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도인가? <블로그>가 아직 생기기전 <칼럼>으로 올렸던 글이다.
* Daum에 의해 자동으로 옮겨지면서 편집이 제대로 되질 않아 이제서야 수정한다...1109
* 영화의 구성이나 감독에 대한 글은 내용과 무관하다 싶어 생략했다...
율리시즈의 시선이란 영화를 보고...
1. 영화의 구성
2. 표현의 자유와 실험성에 대하여
3. 감독의 주장에 대하여
4. 몇가지 생각
5. 해는 바다속으로 진다.
Le regard d' Ulysse
신의 첫창조가 <여행과 의심, 그리고 노스텔지어>라고 주인공의 친구는 말한다.
나 역시 그러기를 바란다.
감독은 그 <첫 창조>의 의미를 찾아 나섰다.
1. 영화의 구성
1) 속도감과 줄거리와 자극에 의존하지 않는 영화...
2) 줄거리는 있는데 결론은 관객에게 맡긴 영화...
3) 친절하지 못한 영화...
4) 영화의 전개에서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은 구성...
5) 몰입보다는 거리감이 필요한 영화...
2. 표현의 자유과 실험성에 대하여.
일반적이지 않은 기법(서있는 사람들, 대역 없는 과거 회상과 1인 4역, 1인 3역 등)으로 감독은
마음대로 앵글을 선택한다.
군더더기를 제거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극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인지 판단은 불명확하다.
거장의 고집이며 능력인지,아니면 포스트 모더니즘적인 해체주의의 방법적 적용인지 또한 모르겠다.
......
1) 1인 4역의 여배우에 대해...
2) 도로 한가운데에 서있는 사람들, 군중들...
3) 맨홀뚜껑과 안개 속의 오케스트라...
3. 감독의 주장에 대하여.
영화는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단지 2시간 40분이 넘는 긴 시간을 의자에 꼼짝없이 앉아 있게 만들었을 뿐이다. ... ...
전혀 말이 안되는 문답을 스스로 내뱉듯이, 감독은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데
나는 감독의 의도를 해부하고 그의 주장을 분석하고 영화를 새로 쓴다.
1) 다시 과거를 되돌아보자는 주장에서 무엇을 생각하는가?
결코 화려했던 과거에의 동경과 회상이 아닌, 지나간 역사의 실체를 자신의 눈으로 다시보고
오늘의 맹아를 찾고자 하는 그의 문제제기에 나는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 과거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었던 가장 환상적인 것도, 이상적인 것도, 완벽한 것도 아니다.
한 개인사가 아닌 사람들의 경험, 가치와 무관하게 실재했던 일들,
의지와 관계없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일들,
우리에게 필요한 자료는 '그냥 스쳐지나간, 그렇고 그런 모습들'이다.
그것이 가장 구체적이면서 가장 총체적인 역사적 실체가 아닐까?
세기초에 만들어진 필름 3통으로 상징되는 지나간 역사의 실체를 찾아가는 영화의 줄거리는
애초 내게 호기심을 주지 못했다.
또한 필름 3통을 찾기 위해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 혹은 극적인 순간들도 내게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가 왜 지쳤고 그가 과거에 무엇을 해왔는가의 기억들도 내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내게 관심 있던 것은 (영화이니 만큼)
' 하비키이텔이란 주인공이 얼마만큼 그 필름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소화했는가? '하는 점이 첫째였다.
그리고 두 번째는 ' 중요성을 얼마나 설득력 있게 연출해 냈는가? ' 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나의 간절함과의 비교였다.
나는 연기와 연출에 대해서는 만족스럽지는 못하다는 답변을 해야만 한다.
나는 그 '간절함'을 함께 즐기고 싶었으나 영화는 나를 충분히 몰입시키지는 못했다.
대신 위로를 받는다면 감독이 주제를 부각시킨 문제의식을 충분히 공감하며,
사회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그 진지한 노력은 절대 존중한다는 점이다.
2) 전쟁과 파괴와 학살과, 춤과 음악과 사랑에 대하여
감독은 인간이 처한 가장 극한적인 상황을 전쟁으로 상정했다.
