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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드라마> 서동요...0603

 

 

 

 

 

 

060313 서동요...

 

 

 

 

1. 서동요가 끝나간다...

 

 


 

영화를 볼 때 나는 가끔 시계를 본다...

극이 긴박하게 진행될수록 곧 끝날 시간이 될 것을 짐작하기에...^^

 


서동요를 보면서 언제까지 갈 건지 궁금했다.

왕위계승까지?

선화공주와의 혼인까지?

아님 그 후 무왕의 치세까지?

오늘에서야 몇 회가 남지 않았음을 알았다.

서동요가 끝난 다음의 허전함에 전전긍긍하는 내가 더 우습지만...

 


참 대단하다...

서동요... 25글자인가?

4구절 구전노래로 1,400년 전의 과거를 꾸며 볼 수 있다니...

물론 나의 주요 관심사는 러브스토리보다는 역사적 구성이 우선이었겠지만...

 


薯童謠  

善化公主主隱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

夜矣卯乙抱遣去如 

 

 

 

<무왕릉으로 추정되는 익산 대왕릉 -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소왕릉(비)의 릉이 있다고...>

<통하는 블로그에서 빌려옴...^^>

 

 

 

 

 

2. 드라마에 대한 생각...
 

 

 

서동과 선화의 사랑이야기...

여기에는 백제와 신라의 역사가 숨겨있을 거고

신분을 뛰어넘고, 국경을 뛰어넘는 큰 사랑이 서려있을 터...

 


왕의 서자, 그것도 버려지고 잊혀졌던 사람이 탄생의 비밀을 이기고 왕이 되는 이야기...

여기에는 귀족과 왕권의 다툼이 있는 정치가 숨겨있을 거고

운명을 거역하고, 숙명의 굴레를 뛰어넘는 긴박감 넘치는 혁명적 변화가 숨겨있을 터...

 


그리고 무왕과 의자왕의 치세...

패도의 길과, 치세의 법, 그리고 군주의 덕이

정치가 되고, 사상이 되고, 나라가 되고 삶이 되었던 시대...

AD 600년, 급변하는 한반도를 살았던 인간들의 문화와 꿈이 서려있을 터...

 


작가와 연출자의 상상력에 상당한 시간을 맡기며 즐겼던 시간들...

이제 곧 끝나겠지...

 


처음 서동요를 보면서 느꼈던 한계 ; 2%가 아니라 20%가 부족했던 연기력...

그나마 줄거리와 극적 진행의 긴박함이 많이 상쇄해주었고

비교적 탄탄한 연출과 허를 찌르는 비틈이,

내게 많은 시사를 남겼다는 점에서 즐거웠다.

 


왜에서 건너온 아좌와

수나라의 사신과

고구려와의 갈등...

조금 더 큰 스케일을 기대했던 것은,

그리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단초를 기대했던 것은 나의 어리석음이겠지?

 

 

 

 

 

<아좌태자의 흔적이 남아있는 일본 나라의 동대사 - 대불전, 얼마전에는 바둑알도 공개됐지?>

 

 

 


지금까지의 서동요를 보면서 내가 바랬던 내용, 연출과 연기,

그리고 역사와 드라마의 차이, 느끼고 싶었던 내용들을 정리해 본다.

먼저 역사추적을 시작해 볼까?

 

 

 

 


 

 

3. 백제에 대한 단상...

 

 

 

나는 어떤 드라마를 좋아할까?

물론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문화비평의 영역이니 준비가 필요할 것이고

어찌됐든 나는 연출력과 소재가 주는 흥미,

그리고 내가 받을 수 있는 자극의 경중으로 선후를 구별하는 듯하다.

내가 대장금이나 해신이후 서동요에 주목했던 이유는

역사극 최초로 백제란 무대를 전면에 내세운 시대적 배경이 가장 컸다.

 


백제란 어떤 나라였을까?

정림사지 탑과 미륵사지 탑등 몇 기의 탑과, 무령왕릉 등 몇 개의 능... 이것뿐인가?

아무튼 이를 뒷받침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자의 역사로 남은 신라는 불국토의 실현이란 그 시대의 꿈을 읽을 꺼리를 남겼다.

그리고 그 주도층은 고려후대까지 그들의 이념을 한반도에 실현했다.

그에 반해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까?

