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8 배례석의 시원과 신라왕릉 상석
신라왕릉의 상석(床石) - 배례석 양식의 시원
○ 호류지에서 백제의 배례석 흔적을 상상하는 것으로, 백제에 그런 전통이나 관습이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비약이다. 다만 호류지에서 백제 평지가람의 원형과 7당가람제, 그리고 건축적 연원까지 추정하는 입장에서 배례석의 존재를 무시할 필요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만 이를 근거로 현재 확인되지 않은 백제 배례석의 존재를 찾는 것은 요원한 일...
다만, 이와 비슷한 개념에 접근하는 유적을 찾아보는 것과, 동시기 한반도의 또다른 유적에서 배례석의 시원에 접근하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 아닐까 싶다. 먼저 신라에서 그 흔적을 찾아본다.
-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신라왕릉>이다. 이유는 시대적 배경과 상직적 변화까지 세가지다. 불교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해가는 신라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석가모니-부처와 왕의 위계관계 정립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바꾸고(법흥-진지-진평 등), 왕을 부처와 동급으로 여기는 왕즉불 사상을, 그리고 무속적 영향을 이어받아 왕릉에 신격을 부여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법흥왕부터 100여년이 넘는 시간속 변화, 신성에 맞는 성역을 만드는 것은 왕궁과 사찰(당시 7처 가람 건립), 그리고 왕릉을 함께 변화시켰다.
- 그리고 호류지와 비슷한 600년대에 조금씩 결실을 맺고, 그 구체적 표현 중 하나가 왕릉의 제단-상석(床石)의 등장이다. 내가 특히 상석에 주목하는 이유는 초기라 할 수 있는 경주 불국사의 배례석은 측면단부(이하 ‘면석’)에 조식된 <안상>과 연결될 뿐 아니라, 상석을 축소하면 배례석 형상이 도출되기 때문이다.
○ 이를 추적하기 전에 간단하게 신라왕릉의 변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를 크게 정리하면 ;
①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출발한 신라는 금관총, 서봉총, 천마총 등을 거쳐 진평왕릉(632년)까지 원형 봉토분 외형으로 전승되다가,
② 선덕왕릉(647년)부터 봉토 하부 주변에 자연석 단을 깔았고,
③ 진덕왕릉(654년)부터는 봉토 하부에 십이지신상이 양각된 판석과 갑석을 두어 석축(후대 병풍석)으로 변하고,
④ 무열왕릉(661년)에서 문비를 세우고, 신문왕릉(691년)부터 석축에 받침돌(호석)을 두었으며,
⑤ 성덕왕릉(737년)부터 석축 옆으로 지대석을 깔고 난간석을 두른 다음 진입공간에 사자상과 문인상, 서역인상, 능비, 석화표 등의 기물을 두어 능묘제를 완비한다. 위를 포함해 신라왕릉 완성태를 볼 수 있는 곳으로 경덕왕릉(965년), 원성왕릉(괘릉, 798년), 흥덕왕릉(836년) 등이 있다.
- 후대, 고려와 조선왕릉까지 이어진 능묘제도의 골간이자 원형이 되는 신라왕릉의 몇몇 요소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능묘구조와 완전히 다른 한반도 독창적 문화를 내포하고 있다. 조선왕릉까지 이어진 능묘의 면석과 난간석은 한반도만의 독특한 장지문화이며, 그 앞에 놓인 상석(제석, 혼유석)도 마찬가지다.
규모의 차이 때문에 고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애초 불가능할 수도 있고, 명청대 이전 지하 분묘를 우선시했던 중국의 오랜 전통에서 파생된 향당건축과 정전(正殿) 및 향배(香陪)를 중시한 문화와의 차이일 수도 있다.
여기에 능을 지키는 수호석이 전면 진입방향을 향하는 중국과 외부로 향하는 우리나라의 풍습도 다르고, 망주석이 곡장의 안쪽을 지키는 우리나라와 경계 표식을 우선시하는 중국과의 차이 등도 있지만, 외부문물을 수용했음에도 새롭게 형성되고 지켜진 우리의 전통과 독자성은 훨씬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원형이 신라왕릉에 있다는 점도 분명하다.
○ 이중 특히 내가 주목하는 것은 무열왕릉부터 놓이기 시작해 성덕왕릉에서 전형화된 것으로 보이는 상석이다. 먼저 백제왕릉에는 상석이 없다. 이는 중국 및 고구려의 문물과 연관 때문으로 보이는데,
중국의 황제릉은
① 주나라까지는 순장제가 있지만 은폐되어 확인이 쉽지 않고,
② 진-한-남북조(5호16국)시대 황제릉은 지하의 공간 – 묘(사자가 안치된 공간)를 중시하되, 서서히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인 능 진입로에 문무인석 등 석물이 조성되는 등 격식을 갖춰갔다.
