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역사와 함께... 모전석탑
7-1) 경주 북천 분황사 석탑(국보 30호, 634년(신라 선덕여왕), 9.3m),
7-2)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보물 57호, 신라, 8.65m),
7-3) 제천 장락동 칠층전탑(보물 459호, 신라, 9.1m),
7-4) 안동 신세동 칠층전탑(국보 16호, 신라, 17m),
7-5)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보물 56호, 신라, 8.35m)
7-6)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보물 189호, 신라, 16.13m),
1-7) 영양 입암 산해리 봉감 오층석탑(국보 187호, 신라, 9m),
7-7)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국보 130호, 신라, 10m),
8. 영양으로 들어가는 길에 생각해보는 경상도 북부, 안동지방...
산해리 봉감을 지나 영양으로 들어가는 길목...
현일동, 현이동 탑을 보러가면서 잠시 안동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생각해보면 경주를 벗어나 불교유적과 탑들이
가장 폭넓고 밀도 있게 배치된 곳 중 하나가 이곳 안동 주변이 아닐까 싶다.
<현일동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영양...>
부석사에서 시작해 영주 주변의 석불들과 봉화로 이어지는 길목...
문경새재를 넘어 예천 주변으로 내려오면서 석탑들과 불상들...
상주에서 대구로 내려가기 전 구미, 군위 주변의 불상과 석탑...
그리고 이 곳 영양, 청송주변의 석탑들...
결국 이 모든 곳의 중심에 안동이 있고 안동으로 연결되어 있다.
태백산맥과 소백의 준령들이 모여 만든 분지에
낙동강이 주는 넉넉함을 고루 갖춘 곳이 이곳 안동이다.
퇴계 이황과 조선시대의 사상적 풍요로움을 담보했던
유교와 전통의 고향이기도 하다.
<영양에서 봉화로 가는 길... 사월종택... 반변천이 시작하는 일월산 아래에 있다...>
이런 연유로 자칫 조선시대와 유교로 안동을 단정 짓기에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불교의 전통을 안동은 유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또한 신라말기부터 뿌리를 내린 토착세력은 고려시대로 이어졌고
고려말기에는 공민왕과 관련된 유적 등 짧지 않은 연원을 가지고 있다.
<사월종택...>
안동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사상이 살아 남아있는 곳이다.
화석화 되지 않고 현실 속에 당당히 자리 잡은 곳...
불교와 유교와 민속적 전통이란 역사의 퇴적물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현대에 계승시키고 남기고 있는 곳...
단지 현재의 산업화 시대에 보수적으로 보이고 폐쇄적으로 보일지라도
한때는 가장 개방적이고 열려있던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런 곳을 이렇게 짧게 이 자리에서 다 논하는 것은 불가하다.
그리고 이 지역의 부침을 시대적으로 포괄하기는 더더욱 벅찬 일...
단지 나는 전탑과 의상대사 혹은 불교의 시대적 흐름의 길목에서
내 주관적인 생각을 이리저리 던져보고 싶을 뿐이다...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수많은 고택과 종가집은 전통과 현대가 어떻게 공유하는가를...>
9. 안동에서 생각하는 의상대사와 퇴계 이황
개인적으로 춘추전국 시대부터 체계를 잡은 유교의 사상적 완성은
조선의 유학자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입장인데
개인적 수양의 완성태로 유교를 완성한 것은 퇴계 이황의 경학이고
유교를 국가적 체계의 혹은 경세제용의 토대로 만든 것은 율곡 이이다.
안동에서 이황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굳이 율곡을 끌어들인 이유는 의상대사와 원효와의 관계 때문이다.
원효와 의상이 불교의 이론적 체계를 완성 시킨 것은 아니지만
유식론을 기반으로 불교의 사상적 기틀을 가장 광범위하고 깊이 있게,
분석하고 종합하고 해석하여 개인의 수양적 방도로 넓인 이가 원효고,
통일성과 조직성을 강조하여 국가운용의 토대로 불교를 정착시킨 이는
한국 화엄종의 개창자 의상이다.
<일원산 근처일듯...^^ 길을 잘못들어 막힌 곳 끝까지 가다보니... 너무 가물었다...>
불교의 흐름을 크게 식을 근본으로 삼는 유식종과
리를 근본으로 삼는 화엄종, 그리고 심을 근본 삼는 선종으로 분류한다면
원효와 의상 모두 화엄종 계열로 분리할 수 있지만
포교의 방법과 수단,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는 방법에서
두 사람은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고
유식종에서 출발한 원효는 화엄종과 선종을 포괄하는 독특함이 있다.
