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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Ⅲ. 부록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10 승탑의 변화와 혼유석

 

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몇가지 메모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10 승탑의 변화와 혼유석

 

 

 

 

 

부도전이 절집 맨 앞으로 온 이유... 승탑의 위치변화

 

   ○ 고려 300여년의 공백기를 살펴보면서, 왕릉구조와 양식의 변화에서 상석을, 기록과 관련된 비와 비각에서는 지석을 같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들은 보조적 도구이면서, 죽음의 공간을 장엄하는 상징이며, 심리적 경계의 표식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에 승탑-부도(浮屠, 浮圖)를 하나로 묶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불교에서 가장 신성한 경외의 대상인 부처의 사리를 탑(塔)에 안치했다면, 인간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왕은 왕릉(王陵)에 묻었다. 마찬가지로 선종의 득세와 함께 깨달은 자 – 부처와 동격으로 격상한 고승들의 사리는 부도-승탑에 안치한다.

 

   때문에 부도는 탑, 왕릉과 동격이며, 그런 이유로 탑과 왕릉의 형태를 그대로 절충-조합한다. 부처가 절대적이었을 때는 탑의 형상을, 인간의 왕권이 불교의 권위를 넘어설 때는 능묘의 형상을... 그리고 그 형상이 스투파를 닮았든 종(鐘)을 닮았든 본질은 탑처럼 위로 솟아오른 둥근형태의 봉분이다. 승탑이 역사문화적 배경에 의해 양식적으로 변천을 이룰 수밖에 없는 이유다.

 