이와함께 동시기 백제에 영향을 미친 고구려는 돌무지무덤(적석총)에서 흙무지무덤(봉토분, 봉토묘)로 양식적 변화를 이루지만, 중국과 비슷하게 사자가 안치된 지하공간(굴식 돌방무덤-벽화)이 중시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이 시기쯤 만들어진 백제의 무령왕릉 지상에는 상석이 존재하지 않았고, 고대 청동기시절 유행했던 도철문양이 새겨진 수호석이 있었을 뿐이다.
중국 황제릉의 이후 변화를 간단히 정리하면 ; ③ 수-당-송대에 이르러 장엄한 규모의 황제릉을 만들었지만, ④ 요(거란), 금(여진), 원(몽고) 영향을 받았을 때는 민족 고유의 토착문화와 절충형태를 보이다가 원의 비밀매장 관습으로 아예 격식이 사라졌고, ⑤ 명대에 이르러 유교적 이념을 기반으로 전형을 완성하고, 청대(여진)에 이르러 무속적 경향과 결합하면서 광대한 규모의 황제릉을 만들었다. |
- 600년대 신라는 큰 변화를 겪는다. 불교와 중국식 법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데다, 삼국전쟁에서 승리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수용에 주도권을 확립한 시점...
이런 상황에서 매장풍습은 화장으로 변했고, 능묘에 전통적인 무속과 도교와 불교적 양식이 복합적으로 결합 된다. 이를 대표하는 유적이 661년과 그 이후 만들어진 무열왕릉과 능지탑이 아닐까 싶다.
- 능지탑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면, 문무대왕의 화장지였을 것으로 보이는 능지탑은 5층이었고, 출토된 소조불좌상을 통해 탑의 상부 4방에서 불상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방형 면석(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양각된 판석이 있고, 두겁석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연화문 조식이 없는 지대석 주변으로는 판석이 깔려 있다.
- 완전한 무속도 불교식도 아닌 능지탑의 면석은 신문왕릉부터 신라왕릉에 전승됐고, 고려 공민왕릉에서 부활하여 조선왕릉까지 이어진다. 또 각재로 마감된 지대석과 달리 연화문이 조식된 두겁석(조선왕릉에서는 ‘만석’이라 명했다. 불대좌와 비슷한 구조이지만 앙련은 있되 복련이 없는) 양식 역시 고려 공민왕릉에서 부활하여, 이후 유교식 능묘제의 완성태인 조선왕릉에까지 정착되고 1926년 유릉에까지 이어진다.
화장지였다는 용도적 한계와 사각-방형에 2층 또는 5층으로 만들어진 탑이었다는 양식적 차이가 있을 뿐, 능지탑-연화탑은 우리나라를 관통한 능묘의 양식적 원형이라 할만하다.
- 다시 무열왕릉을 살펴보면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양식이 등장한다. 바로 상석이다.
사실 무열왕릉(661년) 앞에 몇 개의 석재를 직사각형으로 배열한 조합을 상석이라 이름하기엔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상석이 변한다.
한세대 – 30년이 지난 신문왕릉(691년)에서는 2단 계단석으로 연결된 2단의 석단이 되고,
다시 30~40년이 지난 성덕왕릉(737년)에 이르면 완성태인 상석으로 전형화-정형화된다. 이런 상석이 있었다는 흔적이 효소왕릉(701년), 헌강왕릉(886년), 정강왕릉(887년)에서도 확인된다.
- 성덕왕릉에서 완성된 상석은 하부 지대석에 2단 괴임을 두고, 면석에는 전면에 2개, 측면에 1개의 안상이 조식되고, 부여 무량사탑이나 1000년 전후 고려시대 석탑의 기단부 갑석의 단부처럼 돌출된 단부 아래쪽을 곡선으로 모각한 상대 갑석의 윗면은 편평한 면석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상석은 통일신라가 유일하며, 공민왕릉을 비롯해 조선왕릉의 상석(혼유석, 제단, 석상, 여기서는 구별을 위해 ‘혼유석’이라 칭한다)과 완전히 다르다.