 

 


22개의 담로가 있었다는 것 외에

우리는 백제인들의 정치 사회 경제적 인프라에 대해 모른다.

신라나 그리스 로마와 달리 패자의 역사 백제는 우리에 남긴 게 별로 없다.

신화도, 문물도, 정신도...

아니, 우리가 애써 외면하거나 찾지 않고 있다는 것이 진짜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신라인에 의해서든, 중국의 한족에 의해서든, 일본의 왜곡에 의해서든

문제는 우리의 무관심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면 너무 무거워진다.

수많은 사서와 설화로 백제를 재구성하기에 우리가 가진 밑천은 너무 초라하다.

단지 두가지는 짚고 갈만하다.

<삼국사기>의 최치원전과 중국의 <사고전서>...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는 강희제 옹정제 이후 건륭제때 발전의 정점에 이르게 되는데

18세기 중후반, 건륭제는 청나라의 뿌리를 찾으며 방대한 중국의 역사를 정리하게 된다.

그 결실이 1783년 완성된 <(흥정)만주원류고>란 책이다.

 

여기에 기술된 백제는 ;

광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진,

깊은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가졌던 강대한 대제국으로서

중국의 동부지역을 지배한 황제국으로 기술하고 있다.

처음 접한 분들에게는 엉뚱하지?

 

 

 

 

 

<중국의 주장 - 해상강국이었을 백제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중국의 상해근처에서 백제의 흔적을 찾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또한 한반도 출신으로 당대를 살았던 사람의 진술이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삼국사기를 통해 남아 있는데 ;

전성시대에는 강병이 100만에 이르고

남으로 월을 치고, 북으로 유, 언, 제, 노나라와 경계를 이루었던

커다란 중원국가라고 <최치원전>에 기술되어 있다.

우습게도 우리의 상식인 고구려, 신라와의 대립이 중심을 이루는 게 아니라

중국의 5호16국 시대에 나오는 나라들과의 경계가 중심이 되어 있으니...

 


사고전서 등 수많은 중국의 역사서의 기록 등에서 확인 되듯이

북위와 전쟁을 하고, 중국에서 고구려와도 전쟁을 치르고, 중국의 항주를 치고...

그리고 현재의 광서성(좡족자치구) 베트남 국경 쪽에는 지금도 백제의 지명이 남아있고

그들의 농경문물이 우리나라의 전라도나 충청도와 같았다는 확인도 있었으니

백제의 활동영역은 한반도와 일본만이 아닌 중국에도 실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내게 중요한 것은 백제의 활동영역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많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며,

우리들의 무지가 우리의 정신사적 영역을 너무 한정시키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들의 외면이 불필요한 열등감이나 우월감으로 발현되지는 않는가,

그리고 파편화된 기억과 분절된 역사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이 더 크지 않는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 - 백제인들은 품고 있었을까? 그 해맑음을...>

 

 

 

 


역사는 계승하는 자들에 의해 성취감이 점유되지만

포기하는 자들에게는 비굴함만 남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와 패배의 역사가 주는 회한과 낭비의 요소를 줄이고

미래의 가능성만큼 과거에 대한 열린 포용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4. 역사추적???

 


 

일단 시대적 배경인 백제에 대해서는 이만 줄이기로 하고

다시 드라마로 넘어가본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는 여전히 문학적 시야로 서동요를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역사적 매개체로 <서동요>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서동요가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였을까?

사실 기록이 없다...ㅎㅎㅎ

먼저 무왕의 탄생에서부터 드라마의 내용을 기준으로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추적해 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듯싶은데...


무왕의 탄생도 두 개의 설이 있으나

나는 27대 위덕왕의 왕자였다는 쪽에 한 표...

 


문제는 그다음인데

서동이 무왕이었는가의 문제와

무왕이 선화공주와 결혼하였는가의 문제...

 

 


조금씩 살펴보면...

