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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답사여행...

여행> 경주답사여행에 대하여...9601

* 경주여행 답사기를 정리하면서 오래된 글을 찾아 보았다.

   96년에 쓴 여행기...

 

   답사기를 정리해야 하는데 할말만큼 충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시볼수록 부족함을 많이 느낀다...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고치고 싶지 않은 글을 욕심내기도 하지만

   또한편 지난 세월의 부족함을 생각할 수 있어 안심을 하기도 한다...

 

   그때도 참 말이 많았는지 글이 생각보다 길다...

   마지막 맺음말도 만만치가 않고...ㅎㅎ

   석굴암, 불국사, 감은사지... 길어진 것도 있고 짧아진 것도 많다... 

   하지만 그런 감상들이 있어 중복을 피해가고 깊이도 생기고 새로운 시각도 생기지 않았을까...

 

   7년을 비교해보면서 96년도의 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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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경주여행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 <경주>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갔다 와서 책을 보면 경주는 꽤 자부심이 있다고 보여 진다.

특히 가장 동쪽의 도시, 한반도에 해가 처음 비추는 곳이란 자부심이 강하다.

그런 표현을 많이 보았다.

 

<왜 나는 감포에 펼쳐진 푸르고 깊고 깊은 동해가 아닌, 이렇게 좁고 답답한 동해바다를 찍었을까? 

모래사장에 갖힌 동해바다를...>


 

그러나 경주TV에서 신라민속촌 건설계획을 잠깐 들었지만,

내 생각에 경주와 신라는 얼른 연결이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新羅의 遺蹟들은 생각나지만 慶州의 雰圍氣는 모르겠다>

낱낱의 유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도 못하고

- 관광지의 상업성에서도, 문화적 답사의 유기적 관계에서도 -

그 ‘총합미’를 간파해내기도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경주에서의 말처럼 하나의 국가가 1,000년을 수도를 바꾸지 않고

한곳에서 서막을 맞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역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경주란 지역’의 탁월함으로 주장하여도 달리 항변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지역을 넘어선 종교적, 정치(경제)적,

군사(사회)적인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분명 문화적 유산과 유물들로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때문에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십대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었고,

95년도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적으로 지정된 충분한 근거들을 가지고 있다.

 

<불국사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신라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아쉽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봐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차라리 화려한 경주란 주제로 모든 것의 화려함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키든지,

신라의 서울이었다면 서울로서의 위용과 권위를 갖추든지,

내 생각에는 경주를 관통하는 <核心主題>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하나, 경주를 살아있는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그 많은 절과 탑과 불상들을 만들었다는 것만 남아있고,

우리는 수고스럽게도 여기저기를 다니며 아는 만큼만 느껴야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도

여전히 ‘이곳이 불국토’라는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다.

 

<배리삼존불 ; 신라에는 많은 미소가 있다. 막새, 삼화령 애기부처... 화강암이 만든 생기다...>


더우기 신라의 문화에 대해 나는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 백제의 온유한 숨결은 있는데

신라의 무엇은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신라의 그 무엇이, 경주의 그 무엇으로 재현되어야 하는데

<그 實體가 무엇이어야 하는가?>가 먼저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慶州遺蹟의 總合美가 新羅의 總體性으로 발현되어야

遺蹟들은 生命力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주제와 생명력이 설득력을 가질 때

경주시내의 지금 지어지는 건축도, 지금 만들어지는 도로도,

지금 구상되는 도시계획도, 식당에서 나오는 반찬하나에도

우리는 통일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골속 골속 경주에 지천으로 깔린 무덤과 절과 나무... 그들을 묶어 나는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통일이란 개념’에는 흡입력이 있고,

포용력이 있고, 그리고 진보를 향한 강한 추진력을 담고 있다.

<경주는 이 신라의 낱낱의 유적들을 統一해내야 한다>.

신라의 수도 옛 경주를 완전히 복원해내든지

신라민속촌을 규모 있게 만들든지 무엇인가 대책을 만들 때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시대의 우리들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만큼,

이익이 되는 만큼만 투자하겠지만 일단은 방향을 올바로 잡고 시작할 일이다.

