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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Ⅲ. 부록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6 배례석의 용도와 보편화

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몇가지 메모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6 배례석의 용도와 보편화

 

 

 

 

통일신라 배례석의 용도

 

   ○ 그렇다면 배례석의 기능은 무엇이었을까?

   700년대 중반 불국사에서 만든 배례석은 석등 앞에 놓기 위해 만든 것이고, 그 용도는 석등에 불을 밝힐 때 사용하기 위한 디딤돌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등신보다 조금 더 높은 크기의 석등, 그리고 손이 닿을 수 있는 높이의 화사창 – 화사석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디딤돌... 그런 이유로 불국사의 배례석은 발을 딛고 서는 상부 표면에 굳이 연화문을 만들 이유가 없었고, 석등에 바짝 붙여야 했으며 그만한 높이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 석등은 시대에 따라 유행에 따라 의미부여에 따라 변해갔지만, 양식과 규모와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사람이 매번 불을 붙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이 밝혀질 화사창까지의 높이가 중요했고. 왜? 손이 닿아야 하니까.

   이런 이유로 초기 백제의 석등은 화사창까지의 높이가 낮아 전체적인 규모는 3m를 넘지 않았다. 이는 현재 복원된 전주박물관이나 익산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의 석등 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등(전주박물관), 경주 불국사 극락전(2.3m), 경주 불국사 대웅전(3.1m), 청도 운문사 금당앞 석등(보물 193호, 830년경, 2.6m), 밀양 표충사 석등(2.2m)>

 

 

   -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특히 불국사가 조성될 시점에서 석등의 규모도 커진다. 자연스럽게 높이를 확보하기 위해 간주석이 두꺼워지고 화사창까지는 높아지고. 또한 석등에 불을 매일 밝혀야 하기 때문에 임시 사다리가 아니라 상설적인 형태를 갖출 필요가 생겼을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바로 석등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디딤돌 – 즉 배례석이었다고 생각된다.

 

<경주 불국사 극락전과 대웅전 석등과 배례석...>

 

 

 

   - 석등에 불을 밝히기 위한 상설적인 디딤돌이 필요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산이 있다. 바로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35호/891년경)이다. 이 석등에는 배례석이 아닌 계단이 있다. 이유? 석탑이 크기 때문이다. 높이 5m. 문제는 화사창까지의 높이 – 즉 사람의 손이 닿은 높이가 중요했고, 상시적으로 석등에 불을 밝히기 위해서는 그만한 높이의 계단 – 디딤돌을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남원 실상사 석등... 석등 계단으로는 거의 유일한 흔적이지만, 고려 유물과 비교하면 역시 세련미 넘치는 맵시를 가지고 있다...>

 

 

 

   - 그리고 이 석등 앞 계단석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사례가 2건이 더 있음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북한에 있기 때문이다. 고려말인 1366년 조성된 공민왕릉(현릉과 정릉, 북한국보 123호) 앞 장명등과 강원금강 묘길상 마애불(북한국보 102호) 앞 사각석등이 그것으로, 높이가 2.5m와 3.1m이며(공민왕릉 장명등의 보주 등 상륜부가 있었다면 비슷한 크기다. 묘길상앞 석등과 판박이처럼 보이는 개성 개국사 석등은 3.8m로 제일 크다) 그 앞에 각각 2단과 3단의 계단석이 놓여 있다.

   470여년의 시간이 흐르고 통일신라와 고려의 미감이 달라지긴 했지만, 규모가 있는 석등에는 계단석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남원 실상사 석등, 강원금강 묘길상 앞 석등, 공민왕릉 앞 장명등...>

 

 

 

 

 

 

   ○ 모두 인정하겠지만 석당간만큼 구조적으로 취약한 것이 팔각간주석 석등이다. 왜냐하면 기둥 하나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것도 간주석보다 얇고 짧은 깊이로 상하석과 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5~6개에 불과한 석등 부재들(지붕돌-화사석-상대석-간주석-하대석의 기본구조에 + 상륜부 + 기대석과 지대석으로 구성)로 이뤄진 석등의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여 안정감을 키우면서 장식성을 강조하거나, 화사창을 키우기 위해 시도한 것이 고복형 석등이다.