* 우리나라 승탑의 변천

<우리나라 승탑 1기 - 전형화 : 825년경/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 439호, 844년/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860년경/ 구례 연곡사 동승탑/국보 53호,&nbsp; 883년/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보물 137호... 시원적 형태라 할 수 있는 도의선사탑은 석탑 이중 기단부 위에 팔각원당형 탑신이 얹혀진 형태,&nbsp; &nbsp;염거화상탑에서 문비가 새겨진 팔각원당형 탑신 아래 기단부가 상대석-중대석-하대석의 양식을 갖추면서 팔각원당형 승탑이 전형화 된다. 탑신 문비 주변에는 천왕상 또는 보살상이, 상대석은 앙련이, 중대석 등에는 안상문양이 기본으로 정착, 이후 하대석은 석등과 달리 복련형 연화좌가 아닌 구름문양이 주로 사용됐다... 이후 연곡사 동승탑, 철감선사탑, 지증대사탑에서 보이듯 팔각원당형 탑신과 기단부 상대석 사이에 난간을 중심으로 장식이 추가되며, 상륜부과 화려하게 구성된다... 철감선사탑이 워낙 좋지만 상륜부 때문에 연곡사 동승탑을 골랐다... 나는 양식적으로 완결된 것을 지증대사탑으로 봐서 골랐다...>
<우리나라 승탑 2기, 전환기 :&nbsp; 889년/ 강릉 굴산사지 범일국사탑/보물 85호, 900년경/ 경주 불국사 사리탑/보물 61호, 940년경/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4호, 940경/ 공주 갑사 승탑/보물 257호... 전화기는 900년 전후의 시점으로, 탑신보다 기단부가 화려해진다는 특징이 크다. 석등과 달리 기단부 하대석의 복련이 비중이 작았던 관계로 복련의 귀꽁이 하대석이 아닌 지붕돌 우동-처마에 솟은 경우가 많다... 범일국사탑은 기단부 하대석이 3단으로 구성됐고, 운문이 강조됐다... 불국사 사리탑은 체적이 작은 중대석으로 인해 석등과 가장 유사하고, 기단부에 불보살이 조식됐다... 고달사지 승탑은 운문에 용이 함께 조식되면서 기단부 중대석이 강조되어, 사자와 구름이 함께 조식된 800년대 후반 승탑과 차별된다. 무엇보다 석등처럼 지붕돌 위 상륜부가 2단으로 구성되어 상륜부가 강조된 경향이 크다... 갑사 승탑은 지붕돌 처마 낙수면이 급해졌으며, 상륜부의 장식과 조식이 급격히 약화된 경향이 크게 보인다. 탑신 아래 괴임에서 난간문양이 사라지고, 복련이 깔린 고려초기 석탑의 특징을 공유한다...>
<우리나라 승탑 3기, 실험모색기 : 1000년~1071년 전후/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보물 26호, 1017년/ 충주 정토사지 승법국사탑/국보 102호, 1085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101호, 1213년/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nbsp; &nbsp;고려초에서 중반에 해당하며,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팔각원당형 승탑이 완전히 해체되고 다양한 양식이 실험적으로 적용된 시점이라 생각된다. 금산사 금강계단은 우리나라 석종형 부도-승탑의 시원이라 생각된다. 석종 괴임은 방형으로 구성됐고, 전각부위에 귀면-용의 정면 얼굴일 수도 있다-이 조식된 유일한 예다... 정토사지 승탑은 탑신이 완전한 구형으로 바뀌었고, 구형을 강조하기 위해 지붕돌과 시각적 분리를 위해 기둥을 세워 받쳤는데, 구조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형식을 채택하며 투입된 공력을 생각하면 예술보다 기예에 가깝다... 지광국사탑은 규모와 완성도, 화려함 등 모든 면에서 고려시대 승탑을 대표할만 하다. 특히 4방으로 뻗은 용발톱은 신의 한수라 할만한 화룡정점이다... 일본 석등이 연상되는 보조국사탑은 1213년 조성된 것이 맞는지 의심이 없지 않지만, 고려 후반에 넘어서는 시점에서 승탑의 양식이 얼마나 해체됐는지 생각할 수있다고 보여 같이 묶었다...>
<우리나라 승탑 4기, 해체기 : 1388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보물 358호, 1394년/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국보 197호, 1407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보물 388호, 1460년/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보물 1808호, 1464년/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보물 2130호... 고려말에서 조선초기의 승탑들로 통일신라부터 오랜 전통을 지켜온 팔각원당형 승탑이 완전히 해체되는 시점... 석탑, 석종 등 다양한 양식이 섞이고, 승탑과 일반인의 사리탑 구분이 없어지면서 사리탑이 불교만의 자산과 양식마저 아니게 되었다... 원주 영전사지는 최소 4곳 이상에 조성된 보제존자탑 승탑 중 하나이며,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이 그대로 승탑용으로 조성, 부처와 고승의 격 차이가 사라짐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영전사지의 탑은 3기였다... 청룡사지승탑은 공민왕릉 이후 유행한 장명등 양식을 차용하였고, 기단부가 복련과 앙련을 갖춘 불대좌식이다... 무학대사탑은 공민왕릉 이후 법식화된 조성왕릉의 난간석을 승탑에 적용한 사례로, 이전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과 차별을 갖는다... 수종사와 회암사지 사리탑은 중이 아닌 일반 신자들의 사리탑으로 석탑과 승탑의 차별성이 완전히 사라진 형태다... 조선초부터 유행한 초문은 라말려초에 유행했던 구름문양을 대체한다... 조선왕릉에서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장명등과 병풍석 등에 꽃문양까지 생긴다...>
<우리나라 승탑 5기, 석종형의 고착 : 1174년/ 영동 영국사 석종형 부도, 1397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228호, 1603년/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국보 290호, 1650년/ 장성 백양사 소요대사탑/보물 1346호, 1694년경/ 울주 청송사지 부도, 한독의약박물관 부도... 앞서 말한대로 나는 석종형 부도-승탑의 시원을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으로 본다... 여기에서부터 석종형이 유행하기까지 양식적 변화의 경로와 형식이 있는데, 하나는 불대좌식과 금강계단식, 그리고 기단부가 없는 일반형으로 나눌 수 있고, 또 하나의 분류로는 석종 표면에 문양을 강조한 것과 이름을 새기는 문비양식만 있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나름 이를 대표하는 승탑을 골라본 것으로, 영국사 부도는 불대좌 위에 석종형 부도를 올린 경우로 초기 양식이라 생각된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은 계단형을 갖췄지만 난간석과 수호석 등이 없는 계단형 석종의 초기형태다... 646년, 830년, 1085년, 1379년 등 지속적 보수와 중수가 이뤄진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3년과 1652년, 1705년 형태를 완결하고, 현재의 모습은 1870년과 1919년 중수형태다. 그래서 2중 난간의 석주는 끝부분이 삼각뿔처럼 가공되었다. 일본식이다... 구례 연곡사에도 있는 소요대사탑과 달리 백양사 소요대사탑은 석종형에 용문을 새겼다... 서응당 진읍대사 사리탑으로 추정되는 청송사지는 방형 기단부에 앙련과 복련의 기단부에 범어를 새긴 석종과 상륜부를 갖췄다. 문양과 조식이 완전히 조선스럽다... 한독의약박물관 석종을 특벽히 소개한 이유는 석종 윗부분을 항아리의 뚜껑처럼 만들어진 것이 특이해서다. 모든 석종형 부도-승탑의 보주는 석종과 어울리기 힘들게 보일만큼 연속성이 없고 이질적으로도 보인다. 이에 반해 한독박물관 석종은 약항아리 뚜껑처럼 생각된다...>

 

 

 

 

 

   - 그리고 승탑은 불특정 다수(多數, 왕족 등 혈통과 무관하며, 교리해석에 따른 분파형성으로 층위가 다양한...)의 사리탑이기 때문에 유일성이 없어, 품격에서 차이가 있는 만큼 예법에서 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규모에서 차이가 나고 왕릉에 비해 보조적 도구가 간소화되거나 없지만, 또 그런 이유로 기록성은 강화될 수밖에 없다.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861년, 보물 273호... 통일신라 후기 승탑이 만들어지던 초기에는 항상 승탑과 탑비가 세트로 조성되었다...>

 

 

 

   그런 이유로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승탑들은 탑비라는 보조적 도구와 세트로 조성됐지만, 고려말을 지나 조선에 이르면 승탑이 비석과 지석의 기능까지 수렴하게 된다. 조선시대 승탑에 명찰표처럼 이름이 새겨져 오늘에 이른 경위다. 기록성의 강조와 함께 승탑이 조성되고 배치되는 위치도 달라진다.

