 놓을 수 있는 도구는 석등 밖에 없기 때문이고, 이는 조명의 밝기-조도보다 등대 같은 구심점 역할이 더 컸을 수도 있다.

 

<경주 황룡사지 가람배치 모형... 지금은 황룡사기념관이 따로 있지만, 예전에는 경주박물관에 있었고, 영상자료도 시기마다 약간씩 다르다. 대표적으로는 경루와 종루가 사모지붕-팔작지붕-사모지붕으로 변경되었고, 석등도 황룡사 구층목탑 앞에 3기가 있다가 1기로, 동서금당 앞에도 석등이 없다가 생기고... 어려운만큼 계속 발굴결과에 따라 변동이 있다...>

 

 

- 조금 더 나아가, 석등이 항상 석탑과 패키지로 조성된 것은 아니라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보은 법주사다. 법주사에는 팔상전 동측에 1기, 대웅보전 앞에 1기(사천왕석등), 약사전 앞에 1기, 그리고 원통보전-약사전-팔상전의 삼각형 중심에 1기(쌍사자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대부분 석등이 임진왜란 이후 근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양산 통도사(석등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다)의 경우, 대부분 대웅전, 개산조당, 관음전, 영산전 등 불전(금당-불당)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후대에는 훨씬 실용적으로 배치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보은 법주사의 석등 4개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잡기도 쉽지 않다...>
<현존하는 석등이 가장 많은 곳이 양산 통도사 일 거 같다... 금강계단과 중로전(개산조당과 관음전)의 석등과 석탑... 사실 통도사 중로전의 중심법당은 대광명전과 해장보각이지만, 그 앞에는 석등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
<양산 통도사의 상로전과 하로전... 대웅전과 영산전 앞 넓은 마당에는 석등이 각각 1기씩만 있다... 어쩌면 양산 통도사의 석등은 불이문을 지나 상로전인 대웅전까지의 이동축선을 중심으로 배치했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 양산 통도사의 석등은 이동축선과 중심법당 앞에 배치되었지만, 전부 중심에서 한쪽으로 비켜서 배치되었다... 기하학적 균형과 도상적 중심이 아닌, 사람의 이동 동선을 더 우선시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 즉 석등은 석탑 및 불탑의 배례를 위한 종속도구가 아니었다. 초기에는 금당과 탑(목탑-석탑) 사이에 배치되다가, 점차 석탑이나 불상 앞에, 때로는 불전 앞에, 때로는 가람배치의 중심이나 주요 동선에 조성되었고, 후대의 서원 등에서 사용한 관솔대(정료대-노반석주)와 함께 사찰의 요소요소에 배치돼 불을 밝혔던 용도로도 사용했다.

 

<양산 통도사 관음전(중로전) 앞 석등과 ???... 나는 관솔대로 생각한다... 중복일까?>
<양산 통도사 개산조당(중로전) 앞 석등과 ???... 오른쪽은 관솔대가 아니라 삼십칠조도품탑이라 한다... 열반에 들게 할 37개 실천항목 : 사념처, 사정근,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의 일곱가지 수행방법의 숫자를 더하면 37이 나오고, 탑에는 이 글짜들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이건 도품탑이 맞다... 그런데 여기에 불도 붙였을까???>
<서원에서는 정료대 등으로 불린다... 자세히보면 모두 화사석 위가 결실된 석등이다. 물론 상대석은 바뀐 곳들도 있지만... 맨 왼쪽은 영주 숙수사를 헐고 지은 소수서원의 정료대, 오른쪽 위는 안동 도산서원 전교당 앞... 오른쪽 아래는 경주 옥산서원 구인당 앞 동재쪽...>

 

<세중돌박물관의 관솔대(?), 노반석주(?), 화등석(?)... 무엇으로 불렸을까?... 서원이나 사당, 양반가의 관솔대는 절집의 석등을 재사용했지만, 임진왜란 후 조선 중후기에 들어서면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상부면이 좁아지고 화사석 등이 없다... 게으름 때문일까???>

 

 

   이런 이유로 보은 법주사를 비롯해 양산 통도사와 경주 황룡사지, 칠곡 송림사, 충주 미륵대원지 등 하나의 사찰에서 몇 개의 석등 부재들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고, 하동 쌍계사처럼 석탑과 무관한 석등 부재가 있었다는 말은, 결국 1사찰 + 1석등 또는 1탑 + 1석등이란 기준은 애초 없었다는 말이 된다.

 

<보은 법주사에는 현존하는 4기의 석등 외에도 석등부재들이 더 있다...>

 

 

   - 다만 사찰의 중심공간을 벗어나 별원처럼 꾸며지거나 독립된 공간의 석탑과 석불 앞에는 자체의 완결된 격식을 위해 석등이 조성된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구례 화엄사 사사자석탑을 비롯해, 경산 선본사 삼층석탑,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등이 그곳이다. 이곳의 석등들은 분명 공간장엄을 위한 상징적 의미가 우선이었을 것이다.

 

<경산 선본사 삼층석탑과 석등 부재... 선본사탑은 사찰의 건너편 언덕, 팔공산 기슭에 별원처럼 마련된 공간에 있다... 이렇게보면 석등과 석탑, 또는 석등과 불상만으로도 사찰-절-가람 배치/장엄의 최소 단위는 만족된다고 생각했을 거 같다...>

 

 

   ○ 결국 600~700년대까지, 불상을 비롯해 석탑, 승탑, 탑비, 석등, 배례석 등은 각자의 필요와 위상을 가지고 각자의 위치에 조성됐지만, 석등과 배례석 등 장엄을 위한 기능-용도를 가진 기물들은 존숭예배의 대상 앞에 무조건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석등은 석탑이나 불상, 승탑처럼 배례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배례의 대상이 아닌 기능의 문제... 결론적으로 김대성이 불국사에서 만든 것은 배례(拜禮)을 위한 단(段)이 아니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