 

<왼쪽은 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가운데는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 오른쪽은 장흥 보림사 석등이 모델이다...>

 

 

 

   - 문제는 고복형 석등 등 규모가 커진 석등이 등장하면서부터 배례석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 용도폐기와 변형이란 갈림길에서 규모가 커진 석등에는 배례석이 아니라 진짜 실용적인 계단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추정이 맞다면 석등 배례석은 화사창까지의 높이가 1.8m ± 30cm 내외인 석등에만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 그런 이유로 불국사부터 담양 개선사지나 구례 화엄사 석등이 조성된 180년간 처음의 용도와 양식과 격식을 지켰다는 추정도 역으로 성립된다.

 

<왼쪽 2점은 통일신라, 오른쪽 2점은 고려석등이다... 팔각간주석형인 경주 불국사 석등에는 제대로 된 배례석이, 사각간주석형인 강원금강 묘길상 석등에는 계단이... 고복형인 담양 개선사지와 개성 현화사지에는 배례석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비교를 위해 실제 크기와 높이의 스케일을 맞춰 비교해보면 화사창까지의 높이가 별 차이가 없다... 실용성, 안정성, 장식성을 만족시키기 위한 끊임없는 고민의 결과다... 각각 높이는 3.1m, 3.5m, 4.2m, 3.1m다...>

 

 

 

 

 

   ○ 결론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배례석은 팔각간주석형 석등에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석등의 규모가 커지면서 석등 앞 배례석은 계단석으로 대체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또 모든 석등이 실사용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볼 수도 없다. 즉 순수하게 공간장엄을 위한 상징적 석등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석등이 디딤돌 같은 배례석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튼 이때부터 석등 디딤돌이었던 배례석은 석등과 한 세트라는 인식이 사라진다.

 

<백제, 통일신라, 고려의 대표적인 팔각+팔각간주석형 석등의 크기 비교... 이렇게보면 보은 법주사 사천왕석등과 경주읍성 석등은 실용성보다, 기념비적 스케일에 장엄용으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특히 경주읍성 석등 앞에 계단이 있다는 상상을 하기 힘들다...^^>

 

 

 

   - 이를 가속화시킨 또 하나의 흐름은 시대의 변화다. 중앙집권이 무너지면서 지방호족이 등장하고, 5교9산으로 종파가 분화되면서 국가의 통제력은 더욱 악화된고, 결국 통일신라가 멸망하면서 잊혀진 백제를 비롯해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문화까지 수용한 고려초 격변기를 거치면서 고려의 불교는 통일신라의 전통과 양식을 빠르게 해체한다. 그 하나는 석탑의 변화고, 또 하나는 석등의 단절이다.

 

<통일신라와 고려 미술의 단적인 비교, 일단 석등 비교사진은 많이 올렸으니, 석탑과 석불을 골라 2~3세대를 넘지 않게 맞춰봤다... 석탑은 앞서 본 합천 해인사 길상탑(보물 1242호, 895년)과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185호, 970년경), 불상은 창원 불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436호, 860년경)과 논산 개태사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219호, 936년) 이다... 석탑은 규모와 디테일한 양식에서 많은 차이가 생기지만 3층이 5층으로 바뀐 것이 가장 크고, 석불은 역시 디테일에서 많은 차이가 발생하지만 가장 큰건 규모와 함께 좌상과 입상의 차이로 봤다...>

 

 

 

   - 한 예로 석탑의 변화를 살펴보면, 불대좌 위에 석탑을 올리거나(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 강릉 등명사지 오층석탑, 김제 금산사 육각 다층석탑 등 점판암으로 만든 다층석탑 등)과 복련을 일층몸돌 괴임으로 사용하는 등(논산 관촉사 오층석탑, 춘천 칠층석탑, 예천 개심사 오층석탑 등) 새로운 양식을 탄생시킨다. 기존 양식이 해체되고 미감까지 변했다는 것은 석탑의 위상과 가치의 재해석을 의미한다.

