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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문화유산 - 한국적인 건축 공간과 공예

Ⅲ. 부록▣ 배례석 - 17. 인도 불탑/스투파와 불교석굴사원의 탄생 5

 

한국적인 건축공간(建築空間)과 공예(工藝)

   Ⅲ. 부록  몇가지 메모

 

 작고 낮은 배례석을 위한 메모 - 17. 불탑/스투파의 탄생 5

 

 

인도 사원과 불전의 탄생 5 – 불탑/스투파와 불교석굴사원의 탄생

 

     ○ 그러면 불탑은 언제 등장할까? 석가모니 열반과 다비 후, 그 사리는 바라문이 중재하여 8개의 나라/부족으로 분배되고, 각각 기념물을 세웠으니 이를 <근본사리탑/근본 8탑>이라 부른다(이때 사리를 담은 항아리 가져가 만든 병탑”, 화장터 숯을 가져가 세운 숯탑까지 10개를 최초의 탑이라 부른다.

 

석가모니 열반과 스투파

<239, 석가모니 열반과 스투파에 사리봉안... 석가모니 사리는 불교전파에 매우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당대에도 사리분배와 관련해 주변 7개국간에서 군을 파견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사였으며, 이 이야기는 수백년이 지나서도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고 기억된다...

열반/2~3세기/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박물관, 다비식 후 사리를 옮기는 행렬/산치대탑 토라나 서문, 염소로 태어난 전생이야기와 사리 쟁탈전/3세기/안드라프라데시 나가르주나콘다>

 

사리전쟁과 석가모니 사리의 8배분

<240, 사리전쟁 후 사리 8분과 운반... 사리 운반을 위해 코끼리와 사리함이 사용됐다는 부조들... 사리가 곧 성물(聖物)이기 때문...

사리분배, 사리함을 옮기는 코끼리/기원전 2세기 후반/마디아프라데시 바르후트, ③④코끼리를 탄 사람들-사리를 가져가지 못한 사람들/기원전 2세기 후반/우타르프라데시 마투라>

 

 

 

 

     그리고 근본 8탑은 산치대탑(파프라흐와 스투파도 진신사리 봉안 사리병 출토)을 제외하면 소재가 불분명하고, 2대 정사는 물론,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Lumbini, 성도/깨달음을 얻은 부다가야/Bodhgaya, 처음 설법을 한 사르나트/Sarnath와 열반에 들어간 쿠시나가라/Kushinagar 등 불교의 4대 성지와, 슈라바스티-산카샤-라지기르-바이살리를 포함한 불교의 8대 성지와 일치하지 않는다).

 

인도 불교 8대성지와 근본 8탑

<241, 인도 불교 8대성지와 근본 8탑 중 페페스투파와 랏차비스투파...

장아함경(長阿含經)의 제2경으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으로도 불리는 유행경(遊行經)에는 8개로 나뉜 사리를 가져간 8국을 구시국, 파파국, 차나국, 라마가국, 비류제국, 가유나위국, 비사리국, 마갈국이라 기록했는데,

 

기원전 6~5세기의 인도 16대국과 이름이 일치하는 곳이 없다...>

 

세계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성지

<242, 참고로 세계 4대 종교의 성지들도 찾아본다.

기독교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묘교회, 로마 바티칸 시티와 성베드로 대성당, 스페인 몬세라트 수도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이슬람교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카바신전,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 알 나바위 모스크, 이스라엘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와 바위의 돔,

 

불교 캄보디아 앙코리 와트 사원,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사원, 미얀마 바간 사원,

 

힌두교 인도 바라나시를 포함한 갠지스강>

 

 

 

 

     즉 석가모니 활동과 함께 승원은 규모를 갖춰나가기 시작했고,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분배되면서 불탑이란 개념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다만 초기 형태 승원에는 불탑이 없었으나, 석가모니보다 먼저 입적한 사리푸타/사리불/지혜제일과 목갈라나/목건련/신통력제일의 사리함이 산치3탑(상륜부 사각난간인 하르미카)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하건데,

 

