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경주 국립박물관
지금은 유스호스텔이 돼버린 청산장에 며칠째 투숙하고 있다.
햇살아 차렷해봐!
아빠를 엄마로까지 부르는 햇살이에게 너무 정직한 요구다.
삼화령 애기부처의 신체비례를 확인해보고자 했는데...
<이글 쓰기 한참 전이지만... 그 미소와 신체비례는 역시 이때가 더 좋았던 듯...^^>
미륵삼존불(애기부처)은 조각실에 있다.
그전에 연못이 있던 자리에 미술관-조각실로 새건물이 들어선 것 같다.
야외에서 뒹굴던 유물들을 더 좋은 환경에서 접해서인지
하나 하나가 더 가치있고 좋게 보인다.
<이전 답사기에서는 신라를 대표하는 세개의 미소에 대해 쓴적이 있는데... 그 첫째는 역시...>
이전 답사기에서도 말했지만 정말 애기부처의 미소는 환상적(?)이다.
돌에 살아있는 숨결을 불어넣은 듯한 잔잔하고 귀여우면서도
득의의 미소는 너무 사랑스럽다.
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관람...
본존상의 엉거주춤한 앉아 있는 모습은 왜 낯설게 보일까?
좌우 협시보살의 해맑은 웃음이 본존불의 권위를 거세해 버렸다!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과 이차돈 순교비를 보고...
또 고선사탑 옆에 새로 보수된 늘씬한 비례의 석등도 보고...
고선사탑 사진을 찍을 때마다의 불만 ; 주변 전봇대는 정리하는게...
<박물관 엽서를 스캔했음... >
<금강역사의 단호함과, 치미의 크기만으로도 충분히 신라를 상상하고 그려볼 수 있다...>
25. 에밀레종
포뢰는 경어가 있어야 제 소리를 내나?
에밀레종엔 경어가 있었나?
답사여행의 전리품(?)중 하나는 탁본이다.
성덕대왕 신종 비천상도 그중 하나다.
문제는 생각보다 크다는 점...
축소된 사진 등에서 느끼는 우아함이 크기로 인해 많이 퍼지는 느낌이다.
(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 탁본도 마찬가지... 너무 크다)
<99년경 사진인데... 역시 사진의 반은 햇빛... 그래도 종은 역시 소리를 들어야...>
인도의 불교와 중국의 신선이
도교적 선녀로 변한게 비천상인가?
석조각으로는 신륵사 보제존자 석등의 비천상과
고달사지 부도 옥개석이 기억나고,
종에 있는 비천상으로는 에밀레종과 상원사, 그리고 용주사가 유명하다.
<고달사지 부도의 옥개석 밑면에 있는 비천상... 모두들 찍고 모두들 탁본하고...>
3개의 비천상은 화성 용주사 범종이 제일이다?
표대의 역동성이 참 활기찬 모습이다.
<이글을 썼던때는 왜 용주사 비천상을 3개로 생각했는지... 하나인데...ㅎㅎ>
<천천히 뜯어보면 표대가 차분한것 같으면서도 끝처리를 보면 정말 무릎을 탁 치게된다...>
<최근에 복원한 범종에는 쌍비천상이 있는데 단순하면서도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다...>
2개짜리(?)는 역시 상원사 범종이 제일이다? (실상사 비천상은 못봤고...)
자연스럽게 나부끼는 천의자락의 유려함... 조금 어지럽다.
<상원사 동종 비천상 표대는 하나 하나가 정성스럽고 부드러운 선을 가지고 있다... 빌려옴>
<실상사 범종은 거의 파손이 되었고,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실상사 범종의 비천상... 성덕대왕신종, 용주사,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과 확연히 구분 된다... 현재 실상사에 복원된 범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슴...^^>
하나의 공양비천상으로 이 모두를 압도하는 건 역시 에밀레종 비천상이다.
우아함과 세련된 회화적 구성으로 참 멋지게 자리하고 있다.
종소리 테이프가 지금도 차에 있나?
<그래도 역시 에밀레종의 비천상은 모든 면에서 표준이고 아름다움의 기준이다...>
<이 비천상 탁본을 표구하려했더니 생각보다 너무나 크다... 정말 크다...^^>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한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 이것도 추가한다...100830>
26. 신라역사과학관
다량의 유물을 역사적으로 압축해 놓은 박물관...