일제 때와 같이, 박정희 시대 같이

문명의 기술을 선전하기 위해, 정치적 필요와 성과를 위주로 한 복원과 땜질을 진행했던

(석굴사원에 콘크리트를 덮어놓고, 목조전실로 가둬버리는 )

그런 우매한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석굴암의 십일면 관음보살상 ; 탁본을 보면서 숨이 탁하고 막혔던 긴장감...잊을 수 없던 충격...>

<신라인들이 만들고자 했던 이상과, 신라인들이 만든 현실에는 어떤 괴리가 있었을까?>

 

언젠가는 다시 뜯어야할 석굴사원을 생각하면서,

경주시내의 문화재정책은 다시 뜯기지 않고,

대신에 후대에서 <조금 조금씩 더해갈 수> 있는 그런 방향이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화강암의 나라, 돌을 무우 다루듯 자유자재로 다루었다는 신라인들,

한국인의 끈기와 오랜 저력을 담고 있는 수많은 돌에 관계된 유적들을 생각하면서

일단은 소재에서 <화강암 = 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불상도 돌이고, 탑도 돌이고, 안압지도 돌이고, 첨성대도 돌이고, 포석정도 돌문화이고,

하다못해 왕릉도 태반이 돌로 채워진 유적들 아닌가 !


그리고 시간의 흐름이 주는 연속성을 부각시켜,

유적답사의 <연대별 코스 안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기에 당시의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흐름을 보다 풍부하게 해석할 수 있는

친절한 자료와 안내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것은 사진 몇 장의 책자와 유적 앞의 철판에 새겨진 글씨가 아니라,

영상과 모형 등을 동원한 입체적인 안내기기가 필요 하다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계림과 반월성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한다... 야트막한 나무와 언덕이 만든 무궁한 전설을...>


계림과 오릉에서부터 포석정과 안압지까지

우리가 유적을 답사하는 동안 우리는 신라의 흥망을 알게 될 것이고,

삼국시대의 우리역사를 충분히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해본다.

역사공부가 유적과 함께 문명과 함께 한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풍부할 수 있을까 ?


시작과 근본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종교와 철학은 우리의 감상과 겉돌게 될 것이다.

즉 종교와 철학은 그만큼 쉬우면서도

해석의 잣대와 도구 없이는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여기에 <과학성과 전설>이 들어간다면 거기에는 생명을 가질 수 있다.

 

<죽은 이들이 만든 1000년의 세월과 문화와 꿈... 우리는 역사여행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만난다...>

<죽어서도 생명력을 갖춘 복된 흔적을 우리는 뒤쫓고 바라보고 생각한다...살아있는 우리를...>

 

 

종교와 철학의 보편연속성은

과학과 전설이라는 구체적 분석으로 인해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된다고 생각된다. 

이미 분석되고 연구되어온 석굴사원외에도 많은 유적들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설화에 대한 끈기 있는 관심은 우리의 유물들과 유적들을

보다 진지하고 깊이 있게 연구하게 되는 충분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우리는 항상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의미 있는 시간과 가치 있는 공간을 만들려면 항상 아름다운 경험을 필요로 한다.

문화미의 풍부함과 자연미의 감동에 ‘예술적 깊이’를 알 수 있게 된다면,

그 지성은 참으로 너그럽고 복된 풍요로운 삶을 것이라고 믿어본다.


<석굴암 본존불을 보면서 썼던 96년 답사기 중에서 일부를 옮겨 본다  ;

... ...정말 대상에 대한 사랑과 감정없이 관념과 활자만으로 예술을 이해하고

그 아름다움에 감동받고 그 축복을 나눠갖기란 어려운 모양이다... ...

석굴사원은 내가 김대성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깊은 내용과 맛을 절대로 알 수 없을 거라는... ...

불교에 대한 이해와 관찰에서도,

돌을 다루는 석공의 정과 망치소리가 담긴 예술혼의 가늠에서도,

역사에 대한 의식과 경험에 대한 성찰에서도 김대성 만큼의

아니 그보다 한수위의 관점과 투자없이는 나는 지금의 꼭 이만큼만을 느끼는데 만족해야 한다...