그리고 그런 최악의 상황에서 인간이 바라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과 행복의 표현으로
춤과 음악과 사랑을 제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나는 여기에서 두 가지의 생각을 한다.
먼저 영화의 배경으로서 발칸반도의 특수성에 대해 생각해 본다.
작가의 출발은 자신의 고국인 그리이스에서 시작한다.
오랜 망명 속에서 돌아온 고국은 여전히 이념과 정치적 대결에서 매우 첨예한 대립에 놓여있다.
작가의 시간여행은 결국 발칸반도를 배경으로 하게되고 여행의 종착역은 사라예보로 귀결된다.
1차대전의 발발에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20세기말 다시 사라예보는 인종청소의 현장이 되어있음에 작가는 분노한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 정상적이라는 역설 마져도
끝내는 학살로 끝나버림을 아울러 폭로하고 있다.
이것이 발칸반도의 지난 1세기였다.
물론 나도 인간에 있어 가장 큰 불행은 파괴와 학살과 전쟁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며, 정치는 경제의 충실한 반영임을 생각할 때,
전쟁으로 모든 것을 표현해낸다는 것은 애초 무리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된다.
때문에 이 자체가 곧바로 유럽의 1세기, 인류역사의 100년을 대표한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이며,
그런 이유로 이것을 잣대로 현실을 재단하기는 곤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경험의 차이에서 오는 문화적인 이질감이다.
감독은 춤과 연극과 음악, 산책과 가족과 인생의 관조(공동묘지의 이중성),
그리고 순수와의 만남과 사랑과 결실이란 조건들을 사라예보와 대비시킴으로서,
그 감동의 무게를 더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즉 가장 상처받는 현장에 가장 이상적인 치료를 생각했을 것이다.
내게는 왠지 뜬구름 같은 접근들이다.
나는 그런 대비에서 어떤 역동적이고 감동적인 힘을 세례 받지 못했다.
나의 의식이 현실에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문화적 경험의 차이인지 낯설기만 하다.
나는 감독이 제시했던 상징이 내게 보다 감동적인 표현이었기를 원했다.
3) 사회주의의 몰락과 인테리겐챠의 절망에 대해
고집스럽고 자신만만한 레닌의 동상이 철거/해체되어 배에 실려 독일을 향한다. 독일로 !
또 운하 옆으로 일부의 군중들이 무릎을 꿇고서 성호를 그으며 레닌의 동상을 전송한다.
이반의 표현인지 성스러운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심리는 그렇게 그려지고 있다.
분명 감독과 주인공의 눈에 현실사회주의는 몰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거되고 해체된 레닌의 팔은 여전히 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손가락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주인공은 그 배를 타고 여행하고 있다.
(2차대)전후 가장 큰 사상적 격동기는 1960년대였다.
그 중심지인 파리에 주인공과 그 친구가 함께 있었음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이상과 꿈, 그리고 패배와 절망, 살아남은 이로서의 죄책감까지
두 사람의 대화는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다.
한사람은 '다시'시작하기 위하여 필름을 찾아 나섰다.
그것은 그에게 삶에 대한 애착의 표현이며, 더 이상 물러서거나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희망으로 설정된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긴장의 욕구를 갈구하는 또 한 친구는 역시 인텔리겐챠다.
맑스를 만든 헤겔의 잘못을 비웃으면서도 그는
변치 않는 세상과 변치 않는 바다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친구와 함께.
그러나 그는 여전히 끝과 시작을 자신의 눈으로 모두 보고 싶어하는 쁘띠부루주아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한사람의 존재를 본다. 필름의 현상기술자이다.
자신의 기억과 자신의 삶에 충실하고 만족해하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굳이 사회적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주인공의 설득으로 필름을 현상한다.
현상에 성공하는 기술자는 역시 '프로'다.
그리고 그 기술자의 변화와 자각은 감독의 희망이며 무기일 수 있다.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감독의 희망과 의지를 보았다.
그것은 4명의 여자와의 여정에서가 아니라, 친구와의 만남에서 기술자와의 만남에서였다.
