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16. 불교사원의 탄생
인도 사원과 불전의 탄생 4 – 불교와 불교사원의 시작
❍ 다시 이야기를 돌려 ; 인더스문명은 신앙은 있지만 종교는 없었고, 제례는 있지만 신전이 없었고, 사도와 신자의 구분이 없으니 사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 영향인지 아리아인들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의식과 삶을 지배하는 브라만교도 신전과 사원을 만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원시종교 체계라 부름에도, 브라만교는 제사 의식과 공양뿐이었고 브라만계급은 제사장 역할에 국한됐을 수밖에 없다고 말함에도 불구하고 카스트제도는 너무 공고해졌다.
이를 가속한 것은, 불가능한 계층간 이동과 세습되는 신분 및 계급, 유목민 출신 정복자들은 부정해서는 안 될 카스트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신분제를 지지하는 바이샤(농업, 상업, 목축에 종사하는 중산층)와 수드라(농노/노예면서 육체노동자), 그리고 맨 밑바닥 피지배계급이라 할 수 있는 수드라마저 터부시하는 달리트(불가촉천민)을 지속적으로 공급될 수 있는 정복전쟁이 계속됐다는 점이다.
<225, 198-카스트 제도를 다시 살펴본다...>
- 정복전쟁이 중단됐을 때 바이샤와 수드라를 설득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만든 근거가 베다경전과 우파니샤드였지만, 안정된 시점-평화시대가 오면 브라만교/힌두교의 관념성과 직접적 폐해는 곧바로 드러났고, 정복전쟁을 통한 하층계급의 공급이 중단될 때 왕조와 제국은 몰락했다.
인도대륙과 제국이 강력한 중앙집권하에서 단일한 국가체제를 유지하기에, 힌두교의 통제시스템은 도교나 밀교(대승불교의 분파)만큼 한계가 많았다. 애초부터 불교는 무신론이고 범신론적 다신교인 힌두교인지라 불교와 힌두교 시스템은, 배타적 유일신에 기반한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강력한 통치시스템에 비해 비효율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공식적으로 카스트제도가 폐지된 것이 1947년이니 무려 3,500년간 카스트제도는 유지됐고, 현재도 절대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하고.
<226, 카스트제도는 4계급이 아니라 달리트를 포함 5계급이다...>
- 사실 나는 위 서사시들을 이렇게 이해한다. 【가부장제로 무장한 지혜로운 유목민이 무지한 원시/토착/농경민을 지배하기 위해, 북쪽/서쪽에서 들어와 천하무적 바퀴를 굴리며 정복전쟁을 지속했다.
<227, 드라비다인과 아리아인의 바퀴 차이 - 인더스문명/토착농경민/드라비다계에 수레와 우마차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즉 바퀴가 있었다는 것은 하라파에서 출토된 청동 및 소조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아인의 수레바퀴처럼 살로 만들어진 바퀴가 아니라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내구성, 경량화, 복합공정 등을 생각하면, 이 차이는 트렌지스터와 반도체만큼의 차이일까? 바퀴살은 신석기와 청동기시대를 구분하는 문명의 척도가 되기도 하다...
① 하라파출토/24 ~ 19세기 기원전/뭄바이, ② 마차 2세기/마하라슈트라 출토/콜라푸르 박물관, ③ 법륜과 마카라/200년경/비하르출토, ④ 코나라크 수리야사원/1250년경>
지배받는 농경민들은 전생 때문에 결정된 현실에 만족하되, 더 좋은 세상을 맞이하려면 수많은 업을 쌓아 해탈을 통해 다음생/윤회를 기대해야만 한다. 순환되는 생을 통해 점차 순수하게 정화되는 영혼을 위해 영웅을 찬양하고, 신을 믿으며 수행하라!!!】
이 토대로 집대성된 것이 <우파니샤드>고, 우파니샤드라는 말 자체가 ‘앎을 드러냄으로써 무지를 쉬게 하는 것’, ‘브라흐만/브라만을 아는 것’, 이와 관련된 ‘밀교적 해설’이란 의미와 직설적으로는 ‘(스승의) 발 아래 (그를) 둘러싸고 앉는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28-1, 스승의 발아래 둘러싸고 앉는다... 우리나라의 불전배치와 불화에 익숙한 나로서는 우파니샤드의 직설적 뜻을 이해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인도와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등 상좌부계통의 불화에서는 그 직설적 의미를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안동 봉정사 아미타설법도/1713년/보물1643호와 비교...
