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협영화를 보면서 통일신라論(?)에 대해 생각한다... 070517
1. 무협영화를 보면서 역사에 대한 접근을 생각한다...
2. 우리나라에서의 역사 연구와 고대사...
3. 시대규정을 위한 여러 가지 상징들...
4. <통일신라론>에 대한 검토...
5. 답사여행에서 내가 생각하는 역사...
<이글은 [통일신라론]에 대한 시대규정 논란에서 시작됐다. 썩 동의되지 않았던 개념인데
혹자는 이 시대를 [대신라]로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삼국전쟁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자는
논리이고, 신라의 지배층이 정복왕조의 성격을 가졌음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부분적으로
동의하는 측면이 많다... 해서 전성기 신라의 삼층탑에 대해 생각하면서 기왕 나의 역사에
대한 인식과 접근방법에 대해 메모한다... 특별히 공간적 영역에 대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김석철씨가 주장하는 한중일 삼국의 공간적 범위를 첫 자료로 올린다... 오늘 역사에 대한
메모는 공간적 혹은 영토적 접근을 우선하여, 시대적인 흐름을 따라 올린다... 0524수정...>
1. 무협영화를 보면서 역사에 대한 접근을 생각한다...
하나의 주제는 하나의 매개와 일률적인 접근만으로 충족되지 못한다.
신라 전성기 삼층탑을 정리하면서 분절적이던 단상들이 하나로 묶인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문학이나, 그 영향으로 고착되는 새로운 해석의 역사...
오늘은 역사에 대한 관점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역사관을 먼저 정리하고자 한다.
우리의 오늘이 있게한 역사는 다양한 모습과 거울이 되어 현재를 평가할 잣대를 제공한다.
때로는 벅차게, 때로는 회한으로, 때로는 이상으로...
그러나 단절된 계기와 매개체들을 묶어내고 생명을 부여하는 일은 대부분 상상에 의존한다.
우리에게 우리들의 역사는 그렇게 풍부하게 회자되면서 사랑받고 있지 못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윤활유 역할을 하거나 관계형성의 공감대가 되지도 못한다.
그나마 최근의 <서동요>,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등의 서사적 접근은
잊혀졌던 우리 역사의 공간적 지평을 확대하고, 시간적 영역을 확장 시켜 주었다.
긍부정의 영향과 진실성의 논란을 피한다면 우리는 무엇인가의 필요와 자극에 대응했다.
문제는 그 대응이 미래를 위한 사회적 동의가 아니라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조금은 방어적이고, 자기만족을 위한 몸부림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면 이러한 계기를 제공한 중국의 동북공정은 어떠한 정치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을까?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은 경제성장에 따른 급격한 사회변화와 정치공동체의 이완을 경계하고
사회 구성원의 정체성을 집결시키고자하는 의도에 의해 진행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예측되는 한반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장치일 수 있으며,
1900년대를 전후해 고착된 일본역사학계의 한중일 고대사에 대한 반박의 성격이 강하다.
게다가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반박은 문명의 교류나 문화적 정신적 일체성을
미래 관계의 동질성을 확대하기 위한 접근(한중일 혹은 아시아)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명칭(동해 등)이나 영토(만주 등)에 대한 관심으로 국한 되었다는 것이 내게는 아쉽다.
그렇다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단순히 학술적이며 정치적 의도만으로 진행되었을까?
먼저 내가 접할 수 있는 문화적 단편들을 통해 동북공정의 문화적 실체를 찾아본다...
가끔 무협영화, 혹은 무협지가 영상화된 TV 속의 무협영화를 본다...
<천룡팔부>,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등등...
대부분 홍콩사람 <김용>의 작품이다...
80년대쯤일까? 무협지가 입성하고 김용이라는 이름이 내 귀에 들린 게?
하지만 한권인가 읽고, 무협만화를 많이 봤던 것 같다...^^
문이 권력을 잡고, 무의 침략으로 쇠퇴하고 자존심이 꺾인 한족의 염원이 담긴 내용들...
유교가 자리를 잡았지만 도덕과 이상만으로 세상사가 통제되지 못한 시절...
사실 삼국지연의도 이 시기에 쓰여 졌고, 수호지도 이때가 배경이다.
대부분 송대에 시작되어 명대를 배경으로 소위 중국의 무협지들이 쓰여졌다.
