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 몇가지 메모
▣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18-1. 인도 불교석굴사원 1
인도 석굴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위해...
○ 인도의 석굴을 사원 및 스투파와 함께 살펴보는 이유는, 인도불교사에서 <불교 멸망의 해>로 기록된 1203년 이후 대부분 불교유적들이 파괴됐음에도, 석굴사원들은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혀졌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고, 이 결과로 석굴사원은 산치대탑/부다가야의 마하보디사원과 함께 원시불교와 부파불교시대 등 고대 및 전성기 불교사원의 흔적을 온전하게 보존한 유일한 사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253, 인도 불교사원 원형은 석굴과 산치대탑, 마하보디 사원을 기준으로 추정할 수 있다... 1-1 아잔타 석굴, 1-2 아잔타 26굴 파사드, 1-3 엘로라 10굴 차이타야, ② 산치대탑, ③ 마하보디 사원>
○ 석굴사원>
- 석가모니가 부다가야에 있는 전정각산의 석굴에서 고행하기 이전부터, 동굴수행은 인도의 열대성/열대몬순기후로 발생하는 우기를 피할 수 있는(안거) 전통적(힌두교로 바뀐 브라흐만교와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자이나교 시절에도 존재했다)인 방식이지만, 이는 기존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굴이었고,
<254, 전정각산은 마하보디 보리수/사원에서 ① 팔구강 건너 북동쪽 7.5km 지점의 낮은 돌산. ② 석가모니가 머물던 ③ 자연석굴/유영굴은 구글지도에 ‘dungeshwari’라고 입력하면 확인된다. bagahi kalan이란 명칭 외에 인도식 산이름은 모르겠다는 이야기...
아무튼 이 굴은 석가모니가 우기를 피한 – 그리고 깨달음을 얻기 바로 직전에 머물던 석굴이고, ④ 이와 관련 ‘제석굴에서의 명상’이란 부제로 많은 조각들이 남아있다.>
- ① 암반을 파내는 건축행위로 조성된 인위적 구조물로, 인도석굴 중 ② 20여개 이상 모인 규모로 집단적이며, ③ 가운데 만다파라 불리는 중정 또는 공양칸을 두고 3면에 독실들이 배치된 비하라 구조가 있고, ④ 스투파가 안치된 예배당(차이티야/Caitya)이 하나 이상 있는 불교 석굴사원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255, 인도석굴을 대표하는 ①아잔타와 ② 엘로라 석굴, ③ 렌야드리 석굴, 비하라 전실 열주와 내부 만다파, ④ 아잔타 석굴의 차이티야 파사드(제24굴)와 차이티야 내부(제27굴)...>
○ 조성시기>
- 마우리아 왕조 말기, 아소카왕 시대(BC 268 ~ BC 232년) 100여년 후인 기원전 2세기부터 간다라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1세기까지 전기(소형스투파 유행시기)와, 굽타왕조시대부터 불교의 몰락이 본격화된 5~7세기까지를 후기(대승불교의 유행과 불교미술의 전성기)로 구분할 수 있으며, 두 시기에 걸쳐 집중적으로 조성된다.
<256, ① 석굴 분포도... 전기 석굴사원시대를 연 ② 사타바하나 제국과 ③ 숭가제국...
시대를 보면 사타바하나와 숭가왕조 시대고, 숭가왕조에서 산치대탑의 참배로와 난간을 조성하는 등 불교의 중흥에 기여한 바 크지만, 지도의 석굴분포를 보면 석굴사원을 유행시키고 주도했던 것은 사타바하나제국이 아니었나 싶다...>
- 대체로 전기 석굴은 사타바하나 왕조(BC 230 ~ AD 225년)와 숭가왕조(BC 185 ~ BC 73년) 시대를, 후기는 굽타왕조(240 ~ 550년)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굽타왕조 후기부터는 자이나교와 힌두교 석굴사원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10~12세기를 넘어서도 불교사원은 새롭게 만들어졌지만 이후 완전히 잊혀진다(유명한 아잔타석굴 명칭유례를 보면 ; 힌디어로 a는 ‘없다’, janta는 ‘사람’, 즉 Ajanta는 사람이 살지 않은 곳이라는 뜻으로, 1819년 영국인에게 우연히 발견될 때까지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던 곳이다).
<257, ① 석굴 분포도... ② 쿠샨제국과, 후기 석굴사원시대를 연 ③ 굽타제국의 영역...
지도를 보더라도 ② 간다라불상을 탄생시킨 쿠샨제국은 주요 석굴 분포와 무관하게 보일 수 있다. 제국의 중심지가 지금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지역이며, 현재 이슬람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258-1, 그러나 쿠샨제국과 굽타제국 영역이 겹치는 파키스탄 간다라와 아프가니스탄 카불지역에도 석굴사원 흔적이 많다. 대표적으로는 2001년 이슬람 원리주의를 내세운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바미얀 석불 주변에는 100여개가 넘는 석굴에 6구의 불상이 남아있다고 한다...
바미얀 대불 조성시기는 굽타제국 말기인 6세기 전후로 추정한다...>
<258-2, 바미얀 석불 파괴 전후와 복원 추정도...