두 개의 탱화를 비교하면 스냅사진과 기념사진의 차이가 생각난다. 사실관계를 스케치한 것과 신화와 경전을 풀어낸 그림은 작법부터 다를 수밖에 없나보다...>
<228-2, 비슷한 주제의 설법상을 비교해도 마찬가지, 양산 통도사 영산전의 팔상도 중 제7화 녹원전법상과 비교해 본다... 한마디로 단체사진끼리 비교...>
<229, 양산 통도사 응진전의 나한상 배치... 227, 228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면 ; 불전과 강원이 있기 전 - 설법이 먼저 있었던 인도와, 가람배치에 강당이 포함된 이후 대승불교가 유입되어 설법을 개념과 규범으로 습득한 우리의 차이일 수도 있다... 본래의 뜻과 의미, 개념의 이해와 무관하게 석가모니를 둘러싼 제자들의 형태를 구현한 것이 우리나라의 나한전/응진전의 나한들 배치일지도 모르겠고...
우리나라에서 이런 배치가 가장 극적인 곳은 오히려 지장전/명부전이고, 배치로는 양산 통도사 응진전과 공주 마곡사 명부전이, 완성도는 김제 금산사 나한전과 화순 쌍봉사 지장전이 볼만하다...>
- 결국 (영웅은 아리아족이거나 브라만계층이어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해탈/지혜/깨달음을 찾기 위해서는 관계와 육체를 버리고(출가/出家와 고행/苦行), 수행하기 좋은 곳을 찾아 유랑(流浪)/유행(遊行)하면서 탁발(托鉢)/걸식(乞食)걸식으로 생활하여 영혼을 수행한다.
평상시에는 수하좌(樹下座)/나무 아래에서 수행하고, 인도 기후의 특성상 우기(雨期/3개월 정도 추정)에는 천막이나 석굴에 머물면서(안거/安居), 스승을 만나 무지를 깨고 제자들에게 지혜를 설파하며 간혹 대중들에게 설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결국 인도의 사원은 안거시 머물던 석굴이나 정사에서부터 출발했다.
<231, ① 석가모니의 삭발/카필라비스투 숲, ② 맨발로 탁발하는... ③ 보리수 아래에서 수하관경, ④ 고행상/파키스탄 국보 1호/라호르 박물관... 삭발, 맨발, 탁발... 라임 좋다...^^>
❍ 인도 불교사원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이 같은 베다시대부터 내려오던 역사문화적 풍토와 수행자들의 수행방식과 의미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런 전제에서 생각하면, 석가모니가 활동하던 시절 탄생한 인도의 최초이자 최고 정사라 알려진 죽림정사(竹林精舍/Veluvana, 라즈기르 지역)와 기원정사(祇園精舍/Jetavana, 스라바스티 지역, 기원급고독원/祇園給孤獨園)는 자연적인 공간이나 우연한 계기가 아닌, 공통된 종교를 가진 수행자들을 (최초로!)특정한 공간에 (최초로!)집단적으로 모여 (최초로!)생활이 가능하도록 유력한 기부자가 제공한 것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232, ① 보리수 아래 수행자들... ② 라자그리하 죽림정사, ③ 기원정사, ④ 기원정사를 방문하는 아소카왕/산치1탑 토라나 부조...
죽림정사는 비라흐주 라지기르에 있다. 현재 행정지역명 라즈기르는 BC 6~5세기 마가다왕국의 수도였으며, 빔비사라왕이 축조한 라자그리하/왕사성지가 있다(현재 지명에 과거 지명에 한역까지... 인도에서 위치를 지명으로 확인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ㅠㅠ).