소위 서유기, 금병매를 포함하여 중국의 4대 기전으로 읽히는 삼국지 수호지는
거란이나 여진 등 동이족이나 몽골인등 이민족이 창궐(?)하던 송대에 저작되어
몽골이 지배하던 원대에 자유스럽게 과장되다가
한대이후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 한족이 부상한 명대에 이르러 완성된 작품들이다...
<고구려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거란족의 이탈에 있었다... 이진충의 반란이 실패하고 들어선게 발해...
다시 대조영의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금나라를 건국하고 중원을 양분한다...>
삼국지나 위에서 이야기했던 김용의 소설 등은 모두 한족의 정통성에 기초한 작품들...
홍콩의 번영과 대만의 중원진출을 희망한 김용의 여러 무협소설은
삼국지의 촉한정통성에서 출발했다 해도 별반 틀리지 않은 말이다.
가장 먼저 한족에 동화된 선비족의 연나라에 뿌리를 둔 조조의 위나라를
그들은 이민족으로 보았고, 거란의 요나라나 여진의 금나라도 이단시했다.
(조조가 간웅이 되고, 관우가 중국을 대표하는 무신으로 추앙 받은지 700년, 길게는 천년)
(악비가 이민족에 대항하여 구국의 수호신으로 자리한지 800년, 짧게는 100년)
그러나 중국의 마지막 황조를 열었던 청은, 조선의 형제국 후금으로 출발했던
애각신라라는 성을 사용하고, 백두산과 고구려의 오녀산성을 성지로 받들었던 만주족...
결국 위진 정통성을 주장한 중국공산당의 조조(曹操)정통성은
현재 우리와 갈등을 빚는 동북공정을 비롯해 서북공정의 뿌리가 되고...
<임청하... 중고등학생땐가? 그가 출연한 영화와 그당시 대부분의 홍콩영화는 김용작품이었다...
중성적 이미지에 좋게 보았던 배우... 이번에 사진 찾으며 놀랬다... 이렇게 많아???>
모두가 동이족이나 몽골 등 외세의 침입에 저항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북돋고
억눌린 중화민족의 번영을 염원하던 난세에 저작되어 민초들의 소망을 결집시켰다...
갑자기 삼국지나 김용의 무협소설을 생각하는 이유?
우리에게 우리의 고대사가 정리된 시기가 언제였는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2. 우리나라에서의 역사연구와 고대사...
우리 한반도에서도 항상 이민족의 침략이 있었을 때 민족의 정통성과
과거의 영화를 꿈꾸며 민초들에게 희망을 설파하고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노력들이 적지 않았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삼국사기>와 달리 고조선의 <단군신화>에서 발해의 역사까지도 포괄했던
<삼국유사>도 대몽항쟁기에 만들어졌고, 또 그 시기에 <제왕운기>도 저술되었다.
<오늘 그림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도로 간다... 글과는 무관해도 이렇게 정리하는 것도 재미있을 듯...
내 생각에 고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하지만 문화 문명적 동일성은 일정한
세력권을 형성하며 자리잡았고, 그 대부분의 영역이 동이족의 분포와 일치한다...>
위기에 처할 때일수록 역사에 대한 연구성과의 양질도 깊어졌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시기가 대몽항쟁기와 조일전쟁(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
그리고 조선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가 이에 해당한다고 생각된다.
사실 근대 한국의 역사에 대한 모든 단초는 19세기후반, 20세기 초입에 결정되었다.
고조선 - 부여 - 고구려,백제 - 발해에 대한 관심영역이 확대된 것도 이때이고
소위 신라중심의 <삼국통일론>이 민족통일로 해석되고 규정된 것도 이때부터다.
그래서 삼국시대의 신라와 통일신라를 구별하고 차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전제로 한민족의 원형질을 연구하던 때도 이 시기였다.
<최근 환단고기등이 지도화 되고 영토적 실체로 구현되곤 한다... 다소 과장도 있고 상상도 많은 듯...
그나마 이지도는 비슷한 세력권을 형성하지만 변한, 마한, 진한의 위치가 일반 상식을 벗어난다...
물론 산동지방과 양자강 하류는 백제나 장보고와도 관련이 깊고, 이정기의 제나라 영역과도 일치한다>
스스로 중화를 주장하며 우리의 원형과 이상를 주나라와 공자에서 찾았던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가장 커다란 오류는 우리의 뿌리를 스스로 부정했다는 점이다.