 

<해남 대흥사 부도전... 왼쪽부터 연담화상지비/1799년, 서산대사탑/1647년/보물 1357호, 연담탑/1799년, 초의탑/1866년 등이 보인다...>
<해남 대흥사 부도전... 부도와 탑비가 섞여있고, 나중에는 둘 중 하나만 조성한 경우들도 많게 된다...>

 

 

 

   - 승탑이 조성된 위치는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 승탑의 효시로 볼 수 있는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보물 439호, 845년 전후)과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844년)이 있다. 이 승탑들은 어디에 조성됐었을까? 현재 중앙박물관에 있는 염거화상탑의 본래 위치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도의선사탑을 비롯해 초기 승탑이라 할 수 있는 울주 망해사지 승탑(보물 173호),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보물 273호, 861년),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국보 57호, 868년), 울주 석남사 승탑(보물 369호, 890년경) 등은 가람배치 중심공간에서 비교적 가까운 별원처럼 의도적으로 조성된 공간에 안치됐다.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844년/국보 104호, 동제 염거화상탑지/보물 1871호... 염거화상탑과 탑지, 그리고 일제강점기, 현재 중앙박물관, 그리고 예전 경복궁에 있을 때 사진들이다... 자세히보면 상륜부에 변화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보륜 2개와 복발이 있는데, 하나는 복발 밑에 있었고, 최근에서야 복발 위로 보륜 2개가 올려진 형태가 되었다... 예전에는 상륜부가 아예 없었는데,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가 진행 중이었겠다 싶다... 손망실이 있었다는 점, 그것을 치유하고 보수하는 과정도 변해간다는 점... 그렇게 문화재-유물-유적들은 생물처럼 끊임없이 각각의 당대에 맞춰 변해간다...>
<861년,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예전엔 조륜청정탑이란 비명의 이름이 같이 붙었었다... 별원에, 별도의 기단을 두고, 탑비와 함께 배치되었다. 낮은 담장에 출입 사주문이 있다. 승탑이 조성된 별원에서 주요 전각이 곧바로 보이는 사진들이 태안사밖에 없어 골랐다...>
<화순 쌍봉사 전경이다... 전체적으로 남남동 방향 축선을 가지고 있다. 맨 오른쪽부터 비교적 최근에 조성된 일주문(쌍봉사자문), 그 다음이 선암사로치면 삼인당이라 부를만한 연못이 있고, 그 다음이 해탈문(1677년 조성된 사천왕상이 있다), 대웅전(1677년 3층 목탑식으로 조성돼 보물 163호로 지정됐으나 화재로 해제되고, 1986년 중건),&nbsp; 그 뒤로 극락전이 있다. 중심축 왼쪽에는 사모지붕의 범종각과 지장전이 있고, 그 왼편 대숲 왼쪽 낮은 담장이 보이는 곳에 철감선사탑과 탑비가 있다. 뒤쪽 주산은 계당산이다... 868년 승탑은 중심축을 벗어나지만 경내를 벗어나지 않은 지점을 점지했다...>

 

 

 

 

   - 그리고 통일신라 말기에는 순천 선암사 동-북승탑(보물 1184, 1185호), 영동 영국사 승탑(보물 532호), 장흥 보림사 동승탑(보물 155호)처럼 사찰 중심공간에서 완전히 멀어진다.

 

<영동 영국사 승탑... 사찰 경내에서 충분히, 사찰 영역에서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순수하게 승탑만을 위해 조성된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동화사 비로암, 화엄사 구층암, 해인사 원당암처럼 중심 가람배치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암자가 활성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선종의 영향력 확대만큼 양적으로 팽창된 고승들의 등장과 그들의 임종을 위한 공간적 배려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공주 갑사 승탑(보물 257호, 930년경)과 장흥 보림사 서승탑(보물 156호) 등이 대표적인 공간이다.

 

<공주 갑사 승탑과 대적전...&nbsp; 사실 이 위치는 암자로는 애매한 곳이다. 대웅전 중심공간에서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사찰 진입과정을 생각하면, 철당간과 대웅전 사이의 점이공간에 승탑과 대적전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진입로를 거쳐 중심공간을 지나 그 뒤쪽 더 높은곳이나 측면 방향으로 확장되기 쉬운 암자의 배치를 생각하면 특이하다... 그렇다고 본래의 중심공간이라 생각하기에는 좁은 곳이기도 하고... 아무튼 독특한 배치와 구조다...>

 

 

 

   그리고 다시 고려초기의 말, 중기의 초반인 1000년대를 넘어서면 다시 경내로 승탑이 들어오는데,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190호, 1020년경),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101호, 1085년), 순천 송광사 보조국사 감로탑(1213년) 등은 그 이전과 달리 사찰의 가장 높은 공간에 조성됐다. 그리고 다시 고려말부터 조선초기에 승탑의 위치는 전면적으로 조정된다.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과 배치도... 남북축의 배치를 생각하면 가장 높은 북쪽에 원공국사탑이 놓여있다. 그리고 가장 앞쪽, 동쪽에 탑비가 있고... 약한 산지형에 좌우로 능선이 따라 흘러(좌청룡, 우백호처럼...) 매우 안정적이며 평화로운 느낌이 드는 폐사지다... 폐사지 남쪽을 가로지는 포장도로 아래쪽 폐가에 거대한 당간지주 한쪽이 누워있다... 이걸 세우면 굴산사지 당간지주처럼 장중한 느낌이 들텐데...>
<보조국사 지눌의 감로탑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순천 송광사다... 송광사는 중심축이 서향이며, 천왕문-종고루-대웅전-설법전(강당)을 중심축으로 아래쪽 남측으로는 지장전과 국사전(조사당)이, 위쪽 북측으로는 승보전과 관음전의 병렬축으로 구성되었다... 감로탑은 이중 대웅전의 위쪽 관음전 위에 조성되어 있어, 맨 앞에 보이는 건물이 관음전이고, 왼쪽이 설법전 방향의 삼일암과 하사당이다...>
<적당한 높이의 감로탑에서는 송광사 건축물들이 겹겹이 어우러진 기와지붕들의 물결을 볼 수 있다... 왼쪽이 대웅전 방향으로 맛배지붕의 종고루와 사자루가 보이고, 오른쪽은 응현당, 대지전 방향이다...>

