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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답사여행...

여행>경주답사0301 - 33. 선덕여왕... 35. 낭산...

 

33. 선덕여왕릉

 

이 조그마한 낭산을 몇바퀴나 돌았을까?

사천왕사터가 도솔천궁 아래고, 그 위는 도리천...

부처님이 사는 수미산 꼭대기에 선덕여왕이 있다.

그럼 선덕여왕은 부처와 동격?

이만하면 여왕의 배포를 알만하다...

80m가 넘는 황룡사 구층탑, 30만근이 넘는 분황사 약사여래상...

성조황고... 호답게 그녀의 스케일은 신라가 너무 좁았다?!

 

<해가 너무 기울었다... 그러나 그래서 더 아름다운 빛을 보았는지 모른다...>


짙은 석양빛이 주홍빛 수를 놓은 듯, 왕릉이 조심스레 놓여있고,

주위는 온통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겹겹이 호위하고 있다.

햇빛에도 색이 있다?


아침과 석양의 해는 빨간색,

구름과 희롱할 때는 노란색,

중천에 뜬 해는 하얀색...

해의 색깔은 변한다.

적색 - 황색 - 백색 - 청색이 별의 밝기라고 하는데

그 색온도의 순서대로 해의 색깔은 변한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나 아름답고 따사로운 주홍빛 햇빛을 왕릉이 받고 있다.

 

<경주와 남산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다... 낭산의 소나무는? 높이와 크기때문일까?...>


왜 이렇게 이곳이 오고 싶었을까?

여왕이라는 호기심?

아니면 몇 차례의 불발된 시도가 아까워?

그도 아니면 신라역사과학관에서 본 여왕의 자태에 운우지정이라도 느낄까봐?...

모두가 맞는 말이기도 하고, 모두가 아니올시다 일수도 있다.

 

남자들이 많았나?

하긴 고려의 왕건이나 세종도 30명 가까운 빈이 있었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왜냐하면 호족이나 지방세력의 견제를 위해 왕실의 결혼이란 정략을 벗어나지 않으니까...

여자라고 그게 책이 될건 아닌 것 같고...

그러나 김춘추에게 문희를 책임지게 한

너그러우면서도 호방한 성격의 그녀가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았을 듯 싶은데?

그리고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를 때 그는 이미 40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문화콘텐츠진흥원의 캐릭터 - 얼굴 한가운데 sign을 해야 속이 편했을까?>

<야 이 옷 혹은 물건 좋더라 ;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언동인가요? 출처가 있고 상업적 이용이

  아니라면 자료는 공유되는게... 인터넷과 자료는 공유될 수록 가치가 있지 않나요?>

 


여자가 왕이 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선덕여왕 16년 비담과 염종의 난으로 선덕여왕은 재위를 마감한다.

백제의 무왕과 의자왕 15년까지 백제는 마지막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무왕시기의 미륵사지가 백제의 마지막 최대의 국가적 사업이 되고

재정압박을 초래했다는 일설이 있다?

선덕여왕도 무수한 국가사업을 진행한다.

첨성대, 분황사, 황룡사 등등등...

 

<황룡사의 복원 모형도 ; 선덕왕의 국책사업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이 있었겠지?>

 

 

기실 이런 국가적 사업에는 엄청난 재정적 소요가 있었을 것이고

또한 민초들의 삶에도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고...

게다가 선덕여왕 때는 선대 100여년의 중앙집권적 왕권확립을 위한

완성단계에 다다른 시기이기도 하다.

당연히 비담과 염종 등은 왕권견제를 위해 민초들의 불만에 편승하였을 것이고

단지, 명분은 여자왕의 음탕과 가벼움을 명분으로 바꿨을 공산이 크다.


결국 이 난이 제압되고 신라는 명실상부한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제를

김춘추와 김유신 등에 의해 완성한다.

의자왕 초기에서야 강력한 왕권을 회복한 백제와 다른점이 있다면

결집된 에너지로 통일전쟁의 기틀을 신라가 마련했다면

의자왕은 그의 전반기 치세에도 불구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정신적 공황을 맞는다는 것...

의자왕의 태생적 한계였을까?

노쇠한 제국과 새로 떠오르는 국가의 차이일까?

아니면 죽은 선덕여왕과 살아남은 의자왕... 존재유무가 근본적 차이일까?

 

<두개의 기마상이 생각난다... 부여에 있는 계백과 경주에 있는 김유신장군의 기마상...>

<백제와 신라, 그리고 선덕여왕과 의자왕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된다...>

  

 

34. 능을 돌며...

 

선덕여왕을 전후한 시기, 신라가 급성장한 내적동력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4세기 이후 급속히 파급된 철기문화...

농업생산성은 급속히 향상되고, 씨족-호족 중심의 기존 공동체는 급속히 해체된다.

철기는 수공업의 발전을 야기하고, 결국 상업자본도 태동되었을 것이다.

 

해체되는 공동체와 이완된 통치체계의 정비를 위해 6세기초 유교는 통치이념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이제서야 신라라는 국호를 갖게된다.

율령이 제정되고, 국가개념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에게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게 되고...

그 공백을 채우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상은 유교와 멋지게 융화된다.

이차돈의 순교는 왕실과 민초 모두에게 필요한 설화로 남게 되고...

