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300여년의 공백기를 살펴보면서, 왕릉구조와 양식의 변화에서 상석을, 기록과 관련된 비와 비각에서는 지석을 같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은 보조적 도구이면서, 죽음의 공간을 장엄하는 상징이며, 심리적 경계의 표식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 승탑-부도(浮屠, 浮圖)를 하나로 묶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불교에서 가장 신성한 경외의 대상인 부처의 사리를 탑(塔)에 안치했다면, 인간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왕은 왕릉(王陵)에 묻었다. 마찬가지로 선종의 득세와 함께 깨달은 자 – 부처와 동격으로 격상한 고승들의 사리는 부도-승탑에 안치한다.
때문에 부도는 탑, 왕릉과 동격이며, 그런 이유로 탑과 왕릉의 형태를 그대로 절충-조합한다. 부처가 절대적이었을 때는 탑의 형상을, 인간의 왕권이 불교의 권위를 넘어설 때는 능묘의 형상을... 그리고 그 형상이 스투파를 닮았든 종(鐘)을 닮았든 본질은 탑처럼 위로 솟아오른 둥근형태의 봉분이다. 승탑이 역사문화적 배경에 의해 양식적으로 변천을 이룰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우리나라 승탑의 변천
- 그리고 승탑은 불특정 다수(多數, 왕족 등 혈통과 무관하며, 교리해석에 따른 분파형성으로 층위가 다양한...)의 사리탑이기 때문에 유일성이 없어, 품격에서 차이가 있는 만큼 예법에서 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규모에서 차이가 나고 왕릉에 비해 보조적 도구가 간소화되거나 없지만, 또 그런 이유로 기록성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승탑들은 탑비라는 보조적 도구와 세트로 조성됐지만, 고려말을 지나 조선에 이르면 승탑이 비석과 지석의 기능까지 수렴하게 된다. 조선시대 승탑에 명찰표처럼 이름이 새겨져 오늘에 이른 경위다. 기록성의 강조와 함께 승탑이 조성되고 배치되는 위치도 달라진다.
- 승탑이 조성된 위치는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승탑의 효시로 볼 수 있는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 439호, 845년 전후)과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844년)이 있다. 이 승탑들은 어디에 조성됐었을까? 현재 중앙박물관에 있는 염거화상탑의 본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도의선사탑을 비롯해 초기 승탑이라 할 수 있는 울주 망해사지 승탑(보물 173호),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보물 273호, 861년),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 57호, 868년), 울주 석남사 승탑(보물 369호, 890년경) 등은 가람배치 중심공간에서 비교적 가까운 별원처럼 의도적으로 조성된 공간에 안치됐다.
-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순천 선암사 동-북승탑(보물 1184, 1185호), 영동 영국사 승탑(보물 532호), 장흥 보림사 동승탑(보물 155호)처럼 사찰 중심공간에서 완전히 멀어진다.
동시에 동화사 비로암, 화엄사 구층암, 해인사 원당암처럼 중심 가람배치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암자가 활성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선종의 영향력 확대만큼 양적으로 팽창된 고승들의 등장과 그들의 임종을 위한 공간적 배려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공주 갑사 승탑(보물 257호, 930년경)과 장흥 보림사 서승탑(보물 156호) 등이 대표적인 공간이다.
그리고 다시 고려초기의 말, 중기의 초반인 1000년대를 넘어서면 다시 경내로 승탑이 들어오는데,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190호, 1020년경),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101호, 1085년),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1213년) 등은 그 이전과 달리 사찰의 가장 높은 공간에 조성됐다. 그리고 다시 고려말부터 조선초기에 승탑의 위치는 전면적으로 조정된다.
- 한쪽 축은 양주 회암사지(지공/1372년-나옹/1381년-무학대사탑/1407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228호, 1397년)처럼 사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별원(別院)처럼 조성하거나,
또 한축에서는 가람배치-사찰의 산문-일주문 앞에 집단적으로 조성된 부도전 양식이다. 특히 부도군(부도밭이 오히려 익숙하다)은 임진왜란 이후 대부분 가람배치의 새로운 양상으로 굳어졌다.