결국 한국불교의 큰 맥은 원효 - 지눌 -(무학)- 휴정(서산대사)으로 이어졌지만
이를 보완한 쪽이 의상 - 의천으로 이어지는 화엄종 계열이다.
이런 흐름을 시대적으로 해석하면 불교의 전파는 유식종으로 시작하지만
종파와 종단을 갖추고 조직적이고 국가적 지원을 받을 때는 화엄종이 강조되고
다시 보편화 일반화 되어 대중 속에 자리 잡을 때는 선종이 득세한다는 점이다.
이점은 중국의 불교를 꽃피운 수당대 초기는 현장법사를 필두로 한
유식종이 부각되었지만
중국불교의 마지막을 수놓은 송대는 혜능의 선종으로 귀결된 것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포교를 국가가 지원할 때
화엄종(법상종, 천태종) 계열이 득세했다.
불교와 유교를 넘나들며 불필요한 상념들을 안동지방을 배회하며 강조하는 이유는
안동지방이 의상대사가 만들어 간 화엄종의 지역적 기반이 아니었을까 하는 점,
둘째는 통일과 융합의 엄숙함을 보완하며 끌어들인 것이 관음사상이 아닐까...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러한 역사적 토양이 이황과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엉뚱하다...ㅎㅎㅎ
화엄종의 리사무애설은 결국 송대 주희의 리일분수설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주희의 이론은 이황의 이기이원론의 뿌리이기도 하다...
결국 주리론이란 유교사상의 뿌리에 불교의 인식론이 자리 잡는 셈이다.
하나의 사상이 완성태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이 관계론, 존재론,
그리고 인식론인데, 유교의 사상적 체계는 상당히 오랜 세월이 걸려 완성된 셈이다.
(또한 유교의 왕양명 심학은 선종의 ‘불성이 마음’이라는 영향을 깊이 받았다)
만약 의상대사가 개창한 화엄종의 지역적 종착점이 안동지방이었다면
900년이란 시차를 뛰어넘어
그리고 불교와 유교란 배타적이며 경쟁적인 사상체계를 뛰어넘어
인간을 더욱 풍요롭고 풍부하게 교양시키는 공간적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10. 의상대사의 화엄종과 불교종파의 흐름...
한반도내에서의 통일전쟁이후 국가체계의 정립과 확고한 위계를 잡기 위해
당시의 신라가 선택한 사상은 화엄종이고 당연히 의상대사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러나 의상대사의 행보를 보면 국가적 지원을 받았다고는 하나
그의 시작은 당시 통일되기 전 신라의 가장 변방인 강릉의 낙산사였고
화엄종을 개창한 부석사는 고구려 멸망 10여년 후에 창건되고
실제로 부석사와 화엄종이 가장 왕성하게 발전한 때가 9세기 들어서이다.
<만해 한용운이 만들었던 낙산사의 의상대...>
의상의 화엄종은 부석사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지만
신라의 수도인 경주지역의 기득권 세력의 견제를 받고
또 원효로 대변되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불교의 대중화로 인해
신라하대에 이르러 선종의 득세로 명멸해 나간다.
원효의 사상을 정토종이라 특칭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나, 이를 통칭으로 보고
의상의 화엄종은 이의 간극을 관음사상을 수용하며 메워가면서
경주지방으로 진출하는데 강릉, 제천, 대구를 거쳐 결국 안동에 정착한다.
그리고 그 관음사상의 현신으로 만든 것이 전탑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역시 신라의 분열과 함께 종식된다...
한 왕조의 멸망에는 사상적 이완 혹은 변화가 공존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에는 불교를 압도하는 도교의 융성이 있었다는 점은
연개소문의 도교 도입과 백제말기의 대향로를 통해서도 확인될 수 있고
신라의 멸망에는 선종의 득세와 함께한 지방호족의 이탈이 있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역시 신라와 비슷한 경로를 밟아 불교는 부침을 거듭한다.
도가사상과 결합한 불교는 이전 시기에 비해 기복적 성격이 강해졌고
난립한 구산선문을 통합시키고자 노력한 화엄종 계열 의천에 의해
각종 경전이 인쇄되고 체계를 잡는 등 천태종을 중심으로 정점을 맞지만
다시 지눌에 의한 선종이 고려 불교를 주도하다가
내부의 관료화와 부패, 그리고 유교의 배불정책에 의해 파편화 된다.
11. 화엄종과 관음사상...
한반도의 문명사 발전과정에 또 다른 정점을 만든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의 판각과 인쇄, 그리고 수월관음도다.