 

 

 

   - 한쪽 축은 양주 회암사지(지공/1372년-나옹/1381년-무학대사탑/1407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228호, 1397년)처럼 사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별원(別院)처럼 조성하거나,

 

<양주 회암사지의 지공선사 부도비와 석등, 부도다... 앞쪽부터 1378년, 1828년, 1372년 조성되었고, 1828년 대대적인 보수가 있었고, 이때 석등과 부도 사이의 상석도 변경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좌측에 사찰 경내가 보이는 부도를 찾다가 골랐다... 아래에 무학대사탑이, 위에 나옹선사 부도가 있다...>

 

<여주 신륵사는 조사당(1450년/보물 180호) 뒤쪽에 나옹선사의 석종이 조성되어 있다... 조사당에는 중앙에 나옹화상, 좌우에 지공선사와 무학대사 영정을 모시고 있다...>
<나옹화상-보제존자 비, 석종, 석등... 조사당 뒤쪽의 별원이다...>

 

 

 

   김제 금산사(보물 26호, 922년~1079년 중수), 양산 통도사(국보 290호, 1603년~1919년 중수), 달성 용연사(보물 539호, 1613년), 완주 안심사(보물 1434호, 1759년)처럼 가람배치의 한 축으로 고착된 금강계단 양식이 있고.

 

<십차 교차축으로 배치된 김제 금산사... 좌측부터 대적광전(1635년/ 보물 476호, 화재로 해제), 금강계단, 미륵전(1635년/ 국보 62호)... 이 금강계단은 진표율사 시절(762~766년)때 만들어졌을 수도, 견훤 시절(920~935년),&nbsp; 법상종의 대종사 혜덕왕사 시절(1079년), 승병들의 훈련장이었다는 이유로 정유재란때 전소된 이후인 1635년에 각각 중수되었을 수 있다... 나는 기준을 견훤시절의 중건과 5층석탑의 양식을 고려하고, 1079년 최대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점을 감안해 922년에서 1079년 현재의 모습으로 정착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사진을 보면, 금강계단을 올라가는 계단이 현재와 완전히 달라, 근현대 이후 변화된 모습도 있을 것이고, 계단 면석의 조각양식을 보면 1000년 전후가 아닌 1635년 또는 그보다 훨씬 후대의 것으로 생각되기에 세월의 변화를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았기 때문에 어느 한 시점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튼 금강계단으로는 유일하게 가람배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곳이 김제 금산사다...>

 

 

 

   또 한축에서는 가람배치-사찰의 산문-일주문 앞에 집단적으로 조성된 부도전 양식이다. 특히 부도군(부도밭이 오히려 익숙하다)은 임진왜란 이후 대부분 가람배치의 새로운 양상으로 굳어졌다.

 

<영암 도갑사다... 월출산에 있어선지 조감도-배치도에도 월출산에 달이 떠 있다...^^ 도갑사 부도전은 사찰의 맨 뒤쪽, 위쪽이다. 일주문에서 가장 먼 곳... 일반 부도전과 위치가 완전히 다르고, 또 단일 국사나 왕사의 부도가 아닌 부도전이 뒤쪽에 위치한 경우다...  그래서 나는 이곳의 부도전이 시작된 시점은 고려시대라고 본다. 실제로 부도의 형태도 그 시대고, 조선시대의 부도들이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처럼 사찰 경내도 아니고, 고려초기처럼 단일 부도도 아니고 부도전이 사찰영역이지만, 부도전으로 만들어진 경우... 생각해볼만하다...>
<양산 통도사 부도전... 도갑사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곳이다... 사찰 진입로 일주문 앞에 설치된 경우다... 불보사찰이지만, 승보사찰인 송광사, 법보사찰인 해인사의 부도전은 물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많은 부도를 가진 부도전이다... 물론 통도사가 불보사찰인만큼 사찰의 맨 안쪽, 상로전에 금강계단이 있어 극렬한 대비가 살아있기도 하고... 아무튼 이렇게 조선 중후반이후,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 사찰의 부도전은 절의 맨 앞으로 나왔다...>

 

 

   - 생각해보면 이 변화도 대단한 것이다. 통일신라 후기부터 선종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깨달은 자가 곧 부처라는 인식이 있어, 국사나 왕사 등 고승의 다비(茶毘) 후 승탑을 조성해 사찰의 내부공간에 안치했다(그러나 산문-탑-금당-강당의 중심축에 배치한 적은 없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과 탑비가 있는 보호 비각... 바로 왼쪽 건물이 조사전, 그 앞에는 금색전과 삼층석탑이 한축을 이루고, 비각의 오른쪽은 대웅전과 남훈루 - 현재의 중심공간이 한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고려초기 사찰에서 멀어져 더 높고 깊은 곳에 조성된 승탑들을 보면, 당대의 권력화를 지향한 출세주의에 밀려났거나, 현세주의적 불교에 대한 반작용이나 비판적인 성향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다.

