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불상 - 心,想,和...

백제 금동보살입상 5. 사족 2 – 600년대 전후 시대적 배경

 

* 사진을 클릭하시면 크게...

 

 

 

 

5. 백제 금동보살입상 사족 2 600년대 전후 시대적 배경

 

 

이렇게 범위를 넓혀봐도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미소를 머금은 불상은

600년대 전후 100여년과 800년 전후 60여년에 집중되어 있다.

사실 800년대 전후처럼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여유가 뒷받침된,

혹은 사치와 향락을 위해 절정의 공력과 부를 쏟아부어도 용인될 수 있는 집단적 분위기,

이기심과 과시욕이 광기에 휩싸일 때, 화려하고 장중한 불상들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미소를 띤 불상이 일반화되지 않는다.

 

<5-1. 성덕대왕신종과 비천상... 경덕왕의 죽음과 원성왕의 등장은 통일신라 중하대를 구분하는 주요한 계기가 된다. 경덕왕의 위대한 유산 중 하나로 석굴암과 함께 우리나라 문화를 대표하는 성덕대왕신종. 얼마나 장중하고 화려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회가 전쟁에서 멀어지고 화려해질수록 근육은 사라지고 여성성이 커진다. 그러나 속세는 문란-문약해지지만, 종교와 통치는 화려함을 근엄함으로 포장한다... 가운데 탁본과 비천상 조각은 스크랩한 사진>

 

 

 

 

어쩌면 600년대,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지 300여년이 지난 이 시점이 특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300년대부터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역사가 기록한 최초시점에 대한 의미부여지만,

다른 한편으론 불교에 대한 선망이 이미 충분한 사회적 현상이 되면서

지배계층과 왕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말일 수도 있다.

즉 예수 사후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기간이 300년이나 필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가 얼마나 센세이션하게 파급되고 유행이 됐는지 짐작할 수 있다.

 

<5-2.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건 공식적으로 이차돈이 순교한 527년이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충분한 대중적 저변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500년대 후반부터는 인도와 중국의 석굴을 곧바로 실험한다.

580년경 경주 남산 불곡에 이어 680년경 군위 석굴, 770년경 경주 석굴암에 이르기까지 공교롭게 100년 단위로 석굴을 만든 신라는, 경주 남산에 세계 불교 미술이 길이 남을 대승불교의 꽃, 석굴암을 건축하기에 이른다...

경주 백률사 석당기/527/818년작,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조상/580년경/보물198, 군위 아미타여래삼존 석굴/680년경/국보109, 경주 석굴암 석굴/774/국보24>

 

 

 

 

 

그리고 다시 300여년이 지나면서 구역불교가 정점에 이르고,

토속민속적인 온갖 종교적 행위와 사회의 다양한 미풍양속이 불교로 필터링되고,

전통적인 선도와 도교까지 불교가 주도적으로 습합해 대승불교 틀로 묶고 호국불교로 각색,

중국에 비해서도 선도적이며 수준높은 철학적 이해에

다양한 요구까지 반영한 불교를 일본에까지 전파하기 위해 완숙되어야 할 시점,

여기에 불교가 태동하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인도에 대한 선망이 정점에 이르면서

신역불교가 새로운 지평을 여는 시점이 600년대 전후다.

 

<5-3.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지 300... 중국의 구역불교를 한반도의 정체성으로 소화해 이를 실체로 구현한 것이 639년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와 645년 신라의 경주 황룡사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와 사리장엄구/국보 340>

<5-4. 그리고 신역불교까지 소화한 통일신라가 스스로 세계관을 만들어 간 곳이 682년 경주 감은사지라 생각한다...

한반도 최초의 통합군주 문무왕과 이를 뒷받침한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 신라가 선택한 통불교는 불국사와 석굴암에서 만개한다...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112호와 동삼층석탑 사리장엄구/보물 1359... 이건 왜 아직까지 국보로 승격되지 않을까???>

 

 

 

 

 

이때 신상으로 제작된, 민초들에게 보여주고 지배층들이 갖고 싶은 불교는 어떤 얼굴이었을까?

풍요와 전란, 전통의 완성과 변화 그리고 도전, 격변의 시점 한반도에서

기존세계의 몰락에서 느끼는 불확실함과 새로운 미래를 향한 희망과 열정이 버무려지면서

새롭게 정립되는 세계관이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가는 시대가 요구하고 반영하고 싶은 표정.

