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7 배례석의 시원과 호류지
배례석의 시원
○ 한때는 석등의 디딤돌이었다. 연화문을 받아들이면서 석등에서 벗어나고, 범위는 넓어졌지만 보조재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배례석은 탑에도, 불상에도, 승탑에도, 불전에도, 무덤에도 필요하지만 각각의 법식에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신, 성인, 성경, 성전, 성역... 등 개념을 확장시켜 생각하면, 권위와 전통이 있는 곳에는 법이 있고 식이 있다.
-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대로 권위는 단(段)을 필요로 하고, 단은 격(格)을, 격은 식(式)을 필요로 한다. 그 중 배례석은 가장 낮은 단을 갖추고 있으며, 가장 단순한 격을 갖췄지만, 결국 고유의 식을 만들지는 못했다. 통일신라시대 완성된 양식의 배례석은 전승되지 못한 이유가 아닐지...
- 또 이런 이유로 그 시원적 양식과 유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탐구는 없었던 거 같다. 그럼에도 배례석이 그냥 생길 리가 없고, 생겼어도 의미 없이 전승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한계가 없는 보통명사가 되어 고착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곳, 특정된 시간, 누군가의 특별한 의미부여만이 아니라, 모두가 납득하고 부담없이 공감할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이 있어야만 정착하고 꽃을 피울 수 있다.
배례석도 마찬가지, 배례석 출발의 명쾌함과 무관하게 그 개념이 보편화되는 과정은 단순한 착각과 혼용만이 아니라 이게 상용화-범용화 되는 것을 모두가 수용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공감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통일신라, 불국사 건립과 함께 안상무늬를 두르며 전형화된 다음 상부갑석면에 연화문이 안착된 배례석은, 석등의 변화와 함께 정형화된다. 고려시대 석등 제작 중단에 맞춰 흐름이 끊겼다가 석등에서는 계단석으로, 승탑 및 묘역에서는 상석으로 분화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면 사리탑까지 범위를 넓힌다. 그 사이에 배례석이란 이름은 고착되고.
- 이 유적들의 흐름을 통해 읽을 수 있는 것은, 석등의 디딤돌이 만들어진 다음, 이런저런 우여곡절 속에서 배례석이란 개념으로 승화한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배례석이란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역사-문화-민속적 전통들이 있었는데, 석등의 디딤돌이 탄생한 이후 그 개념까지 포괄하면서 포용의 범주가 넓혀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만약 이런 가정이 맞다면, ① 불국사 석등 배례석 이전에도 그런 사례가 있어야 한다. 또 어느 순간 ② 배례석의 변화 발생하는데, 그것은 배례석 문양 중 연화문이 배례석 윗면에 안착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어야 하고, ③ 단절된 석등과 함께 사라진 디딤돌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활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어야만 한다.
- 이런 역사사회문화적 배경을 찾는데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사례들이 있다.
먼저 ① 배례석이라 칭해야할지 모르겠지만 불탑 앞에 자연석이 유의미하게 존재하고 있는 호류지(법륭사) 오중탑(606~711년)과 금당, 그리고 경주 남산 청룡사지 삼층석탑(보물 1188호/820년경) 앞 등의 자연석재가 그것이다.
또 하나는 ② 신라 및 통일신라의 왕릉에 있는 상석(床石, 제단)과 공민왕릉 이후 정형화된 조선왕릉에 등장하는 정중석 – 예감/산신석, 그리고 충주 청룡사 보각국사탑 등의 제단과 상석 등이 그것이다.
106 조선왕릉 구조-1424 태종 헌릉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③ 석탑 주위로 수호석을 둔,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634년)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639년) 등과 배례석이 처음 형식을 갖춘 경주 불국사에서 배례석인지 또는 무엇일지 개념이 불명확한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의 팔방연화대의 실체는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 또는 관련성...