 

<장흥 보림사를 보면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 부도 위치의 변천을 볼 수 있다... 맨처음 사찰 경내에는 보조선사탑과 탑비(883년/ 보물 157, 158호)가 있고, 사찰의 동쪽 - 일주문과 진입방향의 앞쪽(300m 정도)에 동승탑(보물158호) 부도군이, 사찰의 서쪽(1km)에 서승탑(보물 156호)라 불리는 남북방향의 2기의 부도가 각각 있다... 사진을 확대해보면 대충 양식적 변화도 추적되는데, 보조선사탑은 883년, 서승탑 중 북쪽승탑은 대략 930~940년대, 동승탑은 940~960년대고, 다시 서승탑 중 남쪽승탑은 대략 1100년대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승탑 주변의 부도군도 석종형보다 팔각원당형이 많고, 팔각원당형이 석종형으로 바뀌는 과정을 읽어볼 수도 있다... 아무튼 시대별로 부도들이 어떻게 사찰과 거리를 유지하는지 읽어볼 좋은 답사지다...>

 

 

 

   그런데 왕릉과 비슷한 품계의 금강계단이 조성되기도 하는 시점에서, 부도전이 가람배치-사찰의 맨 앞으로 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고립된 섬? 왕국화된 절? 임진왜란 이후 승병들의 활약에 따른 보상? 고승들이 많다는 자랑과 과시, 혹은 자부? 타협을 빙자한 보호막? 아니면 위장? 상업화?

 

<해남 대흥사 부도전... 삼보사찰이 아니지만 양산 통도사 다음으로 우리나라 부도전을 대표하는 곳이 대흥사라 생각된다... 사찰 경내는 물론, 사찰 주변에 부도가 없어 골랐기도 하고... 대흥사에서 생각하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는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았기에 임진왜란 이후가 될 수밖에 없기도 하고, 실제 이들의 부도도 1665년부터 1896년까지 이어지니 임진왜란 이후 200년, 그 이후까지 360년간 우리나라 부도 변천의 역사가 한곳에 집약된 장소이기도 하다...>

 

 

 

   이들 하나하나가 배제될 수 없는 요소이며 이 요소들의 복합적 작용이겠지만, 일주문 앞 부도군이 보편적으로 정착된 조선시대 불교는, 어쩌면 죽음과 긴밀하게 관련되면서 신성과 성역을 내려놓아 인간화-세속화되었고, 또 사찰-절은 그만큼 현재를 즐기면서 웃고 떠드는 축제의 공간이 아닌 적막(寂寞)의 공간이 되었음-지향함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생각된다. 유학자-선비정신과 교류과정에서 특화된 차(茶)문화도 그런 일환이었고...

 

<순천 선암사 부도들... 장흥 보림사가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 부도의 변천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순천 선암사는 통일신라 말기부터 현대까지의 부도 변천을 한곳에서 읽어볼 수 있는 우리나라 유일한 곳이 아닐까 싶다... 12시를 기준, 시계방향으로 940년대 북승탑(보물 1185호),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의 동승탑(보물 1184호), 선암사 중수비(1707년), 동부도전(조선과 근대 중심), 서부도전(현대중심), 그리고 대각암 승탑(1101년, 보물 1117호)로, 900년대부터 고려시대, 그리고 절집 앞으로 나온 조선시대 부도전과 현대까지가 모두 다 있다...>

 

 

 

   - 나는 부도전이 사찰의 맨 앞에 놓였다는 것을 큰 변화로 이해한다. 불교의 용도-쓰임새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사찰을 하나의 완결된 유기체라고 상정하면, 맨 앞에 있는 부도전은 내외 경계 구분의 표식이 되며, 능 앞에 놓인 상석-혼유석처럼 유기체를 보조하는 존숭배례의 도구가 되며, 첫인상을 좌우하는 얼굴이 되기도 한다.

 

   도심 한가운데서 현세에 대한 축제-팔관회를 열던 사찰이 조선의 숭유억불에 밀려 산으로 쫓겨나면서, 세속과 거리를 둔 첫 이정표로 자리잡은 부도전. 억불(抑佛)치하의 조선에서 백성-대중과 교류할 수 있는 유일한 연결고리는 숭유(崇儒)의 가치를 담은 죽은 조상들의 명복과 현세의 기복(祈福)뿐이었을지도 모른다.

 

<순천 송광사 진입로와 부도전... 탑비가 대부분이지만...>

 

 

 

   - 유교-유학의 가장 중요한 배례의 대상이 된 조상숭배와 맞물려 죽음의 기록이자 공간이자 표식인 부도들이 모인 부도전이 사찰의 맨 앞에 놓였다는 것은, 능묘 앞 상석 밑에 기록한 지석처럼, 호류지 오중탑과 금당 앞에 놓인 배례석처럼 조선불교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때가 조선의 유학이 가장 교조적으로 횡행하면서 탄력을 잃어 관념화 – 문약화 되고, 공공재적 성격의 향교(鄕校)의 권위를 가문과 문중 중심의 서원(書院)이 대체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착한 시기다. 선조집권 후반기에서 인조집권까지... 한반도 역사상 가장 병약했던 시기의 조선은 일본과 청나라의 외침에 뿌리채 흔들리던 시점이고...