산치 3탑/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243, 산치 3>

 

 

 

     이전부터 다비식이 있었고, 이때 수습된 사리를 담는 사리기/사리함이 있었으며, 이를 스투파에 봉안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때부터인지 불교에서는 사리신앙이 중시됐으며, 기존의 스투파를 보강하여 불탑으로 정형화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석가모니 사리함

<244, 석가모니의 다비 및 사리전쟁 과정에 등장한 사리함과 스투파 형태와 양식을 추정할 수 있는 사리함과 스투파다... 이를 시대별 순서로 넘버링해본다면

기원전 6세기 실존했던 석가모니의 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의 사리함이 안치된 산치3(늦춰 잡으면 기원전 3세기),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아소카왕의 사리배분 과정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는 피프라와 (페페) 스투파 사리기(기원전 6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기원전 3세기 승려 유골이 담긴 기원전 1세기 사리외함과 내함...>

 

 

 

 

     - 공자가 <춘추시대> 제국을 유랑하며 사상을 설파했듯이, 인도의 <십육대국 시대>에 활동했던 석가모니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수행과 설법을 진행했고, 그 제자들과 수행자들에게 불교를 전파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석가모니 입적 100여년이 지나 찬드라굽타가 건국한 마우리아 제국이 탄생(BC 322 ~ BC 185년)하면서 인도는 이제야 인도의 역사를 갖게 된다.

 

 

     십육대국 시대(BD 600 ~ BC 321년)까지 인도는 다리우스왕과 크세르크세스왕의 파병요청을 따라야 하는 <아케메네스 제국(BC 550 ~ BC 330년)>의 속국 또는 후방지원 역할이었으나, <알렉산드로스 제국>에 의해 아케메네스 제국이 멸망하자 알렉산드로스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집결한 십육대국의 군대와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시스템을 찬드라굽타는 그대로 장악한다. 마우리아제국의 탄생이다.

 

<245, 십육대국 시대, 알렉산드로스 제국과 원정로, 마우리아 제국>

 

 

 

 

     이 제국은 북인도1과 북인도2를 거점으로 서인도와 동인도를 통합하고 단일 왕국/제국으로는 처음으로 데칸고원까지 진출한다. 무굴제국 이전 유일한 인도의 통일제국이다. 문화와 신앙에 근거한 도덕과 윤리 등 가치관과 전통이 섞이면서 기준과 표준을 만들어 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소카 기둥과 칙령을 보면, 이 당시에도 인도는 언어통일은 이루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국이 탄생하고 다시 2세대-60여년이 지나 아소카왕이 등장하면서 인도는 통합된 역사를 처음으로 갖게 되면서 <역사시대>로 진입한다.

 

아소카 칙령

<246, 아소카 칙령(269 ~ 231년 기원전) 명문이 새겨진 기둥과 바위 분포도... 라우리아 난다나르 기둥, 아프카니스탄 칸다하르 출토 아소카 석각명문/위쪽은 그리스문자, 아래쪽은 아랍문자, 델리 미어루트 아소카 6대칙령/대영박물관, 룸비니 사라타베 기둥/라흐미 문자, 아마라바티 명문, 고대 브라흐미 문자가 현대 데바나가리 문자로 진화되는 과정 추적 논문/1838>

 

<247, 고대 브라흐미 문자 외에 카로슈티/그리스/아람어 문자로 새긴 아소카 석각 칙령을 담마 리피(그 법의 글들)라 하는데, 이 명문들은 인도를 비롯 파키스탄/방글라데시/네팔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까지 퍼져 있었다고 한다. 바위 담마칙령 제13호가 전하는 아소카 재위 당시 담마로 정복(?)한 지역들/위키백과 아소카의 칙령사절파견...