바미얀 석불을 보면, 석굴사원이라기보다 불상이 안치된 석굴이란 표현이 맞을 듯 싶다... 본격적인 인도의 불교석굴사원을 알아보기 전에 간다라 서쪽(중동과 지중해 방향)의 석굴을 생각해봤다.
여기에 바미얀 석불 양식과 비슷한 중국의 석굴 양식과 불교석굴사원에 대비되는 힌두교 및 자이나교 석굴까지 먼저 접해보면, 인도에서의 석굴 사원과 건축의 변화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화권의 차이까지 생각해 볼 수 있다...>
○ 석굴과 종교>
- 불교석굴(60% 이상), 힌두교석굴(15% 정도), 자이나교석굴(5% 정도), 3대종교가 섞여 있거나, 특정 종교를 확인할 수 없거나 무종교로 추정되는 기타 석굴(20%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개인적 추정이다!).
<259, 자이나교 석굴/엘로라 제32굴... 엘로라 석굴의 마지막은 자이나교가 장식했다.
그리고 신전건축까지 확대하면, 자이나교 신전이야말로 불교/힌두교/이슬람교의 건축과 장식적 요소를 모두 총합한 형태를 갖췄다고 생각된다... 엘로라 석굴 중 30~34굴까지 5개가 자이나교 석굴이다...>
- 불교석굴사원인 아잔타석굴을 외에, 웅장한 규모와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석굴사원 중 최고로 불리는 엘로라 16굴 카일라사 사원(765년)을 비롯해 아잔타/엘로라 설굴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된 엘레판타 동굴 등 인도의 석굴사원은 결국 힌두교 석굴사원을 통해 완성되고 꽃을 피우지만, 석굴건축 및 석굴사원의 태동과 확산/유행 과정 모두 전형화된 불교석굴사원을 통해 출발하고 이를 모본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260-1, 최고의 석굴로 꼽히는 엘로라 제16굴...
장식과 건축, 규모와 세련미, 완성도에 이르기까지 석굴사원의 정화라 불릴만 하다...>
<260-2, 엘로라 제16굴의 입면도 및 상하층 평면도...
마하보디 사원의 불교신전 건축과 아잔타 등의 석굴에서 완성된 만다파 구조, 그리고 수많은 경험과 역량이 축적된 700년대의 석굴사원의 양식과 구조 등이 확인된다... 그 총합이 카일리사 사원이고,
600년대 이후부터 도시와 거리로 나선 힌두교사원은 석조와 벽돌축조 방식으로 탈바꿈하면서 더욱 장대하고 화려해지고, 고푸라(사원 입구에 세워진 피라미드형 첨탑)까지 추가되면서 신전배치도 완성태를 이뤄간다...>
<261, 힌두교 석굴사원으로 엘로라석굴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엘레판타 동굴...
시바신전으로 단일 조각으로는 가장 큰 규모와 완성도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며, 3면 마하데바 흉상도 유명하다.
“동쪽 얼굴은 끔찍한 파괴자인 아고라(Aghora) 또는 바이라바이며, 서쪽 얼굴은 미와 환희의 창조자인 바마데바(Vamadeva)로, 여성의 머리로 화현(化現)하였다. 중앙의 얼굴은 타트푸루샤(Tatpurusha)로, 존재의 음양을 다스리고 양성의 조화를 수호하는 신”이란다(http://heritage.unesco.or.kr/whs/elephanta-caves/ 에서 인용)>
○ 석굴 분포>
- 초기에는 데칸고원의 동쪽(벵골만 연안으로 동인도와 남인도의 동쪽 경계) 오리샤 주와 안드라프라데시 주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분포는 데칸고원 서북쪽, 뭄바이 시와 마하라슈트라 주 등 <서인도 또는 인도 중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262, 전기 석굴분포와 주요 제국과의 상관관계... ① 석굴 집중분포지역, ② 사타바하나 제국과 숭가제국, ③ 사타바하나제국과 쿠샨제국, ④ 쿠샨제국과 안드라 왕국...
이렇게 보면 사타바하나제국의 멸망과 굽타제국의 등장까지 공백기에, 석굴사원이 집중분포된 지역을 통치한 것은 안드라 왕국이었지만, 이 시기에 석굴은 침체기였거나 외면당하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인도의 석굴 1,200여개 중 900여(불교 720개, 힌두교 160개, 자이나교 35개 : 인도불탑/송봉주 지음/담앤북스/2022년/p139 참고) ~ 1,000개가 서고츠산맥 북쪽에서 데칸고원의 서북쪽 일대에 분포하며, 이 지역은 나르바다강 남쪽으로, 과거 사타바하나 제국(안드라족이라 생각한다, BC 230 ~ AD 225년)의 영토와 비슷한 영역이다(참고로 한반도와 반대로 서고동저의 특징을 갖는 중부와 남부 인도는 서고츠산맥에서 발원한 대부분 하천이 동쪽 벵골만 방향으로 흐른다. 석굴은 퇴적층인 동쪽보다 침식층인 서쪽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263, 후기 석굴분포와 굽타제국... ① 석굴 집중본포지역, ② 굽타제국 찬드라굽타 2세시대(380 ~ 414년) 영역, ③ 굽타제국 최대 강역/420년대...