 

 

 

 

상석과 혼유석

 

   ○ 배례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너무 많은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없지 않다. 복합적, 중층적, 입체적으로 폭 넓게 접근하는 것만이 작고 낮은 배례석을 가치있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욕심 때문임을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정리할 수 있을지 모르니 멈추기도 그렇지만, 위치와 형식 그리고 의미를 죽음의 공간에서부터 시대적 변천까지 다루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 요약과 함께, 문양으로 넘어가보려 한다.

 

   - 상석에서 배례석을 끌어온 것은 호류지의 자연석 때문이고, 그 자연석에서 연상된 백제및 고구려 적석총의 호석과 장군총을 호위하듯 배치된 배총(陪塚)은 다시 신라왕릉으로 이어졌고, 호석과 배총을 이어받았지만 간소화된 신라왕릉의 상석은 양식과 문양에서 곧바로 석등의 디딤돌로 연결됐다.

 

   여기에 석등의 변화와 함께 고려 중반 260여년 공백기의 역사문화적 배경을 살피다가, 고려후반의 급격한 변화에서 결국 장명등이 어떻게 석등에서 분화되어 정착하는지도 접하게 되었고... 변화의 큰 모태가 된 왕릉에 첨언해 죽음의 공간을 다루면서, 지석과 사리장엄구를 거쳐 승탑과 부도군의 변화까지 거치다보니 조선 중반 암흑기까지 나가게 됐다.

175-호석-예배석-성덕왕릉-불국사

<장군총 호석과 호류지의 예배석, 성덕왕릉 상석과 불국사의 배례석...>

 

 

 

   - 이런 단초들을 배례석이란 틀로 묶어본 이유는, 1085년 통도사 국왕배례지석에 맥이 끊겼던 많은 것들이 1366년 고려말 공민왕릉에서 성공적으로 부활하면서, 불교와 유학의 간섭과 상호 습합과정의 또 다른 다이나믹한 역동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1085년... 같은 해에 통도사의 국왕배례지석과 지광국사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이후 청자와 인쇄술, 고려불화 등 문화의 절정기가 열리고, 석조에술은 극심한 침체기로 치닫는다...>

 

 

 

   ○ 이미 언급했지만 공민왕릉은 단순히 조선왕릉의 모본이 되었다고 말하기에는 그 미친 영향이 탑을 제외한 전분야에 걸칠만큼 지대하고 막대했다. 당장 눈에 띄는 것으로는, 승탑 양식에 석등의 기능을 조합한 장명등이 탄생하고, 탑비는 비석과 표석으로 분화되고, 유학의 영향으로 매장이 대세로 정착하지만, 화장 후 스님들은 부도에, 왕족이나 일반인은 사리탑에 봉안됐고, 목조탑파를 차용했던 승탑-부도들은 왕릉-봉분을 모본으로 고착됐다.

 

<1366년의 고려 공민왕릉과 1408년의 태조 건원릉... 모든 게 같다??? 자세히보면 상계, 중계, 하계를 구분하는 단에 큰 차이를 갖는다... 또 왕릉에 진입하는 방법이 공민왕릉은 계단으로 이뤄졌고, 건원릉은 구릉으로 조성됐다... 마찬가지, 크기의 차이도 있겠지만 공민왕릉 장명등은 사각에 계단석이 있고, 건원릉은 팔각원당형이다... 한마디로 단이 사라지고 구획만 남았다... 이게 자연친화적일까? 아니면 인위배제일까?? 그도 아니면 게으름일까???>
<난간석은 왕릉을 이어 승탑과 사리탑까지 이어진다... 통일신라의 성덕왕릉, 고려의 공민왕릉, 조선의 태조 건원릉은 위에서 봤고,,, 아래는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1407년, 전주 경기전 예종대왕 태실 및 비/1578년, 남양주 봉인사 보도암지 사리탑/1620년/보물 928호... 난간석은 왕릉의 격을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금강계단... 금강계단의 시원을 김제 금산사라 말했고, 그 이후를 보면,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1379년,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1603년,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1613년/보물 539호, 완주 안심사 금강계단/1759년/보물 1434호가 있다... 금강계단의 변화를 볼 수 있다...>

 

 

 

   - 그리고 무엇보다 라말려초와 달리 려말선초가 되면 석조예술은 거대한 기념비(석탑, 불상 등)를 만드는 목적물의 소재가 아니라, 목적물을 치장-장엄하는 보조재로 격하됐다는 점이다. 물론 공민왕릉에 와서 고구려 고분처럼 지하공간이 부활하고 벽화가 재현되며, 십이지신이 다시 벽사의 기능을 되찾고,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는 조망을 고려한 입지-점지는 풍수지리에서 음택과 함께 양택의 역할을 부각시켰다는 것 등도 그냥 지나칠 사안은 아니다.

 

   여기에 단을 만들어 격을 높이고(조선왕릉에서는 구릉으로 대체된다), 각종 기물 배치에서 조선왕릉의 모본이 되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상석-혼유석은 전형화된다.