인간의 손이 닿은 모든 조형물들을 바라보는 관점,

그것은 내가 그 조형물을 만든 창조자가 되어서야 제대로 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경주에는 소중한 자원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울러 ‘나도 본 기억이 있다’는 말보다

‘나는 이렇게 느꼈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했느냐’하는

대화가 가능할 수 있는 진지한 설명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본다.


세계적 유물이면 세계적 유물들과 비교하여,

동양적이면 동양적인 면에서,

한국적이면 한국적인 면에서,

지방의 지역문화재면 또 그런 면에서

등급이라면 등급이라도 나누어서

다양한 비교와 함께 절대적 기준들을 제시한다면

그 유물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있을까 ?

 

<시스틴 성당 ; 나는 두번 놀랬다... 한번은 무엇을 보고 감동해야 하는지 몰라서 당황했고,

무수히 많은 유럽인들이 누워서 앉아서 혹은 서서 그림에 취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놀랬다...

책을 사고... 그림을 보고... 구약을 읽고, 문화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그들을 조금은 이해한다...>

 

 

시스틴 성당의 천지창조란 천장벽화가 무엇 때문에 위대한지,

일본에 있는 반가사유상이 지구가 멸망할 때 제일 먼저 피신시켜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왜 석굴암의 본존불이 지구에 살고 있는, 소위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물중 하나라고

주장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을까 ?

 

 

<광륭사 반가사유상 ; 그 득의의 미소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사진으로나마...ㅠㅠ>

<법륭사의 백제관음상 ; 혼자 갔다면 그냥 그자리에 서있었을 것이다... 너무나 행복했던 시간...>

 

 

그래도 세계의 3대 유물 중 두개는 우리민족의 손으로 만든 것 아닌가 ?! (^^)

우리의 예술적 깊이를 보다 심화시켜도 충분한 싹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 않는가 ?! 

 

<박물관에 갈때마다 비교해본다... 조금은 들뜨고 조금은 여린... 조금은 엷은 미소를...>



그리고 <관광의 방법>도 많이 개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호회 같은 모임들이 보다 활성화되고 여가를 이용한 학습도 다양해져야 하지만,

경주 같은 규모의 유적과 유물들이 있다면

자체적인 관광버스라도 만들어서 안내인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개개인의 노력과 수준에 여행을 맡길 것이 아니라,

공공의 성격을 가지고

보다 대중적으로 답사를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소나무 숲사이 건물이 있고, 유적이 있고, 이야기가 있다... 꼭 이만큼이 경주의 모습일까?>



신라의 문화를 평가하는 유홍준씨의 표현을 빌린다면,

‘하나하나의 종교적 조형물에 상반된 미감을 결합하여 이룩해낸 복합미’를

신라인은 가졌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내식으로 말한다면

‘변증법적 대립과 통일이 논리적 역동성으로 운동과 창조로 발현되었다’는 말이다.

상승과 안정, 장중함과 맑음, 정중함과 유려함 등

그 아름다움이 주는 감동은 참 깊은 맛이다.

 

<조금은 답답하고 조금은 안타까운 장항사지... 찾는 걸음이 힘들지 않은 이유는 美가 있기 때문?>


나는 소불선생이 말했던 경주의 세 개의 유물 중

진평왕릉만 보았을 뿐, 장항사 절터는 보지도 못했고,

에밀레종소리는 테이프로만 들었다.

그렇지만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라는 말과

‘명랑성과 생동성의 통일’

그리고 ‘감성과 지성이 양식적인 것에서 조화되어 있다’는 표현의 맛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혼이 담긴 인공미의 천년을 뛰어넘은 언어를 조금 들은 것 같다.

그것은 내게 즐거움이요 기쁨이다.  

 

<진평왕릉 ; 이야기가 있고 물음이 있으면, 죽은이가 살아나고 공간에는 향기가 시간에는 깊이가...>


 

그러나 경주에 쌓여 있다는 신라의 천년 무게도 나는 느끼지 못했고,

신라인들의 활기찬 모습을 경주의 어디에서도 읽어내지 못했다.

그것이 설사 ‘나무’만 바라보고 온 나의 지적, 경험적, 시간적인 한계일지는 모르겠지만,

‘숲’을 안내하지 못하는 공공의 그리고 사회의 책임방기를 나는 절실하게 느끼고,

또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감동은 보다 깊고 알차게 익을 것 같다.


                                                               199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