 

<이차돈 순교 ; 목은 금강산으로 날아가고, 흰젖이 공중으로 치솟고, 하얀 꽃들이 하늘에서...>


늘어나는 지배계층과 교육된 엘리트들의 새로운 대립...

성장과 발전의 공과는 항상 지배층 내부의 대립과 경쟁속에서 보다 나은 대안을 찾게된다.

국가구성원 전체를 포괄하는 보다 큰 그림의 체제정비가 필요해지고

미래를 담을 수 있는 보다 큰 그릇의 체제이념을 필요로 하게 된다.

유교의 수직적 체계와 불교의 수평적 공감대는 그렇게 신라에 정착되고...

그 정점에 진평왕의 딸 선덕여왕이 위치한다.

 

<진평왕 ; 세딸이 있었고, 선화공주는 진짜 무왕에게 시집을?^^ 내 의견은 서동요에...>


비젼을 가진 국가는 교육을 선택한다. 엘리트 교육...

유교적 목적과 불교적 심성을 가진 청년들의 단련은 100여년이 지나

영웅을 탄생시킨다. 화랑도, 그리고 김유신과 김춘추...

비젼을 가진 국가는 생산성 향상을 장려한다. 과학의 발전...

농업에 가장 필요한 기후의 변화정보를 장악하려는 국가의 장치(?)

남천과 북천사이의 치수공사와 첨성대의 건립...


비젼을 가진 국가는 시간을 통일한다.

국사편찬은 과거를 통제하고,

내세가 없는 유교를 대신한 불교는 미래와 극락을 보장한다.

그리고 시계를 만든다... 현재의 시간...

종소리는 마음만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민초들에게 시간을 알려주었다.

 

<첨성대와 물시계와 종... 모두 시간을 만들기 위한 도구들이 아닐까?>

<시간이 있어 자연은 환경이 되고, 인간은 과거와 미래를 갖게 되고, 공간은 문명이 된다...>

 

 

비젼을 가진 국가는 일정부분 신념을 강제한다.

분황사와 황룡사의 대대적인 창건으로 신라의 불교는 호국불교로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러한 업적은 성숙된 문화 창달로 연결되었다.

이제 남은 건 대외관계에서의 군사력과 외교력인가?

이 몫은 선덕여왕이 숙제로 남긴거고...

 


<선덕왕릉 ; 물론 전해지는 명칭이지만 그 명성에 비해 너무 소홀한 것은 아닌지...>

 

 

선덕여왕 당시의 대표적인 인물은?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선 정암사 골짜기에 몸을 던진 자장율사...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적극 도입하여 왕실을 변화시켰지만 역시 완성의 개념이 없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을까?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하고 선덕여왕도 재위를 마감한다.

그러나 완성이 아니었을 뿐,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인물들이 미래를 준비하며 바톤을 이어받는다.

기실 이시기만큼 걸출한 영웅호걸들이 충만한 적도 없는 듯싶다.

 

 

<김춘추와 김유신 ; 선덕여왕이 남긴 신라의 과제를 해결한다... 외교와 군사력...>

 

 

이미 30대가 넘은 김유신과 김춘추...

뛰어난 인물됨으로 일본에까지 기록을 남긴 김춘추

천하를 호령할 기세와 기회를 자기것으로 만들줄 알았던 김유신,

그들의 뒤는 당시에 한참 성장하던 의상과 원효가 맡는다.

말달리고 칼을 갈던 원효는 15세 전후의 청소년 화랑,

승복으로 갈아있고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는 비슷한 나이의 의상...

 

  

<의상대사와 원효... 이 두사람을 빼놓으면 한반도의 어떠한 사상과 유적도 이름값을 못한다...>


 

김춘추와 김유신, 의상과 원효...

기막힌 대비다...

너무나 완벽한 조화...

혼란기의 와중에 무의 힘으로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고

그 뒤 문의 힘으로 아픔을 치유하고 도약을 기약했으니...

시대가 그들을 만들었는지, 그들이 시대를 주도했는지 몰라도,

이처럼 다이나믹한 구조가 있을까?

 

 


35. 낭산을 내려오며...

 

100여년 전쯤, 선덕여왕릉이 자리잡은 낭산에서는 경주가 다 보였을 것이다.

지금의 소나무는 몇십년 수령에 불과할 뿐이니...

뒤로는 아버지 진평왕릉이 있고

강건너 왕경이 자리를 잡고 있었겠지? 황룡사도 분황사도...

그리고 남산도 보이고...

 

<진평왕릉 ; 10년전 사진이지만... 주변 진입로에 있는 나무들이 그림처럼...>


답사여행의 진짜 맛은 이런건지도 모른다.

1,300여년전의 사람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꿈을 꿀 수 있다는 것...

 

<진평왕릉과 선덕여왕릉... 그리고 남산과 낭산... 경주벌판은 무엇을 간직하고 있나...>


어둠이 깔려가는 왕릉을 돌고 돌며 생각한다.

가깝게 멀리... 능도 보고 소나무 너머도 훔쳐보고...

나도 최인호 흉내를 내나?

그러나 역사추리를 하려는 건 절대 아니다...

선덕여왕... 그가 있어서 김춘추도 김유신도, 원효도, 의상도 있었다!

 

 


이제 경주를 다 봤는가?

신라를 봤을까?

애꿎은 물음...

역사과학관에 있던 여왕의 초상을 상기한다.

과연 그 크기를 나는 가늠할 수 있을까?

경주에서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