178-1352개성 충정왕릉-1366개성 공민왕릉-1408태조 건원릉-1424 태종 헌릉

<고려왕릉과 조선왕릉... 왼쪽부터 개성 충정왕릉/1352년, 공민왕릉/1366년, 태종 헌릉/1424년, 태조 건원릉/1408년... 공민왕릉이 갑자기 완성된 것이 아닌 이전부터 변화와 전형화의 과정이 있었다는 증거가 충정왕릉을 비롯한 7릉군이고, 태조 건원릉은 이를 완전하게 법제화 했다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 태종 헌릉은 올린 이유는 공민왕릉과 같은 쌍릉 구조여서...>

 

 

 

   - 사실 혼유석이란 명칭은 15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사용된 것으로 유가(儒家)와 민속(民俗)의 습합(習合)에서 파생된 개념일 수 있다. 매장한 조상의 혼령이, 지석이 묻힌 상석을 통해 나와 후손들의 제례(祭禮)를 지켜보는 돌이란 뜻... 매장이니까 불교식 화장이 아니고, 돌아가신 조상과의 교감이니 유교식이고, 명복과 기복을 함께 비니 민속이 되고... 그래서 본래 상석은 제사상을 차리는 곳이 아닌 비워진 공간이기에 상부 표면은 별도의 문양이 없으며, 상석 앞쪽에 향로나 차(茶)를 공양하는 받침돌이 별도로 있다(우리는 주(酒)례가 아니라 차례(茶禮)라 이름한다).

 

<전 홍유후 설총묘... 이 방향으로 찍은 내 사진이 없어서...ㅠㅠ 문묘배향 시점인 1022년을 추정하는 것은 상석의 격식 때문이다... 향교의 대성전이나 서원의 사당과 비교하면 확인할 수 있는데, 상석을 중심으로 뒤편에는 신위가 놓인 의자, 앞쪽에는 향로대와 좌우로 제주와 모사그릇을 놓은 대가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 및 서원의 대성전 내부... 설총묘와 같은 구조는 맨 오른쪽 파주 자운서원의 문성사다... 사진은 왼쪽부터 북경 국자감 대성전(1104년), 산청향교 대성전(1406년/1648년), 그리고 아래쪽이 1127년 창건된 산청 단성향교의 대성전(보물 2093호) 내부 모습이다... 참고로 파주 자운서원은 1615년 창건, 1650년 현액을 받았고, 1868년 철폐되었다가, 1970년 복원된 서원이다... 뒤쪽에 위패/신위가 놓이는 의자가 있고, 상석이 있고, 앞에는 향로대와 제주 및 모사그릇 등을 놓는 낮은 단이 3개 있다...>

 

<부산박물관의 향로대... 향로대가 이만하면 상석은 얼마나 컸을까???>

 

 

 

   - 때문에 유교를 신봉했던 조선시대에 상석이나 혼유석이 만들어졌다는 인식은 큰 착각이다. 한반도에 유교가 국시로 고착된 것은 조선이지만, 공자가 집대성한 주례(周禮, 주나라의 예법)가 관습처럼 정착된 것은 진한시대부터이고, 유학이 국가의 교육시스템으로 정착한 것은 삼국시대(고구려의 태학(372년)과 경당(427년경), 백제의 박사제도(285~375년), 신라의 국학(682년) 등)이며, 고려시대에는 관학인 국자감(992년)과 지방교육기관인 향교(1127년)가 설립되었고, 과거제도(958년)와 공자를 문묘배향한 최초기록이 통일신라 성덕왕(714년)이고, 국내 유학자인 최치원과 설총을 문묘에 종사한 것이 1020~1022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 통일신라의 무열왕부터 시작해 성덕왕릉에서는 완성태의 상석까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릉, 조선의 태조 건원릉, 세종 영릉의 상석과 혼유석...>

 

 

   - 이런 역사적 흐름을 생각하면 불교의 나라 고려, 또는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혼유석이 생겼다기보다는, 민간으로 보급되면서 제례를 위한 도구에 오랜세월 이야기들이 덧씌워지면서 풍속(風俗)이 되고, 공민왕릉에서 새로운 유형의 상석이 전형화된지 200여년이 지나(특히 임진왜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혼유석(魂遊石)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조선왕릉의 명칭... 구조와 왕릉의 구조, 상석과 향로석, 망주석 등의 세부명칭이다... 네이버, 솔뫼님, 기타 자료를 스크랩해 취합했다...>

 

 

 

   ○ 그리고 아직 혼유석으로 정착되기 전, 공민왕릉에 있던 상석은 승탑의 장엄조식에 영향을 미친다. 즉 양산 통도사 삼층석탑 앞에 국왕배례지석이 만들어진지 280년이 지나 공민왕릉(북한국보 123호, 1366년)의 상석이 만들어진 이후, 양주 회암사지 지공선사탑과 석등(1372년), 나옹화상탑과 석등(1381년) 사이에 배례석 같은 상석이 놓이고(1828년 중수하면서 제단으로 바뀌었을지 모른다), 다시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탑(국보 197호/1394년)과 사자석등 사이에는 배례석인지 상석인지가 놓이고,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과 쌍사자석등(보물 388, 389호, 1407년) 사이에는 고석(鼓石, 북처럼 생긴)으로 받쳐진 상석이 놓이게 된다. 승탑과 석등 사이의 상석... 다리가 있는 상석... 더 이상 배례석과 동일범주에 넣기 힘든 별개의 양식...

통일신라부터 공민왕릉 이전에는 없던 양식이다.