종교와 철학이, 정치와 권력이, 시대가 상황을 만들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조우하고 느끼고 이상(理想)하고 꿈꾸며 현현시킬 역량들이 집중된 시점에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는 분명 커다란 귀착점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5-5. 600년대 전후 대중들이 열광했던 것은 미륵과 관음신앙이었다... 그리고 600년대 후반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나가는 과정에서는 아미타신앙이 득세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튼 600년대 한반도의 민중들에게 종교는 풍요의 만끽이었거나, 희망찬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백제 금동보살입상,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그런데 생각해보면, 불상에 미소가 어우러진 것은 한반도의 600년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쩌면 500년대에서부터 수와 당나라 초기까지의 중국에서도 확인된다.

이 시기에 조성된, 조금 더 앞당겨 중국의 석굴에서부터 상당수 불상에는 미소가 조각되어 있다.

이유가 뭘까?

4대문명 중 하나, 메소포타미아-이집트-인도, 그리고 그리스까지를 포함해도

유일하게 그들과 교류없이 무려 수천년동안 성장하여 인류의 지평을 넓힌 곳이 중국이지만,

외래종교의 통과의식이었을까? 대중에게 다가갈 불상의 첫 표정은 미소였다.

 

<5-6. 중화의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렇기에 불교의 유입도 중국식으로 해석하되, 원본을 충실히 따르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내지만, 처음엔 웃지 않았을까? 생각보다 중국은 인도와 커다란 시차없이 불상조성 양식을 쉽게 받아들이고, (인도에 없지만, 기술이 있는 중국은) 금동불상을 먼저 만들어 전파하며, 석굴사원을 유행시킨다...

그래서 맨처음 불상은 인도식 복장이지만 수인은 도교적인 선정인이고, 차츰 황제의 일산과 도교에 없는 일산을 부가하고, 또 익숙하지 않은 교각좌도 그냥 받아들인다. 이런 양식은 40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며, 상당수 불상에 미소가 깃들어 있다...

금동 선정불좌상/300년경/하북성 석가장 출토/새클러박물관, 금동 건무4년명 선정불좌상/338/후조시대/샌프란시스코아시아박물관, 일산과 광배를 갖춘 금동 삼존불좌상/400년경/메트로폴리탄미술관, 미륵보살 교각상/400년대 전반/돈황 막고굴, 석가여래상/400년대 전반/병령사 석굴>

 

 

 

 

 

여기에 종교라는 시스템을 갖춘 고도의 철학과 율법과 수행을 일체화한 불교는

당대 가장 선진적이며 고도한 인류문명의 집대성이었을 수 있다.

이를 받아들이고 전파한 중국인 입장에서 절대자, 신격, 보편성은 권위와 위엄보다

포용과 희망과 평안을 앞세워야 했을 수 있다.

결국 외부에서 이식된 불교가 내부 방어막 해체를 위해 선택한 것은 칼이 아닌 빛이었다.

친근한 메시아, 내 곁에 있는 신격, 생로병사를 위로할 수 있는 구원의 상징...

 

<5-7. 두 번으로 중국의 초기 불상의 흐름을 요약하기 힘들지만, 수당양식 이전 남북조시대를 기점으로 두 번으로 나눌 수 있다... 420년 전후를 기점으로 완전히 중국식으로 소화된 불교의 체계가 사찰과 불상에 그대로 투영된다.

인도와 달리 불상이 거대해지고, 광배와 좌대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게 되며, 이때에도 많은 불상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여래입상/476/북위/운강석굴/포복식복장, 금동여래좌상/477/북위 태화양식/닛타그룹, 용문석굴 빈양중동/500~523/북위/상현좌-거신광 좌불상과 황후예불도, 금동 정광5년명 불입상/525/정광양식/메트로폴리탄미술관, 석조삼존상/535/동위/하남성출토, 석조여래입상/560년경/북제/네즈미술관>

 

 

 

 

 

5호 16국(304~439년), 위진(220~420년) 남북조(420~589년)시대의 격변과 혼란기에

중국인들의 선택은 위로와 용서, 포용해 줄 수 있는 대자대비한 메시아였을 수 있다.