조선 건국의 군사적 기반을 여진족에 두었으면서도 오랑캐라 멀리하였던 동족이,
청을 건국하고 중국을 통일했으니 조선의 사대부와 왕실이 받은 충격이 어떠했을까?
<숙신의 이동 경로... 고조선의 몰락으로 부여가 등장했지만 이미 동이족은 여러분파로 나뉜다...>
아무튼 그 이후부터 시작된 지식인들의 고민은 민초를 기반하고 만주를 향했다.
<규원사화>가 만들어지고, 유득공의 <발해고>가 서술되고,
정약용의 <아방강역고>가 엮어졌다.
하나같이 만주와 발해를 우리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정신적 영역을 확대하려는 노력들...
그 흐름들이 있어 신채호와 박은식 등의 <조선상고사>와 <발해사>가 저술될 수 있었고...
그리고 이때까지도 두만강 이북의 <간도지방>은 조선의 강역이었다.
3. 시대규정을 위한 여러 가지 상징들...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우리의 뿌리는 또다시 강역을 넓히고
수용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공간도 넓혀지는 시기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단지, 중국의 많은 역사는 소설로 기록되고 읽혀 민초들의 정신사를 살찌운다면
우리는 빈약한 기록과 재야의 외로운 외침으로 근근한 끈으로 남았다는 점...
일본의 비밀스러운 문서들이 조직되고 권력의 주변에 전수 되는 것과 비교된다.
<이 그림도 약간의 상상이 덧붙여진... 물론 일본내 신라나 고구려의 진출은 있었지만, 왜나라 위치나
왜 자치구표현은 동의하기 힘들다... 나는 개인적으로 왜가 전라도 지방에 있었다는 입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의 정신사는 온전한 밑그림을 공유하지 못하고 있고,
우리들의 정신적 공간은 분단으로 단절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노력도 방향이 없다.
게다가 중국이나 일본의 구미에 맞게 왜곡되고 수정된, 그 틀에 안주하고 있으며
우리들이 풀어야 할 반도사관은 우리가 부정한 많은 것들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들의 본질은 무엇이고, 원형질은 무엇인지,
그 뿌리의 실상과 허상은 무엇인지에 대한 오랜 고민들은 현대를 배경으로 한다.
19세기말부터 만들어지고 주장되어 온 무수한 국내외의 주장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내가
선택하고 채워나가야 할 우리들의 공감대와 이상은 무엇인지 또다시 질문을 던진다.
<이 그림은 박물관 전시용이었는데 광개토호태왕과 장수왕대의 고구려 강역도 중심...>
최근 만주어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에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지 물어본다.
우리의 어순과 동일한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는 말이 만주어와 일본어다.
물론 중국은 영어와 비슷한 문법적 체계를 갖춘 언어, 민족의 차이일까?
공감대와 이상, 혹은 원형질을 논하면서 나는 언어와 민족이란 개념도 끄집어들인다.
대상이란 정보가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관점이 대상을 창조한다는 소쉬르의 구조주의가
계승되고 해체되고 비판되어도, 그는 의식의 논리학을 해체하고 무의식의 지평을 넓혔다.
내가 굳이 만주어를 끄집어내는 것도, 그 만주어를 사용하던 청나라를 거론하는 것도,
그리고 김용이 그리는 무협소설과 오늘날 중국의 민족의식을 상기시키는 것도,
언어가치의 동일성은 물질적 개체의 동일성이 아니라 관계성의 동일성이란 주장을
언어에서 찾고, 민족에서 찾고, 우리들의 오랜 역사적 뿌리에 찾고자 하는 노력이
관계성에 대한 동일성이란 전제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백제에 대한 재야와 개인적인 연구들이 활성화 되면서 약간의 염원이 보태어진 그림...
중국의 삼국지등 사서에 나온 기록에 근거한 것같고, 일본을 아예 나라백제라 칭했다... >
김영삼 정권시절부터 화두로 떠오른 세계화가 한미 FTA로 일단락되는 느낌이다.
물론 세계화와 근대화에 대한 오랜 논쟁이 마무리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분명한 한 가지는, 레닌을 이어 스탈린이 완성한 <일국사회주의>가 완전히 거세되고
자본주의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초국적 금융독점 자본주의>로 명명된 세계화가
새로운 체계와 수많은 국가들의 동의를 받아 도도한 흐름을 확고히 하고 있다는 점,
이 흐름은 프랑스 혁명이후 200년만의 새로운 변화가 완성되는 시점은 아닐까?