서동, 혹은 부여장이 동성왕이었다는 설과 무왕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동성왕이나 무왕의 치세와 업적이 비슷하였는데,

먼저 웅진이나 익산으로 천도를 감행하면서 토착 귀족세력에 대항하였고,

왕권을 강화하여 후대의 무령왕이나 의자왕의 권력기반을 갖추어준 점등이 그렇고,

신라나 고구려, 중국세력에 대항하여 영토를 넓힌 점 등이 비슷하다.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백제의 활동무대 - 여기까지는 인정하는 듯...>

 

 

 

 


 

그리고 오히려 동성왕은 실제로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었던 기록이 남아있고,

무왕은 지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하였으니

선화공주가 신라인이라면 무왕보다는 동성왕에 가까울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오히려 동성왕은 혼인동맹을 통해 신라와의 안정된 관계를 기반으로

북위나 고구려 등, 중국에서의 영토전쟁으로 국력을 넓혔으나

이미 몰락기에 들어선 무왕대에서는 신라와의 전쟁으로 전선이 축소된 점이 큰 차이다.

(왜국에서 온 동성왕은 해씨세력과 갈등을 빚다가 위사좌평에 의해 중국에서 암살된다)

 


그리고 서동을 무왕으로 보기에는 28대 혜왕이나 29대 법왕과의 관계설정이

드라마의 전개와 역사적 사실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27대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의 집권시기는 3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무왕이 황제로 등극한 600년은 무왕이 20세를 갖 넘긴 젊은 나이...

게다가 법왕은 살생을 금지하고 귀족세력에 대항한 정책을 펼쳤던 인물...

그런 점에서 드라마와 역사적 흐름은 차이가 날 수밖에...

 

 

 

 

 

 

 

<촬영중 잠깐 나온 무량사 : 벌써 10년전... 백제계 탑과 전각이 어우러진 거의 유일한 절집?>


 

 

 

 

 


그리고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과연 백제의 무왕과 결혼하였을까?

사실 나는 여기에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백제의 전시기 동안 신라를 가장 많이 침공한 왕이 무왕이다...

만약 선화공주가 아내였다면 장인의 나라를 그렇게 집요하게 공격하였을까?

오히려 익산에 기반을 둔 세력 혹은 우영공주(?)와 결혼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드라마에서처럼 무왕은 황후와의 관계가 각별했고

황후와의 사이에 두명의 자제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들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되고

의자왕의 누이는 일본의 37대 천황인 제명천황이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일본은(당시의 왜국) 제명천황(사이메이 여왕)이 중심이 되어

백제부흥을 위하여 부여풍과 구원군을 파견하였으나

복신의 내분(이때 흑치상지의 직책이 달솔이었지)과 백강구 전투에서 패하고

주유성을 잃으면서 670년 일본이란 국호를 사용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일본에는 부여풍의 귀국을 환영하는 축제 “오이소” 마쯔리가 남아있다)

 


의자왕의 누이 때문에 조금 엇나갔지만 무왕의 황후에 대한 애정은 드라마와 비슷하고

해동성자로 불리웠던 의자왕 역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총명함이 지극했다하니,

아무튼 무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영웅의 면모를 갖춘 출중한 왕제였던 모양이다.



한가지 집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진평왕과 세딸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나는 진평왕이 세명의 딸을 두었다고 보는 입장인데...

 

 

 

 

 

 

<진평왕릉 : 경주가면 빼놓기 싫은 곳 - 호젓한 곳...>

 

 

 

 

 

 


천명공주와 덕만공주 중에 누가 첫째인지는 설이 분분하지만

덕만공주는 권력과 사랑에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진평왕의 뒤를 이어 선덕여왕이 되는 분이고(극에서는 한번도 나오지 않아서 섭섭했음)

천명공주는 사랑 때문에 왕위와 권력을 포기한 사람으로서

후에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의 어머니가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만약 선화공주가 있어 무왕의 부인이 되었다면

진평왕의 세딸은 그 인물만큼이나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여러 내용을 유추해보면

당시의 신라에서는 서동요와 비슷한 노래가 울려 퍼졌었는데

그 진원지와 유포자는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이었다는 설이 있다.

김서현이 진평왕 당시 만호태후의 딸 만명공주와의 혼인을 위해 만든 노래...

무강왕자의 서동요와 김유신의 탄생과 직결된 동요...

그 어떤 것도 극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되면 나는 서동요를 바라보면서

신라와의 혼인동맹에는 동성왕을...

공주와 결혼에서는 김서현의 편을 드는 셈인데...

그렇게 되면 서동요에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되는데...

아무튼 설화는 역사적 사실과 많이 혼재 되는 게 특성이니...

 

 


그리고 마지막...

