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글이다...
2001년 김대중 정부 시절이고 IMF 구제금융을 탈피하던 시점이다...
한국경제에 대한 메모가 있어 올려 놓는다...
현재적 의의가 강조되는 것이 인터넷이고
지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 디지텔 생활의 근본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블로그의 폭을 조금은 넓혀 놓을 필요가 있어 늦게나마 첨부한다...
내가 한 사람의 기업인에 대한 메모를 할지는 몰랐지만
여전히 나와 동시대의 사람이고
배워야 할점은 넘치고 넘친다고 생각된다...
정주영의 빛과 그림자 20010324
정주영 명예회장이 죽었죠?
글세... 죽었다는 표현보다는 뭔가 더 고상한 표현을 찾아야 되나 싶게
그의 죽음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겠죠...
우리들이 인정하든 무시하든 간에 그의 삶은 우리나라의 근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점을 애써 부인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이었다는 인천국제공항의 개항식을 덮어버린
그의 소식은 많은 생각을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글세, 인지상정이란 게 간접적인 어떤 사업의 규모보다는
개인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죠.
아무튼 그의 죽음을 나도 그냥 넘어가기에는 할 말이 없지는 않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깊이 있게 관찰하지도 않았고,
개인적으로 많은 말들 준비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80년대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청문회에서 나는 그의 얼굴과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면서 그의 정치적 행보는 극에 달했고요.
아무래도 저와의 먼 인연은
정치적 사상적 측면이 우선한다는 점을 밝히지 않을 수 없네요.
80년대 당시의 조직운동의 흐름은 경제학적 분석을 기초합니다.
즉, 소비재와 생산재 / 또는 경공업과 중공업의 관계에서
중공업에 조직적 배치가 전체운동의 흐름을 좌우한다는 이론이 있었습니다.
특히 생산재 산업을 1부문과 2부문으로 나눌 때
소비재 생산을 위한 생산재가 모든 운동의 흐름을 좌우한다는 논리에
80년대 후반, 많은 운동조직은 중공업과 조선 등에 배치가 되었죠.
이즈음 정주영은 울산 운동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약간의 수모를 당했죠.
아마 이게 먼 거리의 첫 인연이 아니었을까요?
결국 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아마 계급적 대립의 극한 논리를 서로 주고받았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위한 정치적 보호의 틀을 깨고,
직접 자본가의 대표로서 권력에 도전을 한 거지요.
80년대 사회주의의 몰락이 있기 전후의 이러한 사상적 대립은
상호 극우와 극좌의 만남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심과 인연은 극소수의 과거에 불과하고
우리들의 대부분 관심사는 현대그룹 창업주로서의 정주영을 기억합니다.
즉 그가 남긴 빛과 그림자는 경제적 측면이 우선한다는 거죠.
그럼 경제적인 면에 대해 생각해 볼까요?
소위 세계화와 디지털 혁명이 바꾸어 버린,
세계 경제의 변화는 결국 사회주의의 내재적 한계(혹은 태생적 한계)를
전제로 출발합니다.
이런 2000년대 우리는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회장,
소위 왕회장의 희망이 함께 사라짐을 추스리고 있습니다.
1913년 출생, 2001년 졸... 88세.
30년대부터 시작한 그의 사업은 50년대에 완전한 기반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57년엔 건설 도급순위 1위의 현대건설을 만들고,
다시 자동차 산업을 통해 우리 산업의 흐름을 변화시킵니다.
70년대 오일쇼크의 충격 속에서 그는 중동 건설 붐을 통해 외화획득의 선두에 섰고,
중화학 공업을 통해 그의 국가적 산업체계는 본격화되지요.
80년대를 넘어서면서 기존의 체계는 물류와 서비스업,
그리고 90년을 넘어서면서 금융과 전자 등, 그는 소위 굴뚝 산업의
모든 틀을 갖추게 되었고, 이때 현대는 재계 순위 1위 업체로서
국가경제를 리드해 나갔죠.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이었고, 그는 분명 한발 앞서서 그룹의 체계를
국가경제의 선두에 위치시킨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나라의 경제를 잠깐 살펴볼까요?
자본주의 시대에 모든 사업의 동력은 자본입니다.
일제하에서 자생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국내 산업은
50년대 적산불하를 통해 상업 자본으로서의 기틀을 갖추게 됩니다.
그리고 박정희가 등장한 이후 국내 경제는 전략을 갖게 되지요.
즉 60년대 노동집약적 산업과 경공업에 기반 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국가의 전략이었고, 본격적인 산업화의 진입이었습니다.
그리고 제3세계 논쟁이 한창일 60년대 후반 무렵
박정희는 오히려 신흥공업국으로서의 국가경제 기반을 바꾸어 나갑니다.