굽타제국의 최전성기 영역과 석굴사원의 분포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 말은 굽타제국이 불교석굴사원을 적극적으로 후원/육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말이고, 실제 굽타왕조 대부분 왕들은 힌두교도였다. 그리고 굽타제국 최대 정복군주였던 찬드라굽타 2세부터, 인도의 중심적 종교는 불교에서 힌두교로 전환된다...
간다라+마투라+안드라 양식을 통합한 것으로 설명되는 굽타양식, 불교와 석굴사원의 최전성기를 탄생시킨 강력한 통일제국으로 알려진 굽타왕조, 그렇지만 이런 결과는 시대의 산물이었지, 굽타왕조의 적극적 개입과 의지로 불교석굴사원이 중흥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 이곳에 집중된 이유는 ① 인도 북부문화권/아리안계와 남부문화권/드라비다계의 중간대에 위치하고 있고, ② 해상무역의 중심지인 뭄바이를 중심으로 항구와 내부도시를 연결하는 교통로 인근에 형성되었고, 또 그만큼 ③ 제국의 통일 등 정치권력의 향방을 벗어나, 무역과 상업적 성공을 거둔 유력자들의 지원이 지속적일 수 있다는 인문적 조건도 있지만, ④ 기후와 현무암층이라는 토질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된다.
<264, ① 주요 석굴사원 분포도와 ② 인도 지형도와 유적분포도, ③ 인도 지형도, ④ 인도 철도노선도...
석굴사원은 석굴사원이 건축/확장/보존될 수 있는 지형 및 지질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지질과 함께 석굴사원의 번영과 확장을 유의미하게 설명하는 것은 교통로이며, 그 중 현대의 철도노선도만큼 과거의 주요 교통로를 적절하게 설명하는 자료는 없다... 현대의 대부분 철도노선은 과거 역사속에서 마차가 달리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65, 아잔타 석굴 주변 지형/구글어스...
우리가 지명으로만 접하는 데칸고원을 구글어스를 통해 “고원(高原)”의 실제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그랜드캐니언이 평지가 패인 협곡이라면, 데칸고원은 그랜드캐니언의 한쪽이 침식으로 완전히 가라앉고 그 경계는 절벽처럼 솟은 것처럼 보이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다만 남아있는 고원 위쪽은 황무지가 아니라 강이 흐르고 사람들이 사는 평야가 형성되는 지형이다...
아무튼 데칸고원과 서고츠산맥 경계에서 시작하여 남동쪽 방향으로, 협곡 혹은 절벽을 이룬 곳에 인도의 석굴사원들은 자리 잡았다...>
<266, 엘로라 석굴 주변 지형/구글어스...
아잔타 석굴이 평야와 고원이 만나는 경계의 산맥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간 협곡에 위치한다면, 더 후대에 만들어진 엘로라 석굴은 아잔타 석굴보다 남서쪽으로 평야와 떡시루처럼 놓인 고원의 경계 시작점에 만들어졌다... 바미안 석불 주변지형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 지형과 기후>
- 석질은 2천여년 유지될 만큼 안정적이지만 차이티야 규모를 감당할 적정한 경질도를 가지되, 파낸 부산물을 처리하기 쉬운 절벽 중, 지하수가 나오거나 주변에 식수와 하수처리가 가능한 강변 언덕이 적절한 지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대체로 직선보다는 말발굽형의 오목한 지형이 유리하며, 우기 범람을 피할 수 있는 높이도 필요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267, 아잔타 석굴의 주변 지형을 보면, 위의 특징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 일부 데칸고원 동쪽에서 석굴이 시작됐다지만 퇴적지의 침식과 사이클론의 영향으로, 또 석가모니 탄생지인 네팔쪽은 석질문제로 자연석굴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 확산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268, 건투팔리 석굴과 주변지형 및 벵골만 방향 열대성 사이클론...
데칸고원의 동쪽의 주변지형과 아잔타/엘로라 석굴의 주변지형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즉 아잔타/엘로라 석굴이 데칸고원의 시작지점이라면, 건투팔리는 데칸고원의 끝지점이며, 고원이 끝난 평원에 침식작용 후에 남아있는 작은 산에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인도양에서 발생하는 사이클론의 진행방향은 아라비아해쪽(서고츠산맥)과 벵골만쪽(동고츠산맥)의 대양무역과 연안무역의 차이를 결정지었을 뿐만 아니라, 석굴사원의 분포뿐만 아니라(우기를 피하기 위해 석굴에 안거하는데, 사이클론은 인도의 우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지역의 왕조의 존속 및 문화의 지속성에도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인도의 지형을 한반도와 대비해보면 ; 인도의 서쪽 아라비아해+서고츠산맥 일대는 우리나라의 동해안과, 인도의 동쪽 벵골만+동고츠산맥 일대는 우리나라의 서해안과 비슷한 지형 및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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