세계화와 탈근대의 논의들이 국가 권력을 추동하고 변화시키는 시기에,
근대와 탈근대의 논쟁 속에서 나는 민족이란 개념을 여기에서 다시 사용한다.
전세계에서, 그리고 각국 단위로 진행되는 regime change 시기에
나는 다시 신라시대의 탑을 생각하고,
특히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 만들어진 소위 신라전성기의 탑들을 찾고 있다.
한 시대와 문화의 상징을 뜯어보면서 여전히 복잡한 여정을 나는 그리고 있다.
통일 신라라는 시대 규정, 한 가지를 위해 나는 너무 많은 잡념에 사로잡혀 있다.
4. <통일신라론>에 대한 검토...
내가 보아온 탑들을 정리하면서 무척 고심했다.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신라 전성기의 탑이라고 해야 하나...
결국 나는 7세기, 8세기, 9세기 전, 후반으로 나누며 다시 자문한다.
내가 무엇을 위해 탑을 분류하고 구별하려고 하는지...
사실 고민의 단초들은 다양했다.
그리 멀지 않은 밀라노 출장에서 나는 잘하면 로마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
창녕 술정리 동탑을 보면서 비슷한 시기의 탑들을 찾아보고 느끼려 했다는 점,
고대사를 정리하면서 신라에 대해 스스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답하고 싶었던 점...
그 복잡한 가운데에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며 서성거리고 있다...
<사실 이 글은 통일신라라는 말을 피하고 남북국시대라는 말이 맞다는 데서 출발했는데... 길어졌다...>
이야기의 시작은 내 스스로 동의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주저와 조심 때문이다.
통일신라라는 개념이 일상적이고 보편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턴가 조심스러웠다.
96년 경주여행에 대한 기행문을 처음 쓸 때도, 2003년 경주답사 여행기를 마치면서도
나는 의도적으로 <통일신라>라는 말을 피했다.
왜냐하면 통일신라라는 개념은 우리들이 만들어 낸 고유의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892년 하야시 다이스케는 <조선사>란 역사책을 통해 처음으로 <통일신라론>을 개진한다.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으로 대중이 동원되고 조직되고 교육되는 역사가 등장한다.
왕실과 지배층의 정통성과 유교적 도덕적 우위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국가 체계의 시스템으로 역사가 재해석되고
정신사를 리모델링하는 출발점에서, 역사가 규정되고 역사관이 인식되었다.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일본인에 의해서, 그들의 필요에 의해서 근대역사학이 정립되었다.
<일제하 역사 교과서... 만주원류고는 이미 알려졌다시피 청나라의 정본 역사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그들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를 강조했고, 애각신라는 신라인의 성씨를 본으로 한다는 말...>
몇 가지 문제점이라면 ;
우리 스스로 우리의 역사와 민족을 돌이켜 볼 여유를 가지지 못한 체,
중국과 조선의 종속적 관계의 청산이 주목적인 일본인들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했고
청나라에 대한 저항감을 만주족에 대한 동질성과 구별하지 못했고,
고구려 이전의 부여나 고조선에 대한 민족사가 훼손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요구와 청나라로부터의 자주권이 시급했던 조선말기 지배층의 요구는
절묘하게도 <통일신라론>에 대한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공유하게 된다.
조선시대 몇몇 식자들에 의해서만 기억되던 신라의 유적들이 조선미의 실체로 부각되는데
그 단초가 1902년부터 시작된 일본인들에 의한 경주, 석굴암과 불국사의 발굴 때문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동양의 종교와, 예술의 귀결”이라는 평을 비롯해
“석굴암이야말로 신라 예술의 정수를 모은 것이다.
아니, 조선만이 아니라 地上美의 전당이다”고 극찬한 나카무라 료헤이의 평가들은
일본을 벗어나 일본을 통해 조선을 바라보았던 유럽인들에게도 충분한 공감을 확산시켰다.
조선시대 지배층과 지식인들이 보지 못했던 한국의 미, 신라의 미가
일본인들에 의해 평가되기 시작하고, 이러한 문화예술적 접근의 참신함은
조선의 도자기와 백자를 넘어, 고려청자와 불화, 신라시대의 석조물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고, 세상에 빛을 발하는 기묘한 인연으로 이어진다.