- 생각해보면 이 변화도 대단한 것이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선종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깨달은 자가 곧 부처라는 인식이 있어, 국사나 왕사 등 고승의 다비(茶毘) 후 승탑을 조성해 사찰의 내부공간에 안치했다(그러나 산문-탑-금당-강당의 중심축에 배치한 적은 없다).
그러나 고려초기 사찰에서 멀어져 더 높고 깊은 곳에 조성된 승탑들을 보면, 당대의 권력화를 지향한 출세주의에 밀려났거나, 현세주의적 불교에 대한 반작용이나 비판적인 성향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왕릉과 비슷한 품계의 금강계단이 조성되기도 하는 시점에서, 부도전이 가람배치-사찰의 맨 앞으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립된 섬? 왕국화된 절? 임진왜란 이후 승병들의 활약에 따른 보상? 고승들이 많다는 자랑과 과시, 혹은 자부? 타협을 빙자한 보호막? 아니면 위장? 상업화?
이들 하나하나가 배제될 수 없는 요소이며 이 요소들의 복합적 작용이겠지만, 일주문 앞 부도군이 보편적으로 정착된 조선시대 불교는, 어쩌면 죽음과 긴밀하게 관련되면서 신성과 성역을 내려놓아 인간화-세속화되었고, 또 사찰-절은 그만큼 현재를 즐기면서 웃고 떠드는 축제의 공간이 아닌 적막(寂寞)의 공간이 되었음-지향함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생각된다. 유학자-선비정신과 교류과정에서 특화된 차(茶)문화도 그런 일환이었고...
- 나는 부도전이 사찰의 맨 앞에 놓였다는 것을 큰 변화로 이해한다. 불교의 용도-쓰임새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사찰을 하나의 완결된 유기체라고 상정하면, 맨 앞에 있는 부도전은 내외 경계 구분의 표식이 되며, 능 앞에 놓인 상석-혼유석처럼 유기체를 보조하는 존숭배례의 도구가 되며, 첫인상을 좌우하는 얼굴이 되기도 한다.
도심 한가운데서 현세에 대한 축제-팔관회를 열던 사찰이 조선의 숭유억불에 밀려 산으로 쫓겨나면서, 세속과 거리를 둔 첫 이정표로 자리잡은 부도전. 억불(抑佛)치하의 조선에서 백성-대중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숭유(崇儒)의 가치를 담은 죽은 조상들의 명복과 현세의 기복(祈福)뿐이었을지도 모른다.
- 유교-유학의 가장 중요한 배례의 대상이 된 조상숭배와 맞물려 죽음의 기록이자 공간이자 표식인 부도들이 모인 부도전이 사찰의 맨 앞에 놓였다는 것은, 능묘 앞 상석 밑에 기록한 지석처럼, 호류지 오중탑과 금당 앞에 놓인 배례석처럼 조선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때가 조선의 유학이 가장 교조적으로 횡행하면서 탄력을 잃어 관념화 – 문약화 되고, 공공재적 성격의 향교(鄕校)의 권위를 가문과 문중 중심의 서원(書院)이 대체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착한 시기다. 선조집권 후반기에서 인조집권까지... 한반도 역사상 가장 병약했던 시기의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외침에 뿌리채 흔들리던 시점이고...
상석과 혼유석
○ 배례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너무 많은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복합적, 중층적, 입체적으로 폭 넓게 접근하는 것만이 작고 낮은 배례석을 가치있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욕심 때문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니 멈추기도 그렇지만, 위치와 형식 그리고 의미를 죽음의 공간에서부터 시대적 변천까지 다루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 요약과 함께, 문양으로 넘어가보려 한다.
- 상석에서 배례석을 끌어온 것은 호류지의 자연석 때문이고, 그 자연석에서 연상된 백제및 고구려 적석총의 호석과 장군총을 호위하듯 배치된 배총(陪塚)은 다시 신라왕릉으로 이어졌고, 호석과 배총을 이어받았지만 간소화된 신라왕릉의 상석은 양식과 문양에서 곧바로 석등의 디딤돌로 연결됐다.