즉 선진국에서 공해산업이라고 낙인이 찍힌,
그러나 필연적으로 갖추지 않으면 안 되는 중화학공업으로 한국경제는
70년대에 본격적으로 재편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기술집약적 산업으로의 전환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산업적 기반은 70년대 말, 80년대 초 또 다른 변화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시점에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가 있었죠.
그리고 그 시기는 세계경제의 재편과정 속에 있었고,
국내 자본의 자본집약적 산업으로의 준비과정과 일치합니다.
즉, 80년대는 전기와 전자 등에 소위 자본집약적 산업으로의
전면적 변화과정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소위 종합산업이라고 불리는 자동차, 건설 등이 최대의 호황을 만들어 냅니다.
소위 부가가치라는 말이 우리들에게 회자되는 시점입니다.
90년대 우리는 또 다른 변화의 시점에 부딪치게 됩니다.
즉 80년대 시작한 유럽의 몰락과 일본의 급부상, 사회주의의 몰락, 중국의 위치조정 등
급격한 변화 속에서 한국은 90년대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때는 더 이상의 모방이 약발을 받지 못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미 고도의 산업적 체계와 사회안전망을 기본으로 한 소위 선진국은
IT혁명을 통해 새로운 도약을 맞이하게 되고,
자본과 기술에서 열세인 신흥공업국은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지게 되죠.
이미 노동시장과 자본시장의 변화는 10여년에 걸쳐 이루어졌지만,
우리는 93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환율의 문제, 경착륙의 문제, 그리고 금융기법과 통계기법의
문제 등에 심각한 한계를 노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기의 결과는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IMF 구제금융을 통해 잠깐의
조정기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에 우리의 왕회장은 이 세상을 떠나셨고요.
그는 분명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그리고 남들보다 한발 앞서 갔고...
그는 상업자본을 통해서, 적산불하를 통해서 그의 자본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노동집약적 산업에 매달릴 때 그는 건설업을 중심으로 사업을 이루었습니다.
이점이 삼성이나 타 재벌과 다른 점이지요.
질이 달랐던거죠.
그리고 70년대 그는 다시 자동차 산업과 중공업 등을 통해
한국경제의 중심에 현대를 위치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30여년 간의 기반은 80년대 엔화하락과 결부되어
소위 3고 호황시기에 현대를 재계의 1위 자리에 확고하게 위치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때가 정점이었던 것 같아요.
삼성 이건희가 가족만 빼고 모두 바꾼다고 선언할 전후,
그는 정치적 행보를 내딛고 있었고,
결국 전자와 금융에서 실패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IMF가 터질 때 모든 사람들은 대우를 우러러봤습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모든 것은 끝이었죠.
대우의 실패는 전기, 전자의 실패에 있습니다.
이미 디지털이 모든 것의 잣대가 돼버린 지금,
전기, 전자, 그리고 금융을 선도하지 못하는 그 어떤 기업도 살아남을 수는 없습니다.
그 나머지는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의 문제입니다.
이미 96,7년을 전후해 소위 재벌의 문제점이 논의될 때,
그들의 한계는 이미 모두가 인식한 이후의 시점입니다.
이러한 기준의 평가는 지금의 삼성을 봐도 극명합니다.
경박단소, 소위 현대의 중후장대와 비교되는 삼성의 경영스타일입니다.
그들은 의류, 유통에서부터 성장했습니다.
자동차를 건너뛰었지만, 전기와 전자를 통해 그들은 착실한 기반을 갖추었고...
그리고 특히 유통에서의 두각은 문화적 안목과 결부되면서 참으로 알차게 성장했지요.
90년대 들어와 비록 자동차에서 실패했다고는 하나,
전기, 전자, 금융의 그룹 핵심 사업을,
건설과 유통, 중공업이 호위를 하고 있지요.
즉 자동차, 화학 등의 부족분을 주변 분야만으로도 충분히 감당이
가능하기 때문에 유일하게 버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선단식 경영의 마지막 보루는 이제 삼성이 돼버린 셈입니다.
삼성이 남아있는 한 우리들은 아날로그식 규모와 범위의 경제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할 것이며, 삼성 역시 그 향수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리라 봅니다.
왕회장의 몰락은 이런 먼 경제사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고 저는 봅니다.
이게 왕회장에 대한 전부일까요?
조금 더 의미 있는 일이 있지요.
소위 대북사업과 소떼의 방북, 그리고 금강산 유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북사업에 대해 그의 경영스타일과 경영예측에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 점은 사실 왕회장이 만들어 놓은 일을 우리들이 담아내지 못해서 역으로
지적되는 측면이 크다고 보여 집니다.