아소카왕 당시 불교의 전파방향은 완벽하게 서쪽/중동/지중해 방향이며, 알렉산드로스제국 이후 인도문명의 교류방향을 명확히 보여준다는 면에서 다시 한번 스크랩했다...>

 

 

 

 

     - 불교도 내외적인 조건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카스트제도는 거부되고, 사제의 개입도 없고, 의식도, 제사도 없이 오직 석가모니에 대한 믿음과 교리로 무장한 수행자집단이 요구된다. 지역의 왕들과 상인, 소작농, 특히 여성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특히 대다수 수드라계급이 불교로 전향한다. 석가모니가 가르친 초기 불교는 <포교 종교>였다(인도미술/비드라 데헤자 지음/한길아트/p41).

 

 

     이때 포교의 상징이 스투파/불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기에 머물던 정사와 석굴은 스투파의 사원내 조성으로 인해 변화/발전(승원→승가람마→사원)하면서 불교는 기존 브라만교/자이나교와 다른 시스템을 갖춰간다.

 

다르마라지카와 산치 불교유적 배치도/인도의 건축에서...

<248, 스투파 중심의 사원 배치도... 기원전 2~1세기 전후부터는 탑돌이가 가능한 참배의 길이 스투파 하단과 기단부 위에 만들어지고, 그 주위로 난간이 추가 설치되기 시작한다...

그런 유적들이 잘 남아있는... 다르마라지카 불교사원/탁실라/기원전 1세기 ~ 기원후 2세기, 산치 불교 유적 배치도와 복원도>

 

 

 

 

     - 내적으로 ① 개개인에게 맡겨졌던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방향이 집단적으로 바뀌면서 체계화가 필요해졌고, ② 석가모니의 언행을 경전으로 취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이견으로 부파/종파로 분열됐으며,

 

     외적으로는 ③ 데칸고원 남쪽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도를 정복한 아소카왕이 근본8탑을 파분하여 제국 각지에 8만4천기의 불탑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표준화가 필요했고, 결국 ④ 공존하는 힌두교 및 자이나교(굽타시대뿐만 아니라 마우리아시대에도 3종교는 공존하고 있었고, 같은 왕조에서도 왕들의 선호도 역시 각기 달랐다)를 포용하면서 불교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품격을 높이기 위한 화려한 장엄과 완성된 세계관이 구현된 사원의 재정립이 필요했을 것이다.

 

탁실라 시캅유적과 주변

<249, 이슬라마바드에서 페샤와르 방향 서북쪽 인근,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와 펀자브의 경계, 현대의 파키스탄 수도가 자리잡은만큼 핵심적 교통요충지... 간다라 지방, 탁실라의 지정학적 요약일 수 있겠다.

이곳에는 대형 불교유적이 있고, 바로 위쪽()에는 잔디알 유적, 남동쪽에는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와 불교유적을 비롯해 주변에 많은 스투파와 불교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 중 차이티야 유적 주변에 시캅궁전이 있어 불교유적의 한계가 불분명하고, 또 인근의 잔디알 유적에는 그리스신전이 있어 경계는 물론 상호간에 주고받은 영향도 불분명하며, 소위 수도원 또는 불교유적으로 명명한 달마라지카와 모라모라두 유적의 스투파와 석굴 등의 관계도 확인하기 어렵다.

 

마우리아시대... 아직 불교사원의 정형과 전형을 규정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불교유적

<250,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불교유적... 249도판 시캅궁전 남동쪽으로, 스투파 주위로 승원과 봉헌용 스투파, 불상봉안용 감실 등이 무질서하게 혹은 부정형으로 확장된 유적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미 간다라불상까지 있어 조성된 시기는 마우리아에서 쿠샨시대까지 범위가 넓혀진다.

인도의 불전변화와 가람배치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 이 결정적 계기는 아소카왕(BC 269 ~ BC 232년 재위)의 칙령반포와 불탑조성 과정에서 <사리숭배>가 대중화됐다는 점이다. 이때부터 수행자들이 모인 승원에 스투파 중심의(또는 스투파들이 모인) 탑원이 생기고, 대중들이 예배하면서 탑돌이를 할 수 있는 회당이 생긴다.

 

 

     칙령이 새겨진 아소카 기둥과 스투파를 끌어안으면서 불교의 상징성을 가진 승원은 승가람마로 불리면서 사원으로 격상하고, 기존의 자연 석굴들도 불교사원으로 새롭게 정비되기 시작한다(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

 

비하라 구조의 변화와 발전...