먼저 혼유석은 고석(부석, 족석)이라 불리는 둥근 북처럼 받침석으로 만든 다리(4~5~6개로 다양하지만, 처음과 맨마지막에는 4개로 고착된다)가 있지만 통일신라 상석은 다리가 없고, 무엇보다 성덕왕릉대 완성태는 혼유석에 비해 탁자처럼 높다. 한마디로 좌식과 입식의 (책)상처럼 높이 차이가 크다.
통일신라 왕릉에만 있는 상석이 탄생하여 완성됐고, 그리고 이 상석을 작게 축소 - 간소화하면 불국사의 배례석과 똑 같아진다.
○ 나는 이 상석이 불국사 배례석의 양식-형태적 시원이라 생각한다. 존숭배례 대상에 격식의 도구로 만든 것이 배례석이다. 불교를 가장 늦게 수용한 신라는 최고의 권력과 권위를 가진 대상인 왕(王)을 부처와 동일시하면서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내걸고, 신라 땅이 불국토(佛國土) 라는 국가통치 이데올로기(호국불교(護國佛敎))까지 정립한다.
성골(聖骨)도 그렇게 형성된 것이고. 그런데 성골이 단절되면서 집권한 무열왕(진골(眞骨))의 묘는 어떤 장엄조식이 필요했을까?
- 처음으로 중국문물을 수용해 귀부와 이수를 갖춘 묘비를 만들었고, 또 하나 능 앞에는 배례석 같은 단을 만들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전통과 불교와 새로운 미래에 어울리는 격식을 모두 만족해야 했을 것이고, 이때 무속적이지만 전통의 방식을 받아들인 것은 백제에 있었던 배례석 문화가 아니었을까?
통일신라의 상석은, 부처를 모신 탑이 아닌 왕이 묻힌 능묘 앞에 최고의 존숭배례를 위한 표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 그리고 상석을 둔 왕릉은 한반도의 유일한 문화다. 중국식도 아니고 불교식이 아니다. 신라의 이런 독자성은 호국불교 속에서 성장한 화랑도(花郞徒)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화랑도를 달리 국선도(國仙徒)·풍월도(風月徒)·원화도(源花徒)·풍류도(風流徒)라고도 하는데, 이는 극히 무속(巫俗)적이며 도교(道敎)적이다. 또 당대는 불교가 만능도 아니었다. 중국에서 불교문화가 완전히 성숙단계에 이르렀던 시대가 수와 당나라였지만, 당시 국교는 송나라까지 불교가 아닌 도교였다. 또 백제와 앙숙관계에 들어설 때 신라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고구려가 마지막 선택한 국교도 도교였다.
- 이처럼 불국토를 염원하며 왕즉불을 내세웠던 신라지만 전통의 문화는 강고했고, 불교 자체도 배타적이거나 전제적이지 않은 유연성이 있었다. 그런 전통과 신문물의 습합의 결과로 통일신라 고유의 상석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우연일 수 있지만, 불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최고의 경배를 위해 놓았던 호류지의 예배석과 같은 의미의 증표였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했던 백제인과 달리 신라인들은 그 석재를 가공해 사용했다.
처음에는 사각-방형의 규준틀을 잡고 몇 개의 장대석으로 내부 면을 채워 바닥에 깔았고, 다음에는 2단으로 만들어 제단처럼 지표면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여 격을 높이고, 그 다음에는 측면 판석에 안상을 조식하고 갑석에는 장식성이 강한 층급을 두어 특성을 강화했다. 그렇게 완성된 상석은 이후 왕들의 무덤 맨 앞에 놓이는 법(法)이 되었고.
- 경덕왕이 만든 성덕왕릉에서 완성된 상석이 만들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주 불국사에는 똑같은 양식을 갖춘, 석등 디딤돌의 모본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석등의 디딤돌이 배례석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백제 등에서 가장 큰 존숭배례의 대상에 사용됐던 경배의 표식이 신라왕릉에까지 적용되었고, 그 배례를 위한 상석 양식이 잠시 석등의 디딤돌에 차용되었다가, 다시 필요에 따라 석탑, 불전, 불상 등에도 자연스럽게 적용되었다는 경로가 더 적확할지도 모른다.
- 배례석이 만들어진 연유와 시원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또 특정 기능에 한정되지 않고 범용화-상용화되는데는 그만한 역사문화적 공감대와 배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호류지에서 백제와 고구려의 고분을 거쳐 통일신라 왕릉에 이르러서야 배례석의 단초를 읽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출발한 배례석은 처음 안상만을 고유 문양으로 삼다가, 얼마 후 곧바로 연화문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배례석 고유의 문양이라 할 수 있는 안상과 연화문은 어떤 연원들을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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