 

<상석, 배례석, 혼유석의 변천... 조성된 순서로보면 보각국사탑 왼쪽의 지공선사탑의 상석은 배례석처럼 단일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맞지 않나 싶다... 그렇다면 현재 모습은 1828년 중수과정에서 변경되었을 수도 있다...>

 

 

 

   - 그리고 이시기 전후 보은 법주사 세존 사리탑(1362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1388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1397년), 구리동구릉 태조 건원릉(1408년) 등이 조성되면서 석탑, 승탑과 석등, 왕릉과 금강계단, 석등과 장명등은 기존 양식이 뒤섞이면서 완전히 새롭게 재해석된다.

 

<부도/승탑과 석등, 장명등 양식의 혼합과 변천 과정... 맨 왼쪽부터 1174년 영동 영국사 석종형 부도, 1224년 포항 보경사 승탑(보물 430호), 1394년 충주 청룡사지 보각국사탑(국보 194호), 1397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 1422년 태종 헌릉 장명등, 1762년 화성 융건릉(정조/사도세자)의 장명등이다... 불대좌 위 석종형 부도에서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다시 구형 승탑에서 팔각원당형 석등이, 그리고 그다음에는 동일한 양식의 장명등이 파생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고 융건릉 장명등은 건축적 요소는 물론 기존 양식들이 완전히 목가구의 공예처럼 전환됐고... 문양도 불교의 앙련 및 복련의 연화문이 사라지고, 융건릉 장명등에서는 화문이 새겨진다... 1100년대부터 100년 단위의 변화를 구성해봤다...>

 

 

 

 

   - 먼저 1000년대 전후 고려시대 개성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방형)불대좌식 기단부를 가진 석탑이 유행했듯이, 이 시기 들어와 (팔각)불대좌식 기단부와 비슷한 석등이 장명등으로 재생성됐다. 또 나옹화상의 승탑은 통일신라식 팔각원당형 승탑이 약식화된 구형(양주 회암사지)으로, 또 통일신라식 삼층석탑(원주 영전사지)으로, 그리고 석종형(평북영변 안심사)으로, 금강계단형(여주 신륵사) 등 4가지로 만들어졌는데 이때부터 승탑은 구형(球形) 또는 석종(石鐘)형으로 완전히 고착된다.

 

<불대좌식 석탑에서 사리탑으로의 변화과정... 맨 왼쪽부터 900년대 초반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보물 518호), 970년경 안동 임하동 동삼층석탑, 980년경 강릉 등명사지 오층석탑, 1460년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보물 1808호), 1464년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보물 2130호)... 이들의 공통점은 기단부가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된 불대좌 양식이라는 점이다... 원당암 다층석탑 같은 청석탑들은 모두 이런 양식의 불대좌였으나, 후대에 기단부 중대석과 탑신석이 붕괴된 것으로 보인다. 청석은 세우면 결국 부서진다. 압축력이 약한 합판을 세웠으니까... 임하동탑이나 등명사지탑처럼 불대좌 기단부 밑에 별도의 기단부가 보인다. 그래서 낯설고... 이런 유행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데, 수종사탑이나 회암사지탑은 앙련과 복련이 있는 불대좌 아래쪽, 본래 기대석이라 불리는 곳이 2단으로 별도의 구조체처럼 조성됐다... 고려말 조선초의 경천사지탑이나 원각사지탑이 그랬던 것처럼...>
<통일신라의 팔각원당형 승탑은 고려말에 이르면 완전히 해체되고, 몇몇 실험을 거쳐 조선시대에는 석종형으로 고착된다... 왼쪽부터 1362년 보은 법주사 세존사리탑, 1388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1397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1613년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 그리고 맨 오른쪽이 조선시대에 복고풍이지만 가장 완성도 높게 조성된 구례 연곡사 소요대사탑(1650년/보물 154호) 이다...>

 

 

 

   - 그리고 무엇보다 불탑과 승탑의 차별성이 사라지면서 석탑의 나라 한반도에서는 더 이상 규모 있는 석탑이 조성되지 않게 된다. 불탑과 승탑과 사리탑의 경계 구분점이 사라졌는데 불탑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조선시대에는 없어진 것... 개념의 혼돈은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야할 긴장을 줄 수 없었다.

 

   아무튼 그 와중에 탄생한 것이, 사리탑이라 할 수 있는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석탑(1460년)이고 배례석이다. 상석도 아니고 배례석도 아니고 혼유석도 아닌 이것 저것이 절충된 석재. 조선초기 각종 승탑과 석탑과 장명등에 사용된 초문(草紋)이 조식된 배례석이 놓인 것이다.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탑... 배례석의 단부 4면을 빙둘러 초문이 조식됐다... 유일한 사례며, 또 격식을 갖춘 배례석의 최후 형태다... 참고로 석탑 기단부와 2단으로 조성된 기대석에 조식된 문양은 삼국시대 문양과 가장 닮았다...>

 

 

   - 그 다음, 모두가 알고 있듯이 새로운 문양을 갖춘 배례석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전에 있었던 배례석의 위치가 이동할 뿐... 석등의 디딤돌로 사용했거나, 불전과 불상, 그리고 석탑에 있었거나 없었거나 그렇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배례석은 옮겨지고 새롭게 만들어짐을 반복했다. 배례를 위한 적당한 장소와 거리를 두고, 적당한 크기로 재단되어서... 그 적당한 장소와 거리에 대한 고민을 남겨둔 체 일단 배례석의 문양으로 간다. 안상과 연화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