인텔리의 절망과 한계를 감독은 친구를 통해 그렸고,
희망은 포기되지 않는 간절함이라고 극을 전개한다.
그리고 기술자를 만나 그 방법을 찾아낸다.
여기까지는 감독의 탁견이다.
단지 인텔리에 의해서 설득되어지는 기술자가 꼭 필요하다는 20세기초의 시각이 문제라면 문제다.
주인공은 여전히 기술을 갖지 못했다.
소위 '테크노라트'에 의해 주도되는 21세기의 시각이 없다.
테크노라트가 부각되지 못한 것이 나의 불만은 아니다.
나의 불만은
<오늘날의 기술자에게 아직 사회적 역사적 관점이 없다는 점과,
사회적 역사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아직 기술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감독의 한계이며 현실의 한계이다.
4. 몇가지의 생각
이제 나는 나의 생각을 이야기 해야할 때이다.
과거를 보다 잘 보기 위해,그리고 세기말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시선에 대해 몇 가지의 생각이 필요하다.
1) 이상적인 사회와 과거에 대한 회상
우리는 비참한 현실을 생각할 때 항상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이나 어머니 품 같은 고향의 향수를 끄집어내곤
한다. 때로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 때로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위안 받기 위해서.
그러나 과거에 대한 동경과 과거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은 별개의 문제이다.
주인공을 태운 택시운전사는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이미 3천년 전에 우리들의 과업을 완성했다. 이제 우리는 죽어 가는 국민이다"고.
지금 나는 그리이스의 과거와 로마의 영광에 대해 평가하고자 하는게 아니다. 단지
과거를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잣대로 인용하는 그 어떤 표현도
'관념적'이란 비판을 피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세상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휴머니즘에 의해서 주도되면서, 물질적으로도 풍족하고, 문화적으로 충만한 사회와 역사>를
경험해 본 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누릴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사회/역사적으로 한계 지워진,
그리고 또다시 자신의 수준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그리고 한계와 수준은자신들의 관심과 실천과 투쟁에 의해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씩 그 영역과 수준과 시야를 넓혀왔다.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의 '진리와 자유'를 인간은 완전하게 누려본 바도 없으며,
그런 이유로 더더욱 그것을 모두가 소망하고 있다.
즉 우리들에게 진리와 자유는 미래의 문제이지
과거의 회상과 현실에의 비교대상으로 존재하는 것은 분명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란 시제의 유효성은
우리의 현실과 사회적 관계의 본질 중 어느 것도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는 점이다.
헤겔의 말대로 '종의 발생은 계통의 발생을 반복한다'
2) 우리에게도 세기말의 시선과 세기초의 시선이 있는가?
19세기말 그리고 20세기초 자본주의는
인류의 역사를 가장 빠르고 가장 광범위하게 그리고 가장 인상적으로 변화시켰다.
사고는 자유로웠고 자신감에 넘쳐있었으며, 대부분의 과학적 개념들을 정립하였다.
정치에서 경제에서 사상에서 인간은자신들이 만든 지식의 잣대로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였고
인간이란 실체를 재해석하였다.
남은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확실성과 불확실성' 뿐이었다.
과학은 객관적 세계를 해부해 주었고, 실천은 인간의 영역을 넓혔으며,
그리고 문제가 된 것은 '가능성에 대한 판단' 이었다.
또 무엇이 남았을까? 그것은 '주관의 의지'이다.
할것인가 말것인가? 주관의 문제는 모든 것을 '선택의 문제' 로 되돌렸다.
인류발전의 성과는 이제서야 인간 개개인에게 그 성과를 나누어주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이성적이고 가장 합법칙적이며 가장 능동적인 인류발전의 성과물은,
가장 감각적이고 가장 우연적이며 가장 수동적인 방법으로 개개인에게 분배되었다.
'불균등 발전'이란 한계를 저변에 깔고서 말이다.
우리나라에서의 19세기말 20세기 초는 어떤 시기였을까?