 

<이런 석등을 통칭해서 불대좌식 석탑이라 부를 수 있을 거 같다... 이 양식은 분명 통일신라에서 시작했지만, 고려시대, 1000년대 전후, 개성과 황해도를 중심으로 평양 묘향산과 강원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북한 전역에서 크게 유행하며 수량도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그 전통은 조선까지 이어지고... 왼쪽부터 철원 도피안사 삼층석탑(보물 233호, 865년경), 황해신천 자혜사 오층석탑(북한국보 169호), 개성 흥국사지 석탑(북한국보 132호, 1021년), 황해해주 광조사 오층석탑, 여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225호, 1472년) 이다...>

 

 

 

   - 무엇보다 큰 변화는 석등의 단절이다. 사실 광종 이후 문벌귀족이 완전히 득세하는 1000년대 중반부터 무신정권이 성립할 때까지 귀족화된 불교사회에서 더 이상 석등을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나무 서문 석등/보물 364호/1093년과 이후 1366년 강원금강 묘길상과 개성 개국사지 사각등이 새롭게 조성될 때까지 석등이 만들어진 사례가 없다).

 

<황해신천 자혜사, 양산 통도사 관음전 앞(1085년 추정), 나주 서문(1093년)... 이때부터 270년간 특별한 석등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이 1366년 개성 개국사지, 강원금강 묘길상 석등이다...>

 

 

   - 또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화순 운주사다. 운주사에는 천여개의 불상과 탑을 만들어졌는데 왜 천불천탑천등은 아닐까? 또 아직 100여점의 석불과 석탑이 남았는데 이 중 석등은 물론 그 부재들이 하나도 없다?! 이게 말이 되나?

 

<화순 운주사... 나만 석등을 못봤나 싶어 조선고적도보랑 문화재청 자료들을 다시 살펴봤다... 왼쪽 위가 일제강점기 사진이고, 나머지는 내가 찍은 사진들... 예전의 위치와 비교하기 위해 화살표로 같은 석탑을 표시했다...>
<역시 마찬가지... 왼쪽 2점의 사진을 보면 일제강점기와 현재 차이가 별반 없다. 소나무가 자라나고, 좌불상에 기대어 있던 석불이 세웢ㅆ다는 정도의 차이... 오른쪽은 2014년과 2018년 사진이다... 2014년에는 새롭게 뭔가 만들려고 석등과 ??을 만들다가 어느 순간 없어졌다... 계절이 다르기는 하지만 나무도 자라고, 길도 바뀌고, 표지판도 바뀌고... 바위도 없어지고... 일제강점기 사진과 가장 큰 비교는 민둥산에 수목이 꽉 찼다는 점... 밭이 절로 바뀌었다는 점...>

 

 

 

   - 한마디로 1100년 전후부터 통일신라시대 유행했던 석등과 관련된 배례석은 완전히 사라지고, 1366년에는 석등 앞에 계단이 만들어지고, 1394년과 1407년 승탑 앞에는 제석처럼 놓이고, 다시 1460년 사리탑 앞에 배례석이 등장했다.

 

<970년경 부여 무량사 석등(보물 233호), 1366년 공민왕 장명등, 1394년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1460년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보물 1808호)... 부여 무량사 석등 앞에는 최근에 배례석을 다시 찾아 석등 앞에 놓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때처럼 바짝 붙인 것이 아니라 많이 떨어져 있어 적당한 사진이 없다...>

 

 

   - 새로운 석등 조성의 단절과 이에 따른 배례석의 단절이란 추정을 확신으로 단정하기에는 비약이 있을 수 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구조적으로 취약하고 규모도 작았던 석등과 배례석인만큼 온전히 제자리를 보존한 경우도, 세트로 남기도 어려운 상황인데다, 돌은 햇빛이나 비바람보다 불에 취약한 만큼, 많이 사용했던 석등은 온전히 남아있기 힘들다

   또 불에 취약한 만큼 석등은 화사석이 맨 먼저 가장 많이 파손되고, 지붕돌, 상대 앙련석 순으로 파손되고. 상대적으로 기단부와 하대 복련석이 많이 남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파손된 석등부재들... 왼쪽부터 익산 미륵사지(639년), 경주 감산사(719년), 광양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 경주 황룡사지, 경주 미탄사지(740년경), 하동 쌍계사(887년경), 경주 원원사지(750년경)... 가장 많이 남은 사례들이 왼쪽이고, 오른쪽은 그나마 드물고...>

 

 

 