여기에 석등의 변화와 함께 고려 중반 260여년 공백기의 역사문화적 배경을 살피다가, 고려후반의 급격한 변화에서 결국 장명등이 어떻게 석등에서 분화되어 정착하는지도 접하게 되었고... 변화의 큰 모태가 된 왕릉에 첨언해 죽음의 공간을 다루면서, 지석과 사리장엄구를 거쳐 승탑과 부도군의 변화까지 거치다보니 조선 중반 암흑기까지 나가게 됐다.
175-호석-예배석-성덕왕릉-불국사
- 이런 단초들을 배례석이란 틀로 묶어본 이유는, 1085년 통도사 국왕배례지석에 맥이 끊겼던 많은 것들이 1366년 고려말 공민왕릉에서 성공적으로 부활하면서, 불교와 유학의 간섭과 상호 습합과정의 또 다른 다이나믹한 역동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 이미 언급했지만 공민왕릉은 단순히 조선왕릉의 모본이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그 미친 영향이 탑을 제외한 전분야에 걸칠만큼 지대하고 막대했다. 당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승탑 양식에 석등의 기능을 조합한 장명등이 탄생하고, 탑비는 비석과 표석으로 분화되고, 유학의 영향으로 매장이 대세로 정착하지만, 화장 후 스님들은 부도에, 왕족이나 일반인은 사리탑에 봉안됐고, 목조탑파를 차용했던 승탑-부도들은 왕릉-봉분을 모본으로 고착됐다.
- 그리고 무엇보다 라말려초와 달리 려말선초가 되면 석조예술은 거대한 기념비(석탑, 불상 등)를 만드는 목적물의 소재가 아니라, 목적물을 치장-장엄하는 보조재로 격하됐다는 점이다. 물론 공민왕릉에 와서 고구려 고분처럼 지하공간이 부활하고 벽화가 재현되며, 십이지신이 다시 벽사의 기능을 되찾고,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는 조망을 고려한 입지-점지는 풍수지리에서 음택과 함께 양택의 역할을 부각시켰다는 것 등도 그냥 지나칠 사안은 아니다.
여기에 단을 만들어 격을 높이고(조선왕릉에서는 구릉으로 대체된다), 각종 기물 배치에서 조선왕릉의 모본이 되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상석-혼유석은 전형화된다.
178-1352개성 충정왕릉-1366개성 공민왕릉-1408태조 건원릉-1424 태종 헌릉
- 사실 혼유석이란 명칭은 15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유가(儒家)와 민속(民俗)의 습합(習合)에서 파생된 개념일 수 있다. 매장한 조상의 혼령이, 지석이 묻힌 상석을 통해 나와 후손들의 제례(祭禮)를 지켜보는 돌이란 뜻... 매장이니까 불교식 화장이 아니고, 돌아가신 조상과의 교감이니 유교식이고, 명복과 기복을 함께 비니 민속이 되고... 그래서 본래 상석은 제사상을 차리는 곳이 아닌 비워진 공간이기에 상부 표면은 별도의 문양이 없으며, 상석 앞쪽에 향로나 차(茶)를 공양하는 받침돌이 별도로 있다(우리는 주(酒)례가 아니라 차례(茶禮)라 이름한다).