수동적으로 강요된 신식 서양문물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우리는 모두가 새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왕실도, 개화파도, 위정척사파도, 봉건지주와 유생들도, 그리고 도시소시민과 농민들 모두가 말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세기말과 세기초 라는 인식이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확실성과 불확실성을 해석해줄 수 있는 과학이 부재했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수반한 실천이 인식 시켜주는 가능성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들은 주관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만이 남아있었다.
문학도, 음악도, 미술도, 사상도, 종교도, 소위 국가체계를 가진 한 인간들의 집단이
수천년간 만들어 오던 정신적 세계와 '문화'를 그 당시의 지배집단은 스스로 버렸다.
정치와 경제와 외교의 문제를 우리는 우리 손으로 포기했다.(분명 강요가 아니다)
정신적 세계와 물질적 기반을 우리는 왜 우리 손으로 버리고 포기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살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아직까지 내가 알고 있는 우리들의 세기말은 그런 시기였다.
우리들의 세기초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19세기말 20세기 초라는 인식도 부재했다.
애초 그런 개념이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20세기말 그리고 21세기를 맞이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두 번째 맞는 세기말이다.
그들에게 다시 맞이하는 이 시기는 매우 민감하고 신중한 시기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제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세기말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들의 세기말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3)나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이제 나의 여정도 마칠 때가 되었다.
나는 감독의 주장대로 '과거를 돌이켜 보자'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역시 감독이 과거에 담담하듯이 나도 나의 옛날에 초연하고 싶다.
그리고 그가 최초의 시선을 간절히 원했듯이 나도 우리들의 과거를 철저히 뜯어 보고싶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과거를 볼 것이며,
또 과거를 본 사람들의 목소리는 하나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결론을 역사적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여전히 나는 회의한다.
발칸반도 100년의 전쟁과 사상, 그리고 상처받는 인간들의 삶은 부정되지 않은 현실이며 아픈 체험이다.
그러나 그 기억이 인류의 1세기와 우리의 1세기를 재단하는 잣대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풀어 가야할 문제는 우리들에게도 충분한 검토의 대상이며,
우리들의 질곡을 풀어내는 열쇠일 수 있다.
또한 주인공의 절박함만큼이나 나는 우리들의 지난 100년 전에 대해 절실하게 알고싶다.
분단으로 가로막히고, 사상적으로 가위질 당하고,
그리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거세해버렸던 우리들의 진실,
우리들의 객관적인 모습들에 대해우리는 아직까지 동질한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
만약, 만약 이대로라면 우리들이 맞아야할 21세기는 절대 희망적이지 않다.
선배/부모님들이 겪은 1세기에 대해 관심의 포기는, 우리들과 현실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미래와 우리들의 후세에 대한 무책임에 다름 아니다.
나는 내가 이 영화를 완전히 정리하고 결론 내릴 <때>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필름을 찾았지만,나는 이제서야 <시간>을 찾았다.
주인공은 감동 어린 표정으로 현상된 필름을 보고 있지만,
나는 아직까지 내가 봐야할 것들을 찾아내지 못했다.
단지 나의 잡다했던 지금까지의 경험이나의 안목을 한 단계 더 높여줄 것을 기대하며 노력하려 한다.
5. 해는 바다 속으로 진다!
영화의 시작은 바다로 떠나는 배에 대한 회상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해는 바다 속으로 진다'는 말에 한동안 나의 사고는 정체되었다.
자연적인 현상에 대한 의지적인 표현은 변하지 않는 진리에 대한 강조일 수도 있다.
또한 진다라는 표현을 절망과 체념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변하지 않는 자연과 무한한 꿈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공간을 의미하게 할 수도 있다.
너무나 당연한(?) 그 말은 지금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말의 무게 때문이다.
마나키아라는 영화감독은 죽음의 바로 직전에서도 그 필름을 촬영하고 있었고, 배는 바다로 떠났다.
마나키아라는 영화감독이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그 장면을 주인공은 현상된 필름으로 볼 것이다.
그가 찾은 것이 절망과 체념을 위로해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공간들과 해석되지 않은 가치들이 많다는 것이다.
변하지 않은 세상은 역으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능성을 믿는 사람들, 그들은 이렇게 표현할 것이다.
해가 뜬다. 저기 바다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