<251, 비하라 구조의 변화와 발전... 1-1(사진/건투팔리 석굴) 홀로 수행하던 석굴에 여러 수행자들이 모이면서 승원으로 발전하게 된 석굴을 1-2(사진/렌야드리 석굴) 비하라 구조라 부르고, 이 비하라는 공동사용공간인 만다파를 갖추면서 규모를 키운다.

여기에 테라스형 전실이 생기고, 1-3 열주가 들어서면서 공간이 더 커지고, 또 그 중심구역에 2-1, 2-2 스투파 또는 불상이 안치되기 시작한다. 그 변화과정이다.

 

먼저 비하라는 1-2 독방, 만다파/방형 중정, 전실 테라스 구조를 갖추고, 1-3(바그 석굴) 내부 열주를 통해 공간이 넓어지고, 수행공간과 학습 또는 설법공간이 분리되면서 1-4(엘로라 제5)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엔 수행자들의 공간이었다가, 2-1(나식 제3) 중심부위에 스투파 부조가 들어서기 시작하고, 2-2(담나르 제6) 다음엔 독실 공간에 소형 스투파를 봉안하다가, 나중에는 스투파를 봉안한 중심공간 앞에 2-3(바그 제3) 전실을 두고 내부에 스투파 또는 불상을 안치한 사당형 비하라로 장엄의 격을 높여간다.

 

출발은 다르지만 비하라의 변화 결과가 예배당/차이티야로 완성되게 된다... 석굴이니까 필요할 때 더 넓히고 더 깊게 파가면서 규모가 커진 경우도 많을 거 같다...>

 

 

 

 

     독실구조인 승방은 만다파(평평한 천장구조 포함)의 중정을 중심으로 비하라 구조의 평면으로 정립되고, 비하라 정면 독실에는 스투파 부조나 보석, 사리함 등 상징물이 안치되기 시작하며, 한편에서는 열주로 장엄된 예배당(차이티야)에 소형 스투파가 안치된다. 사원의 변화가 석굴의 변화를 이끌었을 것이다.

 

차이티야 석굴의 변화와 발전

<252, 차이티야 석굴의 변화와 발전... 차이티야가 들어서면 석굴은 진정한 사원이 되고, 그 근간은 스투파와 불상의 유입이다. 이로써 수행공간과 예배공간이 분리되기 때문이다...

차이티야는 초기 만다파 양식의 비하라굴에 스투파부조 또는 스투파의 봉안에서 시작해, 차츰 전실과 열주, 그리고 전면의 첨두형 아치천장과 열주를 갖추면서 완성형을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만다파 양식이 갖춰진 것이 기원전 2~1세기이고, 완성형 차이티야가 등장한 것이 2~5세기이니 수백년의 시차가 있다... 또 초기 형태를 두고 원형과 방형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결국 말발굽형/전방후원형으로 완성된다...

 

가장 초기 형태를 나는 사당형/신전형이라 부르고 싶다. 그리스/이집트 신전형태로 정형화된다. 1-1 주나르 원형 차이티야, 1-2 쿠다 제15, 1-3 쿠다 제1,

스투파가 안치된 공간과 참배 혹은 예배공간이 분리되고, 두 공간은 비도로 연결된다. 석굴의 구조적 문제 때문이라 생각된다. 2-1 건투팔리 석굴/기원전 2세기, 2-2 수마다 석굴/아소카왕 12,

 

두가지의 실험양식이 집적/총화의 결과, 말발굽형/전방후원형 차이티야가 정형화된다. 2-2에 없었던 열주로 예배공간과 참배공간이 분리된다. 참배로는 탑돌이의 건축적 강제와 석굴의 구조적 안정성, 그리고 차이티야의 장엄함을 높이기 위한 3가지 이유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고 생각한다... 3-1 엘로라 제1012층 평면도, 3-2 카를리 석굴 평면/종단면/투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