물론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 모두
신라의 이름으로 옷을 입고 있지만, 그 몸은 고려시대의 건축물이고
가장 우아하고 세련된 예술로서 고려청자가 차지하는 위상이 지고하나
수월관음도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고려의 예술적 깊이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무튼 지혜로운 이를 만나기 위해 54처를 돌아 깨달음을 얻은 선재동자가
28번째로 찾은 곳이 남인도 바닷가 관음보살이 거처하는 보타락가산이고
이 정경을 그린 것이 수월관음도인데, 그 연원은 화엄경이고
그 관음보살을 친견한 이가 의상대사이다.
수월관음도가 처음 그려진 시기가 당나라 시대 8세기 후반이고
중국에서는 대략 10세기를 전후해 송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14세기까지 활발한 작품들이 그려졌다고 추정되는데
그 작품의 기본적인 구도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고
이점은 의상대사의 낙산사 설화가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낙산사 해수관음...>
즉 관음사상의 전파를 위해서는 관음보살의 현신이 필요했고
관음보살은 항상 주변에 강과 바다를 필요로 한다.
(3대 기도처라 불리는 강화 보문사, 금산 보리암, 동해 낙산사는 바닷가...)
8세기 이후 도입된 관음사상은 화엄종의 필요와
개인의 기복이라는 대중적 필요로 확산되었고 그의 상징물을 찾게 되고
결국 신라인들이 택한 것은 전탑이 아니었을까?
12. 관음사상과 전탑 양식의 보급...
낙산사에는 해수관음상뿐이지만 만해 한용운이 만든 의상대가 있고
정선의 정암사는 문수보살과 관련된 설화가 있지만 수마노탑이 전탑식이고
여주 신륵사는 말 그대로 남한강을 굽어보는 전탑이 서있고
저수지와 퇴적층 너른 텃밭에 자리잡은 제천 장락동에는 당당한 전탑이
영주와 예천 사이 학가산에는 부석사와 관련된 전탑식 흔적이 남아있다.
<군위 삼존불 석굴앞... 억측일까? 90년대 찍었던 사진들은 스캔을 이렇게 작게해서...ㅠㅠ>
안동에는 조탑동 전탑, 동부동 전탑, 신세동 전탑이
의성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석탑동 석탑이 전탑식 흔적을 역시 간직하고 있고
군위의 삼존석굴 앞에는 단층만 남아 있지만 전탑식 석탑이 분명하고
조금 더 내려가면 팔공산에 송림사 전탑이 있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영양의 봉감탑과 현이동 전탑이 서 있다...
<분황사탑... 석탑의 초기양식으로 설명되지만 나는 좀 다르게 본다... 고유섭 김원용씨 등이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으로 잡은 탑은 미륵사탑, 정림사탑, 그리고 의성탑리탑이다...>
때문에 나는 전탑식 탑들은 통일신라 후대부터 고려 초기 즉
9세기 이후 10세기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며
(중국의 전탑들도 이 시기에 조성된 것이 많다)
항상 강이나 천변, 물가를 인근에 두고 의도적으로 조성되었고
낙산사에서 시작하여 경주로 향하는 방향에서
안동을 중심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현이동 오층 모전석탑...>
이렇게 본다면 모전석탑 계열이니 전탑 계열이니 하는 구분은 무의미해지며
안동지방의 석질이 퇴적암으로 석가탑식 석탑이 정착되기 어려웠다는 주장이나
학가산이나 석탑동의 돌무지 탑을 고구려식 능묘형식으로 주장하는 입장,
전탑식 특징을 이어간 지방적 전통이라는 주장을 완전히 뒤집게 된다...
그런 이유로 이렇게 멀고 멀게 돌고 돌아왔지만...
아직 단편적인 단서들의 조합 수준이고
역사적 궤적에 대한 오만한 접근일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화엄종과 관음사상의 귀결점으로 안동을 생각하고 있고
또 전탑의 분포를 관음사상과 연관시켜 보고 있다.
의상대사와 화엄종을 굳이 안동에서 생각하는 이유들이다...
<현이동 모전석탑 앞에서 바라본 반변천...>
13. 현이동 오층 모전석탑과 주변지역의 전탑비교...
반변천 지류를 사이에 두고 현일동 석탑과 현이동 모전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좁지 않은 천을 내려 보는 합수부위 높은 곳에 자리 잡은 현이동 오층탑은
높이 7m에 자못 당당한 불륨을 가지고 있으나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하단부의 석축기단의 이질성과
현일동과 현이동을 자른 고가도로로 인해 완전히 주변풍광이 부서져 버렸다.