107 분황사-미륵사지
즉 나는 통일신라 전성기 배례석의 탄생과 용도를 벗어나, 석탑, 금당, 승탑, 왕릉 등에 혼용되고 있는 배례석이란 개념이 범용화되는 문화적 토양을 찾아보고, 그 시원적 형태의 문양에 대해 찾아보려 한다.
일본 나라현 호류지 오중탑과 금당 앞 예배석
○ 일본 나라현 호류지 오중탑과 금당 앞에는 배례석이 아닌 <예배석>이란 표지판이 붙은 석재가 놓여 있다. 빠르면 607년, 늦어도 670년 또는 710 준공된 호류지 오중탑과 금당에서부터 배례석과 동일한 의미의 예배석이 건립 당시부터 있었다?!!
만약 백제시대부터 또는 백제의 전통이 전승되었든 독자적인 문화였든, 600년대 백제 기술자들이 강제하고 당대 일본인들도 쉽게 수용할 수 있었던, 주요하고 상징적인 성역을 조성하는데 배례석을 점지했던 전통이 있었다는 가정을 해본다.
- 먼저 오중탑과 금당 앞 <예배석>을 이해하기 위해 호류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동양 3대 예술품이라 알려진 금당벽화와 동양의 비너스라 불리는 백제관음상(아스카시대/국보)를 비롯해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오중탑과 금당 등)이 남아있는 곳이며, 일본 국보 또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것만 190점이 넘는 등, 총 2300개 이상의 역사적 건축물과 물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문화의 보고가 호류지(법륭사(法隆寺))다.
호류지(법륭사)의 일본 시대별 국보 ①아스카(비조(飛鳥), 538~710년)시대 : 금당(670년), 오중탑(670년/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조건축물, 동서남북에 각각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문답(동), 석존의 사리분할(서), 미륵보살의 설법(남), 석존의 입적(북)이 소조상으로), 중문, 회랑, 동실, 목조 관음보살입상(백제관음/대보장원), 옥충주자(대보장원), 동조 약사여래상(607년/금당), 동조 석가삼존상(623년/금당), 목조 관음보살입상(구면관음/당/대보장원), 목조 사천왕입상(금당), 목조 관음보살입상(구세관음/몽전), 목조 천개3간(금당), 소조 탑본사면구(오중탑) ②하쿠호(백봉(白鳳), 645~710년)시대 : 동조 관음보살입상(몽위관음/대보장원), 목조 아미타삼존상급び주자(대보장원) / 범종 ③나라(奈良, 710~794년)시대 : 몽전(748년), 경장, 전법당, 동대문, 식당, 약사여래좌상(금당), 건칠 행언승도좌상(몽전), 건칠 약사여래좌상(서엔당), 소조 금강역사상(711년/중문/일본 최고/중요문화재) ④헤이안(평안(平安), 794~1185년)시대 : 종루(925년), 대강당(990년 재건), 망봉장, 목조 비사문천입상(1078년/금당), 목조 길상천(1078년/금당), 목조 약사여래급양협시좌상(대강당), 소조 도합율사좌상(몽전), 목조 지장보살상(대보장원), 목조 성덕태자/산배왕/식률왕/졸말여왕/혜자법사좌상(성령원), ⑤가마쿠라(겸창(鎌倉), 1185~1333, 무신정권-일본 최초의 막부)시대 : 쇼료인(성령원, 1284년), 동원종루, 삼경원, 서실, ⑥무로마치(실정(室町), 1336~1573년)시대 : 남대문(1438년 재건), ⑦에도(강호(江戶), 1603~1867년) 시대 및 기타 : 청동등롱(1694년), 동조 아미타여래급양협시상(대보장원), 사기사자영문금, 흑칠 나전탁, 목조 석가여래급양협시좌상(상어당), 대보장원(1926~1988년) |
- 개인적으로 일본의 문화유산 중 호류지를 맨 앞에 꼽는 이유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똑같은 비례와 체감률을 가진 목조 오중탑과 백제의 600년대 7당 가람배치의 원형(중문/탑/금당/강당/경루/종루 + 산문/승방 중 하나로 본다. 참고로 내 입장은, 회랑과 식당은 우선순위에서 미룬다), 통일신라 초기 가람배치 중 경주 고선사지/황복사지/나원리의 직관적 실체, 하앙계 공포구조, 목조건축물 하부의 2층 석조기단 등을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백제관음 등 수많은 국보급 유물을 보는데서 넘치는 충만감을 얻게 되고, 무엇보다 감동적인 것은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건조물부터 미술공예품, 회화, 조각, 서적전서, 고문서, 참고자료, 역사자료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각의 흐름까지 모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호류지에는 석탑과 전탑, 석불과 철불, 그리고 당간지주를 빼곤 다 있다.