무강태자, 즉 무왕은 황제 즉위 시까지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 의자왕의 나이를 역추적해보면

무왕은 즉위 시에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와야 한다...ㅎㅎ

왜냐하면 의자왕의 즉위시 나이를 역추적하면 서기 600년에 그의 나이는

5~7세 전후가 되는 것이 맞기 때문...

 

 

 

 

 

 

 

 

<내가 이렇게 변했다. 이런 사진도 스크랩하고...ㅎㅎ -서동요창에서 빌려옴

  마눌한테 욕먹을지 모르지만...^^ 우는 연기를 잘했다고 햇살이가 칭찬한 선화공주역>

 

 

 

 

 

 

5. 아쉬움을 달래며...

 

 


ㅎㅎ 역사 추적이란 이름으로 너무 많은 것을 건드렸다...

역사와 드라마...

그리고 어쩌면 내가 보고 싶었던 것들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더 많은 것들을 원했다.

백제에 대하여, 그리고 서기 600년을 전후하여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어쨌든 그건 내 욕심일뿐...

 


글을 시작하면서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 버렸다...

게으름 탓이겠지...^^

이제 벌써 드라마가 끝날 시간이 다 됐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서동요에 머무르기 어렵고...

 


여전히 아쉬운 게 많다.

대장금팀이 만든 탄탄한 플롯과 아까운 대사들...

플롯의 3요소라 할 수 있는 급전, 발견과 파토스...

드라마 자체가 비극은 아니지만, 비교적 충실하다.

단지 무강태자가 왕이 되는 구조와 선화공주와의 혼인이라는 두축이

사택기루라는 인물과 엮이는 구조는 썩 매끄럽지는 못했다는 생각...

하긴 이건 소설과 작가의 특권이니 내가 왈가불가 할 내용은 아니고...

 


놓치고 싶지 않은 메시지도 있었다.

리더쉽과 연결된 많은 메시지와 현대의 구미에 맞춘 정치적인 언사들...

어쩌면 나는 이것을 더 즐겨 들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이야기 보다...^^

 


그중 꼭 되새기고 싶은 것은 격물치지...

백제의 태학사에서 시작하는 서동요는 그 근저에 분명 담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을 듯...

어쩌면 유교의 핵심을 관통하는 이 개념은

개인의 수양과도 다르고, 진리탐구의 자세만도 아니며, 사물의 인식의 문제만도 아니다.

때문에 그 실천의 방향도 실용과도 다르고, 개혁과도 다르다.

만약 작가와 내 생각이 같다면 격물치지에 대한 많은 접근방법을 서동요는 제시했다.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의 칠지도 : 백제 근초고왕 당시에 만들어졌다 - 빌려옴>

<명문에는 백제왕세자 기(奇)가 왜왕 지(旨)에게 주었다고 쓰여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기간의 역사드라마가 현대적으로 해석된 사실의 재구성이나

신분이나 각종 직급, 그리고 복식이나 음식에 대한 복원에서

문물과 문명에 대한 재해석과 복원으로 한단계 끌어 올린 점도 평가하고 싶고...

 

 

그러나 여전히 아쉬웠던 것은 연출이 아니라 연기의 문제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절제된 대사와 탄탄한 줄거리가 더 빛을 발할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

한가지, 우리 햇살이는 선화공주의 우는 연기를 너무 잘 한다고 칭찬을 하긴 했다...^^

아무튼 즐거웠다.

서동요라는 한마디에 너무나 풍부한 시간이 복원된 느낌...

 

 

 

 

 

 



<미륵사지 : 무왕이 황후의 꿈에 나타난... 실제로 연못을 메워지었다...

  무왕당시 최대의 국책사업(?)으로 엄청난 경비와 인원이 투입되었다고 한다>

 

 

 

 

 

 

 

연모와 권력을 축으로 시대의 환경에 적응하는 인간들...

칠지도와 대향로와 백제의 정신...

그리고 절제와 기개, 희망이 주는 열려있는 사랑...

풍부한 상상력이 뒷받침된 즐거웠던 시간들...

재미있었다.

이젠 백제를 생각할 때마다 자극받을 수 있는 꺼리를 하나 더 갖게 됐다.

 

 

 

 

 

 

 

<대향로 : 사상적 정치적 문화적 완결체로까지 극상시키면 비약일까? - 인터넷에서 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