영양을 향한 현일동의 너른 들판이 도로에 의해서 잘리고
반변천의 도도한 흐름이 고가도로에 의해 가로막히고
보수의 부실로 인해 정교하고 깔끔한 미감을 놓친 현이동 오층탑은
조금은 적막하고 초라하기까지 하지만
감실주위의 문설주에는 자못 섬세하고 화려한 당초문이 새겨져 있어
이 탑에 들인 간단치 않은 공력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비례와 미감은 신세동 칠층전탑이나 조탑동 오층전탑과 비슷하지만
신세동 탑이 보여주는 당당함과 웅장함이 없고
조탑동 탑에 비해서는 낙수면의 내밈이 미약해 변화가 적어 경쾌함이 없다.
이왕 시작한 김에 비슷한 양식의 전탑과 모전석탑을 묶어서 비교해보면 ;
신세동탑은 중국식 전탑에 비해 고른 체감과 낙수면의 비례가 비교적 정연하고
높이 17m의 우리나라 최고의 국보 탑으로 장엄한 미감을 유지하고 있으나
낙동강을 가로막은 철길로 시원한 전망이 가로막혀 답답함이 있고
기단부에 화강석 판재로 부조된 팔부신중이 시멘트 보수로 안타까움을 준다.
<신세동 칠층 전탑...>
이에 비해 조탑동 전탑은 화려한 당초문 벽돌로 치장된 8.6m의 탑으로
낙수면의 내밈과 몸돌의 비례가 석탑에 가까울 정도로 멋진 조형미를 갖추고 있고
일층 몸돌의 감실 문설주에 조각된 인왕상은 환조에 가까운 볼륨을 가진
상당한 공력의 탑이지만, 보수와 관리의 부실함이 안타까움을 주는 탑이다.
<안동 조탑동의 오층전탑...>
초기 중국식 전탑의 영향을 보였다고 생각되는 제천 장락동 오층 모전탑은
9m가 넘는 볼륨과 급격한 체감으로 당당함과 긴장감을 갖추고 있고
<제천 장락동 칠층 모전석탑...>
여주 신륵사의 전탑은 후대에 많은 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몸체와 낙수면의 차이가 작아 둔중해 보이면서 안정감을 강조했고
<신륵사 다층전탑... 전탑의 위치를 설명해주는 전형적인 모습... 우리는 짝수층이면 다층탑이라고...>
통일신라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전탑은 송림사로 생각하는데
화강암 석탑식 비례로 날렵함과 세련됨을 보이면서도
안정감과 상승감을 고루 살린 정연한 탑으로 기억되는데 특히
4.5m에 이르는 신라대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살아있는
전체높이 16.13m의 수려한 탑이다.
<군위 송림사 오층전탑... 이때도 스캔이 너무 작아서...>
송림사와 비슷한 미감으로 정암사의 수마노탑을 생각할 수 있는데
회색 마노석을 잘라 만든 높이 9m의 7층 석탑이다.
송림사와 달리 높은 언덕에 자리 잡아 상승감이 강조되어 있으나
주변의 산세에 묻힌 면이 없지 않고,
매끄러운 질감으로 독특한 맛을 보여주는 고려초기의 탑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안동에 있는 또 다른 전탑인 동부동 탑은 8.35m 높이의 건실한 탑으로
신세동 탑에 비해 상승감이 강조되어 안정감이 있고
송림사 탑에 비하면 체감률이 살아 있어 약간의 긴장감도 느끼는 탑이다.
이층 몸체에 인왕상이 화강석 판재로 조각되어 있고
낙수면에 기와가 부분적으로 살아있어 한국식 전탑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두툼한 낙수면과 아름다운 비례로 준수하고 멋진 조형미를 갖춘 탑이다.
<안동 동부동 오층전탑...>
14. 다시 생각하는 봉감 오층탑...
현이동 모전탑을 보고 돌아오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지 모르나
잠깐의 여행은 이렇게 길고 넉넉한 혼자의 시간을 보장해 준다...
왕복 600km가 넘는 짧지 않은 휴식의 시간이
피곤한 몸을 빼면 오히려 고맙기도 하다...
이제 영양지방을 보았고 안동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됐다.
고대하던 봉감탑을 보았고 안동을 매개로 이황, 의상대사를 생각한다.
전탑을 생각하고 관음사상을 생각해 본다.
역시 남는 것은 봉감탑이고, 이제 남겨진 곳은 창녕이겠지...
장대하면서도 균형감을 갖추고 있고
화려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고
정연하면서도 준수한 미감...
그런 생각을 갖고
그런 모습을 갖춘
그런 느낌의 사람이 만든 탑...
약간은 어설프고 조급한 비교일지 모르나 역시 봉감탑은 기억할 만하다.
생각할만한 또 다른 자극이 좋았고
기억할만한 또 다른 만남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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