- 특히 호류지는 670년 오중탑부터 1998년 대보장원까지 일본 전시대를 관통하는 국보급 건축물을 한자리에서 읽어 볼 수 있어 필설하기 힘든 깊이와 감동을 준다.
1400년대부터 600년간의 건축적 흐름을 보여주는 안동 봉정사와, 1600년대부터 400년간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양산 통도사에서 (문화재-특히 건축) 답사여행의 즐거움을 느꼈던 분들이라면, 1400여년간의 변화를 한 장소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감동이며 행복인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된다.
- 우리 시대구분으로 이야기하면 고구려-백제-신라의 숨결부터 시작해 통일신라-고려-조선 전후기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건축물, 그것도 각 시대를 대변하는 국보급 건축물들과 문화유산들을 한 공간에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박물관이 아닌 오늘날까지 살아있는 현장을 이처럼 잘 지키고 보존관리 해왔다는 감동과 행운과 정성을 느끼기에 감사하고 또 감사할 수밖에 없다.
○ 아무튼 호류지의 위대함은 위대함이고, 내가 이글에서 호류지를 굳이 언급하는 것은 오중탑과 금당 앞에 있는 배례석 때문이다. 예전에는 금당 앞에만, 2010년 이후부터 오중탑 앞에도 <예배석>이란 작은 안내판이 붙은 돌이 있다. 가공되지 않은 이 자연석에 왜 굳이 <예배석>이라고 안내판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601년부터 시작해 607년 완공되고, 화재로 670년 재건축되고, 711년, 990년 등등 계속되는 전란과 화재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건되고 확장된 호류지에서, 그 많은 국보급 건축물들이 산재한 호류지에서, 오중탑 앞 <예배석>만큼은 (왜? 어떤 이유로 치워지지 않고) 꿋꿋이 살아남았을까? 나는 이렇게 가정하고 상상하려 한다.
- 먼저 호류지는 크게 서원과 동원으로 이뤄지고, 서원의 주요건물은 오중탑, 금당, 대강당, 동원은 몽전이다. 이중 서원의 오중탑과 금당에만 예배석이 놓였고, 건립시기가 같은 대강당과 건립시기가 몇십년 차이나지 않는 몽전에는 예배석이 없다. 그 이유는 존숭배례의 대상 및 시대적 변화가 묶인 결과가 아닐까 생각한다.
오중탑과 금당은 경배의 대상이기 때문에 예배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용도와 기능이 중시됐던 대강당은 경배 대상이 아니어서 배례석을 놓을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화재 후 990년 재건시 또는 청롱등이 건립된 1694년 대강당의 예배석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놓지 않았던 것이다.
- 이에 반해 같이 배례의 대상이지만, 건립시기가 몇십년 차이가 있는 몽전에 예배석이 놓이지 않은 이유는 다르다. 서원과 동원이라는 주부(主部)와 함께 부처와 보살이라는 격의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시대적 배경이 크기 때문이다.
몽전이 건립된 748년 전후 나라시대는 일본이 주체적으로 백제 등 한반도의 영향을 받은 아스카시대를 재해석하면서, 독자적인 기틀을 완성해 가며 교토로 천도해 최고의 전성기인 헤이안시대로 가는 과도기였다.