   - 그리고 통일신라와 고려초기까지 사찰마다 충분히 석등이 만들어져 배치되었기 때문에 파손되지 않는 이상 새롭게 만들 이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또 800년대 후반부터 통일신라의 배례석은 더 이상 석등의 전유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조금 더 시간이 흘러 탄생한 조선시대 장명등은 규모가 작아 디딤돌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한가지 사족 ; 이전 석등들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 손망실을 방지하기 위해 장명등은 기단부부터 화사창까지를 하나의 석재로 가공하고, 상륜부만 따로 올린 경우가 많다). 결국 배례석과 석등의 긴밀한 연관성은 역사적으로 해체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왼쪽부터 1379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보물 231호), 1396년 정릉 태조 신덕왕후, 1422년 헌릉 태조, 1450년 영릉 세종, 1919년 홍릉 장명등이다... 장명등의 높이가 확인될 수 있는 자료가 별로 없어 햇살이 키를 기준으로 했다... 그런데 장명등은 왜 문화재지정이 안 되지??? 아무튼 조선시대 장명등은 여주 신륵사 석등과 공민왕릉 장명등을 모태로 한 정릉의 장명등이 모본이 된다... 사각으로 시작해 팔각이 되고, 다시 사각으로 마무리된다... 크기는 2m에서 2.5m로 커지고, 중간에 3.5m까지 높아지지만, 1700년대 이후 2.5m 내외로 작아진다...>

 

 

 

 

 

 

배례석의 보편화 과정

 

   ○ 지금까지 배례석이 만들어질 당시 주용도와 석등과의 관계에 대해 살펴봤다. 그리고 이것은 배례석 탄생의 계기일 뿐,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오랜 세월동안 석탑, 석불, 승탑, 금당-불전 등 광범위한 존숭배례의 대상과 짝을 이뤄 사용되고 있음과 함께, 현재 우리에게 통용되는 배례석의 개념은 석등과의 유일한 불가지분 관계에서 이미 이탈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앞서 언급한 구례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앞이고, 또 하나는 895년 건립된 합천 해인사 길상탑(보물 1242호) 이다.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합천 해인사 길상탑과 배례석...>

 

 

   - 최치원이 탑지를 쓴 해인사 길상탑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근거한 추복탑이다. 즉 석가모니의 사리를 담은 불신, 교리를 상징하는 법신이 아닌 일반 민초들의 영혼을 달래는 위령탑이란 말이다. 그리고 언제 놓였는지 알 수 없지만 여기에도 배례석이라고 부를 수 있는 돌이 놓여 있다.

   우리가 고고학자가 아닌 이상 그 가공시점을 찾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니 제껴 놓고, 우리는 언제부터 대상이 무엇이든 존숭배례를 위해 직육면체로 가공된 석재를 배례석이라 불렀는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합천 해인사 길상탑과 배례석... 오른쪽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과 비교를 위해 다시 올린다...>

 

 

 

 

 

 

   ○ 기독교식으로는 예배석, 유교식이면 배례석일까? 그 명칭의 연원은 생각보다 오래전이어서 유교가 일상생활을 지배했던 조선시대 이전, 800년대 중반 조성된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보물 1471호) 앞에서 1085년 고려의 선종이 거행한 의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기물을 <국왕배례지석(國王拜禮之石)>이라 부르면서부터 배례석이란 명칭이 고착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이때의 기물은 석등이 아닌 석탑 앞에 놓였다는 점이 해인사 길상탑과 동일하다. 시점의 적확여부를 떠나 1085년에는 배례석이 석등의 부속도구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이는 배례석이 특정 용도를 위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존숭배례를 위한 일반 명사로 이미 대체-사용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양산 통도사 영산전, 석등, 삼층석탑, 그리고 배례석...>

 

 

 

   - 알려지다시피 고려의 선종은 요나라 침공에 대응한다는 명분아래 송나라와 외교뿐만 아니라 유교의 법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왕이다. 즉 그런 시대의 요청에 의식도 순응하기 위해, 불교의 기물에 유교적 개념을 가미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 국왕배례지석은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단도 아니고, 부복이나 오체투지 용도로 보기에 크기가 맞지 않다. 단이라 부르기에 높이도 없어, 어쩌면 서서 합장할 수 있는 넓이에 맞게 만들어졌을지 모른다. 결국 예를 올렸다는 기념을 위한 표식에 불과한 돌은, 석탑 앞에 - 석등 앞에 놓여 있던 모든 돌들의 이름을 배례석으로 부르는 계기가 됐을 수 있다.