<통일신라론>이 대세를 잡아가는 데는 한 번의 계기가 더 필요했다.
일본에서 조선사를 공부한 이들이 해방후 한국역사학계의 주류로 편입되고
분단된 한반도에서 정치권력에 역사적 정통성과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과정은
필연코 신라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한계로 나타난다...
<김유신 동상... 유일한 사진? 경주에 있다... 비슷한 이미지가 부여의 계백장군...>
게다가 남한에 국한된 유물발굴의 성과와 고려시대 이전의 미비한 사료적 실체는
역사론이 유물로 말하고 기록으로 증빙한다는 고고학적 전통으로 고착되고
역사적 진실이 학문적 접근만으로 한정되는 말그대로 歷史學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인문적 상상과 설화와 전설, 그리고 신화와 구전 역사는 그렇게 단절되었다.
개성에 수도를 두었던 고려나, 평양에 마지막 근거지를 둔 고구려는
사실 분단된 나라에서 공간적인 선택의 폭을 좁혔고,
또 반공과 반북의 정서로 질곡 된 우리에게
객관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역사연구는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 결정타는 북한에 있지 않았을까?
사실 이승만이 조선 왕조의 복고를 꿈꾸어 왔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북한에 들어선 김일성 정권도 조선왕조에 대한 환상에서 자유로웠을까?
내 개인적으로는 60년대까지의 북한은 조선의 완결이 아닐까 생각한다.
봉건적인 경제구조에 기초한 자립경제와 부국강병의 기치는 사회주의와 무관하다.
설익은 주체사상으로 포장된 전위당과 계급의 영도는 사회주의와 무관하다.
민족이란 개념을 사회주의 연대의 하위개념이나 자본주의의 산물로 본 그들은
백두산, 간도를 포기했고, 만주의 조선 자치족에게 차별화된 동질성을 제공하지 않았다.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평양에 국한 시킨 것이 그들의 역사관이며
오히려 북한은 평양을 통해 한국 고대사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우리의 역대정권이 신라와 경주, 그리고 서울과 조선에서 국가의 정통성을 찾았다면
그들은 고구려와 평양, 그리고 개성과 고려에 우리들의 역사를 가둔 우를 범하지 않았을까?
5. 답사여행에서 내가 생각하는 역사...
우리들의 역사와 사관과 문화적 동질성이 왜곡되고 분절되고 축소된 것은
어느 한사람, 한 때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 아니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 길어졌다.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본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에게 교육받은 우리 지도층에 의해서,
그리고 분단된 남한과 북한의 정권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는 절름발이가 되고
방어적인 반도사관과 고립된 공간감각(대표적인 것이 단일민족론)으로
우리들의 본원을 뿌리채 뽑혔는지 모른다.
<선조의 요청으로 파병된 명나라가 한 것은 일본과 조선을 어떻게 분할지배할 것인가 였다...
물론 이미 알려졌지만 서애 유성룡의 주도아래 조일전쟁은 끝나고, 명과 일본의 협상은 물거품이...>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고로 잘 사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의 군대가 일본이나 중국의 군사력보다 우위에 서야함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일제 강점기를 이어받은 미국 편향적인 보수세력의 주장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왕조의 복권을 꿈꾸는 것도 아니며, 제국의 영화를 꿈꾸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과거 역사의 과장이나 단편적인 수사로 현란하게 치장되는 것을 경계한다.
현실의 필요에 의해서 지난 시간을 재단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리고 역사가 주는 질량만큼의 무게를 미래의 이상향으로 설정하는 것도 경계한다.
단지, 내가 주목하고 있는 점은,
내가 점유하고 살아가는 이 땅이 발전했던 시기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구심점이 마련되고, 사회발전에 대한 비젼과 목적의지가
지도와 피지배계층에게 동의되고 공감대를 이루고 있었던 시기는
항상 외부로의 진출에 적극적이었으며, 포용력과 다양성이 살아있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고구려의 진출이 주로 북방육로에 있다면 백제의 진출은 해상을 기점으로 한다...
실제 이 활동루트가 장보고와 이정기 시대의 활동영역이 되었다...>
한마디로 열린 마음과 다양성을 수용하는 포용력이 사회진보를 추동했던 시기다.
