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9 호석-상석-지석-비석-사리봉안기
사족 ; 호석 - 상석 - 지석 – 비석 – 그리고 사리봉안기
○ 사실 신라왕릉이나 사찰에서 상석과 배례석은 눈에 확 띄는 물건이 아니다. 목적물이 아닌 보조도구이기 때문이다. 능이나 탑, 그리고 불상과 불전 등 목적물을 보조하는 도구가 더 장엄하면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다. 비(碑)도 그렇다. 비 자체가 존숭배례의 대상은 아니다. 그럼에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碑閣)이 만들어지니 하나의 위계가 추가되면서 복잡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용이 형식을 낳고, 형식이 내용을 구속하는 내부순환 사이클을 벗어나, 형식이 잉태한 파편이 또 다른 형식으로 덧씌워지면서 분화되고 새롭게 돌출하는 개념... 결국 형식이 한겹 두겹 씌워질수록 내용과 개념은 사라지고 권위만 남는 게 역사고, 상석과 배례석도 비석처럼 그런 일탈과정에서 도출된 새로운 개념일 수 있다.
- 사실 그런 사례들을 찾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고구려 고분과 호류지 예배석, 그리고 신라왕릉의 관계만큼 극적인 것도 없을지 모른다. 만약 비약을 한다면, 고구려 장군총 주변 12개의 호석을 진덕왕릉 이후 신라왕릉부터, 고려왕릉, 조선왕릉까지 이어진 십이지신의 시원, 혹은 모태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예전 석탑과 관련된 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장군총 주위 4방에 탁자식 고인돌로 마무리된 배총(陪塚)이 있었고, 호석 밖에 또다른 경계의 표식이면서 공간장엄의 도구였던 배총이 간소화되어 상석으로 전환됐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이렇게 접근하면 배례석은 제례(祭禮)나 의식(儀式)의 도구가 아닌 벽사(辟邪)를 위한 호석(護石)에서 출발했다는 가정도 가능해 진다.
- 수백년의 시차와 지역적 간극을 뚫고 새로운 개념과 양식이 만들어지기 위한 민속-문화적 공감대와 역사적 계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언급했고 다시 이야기를 돌리면, 호석 및 상석, 그리고 비석 등은 보조도구에서 출발한다는 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죽음의 공간을 장엄하는 데서 시작해, 심리적 경계의 표식의 기능도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포고문에서 출발한 공고(진흥왕 순수비 등)나 이정표 같은 표석(標石, 表石)과 달리, 사자(死者)의 공을 찬양했던 비석(碑石)의 출발은 지석(誌石)-묘석(墓石)-묘지석(墓誌石)(이하 ‘지석’)이기 때문이다.
기왕 언급한 왕릉-능묘제의 변화를 비롯해, 석등의 단절뿐 아니라 석조예술의 공백기였던 고려 중후반의 급격한 변화의 원인, 그리고 여기에 묶어 승탑과 부도군의 변화, 존숭배례 대상을 위한 심리적 거리와 경계의 표식 등 조금 더 넓은 시야를 위해 몇가지를 첨언한다. 왜냐하면 내가 시작한 배례석에 대한 탐구는 배례(拜禮)와 관련된 모든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석과 사리봉안기, 그리고 고려시대 300년 간의 공백
○ 망자를 사각판석에 기록한 지석 풍습은 중국의 춘추시대부터 우리나라 조선시대까지 맥을 이어왔다.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 지석인 고구려의 동수지석(357년)에서 시작한 지석문화는,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 발해, 고려, 조선을 구분하지 않고, 또 도교, 불교, 유교적 관습을 뛰어넘어 하나의 공간에 인위적 기물을 조성한다는 행위를 기록하여 기념하고, 후대에 알리고 천지신명에 고(告)하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신성한 행위였다.
- 이 지석문화를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가 523년 + 3년경에 만들어진 공주의 무령왕릉이다. 지신(地神)에게 묘지로 사용할 토지-사후공간을 사들인다는 매지권을 기록한 무령왕릉 지석(국보 163호)이 있고, 같이 발굴된 무령왕릉 석수(국보 162호), 오수전 등과 함께 당대의 매장풍습을 확인할 수 있다.
무령왕릉은 한 공간을 점유하기 위한 인위적 행위와 매매에 대한 권리와 의무관계를, 인간과 인간의 물물거래가 아닌 인간과 신, 그리고 범자연-우주계와의 교감으로 승화시켜 이해한 우리네 오랜 정서의 품격을 상징한다.