(400년간의 실험 끝에 중국인들은 다시 강력한 통일제국을 선택한다. 수당시대 개막이다)

 

<5-8. 516국과 위진남북조 시대... 이 혼란기에 한반도의 백제와 고구려는 1차 전성기를 맞는다.

백제의 근초고왕(346~375), 고구려의 광개토대왕(391~412)-장수왕(~491)의 시대가 그것...>

 

 

 

 

 

이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진 것인 600년대 한반도 – 삼국시대다.

고구려-백제-신라의 조건, 중국이란 환경, 불교의 세계적 흐름...

당시 만든 수많은 신상(神像)들 중 미소 띤 불상은 극히 소수에 불과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그런 분위기로 상당수가, 한반도에서는 극치의 완성태로,

또 일본에는 중세로 가기 전 고대, 그것도 하쿠호시대로 넘어가기 전 아스카시대에 잠깐...

오묘한, 무상무아, 굽어보는, 아름다운 미소의 불상 몇몇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5-9. 일본의 고대 아스카에서 하쿠호시대로 넘어가기 전은 역시 격동과 격변의 시대였다. 불교의 전파와 함께 시작된 국가시스템 확립까지가 아스카시대였다면, 전쟁의 패배와 백제의 멸망, 한반도와 결별 및 일본의 정체성의 위기감을 반영한 게 하쿠호시대가 아닐까 싶다...

그래선지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미소를 머금은 불상, 웃는 표정이 아스카시대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교토 고류지 목조미륵반가사유상/7세기, 나가노현 관송원 동제 반가사유상, 교토 묘덴지 보살반가사유상, 나라 호류지 헌납보물 오존불과 이제부터 표정과 양식이 달라지는 하쿠호시대의 금동 반가사유상>

 

 

 

 

 

물론 비슷한 조건이 갖춰진다고 미소 띤 불상들이 탄생할 개연성은 없다.

고려의 후삼국통일과 창업, 조선의 건국, 또 해방후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이룬 대한민국은

600년대 삼국시대에 비할 수 있고,

 

<5-10. 고려시대의 창업과 황금기 주요불상...

역사에 과연 비슷한 조건이 있을 수 있는가? 역사는 반복될 수 있는가 묻는다면, ‘한번의 희극으로, 한번은 비극으로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할 수밖에 없다. 고려의 창업과 황금기, 그들의 불상에서 미소는 없었다...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968/국보 323,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980년경/보물 96,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1100년 전후/보물 93>

 

 

 

 

 

1100년 전후의 고려황금기와 1450년대 및 1700년대 조선은

800년대 전후의 통일신라에 비교할 수도 있지만, 미소 띤

불상이 지배적 분위기는 아니었다.

 

<5-11. 조선시대의 불상... 신라와 고려만큼, 조선은 고려와 또 달라진다. 완전히...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불상을 꼽는 것은 어렵지만 시대별 패턴은 있는 거 같다.

고려말 조선초 1390년대 그 격변기에 서울 보타사 마애불은 두기운이 충돌하는 느낌이고,

1400년대 중반 무위사 극락전의 불화와 불상에는 고려의 여운이 남아있다...

1600년대 양란의 엄중한 속에서 주요사찰에는 거대한 소조삼존좌상과 화려한 목각설법상이 동시에 조성되고,

1600년대부터 1700년대에는 작은 불상과 화려한 불화들이 만들어지지만 그들에게서 미소를 찾는 것은 어렵다...

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1390년경/보물 1828, 강진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1476/국보 313호와 아미타여래삼존좌상/1478/보물 1312, 김제 귀신사 소조비로나자삼불좌상/1624/보물 1516,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1675/국보 321, 양산 통도사 대광명전 삼신불도/1759/보물 1042>

 

 

 

 

 

세계관이 충돌하면서 문예와 철학의 르네상스가 열리고, 청자도 백자도 완성태를 갖추지만,

세상의 충만한 생기를 포집한 미소가 자연스레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은,

한편으로 역사를 직관할 수 있는 유산을 가진 우리들의 행운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대의 미소를 볼 수 있다는 것은 귀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5-12. 600년 전후 불상의 미소...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중 본존불, 부여 규암리 금동보살입상, 경주 남산 장창곡 미륵여래삼존상 중 협시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