 

<양산 통도사의 배례지석을 유심히 보기는 쉽지 않다?? 사람이 많거나 적거나... 생각보다 크고 넓다...>

 

 

 

   - 이후 다시 배례석이 등장하는데 1394년 조성된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앞과 1460년 남양주 수종사에는 팔각오층석탑 앞 배례석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이미 배례석들은 석등이란 굴레를 벗어나 승탑과 사리탑을 위한 부속기물로도 무리없이 수용됐던 것이다. 결국 이 두 사례가 격식을 갖춘 마지막 배례석이 되었지만, 수백년의 단절 후 이어진 배례석의 의미와 위상, 그리고 이에 대한 인식은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1784년이되면 산청 대원사 다층석탑(보물 1112호)의 경우처럼, 석탑 앞에는 배례석이 아닌 제단이 조성된 사례까지 발생한다. 이제 배례석은 제단의 개념까지 포괄하는 일반적 개념으로 승화한 것이다.

 

<다시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과 배례석, 산청 대원사 다층석탑과 제단, 대구 동화사 금당앞 동삼층석탑과 제단...>

 

 

 

 

 

   ○ 배례석의 명칭과 용도는 불명확하다. 또 법규화되거나 전형화되지도 못한 측면이 있고, 격식을 갖춘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리고 석등의 디딤돌로 시작해 석탑을 비롯해 승탑과 사리탑까지 영역을 넓혀가고, 결국 왕릉-묘역의 혼유석-제단과 비슷한 역할까지로 확대해석 되면서 혼선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승탑과 왕릉의 배례석, 제단, 혼유석... 위치가 같고, 크기도... 다만 청룡사지 보각국사탑에는 받침이 없고,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에는 하나의 받침이, 구리 공구릉의 태조 건원릉에는 4개의 받침으로... 나는 이 흐름을 배례석이 혼유석으로 변화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 결론적으로 초기 배례석은 팔각간주석형 석등에 불을 밝히기 위한 디딤돌로 만들어졌고, 석등의 위상이 변하면서 그 용도가 조정되고, 석등이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완전히 초기의 개념을 상실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용도는 잊혀지고 형식만 전승되던 배례석은, 배례석이란 이름을 얻고 난 이후부터 형식마저 사라지고 행위만 남게 되었다.

   배례석이 있어야 할 석탑과 석등, 건물과 승탑의 <앞!!!>, 사람들이 예를 올릴 수 있는 <위치>만 남게 되었다. 보조적 기능의 고유명사가 보편적인 일반명사로 대체된 것이라 생각된다.

 

<석불, 승탑, 석탑에 경배하는 비슷한 옷색깔을 골랐다...^^ 경주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 770년경),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4호, 930년경),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185호, 970년경)... 딱 이만한 거리에서 이렇게... 어쩌면 이 분들이 서 있는 곳이 배례석의 위치일듯... 그러나 정작 배례석이 있으면 그 위에 서지 않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일까??>
<양산 통도사 영산전... 이렇게 배례석이 있어도 사람들은 그걸 또 비켜선다...^^ 이렇게보면 석불, 승탑, 석탑, 금당... 모두 존숭배례의 대상에 경배하는 사진을 한장씩 골라봤다...>

 

 

   - 격식과 비중을 떠나 잔존하는 배례석을 뜯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리고 현재까지 다양한 형식과 용도로 사용되는 사례를 추적하는 재미도 있고...

   배례석의 격식이 유물과 공간의 품격을 결정하지 않지만, 작고 낮은 배례석인만큼 쉬이 눈에 뜨이지 않지만, 공간구성 중 하나의 요소였다는 점과, 그 배례석이 어느 시대 어느 기물 앞에 있는가를 통해 공간전체를 바라보는 것도 즐거운 답사여행의 특별한 범주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원주 법천사지의 석조부재들... 여기에도 배례석이 있다... 지광국사탑은 1085년, 석탑은 800년대 중후반, 석등 연화하대석은 800년대 중반... 참고로 일제강점기까지 삼층석탑은 기단부와 2,3층 몸돌 없이 서 있었다... 1층몸돌과 지붕돌이 없어진 것... 그렇다면 이 배례석은 언제 만들어져, 어디에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