또한 범자연적 교감과 동화의지는 매지석 및 수호석 등의 수단을 통해, 그리고 표석 및 비석, 후대 건축물의 상량문에 이르기까지 기록이란 형식을 죽은자와 산자의 공간적 범위를 한정하지 않고 적용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 이 지석 전통은 신라와 통일신라를 건너뛰었지만 고려와 조선시대 사대부까지 이어진다. 통일신라에서 지석이 사라지고 급격한 변화가 발생했던 이유는, 이전의 순장 – 매장에 이은 불교의 화장/다비의 도입 때문일 거다. 그래서 지석을 대신한 것이 불교에서의 탑지(塔誌)와 사리기 봉안(舍利奉安記)이고.
이때의 특징들이 있다. 동북아시아 대승불교의 흐름을 호국 이데올로기로 가공한 통일신라 불교의 특성, 또 국가 시스템에 오래전부터 접목된 유교의 영향 등에 의해 한반도에서는 불교 고유의 윤회사상이 매우 미약하거나 느슨했다. 또 백제를 시작으로 조선에 이르기까지 개찰을 비롯한 탑과 불상의 조성은 기복적 성격이 강했고, 이에 논리적 기반을 제공한 것은 통일신라 초기 급속하게 정착한 <다라니(긴 구절로 만들어진 진언(眞言), 우리나라는 ‘조탑(造塔)’에서 시작해 ‘천수(千手)’와 ‘지혜(智慧)’ 관련 다라니가 주류를 이룬다고...)> 신앙이었다.
- 다시 한번 급격한 변화를 이룬 시점은 1000년대 후반부터다. 불교를 신봉하고 유학을 장려하며, 거란의 침입을 막고 여진을 토벌하면서 송나라의 선진문화를 수입하여 문화황금기를 맞이했던 고려는, 문벌귀족기(1095 ~ 1170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외척의 득세와 함께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호족이 득세하면서 불교의 귀족화가 본격적으로 심화된다. 이 시기부터 무신정권(1170 ~ 1270년)과 권문세족이 득세하는 원 간섭기(1259 ~ 1356년)까지 약 300여년간 한반도의 생산적인 역동성은 모든 부분에서 퇴화하거나 공백을 맞이한다.
- 사리봉안기도 마찬가지다.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사리 봉안기 중 보물급 이상과 관련된 것이 30점 정도 있고 그 중 몇 개를 골라보면, 백제의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567년)과 왕흥사지 목탑(577년)에서 시작해, 익산 미륵사지 서탑(639년), 통일신라의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692년/706년), 염거화상탑지(844년), 고려의 개성 불일사 오층탑(951년),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1031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1388년), 조선의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1491년), 남양주 봉인사 부도암지 사리탑(1620년) 등에 이르기까지 매시기 꾸준히 발굴되지만 유독 1000년대 중반부터 1300년대 중반까지 300년간의 공백이 확인된다.
- 이 시기 유일하게 맥을 이어간 것이 고려청자와 고려불화겠지만, 지석만 살펴보더라도 백자, 분청사기, 석재, 금동판, 동제로 봉안된 묘지(명)와 (태)지석이 많음에도, 유독 고려청자로 만들어진 것이 없다(15세기 중반 청자가 한점 있다? 지석은 조선후기 출토품이 많아서인지 1643년 출토품까지 보물로 지정되었고, 7점 모두 조선시대 출토품이며 분청사기가 4점, 백자가 3점이다).
즉 한동안 공백기를 거쳐 혼란한 상황을 지나 조선시대에 법제화된 제례는 조상숭배를 중시하는 유교식이었고, 자연스럽게 화장에서 매장으로 장례풍습이 전환되면서 상석 밑에 묘지석을 묻는 것이 유행했지만, 신라왕릉의 상석과 배례석 등은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된다.
- 문약한 권력의 독점과 사유화가 만든 역사-문화-전통의 단절은, 외세에 굴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 삶의 피폐함으로 이어지고, 장례를 치를 여유가 없어 풍장(風葬)까지 등장케 만들었다. 결국 이 시기는 배례석을 포함해 석탑과 석등, 석불 등 우리나라 석조예술이 방치(?)된 시점과 일치하며, 실제로 고려왕릉은 1300년대 중반 공민왕릉이 등장하는 전후시기까지 봉토분 이상의 장엄조식을 하지 않았다(?)-못했다.
- 그리고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의천(1055~1101년)-지눌(1158~1210년)에 이은 지공(1372년) -나옹(1381년) -무학(1407년)대사의 법맥, 그리고 신진사대부가 역사의 전면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시발된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은 또 한차례 급격한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왕릉의 구조, 승탑과 사리탑, 석등과 장명등, 상석과 배례석 등은 새롭게 해석되고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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