국제적인 정세에 밝았고, 문명교류를 위한 선진문물의 유입에 적극적이었으며,
삶의 질의 개선에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문화를 창출할 줄 알았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인류전쟁 역사 중 가장 대규모의 전쟁을 승리했던
고구려의 군사력과 전략전술은 유럽과 로마의 군사력에 최소 300여년 앞서 있었고,
세조의 등장으로 맥이 끊길 때까지 소유했던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화공무기류,
목판 인쇄와 금속활자를 통한 가장 대중적이고 신속한 문화 보급체계의 보유,
세계 4대 기행문중 하나가 우리 선조들에 쓰여 질만큼 문명에 대한 인식도 높았고,
사람관계와 공동체의 운영을 위한 기록문화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진실한 체계를 가졌다.
<고당전쟁... 맨 위가 당태종, 왼쪽이 설인귀, 아래쪽이 연개소문... 중국의 사서그림...
다섯개의 비도를 사용했다는 연개소문의 칼과 신궁에 가까웠다는 설인귀의 특징이 잘나타난...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상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중국의 경극에서 결론은 설인귀는 당태종을 보호하고, 연개소문은 항상 패배하는 악당이다...>
물론 예술적 깊이와 문화적 역량에 대한 더 많은 예가 없지 않겠지만
가장 커다란 맹점은 바로 그러한 문화적 수준과 역량을 통해
다른 문화의 사람과 인류의 역사에 기여한 내용이 너무 없다는 점...
역사문화는 독창성과 유구한 세월의 흔적보다 시대적 영향력에 의해 평가 된다...
너무 완결적이어서 배타적이기까지 한 조선 유교와 성리학은 자립의 덫을 벗어나지 못했다.
<통일신라론>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 역사학의 정치적 흐름을 살펴보는 이유다...
과거의 고립과 배타적 자율이 가져온 폐해와,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일이
이 땅에서 과거의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우선해야 하는 일이 아닐까?
시대를 꽃 피운 정신을 살피는 일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야 만들어진 진취적인 문화는 인간의 역사가 되고 양식이 되지 않을까?
<청나라...>
역사는 과거이고, 현실은 실현되지 않은 미래일 뿐...
단지 역사와의 끊임없는 대화가 현재를 풍부하게 만들고,
지난 시간의 회상이 공감하는 사람들의 매개로 생명력을 얻고
함께 만들어갈 미래의 좌표가 되고, 함께 공유할 자산으로 남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내가 꿈꾸는 사회의 지표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세계사속에서 좌표를 얻는다.
내가 꿈꾸는 사회의 존재는 개인의 소유물로 전락될 수 없다.
내가 꿈꾸는 사회의 이상은 나와 너가 통일된 우리의 충만함에 있다.
내가 꿈꾸는 사회는 시간의 흐름이 공간에 누적된 모습이었으면 한다...
<조선의 강역... 지금 알고 있는 조선의 영토와 차이를 보인다... 1909년 일본은 간도를 중국에 넘긴다>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이상이 통일되고,
개인의 자유가 사회의 체계 속에서 충족되고,
개인의 선택이 사회의 진보와 함께하는 모습...
내가 꿈꾸는 사회의 뿌리와 원형질에 대한 접근은
폭넓은 답사여행과, 역사에 대한 오랜 시각,
그리고 문화적 코드에 대한 깊은 인식이 필요하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있다.
아름다운 선택과
장기적인 안목,
그리고 맑고 밝고 고운 진취적 기상...
무협영화를 보다가 역사의 흔적은 어떻게 시대를 이어가는 생각해보고,
삼층석탑을 정리하다가 <통일신라론>에 대해 생각해 본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과 흔적이 아닌 현실을 추동하는 면면한 추동력이다.
때로는 필요에 의해서 재단되고, 때로는 의지에 의해 왜곡되기도 하는 생물이다...
나에게 <통일신라> 혹은 <전성기 신라>는 무엇을 의미할까?
'답사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답사> 당간지주 2 - 우리나라는 당간지주의 나라?... 080117 (0) | 2008.01.17 |
---|---|
답사> 당간지주 1 - 당(幢)이란... 080117 (0) | 2008.01.17 |
여행>060105 떠나고 싶다~~~ (0) | 2006.01.06 |
여행(1) ; 여행에 대한 생각... (0) | 2005.12.14 |
여행(2) ; 건축여행 이야기... (0) | 2005.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