일본은 다이카 개신(645년)으로 중앙집권이 가속화되고, 백제 멸망(나는 663년이라 본다)이 확인되자마자 국호를 일본으로 정하면서(670년 설과, 701년 다이호 율령 때라는 정설이 있다/‘고서기’와 720년 ‘일본서기’) 율령을 반포(668~718년)하여 국가 시스템을 정립하고, 드디어 ‘간전영녕사재법(743년)’이 반포되면서 국가소유 토지의 사유화를 공인했다. 이런 시대흐름 속에서 과거의 전통을 따라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 나는 600년대 전후 백제인들에게는 하나의 공간 또는 기념물을 존숭하고 기억하려는 표식을 두려는 전통이 있었고, 일본 나라현 호류지 오중탑과 금당 앞의 예배석도 그러한 관습이 작동된 연속선상에서 배례석을 이해해 본다.
그러나 몽전에서는 그런 전통을 끊었다. 왜냐하면 중세시대를 열어가는 과도기에 건립된 몽전을 통해 선언한 것은, 과거 한반도의 유산과 잔재를 과감히 벗어날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천도는 단순한 수도와 인구이동이 아닌 모든 권력관계의 재편을 전제한다. 당시 일본은 나라현에서 벗어나기 위해, 741년 <구니쿄>. 784년 <나가오카쿄>로 천도를 단행한바 있고, 마지막 성공적으로 정착한 곳이 계획도시 헤이안(교토)이었다. 쇼무천황(701~756년) 때만 무려 네 번에 걸친 천도가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전염병과 재해, 반란 등의 위기가 겹친면이 크지만, 일본이란 정체성과 한반도의 영향력으로부터의 독자성에 대한 몸부림도 주요했다고 생각된다).
○ 아무튼, 나는 이 배례석의 연원이 백제의 흔적이 아닐까 상상한다. 특히 호류지에는 가공되지 않은 석재를 사용한 흔적이 많은데, 이 배례석도 그 일환이라 생각한다(이 추정이 틀렸다면, 알고 계신 분이 말해주시면 고맙겠고...^^).
호류지는 오중탑과 금당의 이단 석재 기단부(여기에서도 당대 통일신라와 차별된다. 비슷한 시기 감은사지는 두겁석에 부연을 두어 2단으로 가공했다. 석탑의 갑석처럼...)에, 충분히 가공된 판재 등을 사용했음에도, 예배석과 기타 건물의 일부 초석들에서는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초석으로 사용했다. 석재 가공기술이 부족하지 않았던 백제인은 왜 자연석 그대로를 사용했을까?
- 가공되지 않은 자연상태의 바위를 초석으로 사용한 예를 들어 일본은 한국인의 게으름 때문이라 평가한 바 있다. 이에 그랭이 기법은 목재와 석재란 두가지 이질적 소재를 긴결하는데 훨씬 안정적(횡력에 저항하는 마찰력이 크다? 압축력이 버텨주는 힘이 더 크지 않나?)이며, 결코 정성이 부족하지 않다는 반박도 있지만, 아무튼 나는 거석신앙의 영향을 받은 돌에 대한 신성성 부여와, 한반도에 유독 강하게 남아있는 자연주의적 성향 신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근거로 백제 석촌동 고분군 4호분(300년 전후)와 고구려 장군총(400년 전후)의 호석과, 예산 화전리 석조사면불상(527년경, 보물 794호)을 생각한다.
- 고구려 장군총도 가공된 적석과 달리 호석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이다. 왜?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신성이 부여된 돌-바위를 온전히 받든다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이건 또 다른 범주의 이야기지만, 나는 거석신앙의 파편이 민속으로 고착되어 돌에 깃든 신성(神性)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입장이고, 그런 의미에서 자연석 그대로를 배례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허허로운 자연숭배를 인정하는 편이며, 또 그런 이유로 예배석이 가공되지 않음에서 백제의 향기를 추론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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