- 때문에 유교를 신봉했던 조선시대에 상석이나 혼유석이 만들어졌다는 인식은 큰 착각이다. 한반도에 유교가 국시로 고착된 것은 조선이지만, 공자가 집대성한 주례(周禮, 주나라의 예법)가 관습처럼 정착된 것은 진한시대부터이고, 유학이 국가의 교육시스템으로 정착한 것은 삼국시대(고구려의 태학(372년)과 경당(427년경), 백제의 박사제도(285~375년), 신라의 국학(682년) 등)이며, 고려시대에는 관학인 국자감(992년)과 지방교육기관인 향교(1127년)가 설립되었고, 과거제도(958년)와 공자를 문묘배향한 최초기록이 통일신라 성덕왕(714년)이고, 국내 유학자인 최치원과 설총을 문묘에 종사한 것이 1020~1022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통일신라의 무열왕부터 시작해 성덕왕릉에서는 완성태의 상석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이런 역사적 흐름을 생각하면 불교의 나라 고려, 또는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혼유석이 생겼다기보다는, 민간으로 보급되면서 제례를 위한 도구에 오랜세월 이야기들이 덧씌워지면서 풍속(風俗)이 되고, 공민왕릉에서 새로운 유형의 상석이 전형화된지 200여년이 지나(특히 임진왜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혼유석(魂遊石)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 그리고 아직 혼유석으로 정착되기 전, 공민왕릉에 있던 상석은 승탑의 장엄조식에 영향을 미친다. 즉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앞에 국왕배례지석이 만들어진지 280년이 지나 공민왕릉(북한국보 123호, 1366년)의 상석이 만들어진 이후, 양주 회암사지 지공선사탑과 석등(1372년), 나옹화상탑과 석등(1381년) 사이에 배례석 같은 상석이 놓이고(1828년 중수하면서 제단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다시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탑(국보 197호/1394년)과 사자석등 사이에는 배례석인지 상석인지가 놓이고,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과 쌍사자석등(보물 388, 389호, 1407년) 사이에는 고석(鼓石, 북처럼 생긴)으로 받쳐진 상석이 놓이게 된다. 승탑과 석등 사이의 상석... 다리가 있는 상석... 더 이상 배례석과 동일범주에 넣기 힘든 별개의 양식...
통일신라부터 공민왕릉 이전에는 없던 양식이다.
- 그리고 이시기 전후 보은 법주사 세존 사리탑(1362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1388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1397년), 구리동구릉 태조 건원릉(1408년) 등이 조성되면서 석탑, 승탑과 석등, 왕릉과 금강계단, 석등과 장명등은 기존 양식이 뒤섞이면서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된다.
- 먼저 1000년대 전후 고려시대 개성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방형)불대좌식 기단부를 가진 석탑이 유행했듯이, 이 시기 들어와 (팔각)불대좌식 기단부와 비슷한 석등이 장명등으로 재생성됐다. 또 나옹화상의 승탑은 통일신라식 팔각원당형 승탑이 약식화된 구형(양주 회암사지)으로, 또 통일신라식 삼층석탑(원주 영전사지)으로, 그리고 석종형(평북영변 안심사)으로, 금강계단형(여주 신륵사) 등 4가지로 만들어졌는데 이때부터 승탑은 구형(球形) 또는 석종(石鐘)형으로 완전히 고착된다.
- 그리고 무엇보다 불탑과 승탑의 차별성이 사라지면서 석탑의 나라 한반도에서는 더 이상 규모 있는 석탑이 조성되지 않게 된다. 불탑과 승탑과 사리탑의 경계 구분점이 사라졌는데 불탑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조선시대에는 없어진 것... 개념의 혼돈은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야할 긴장을 줄 수 없었다.
아무튼 그 와중에 탄생한 것이, 사리탑이라 할 수 있는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1460년)이고 배례석이다. 상석도 아니고 배례석도 아니고 혼유석도 아닌 이것 저것이 절충된 석재. 조선초기 각종 승탑과 석탑과 장명등에 사용된 초문(草紋)이 조식된 배례석이 놓인 것이다.
- 그 다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새로운 문양을 갖춘 배례석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전에 있었던 배례석의 위치가 이동할 뿐... 석등의 디딤돌로 사용했거나, 불전과 불상, 그리고 석탑에 있었거나 없었거나 그렇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배례석은 옮겨지고 새롭게 만들어짐을 반복했다. 배례를 위한 적당한 장소와 거리를 두고, 적당한 크기로 재단되어서... 그 적당한 장소와 거리에 대한 고민을 남겨둔 체 일단 배례석의 문양으로 간다. 안상과 연화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