아마 공간적 밀도로 박물관을 따라갈 답사처는 없을 것이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는 최선의 최고의 답사처가 박물관이겠지만
그러나? 역시 박물관은 명작들의 무덤이다.
다보탑 모형보다 대우를 못받는(?) 고선사탑이 극명하게 이를 증명하나?
<박물관 마당의 다보탑과 석가탑, 그리고 멀리 보이는 고선사탑...>
<아무리 다보탑, 석가탑의 보존을 염두에 두면서 동일 스케일로 만들었다지만
차라리 그 자리에 고선사탑 하나만 배치했어도 그 무게와 깊이가 다르지 않았을까?>
어느 한곳 유적지 아닌 곳이 없는 경주...
어느 하나 이야기와 역사적 향기가 베어 있지 않은 유물이 없다.
그러나 박물관에는 문자화된 유적만이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하면 신라역사과학관은 또다른 맛이 있는 관람처다.
석굴암으로 인연을 맺은 역사과학관은
이제 판매용 물건들이 즐비하던 2층까지 전시실로 바뀌었다.
석굴암외에도 천문도, 왕경도, 경판과 인쇄기술, 종,
그리고 세종대왕 시기의 과학문화재까지 다양한 주제도 갖추었고...
<역사과학관에 대한 사진이 없다... 중복되는 사진이지만 이곳에서 구입했던 탁본...>
<보고 또 봐도 환상적인 손놀림이... 참 좋다... 범석과 제석천의 탁본을 구해야 하는데...ㅠㅠ>
갑자기 햇살이가 3000원짜리 선물을 한다.
그러고선 15만원짜리 물건을 사달라고 조른다.
역시 햇살이는 고단수다.
또 사?
축소형 탁본을 몇 개 사는 사이 색시의 일갈...
집에도 대형 탁본이 표구액자로 걸려 있는 데...
아직도 제석천과 범천의 탁본은 없다.
다 떨어졌는데요? 몇 년전과 똑같은 대답을 판매원에게서 듣는다.
그래도 여전히 고마운 과학관이다.
<신라역사과학관에 처음 가본것이 10여년 전... 그당시부터 왕경도 제작을 의욕적으로 추진했었다>
신라 왕경의 인구수는?
17만 8천호 * 4인 = 최소 70만명?
1910년 한반도의 인구 1,330만명, 1670년 조선의 인구 470만명... 그리고 2000년 7,000만명
물론 이를 산술적으로 역계산하면 800년경엔 턱없는 수치(마이너스...)가 나온다.
중국 삼국지의 배경이된 시대가 200년 전후였지?
위나라의 조조가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약 25만에서 최대 40만명이었다.
위, 오, 촉의 세나라 인구를 모두 더해도 150만 전후(?)
물론 몇백년 후라고 상정하더라도 경주의 인구 70만명은 너무 많지?
<일부에서는 8세기 세계의 중심으로 콘스탄티노플,바그다드,장안, 그리고 서라벌을 꼽는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규모와 인구로 인류사 발전에 무엇을 기여했는가?
그리고 어떤 영향력을 갖췄는가에 있다. 그랬었다~~~로 끝나는 상상은 항상 허무하다...>
인구증가율나 모든 자연법칙엔 항상 변수와 우연, 그리고 비약이란게 있다.
문제는 정확한 수치가 기록된 사서가 유일한(물론 이도 몇백년 지난 추정이지만) 단서...
나는? 호를 집으로 보는게 아니라, 입으로 보는 것...
그래서 당시 경주의 인구를 신라역사과학관의 추론처럼 17만 8천명으로 본다.
여전히 적지 않은 수다.
2000년 경주시 전체를 통털어 9만 7천세대, 29만명,
시내인구만 본다면 16만명 정도가 현재인구인걸 비교한다면...
아무튼 경주는 왕경도나 땅속에 있는게 아니라, 남산아래 있다.
'경주 답사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경주답사0301 - 23 기림사, 29보문사(당간지주에 대해) (0) | 2006.07.10 |
---|---|
여행>경주0301 - 27. 태종무열왕 귀부와 이수 28. 두대리에서 (0) | 2006.07.06 |
여행>경주답사0301 - 30. 첨성대 31. 분황사 32. 능지탑 (0) | 2006.06.30 |
여행>경주답사0301 - 36.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0) | 2006.06.24 |
여행>경주답사0301 - 33. 선덕여왕... 35. 낭산... (0) | 2006.06.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