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태종무열왕릉
모처럼 색시와 햇살이를 위해 부담스러운(?) 식사를 하고,
이제 헤어진다.
벌써 경주에 머문지 5일이지만, 혼자 더 머물기로 한다.
무슨 욕심인지는 모르지만 또 한번 가족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영동고속도로 옛길... 대관령 휴게소에 올라가면 준공기념비가 서있다.
대관령 준령을 바라보고 서있는 귀부와 이수...
그 원형이 태종무열왕 귀부와 이수다.
<태종무열왕릉의 귀부와 이수... 볼수록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차용을 좋아한다?
경복궁내 민속박물관도 불국사의 석축과 계단, 법주사의 팔상전, 화엄사의 각황전,
그리고 금산사의 미륵전을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잔머리 쓸것도 없이 옛것을 그대로 본따서 만든다.
역으로 과거를 포괄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현재의 이야기가 없다.
이건 모방도 아니다.
사실 이 비석이 국보가 된 것은 미적 가치가 있고
정교한 조각들이 살아있다는 점도 있지만
최초의 당나라식 귀부가 신라에 정착되었고,
앞으로 만들어질 수많은 귀부와 이수의 원형이 되었다는
사료적 가치가 우선 평가되었을 것이다.
<경주박물관에 있는 쌍귀부... 변형의 가벼움을 애교와 신선한 자극으로...>
<고달사지 원종대사 부도비... 강렬하고 힘찬 기세의 귀부... 당당하다...>
<흥경사 비갈... 불끈하고 고개 젖히는 그 역동성이 힘차다... 정말 좋지...>
<선암사에서... 두툼한 목에 당당하고 단호한 표정의 얼굴을 보라... 다리를 보면 힘이 빠지지만...^^>
<거돈사의 귀부도 빠지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답습과 모방이 아닌 변화와 발전이다...>
<법천사지 사진이 빠지면 안되는데, 슬라이드로 찍은 필름밖에 없어서... 자료는 풍부하니...^^>
그러나 우리네 선조들은 단순한 모방과 답습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애교스럽게 변형된 경주박물관의 쌍귀부도 있고,
흥경사 비갈에서는 당당하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미적가치를 한차원 끌어 올렸고,
정교함과 생동감뿐만이 아니라 가장 화려하다고 평가받는 법천사지 현묘탑비에서는
종교와 사상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우리들이 만들어 가는 지금의 시기에도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대관령의 기념비는 그렇지 못한 우리들이 한계를 극명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단순한 형태이지만 세련된 당초문, 보상화문...
머리에 비해 힘차게 뻗은 발톱이 1천4백여년을 버텨온 힘일까?
바로 얼마전 만들어진 것 같이 깨끗하고 단정한 귀부와 이수...
이빨을 앙당문 것같이 꼭다문 거북의 입술이
떠나는 마음을 무겁게 잡는다.
28. 두대리 마애불에서 단석산을 바라보며...
선도산, 단석산... 산에 오르는 길은 이미 포기했다.
낯익은 모습의 두대리의 마애불상 본존불...
신성화되고 중성화되지 않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표정의 얼굴이다.
근엄과 장엄, 권위와 위엄을 모두 접어버린 굳은 표정의 본존불...
마애불에서 북쪽으로는 태종무열왕릉, 김유신묘, 선도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이 있다.
어쩌면 신라 화랑도의 흔적과 이야기들이 그대로 살아있는 유적들이다.
두대리 마애불에서 단석산쪽을 바라본다...
골속 골속, 어느 한곳도 가만 놔두지 않은 신라인들의 집념은 무엇이었을까?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흥무왕 김유신이 만들고자 한 신라는 무엇이었을까?
선덕여왕의 눈에 띄기위해 일부러 자기집에 불을 놓은 김유신의 야망...
고구려에 첩자로 잡힐만큼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김춘추...
30여년후 이두 영웅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다이나믹했던 삼국전쟁(?)
그러나 어떤 종교적 대립이나 정치적 사상의 대립도 아니었고
문명의 충돌도 아니었다.
단지 신라는 이제서야 잠에 깨어나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 가는 시기였고
결국 선덕여왕에서부터 시작한 왕권강화는 태종무열왕대의 통일전쟁으로 완성된다.
수나라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대륙의 정세변화에
고구려는 내적 동력을 잃어버리고 군사력만으로 국제정세에 강경하게 대처했고,
백제는 노후화된 담로(식민지 경영)의 네트워크를 경제력으로 돌파하려했지만
신라는 새롭게 정비된 왕권을 중심으로 유연하게 국제정세를 활용하여
신선한(화랑도 등) 문화적 역량을 정치적으로 완성하는 비젼을 가졌다.
미래가 보장된 문화적 힘으로 경주와 신라의 골속 골속을
하나의 신념과 통치이념으로 통일해 갔을까?
당시의 종교와 통치와 정치는 바로 삶이었을테니까...
만약 지금의 유적들이 모든 민초에게 개방된,
모두에게 바쳐진 노블레스 오블리제였다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은 하나의 문화적 자산을 공유 했을거고
의상과 원효의 사상 모두가 신라인들을 하나로 결속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신라인의 문화적 안목은 높다.
한곳의 작은 유적을 보고 내가 침소봉대 하는지 몰라도
경주 전역에 뿌리내린 하나의 사상과 수준 높게 통일된 문화적 역량을 보면서
당시 신라민중 민초들의 공역이 힘겹지만은 않았으리라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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