아무튼 처음 나무아래에 머물던 수행자들에게 작은 공간이 지어지고, 집단화되고, 그리고 규모가 커지고...>
- 이 정사들은 각 지역의 왕들이 지어서 석가모니에게 바친 승원으로, 까란다 연못과 대나무숲 정도만 확인된 죽림정사/베루바나는 60채의 오두막이 있었다고 전해질 뿐 원형을 확인할 수 없다.
<233, 라지기르의 베루바나/죽림정사... 우리나라 대숲과는 분위가 완전 다르다...
그리고 오두막의 원형은 232 산치탑의 토라나 부조를 통해 추정할 수 있고, 그 규모는 현재 남아있는 벽돌기단으로 추정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장기적인 집단거주가 되려면 상하수도와 목욕탕, 그리고 식당이 있어야 한다...
사진은 “계림역사기행”에서 스크랩>
<234, 수행자들이 머물던 공간을 쿠티라 부른다. 죽림정사에 있었던 쿠티의 크기는 인도의 불전 건축에서 승방(승방들이 모여 승원이 되고)의 기준 스케일이 된다.
(한옥기준) 1칸 규모의 쿠티를 벽돌기단에 목조건축으로 완성한 것을 “쿠타”라 부르는데,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쿠타의 스케일은 이후 석굴을 비롯해 힌두교와 자이나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건축에 이르기까지 인도 건축의 모듈처럼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① 죽림정사, ② 상카시아 스투파 위 힌두사원, ③ 기원정사 승원, ④ 보드가야 우르빌라 가섭사원, ⑤ 마하발리푸람 니쿨라 사하데바 라타(힌두교 라타사원/팔라바왕조/드라비다형 건축/7세기), ⑥ 차토가르 삼미데슈와르 시바사원, ⑦ 우다이푸르호수 쿠타>
<234,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당/1561년/보물 2105호... 생각해보면 원시불교시대 인도의 쿠티는 안동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이 머물던 도산서당 완락재의 방크기와 비슷하거나 약간 작지 않을까 생각된다...
완락재라 이름한 한칸방, 암서헌 명판을 붙인 대청마루와 퇴칸마루... 그리고 좌측에는 온돌아궁이와 이를 보살피던 하인이 머물렀을 거 같은 협칸 등 3칸에 좌우로 1.5칸이 덧붙여진 구조... 동측 개울물 건너 절우사가, 주위로는 매화원, 아래는 몽천이라 이름붙인 우물이 있고, 이를 구획한 담장에 회양목 한그루와 정우당이라 이름붙인 작은 못에는 연꽃이 자란다...
예전에는 너무 작은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이에 비하기 어려운 수행자들의 공간규모... 석가모니와 이황의 2,000년 시차를 생각하며 갑자기 비교해 보고 싶었다...>
- 또 첫 금강경 설법지로 알려진 기원정사/제타바나에는 각 수행자들이 독실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벽돌로 구획된 승원들이 있고, 이 중에는 석가모니가 19안거를 머물던 쿠티(Ganddha Kuti/‘간다’는 향기라는 뜻) 외에, 그의 아들과 제자들이 머물던 쿠티(라훌라/사리붓다/라즈까라메야 등)가 산재해 있고, 승원 구조 가운데 넓은 중정에 석가모니가 설법한 단이 남아있다.
<235, 기원정사의 쿠티들... 사원의 초기에는 쿠티만 존재했을 수 있다... 위쪽은 석가모니와 관련된, 아래쪽은 그의 제자들이 머물던 쿠티다...
① 간다 쿠티(19년 기거), ② 코삼바 쿠티(임시 기거), ③ 담마살라(석가모니의 설법장), ④ 아난다(존자) 쿠티, ⑤ 사리붓다 쿠티, ⑥ 라훌라(석가의 아들) 쿠티>
차츰 문(門), 경행처(經行處), 강당(講堂), 온실(溫室), 목욕탕(浴室), 부엌(食廚), 제방사(房舍) 등이 갖춰진 장엄-화려한 7층 건물(사찰의 상징세계 上권/자현 스님/불광출판사/2012년/p155)로 발전했다고 한다.