왜냐하면 대북사업의 문제는 아직 계량화되지 못한 진행형의 문제이며,
왕회장 개인이나, 현대 한 회사의 문제라고 보기에
우리들이 왕회장에게 빚진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WTO에 가입하고 정부는 더 이상의 기업지원에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지원에 따르는 부담이 지원의 효과보다 더 커 버린거죠.
국외의 감시를 벗어나 건설과, 생산라인 이전의 마지막 보루는 북한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7500만의 시장은 인구규모로도 세계 15위권의 커다란 의미를 갖지요.
때문에 대북사업의 문제는 사회주의의 몰락이나,
냉전의 해체에 따른 분위기에 추종하는 흐름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적극적의 전략이었던 셈이죠.
국내의 기술과 인력과 장비가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고,
정부는 그 부분을 지원하게 되면
WTO가 직접적으로 간섭해야할 사항을 이미 벗어나 버리죠.
때문에 대북사업은 북한 내의 공장건설보다, SOC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고,
결국 핵심은 경의선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참 묘수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저와 약간의 방향은 다르지만...
참, 경의선과 금강산 관광은 그 이름만으로도 저를 흥분시키는 것이 많습니다.
일단 금강이란 용어는 우리민족에게 하나의 종교적 표상으로 평가되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 삶속에 금강산의 상징은 이미 하나의 종교를 개인의 호불호를 벗어나 있지요.
아직 금강산을 가보지 못한 저이지만,
금강산의 복귀는 민족정서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경의선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드디어 섬나라의식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섬보다도 더 지독하게 고립되어버린 대한민국...
그리고 그 지정학적 위치는 우리들을 참으로 빈곤하게 만들었죠. 정서적으로.
제가 경의선에 바라는 것은 유목의 기질과 대륙의 기질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계량화되느냐의 문제는 별개이지만요...
현대의 희생을 어떻게 과실로 만드느냐의 공의 우리들에게 있는 셈입니다.
아무튼, 이런 흐름에 적극적으로 편승한 게 바로 현대 왕자의 난인 셈이죠.
그러나 몽헌은 현대와 아산의 이름을 얻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현대건설을 정리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많았습니다.
특히 국외의 비판에서 현 DJ는 자유롭지 못하죠.
그 시점은 내년 선거 이전인 올 6,7월이 유력하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는 왕자의 난이 아니라 다시 한번 왕회장에 대해 이야기하겠죠.
소떼를 처음 몰고 가던 날, 501마리가 판문점을 넘었습니다.
야! 기막힌 착상...
정말 멋을 알고 여유를 아는 사람이란 감탄을 저는 수없이 되내였습니다.
어떻게 500마리 1000마리가 아니고 끝에 한 마리를 더 붙였을까?
아마 이점이 왕회장에 대해 제가 뭔가 정리를 시작한 이유인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멋있는 사람인가?
그 한 마리에 담겨있는 진행형에 대한 암시와 미래의 선점!!!
그건 제 머리를 뛰어넘는 기막힌 착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는 현재의 정치인들 중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몇사람을 꼽습니다.
김윤환, 김철, 박희태 그리고 한명을 더 꼽으라면 김종필...
그들의 말 한마디와 포석은 정말 대단한 내공이라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즉, 그들의 성향이나, 경향, 혹은 공과를 벗어나서 한 개인을 평가하라면
저는 정치에서의 그들의 행태를 매우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근데 김원길이 다시 복귀하나요?
아마 그와 비슷한 감정을 저는 정주영에게서 느끼는지 모릅니다.
아산이란 말이 서산만 충남의 아산이 아니라죠?
강원도 통영(?)의 작은 마을 이름이 아산이라죠?
그의 고향에 대한 애착이 그의 호가 되고 우리들은 다시 그 이름을 부릅니다.
아산 정주영!!!
정주영은 건설회사를 통해 이런 모든 일의 정점에 섰습니다.
그리고 저는 건설을 하고 있고요.
카스트로나 게바라가 처음 손댄 게 아마 건설이었죠?
이게 아마 왕회장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가 되겠군요.
그는 건설을 하면 못할게 없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아무런 깊이를 제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죠.
건설인!
이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제가 고민하고 생각해야할 화두일겁니다.
한강바람을 맞으며 그의 뉴스를 들었습니다.
라디오에 들리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그냥 바람결에 흘리기에 제가 너무 거리를 뒀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를 통해 훨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텐데...
빛과 그림자...
84년 목동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붙여진 제목이었죠.
이제 왕회장이 남긴 빛과 그림자...
저도 천천히 생각해 가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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