<236, 기원정사의 구성... 쿠티에 이어 설법장과 목욕장이 주요시설로 등장한 이후 상하수시설등이 추가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강당과 부엌이 정착된 계기는 원시불교에서 부파불교시대로 넘어간 시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부엌이 존재한다는 것은 출가수행자들이 탁발에 의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정사에서 기거할 수 있도록 재가수행자들이 생활을 보조한다는 점을 전제하며, 강당도 재가수행자 또는 대중들이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상시적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① 설법장, ② 우물, ③ 빔바사리왕의 방문, ④ 승원, ⑤ 목욕장, ⑥ 아소카왕의 방문/부조는 산치대탑 토라나, 사진은 “계림역사기행”에서 스크랩>
- 이 정사들의 특징은 ① 인도의 기후와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수행하기 좋은 곳(특히 인도의 열대성/아열대/열대몬순 기후를 고려하면, 목욕탕과 온실의 역할과 존재가 매우 중요했을 거 같다)이고, ② 이 공간을 공양/시주한 이가 왕 또는 유력자였으며, ③ 불교입장에서 유의미하거나 상징적인 곳이라는 점(이런 원시적이지만 기본이라 할만한 조건들은 이후 사찰의 입지선정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은 짚을만 하다. 다만 초기 승원에는 불탑의 개념이 없었다.
<237, 깨달음을 얻은 보드가야 보리수와 경행처(經行處, 가벼운 걸음,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 옆에서 일주일 동안 동서로 왕래하며 가볍게 걸을 때 연꽃이 피어올라 발을 받쳤다고)... 마하보디 대사원>
<238, 인도 불교사원 변화... 처음 죽림정사의 60여개 독립된 천막은 후대 쿠티 규모의 쿠타로 정착되었을 것이다. 물론 벽돌기단에 초가지붕으로 만들어졌을 터... 그리고 이 크기는 쿠티와 쿠티들이 집적된 승원, 그리고 신전 중 “가르바그리하/garbhagriha/자궁”라 불리는 성소의 기준이 됐을 것이며, 이후 힌두교와 자이나교 등 신전의 기준이 됐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불교 유적이 파괴되어 원형을 추정하기 어렵지만, 기원전 1세기경 산치1탑의 토라나에 새겨진 죽림정사와 기원정사의 신전형태와 가장 유사한 모습이 630~668년경 조성된 힌두교 라타(축제때 마차에 올려 끌고 다닐 수 있게 만든 신전 양식)사원에서 확인할 수 있어 소개한다. 마하발리푸람에는 거대한 화강암을 석굴처럼 파내고 다듬어 만든 5개의 라타가 있고, 이중 쿠타양식의 첫번째와 샬라/shala양식의 세번째 라타가 그것이다.
또 ③석굴 정면뿐만 아니라 쿠타와 신전 등에서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샬라양식의 아치형 지붕단면에 물병장식으로 꼭대기를 장식한 형태(첨두형 아치 또는 스투피라고도 부른다)는, 이슬람식 아치와 돔이 인도에 정착하기 전까지 불교는 물론 모든 종교건축과 주거 등 건축에서 전형처럼 전승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첨탑형식의 본전/비마나가 조성된 것으로 생각한다... 기원정사의 7층도 마하보디 사원의 본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인도 사원건축에서는 북방식과 남방식을 구분하여 이 본전(本殿)을 시카라/sikhara와 비마나/vimana로 구분하여 부르는데, 시카라는 꼭대기, 비마나는 사당/본전이란 뜻이다...
① 마하발리푸람 두르가사원, ② 산치대탑 토라나 죽림정사, ③ 바자12굴, ④ 산치대탑 토라나 빔바사리왕 기원정사, ⑤ 마하발리푸람 비마라타, ⑥ 보드가야 마하보디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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