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답사여행...

답사> 당간지주 1 - 당(幢)이란... 080117

 

 

 

당간지주 1 - 無知의 영역... 080117




1. 시작하는 말...


작년 봄, 어머니 간병차 집에 다녀오면서 영광을 거쳐 올라온 적이 있다.

호적에 기록된 것과 무관하게 내가 태어난 곳(무령리)이고

또 외가집 산소가 있는 곳...

타고난 바람둥이(?) 또는 나그네 기질 때문인지 불갑사를 지나칠 수 없었다.

 

<07 불갑사... 불교가 처음 도래된 곳이란 뜻으로 甲자가 들어간 절... 안쪽으로 모아진 당간지주가 독특하다...> 


최근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오층석탑을 바라보며

왠지 가볍게 느껴지는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 작지 않고 육중하고 두툼한 미감의 오층석탑에서 가벼움을 느낀 것은

무량사 오층석탑의 아류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96무량사... 단호한 맛의 이층전각 앞에 단단하면서도 풍만한 오층석탑이 시원하게 자리잡은 절이다... 전반적으로 쓸쓸한 느낌...> 


하나의 대상을 보면서 참신함과 독특한 차이를 느낌은 분명 즐거움이 있다.

역으로 답습과 모방이 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가끔 실망이란 개념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그러나 지금의 또다른 나는 그렇게 느꼈던 가벼움마저 어설펐다는 생각에 잠시 웃어본다.

 

<불갑사에 최근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오층석탑... 처음에는 한참 웃기도 했다...^^> 


일정한 경지의 완결된 아름다움만큼 사람을 꽉 차게 만드는 것도 없지만

전통의 계승과 답습이 지닌 가치의 고귀함을 놓치지 않았나 반성하기 때문이다.

수백년을 건너 뛰어 지키고자 하는 원형의 보존과 기억의 재구성은

예술적 완결성과는 또 다른 여유와 폭과 깊이를 자극한다.

오늘 <당간지주>에 대한 나의 몇가지 메모는 그런 면에서 내게 유의미하다.

 

<97미륵사지... 기단부까지 완벽한 형태의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동서 양쪽 당간지주가 남아있지만 조금씩 틀어져 있다> 




건축과 공간으로 접근했던 나의 답사여행은

언젠가의 표현처럼 상징적 구상인 탑으로 전이 되었는데,

들과 산을 쫓던 자연에 대한 나의 풍류가

어느 시점에서 폭포와 물, 그리고 바람으로 넓어진 것과 비슷한 여정이었다.

 

<07불갑사...건축의지가 만드는 공간의 경영이 뭔지 생각해 본다...> 


개념이 관념이 되고,

관점이 구상이 되고,

다시 기획이 구체와 추상의 저울을 지니면

어느덧 현실에 두발을 디딘 총체와 또 다른 개념을 만들게 되는 걸까?


아무튼 나의 초기 답사여행은 나의 <建築意志>처럼

역사와 사람과 공간의 핵심개념을 벗어나지 못했고,

내가 보고자 하는 것과 아는 것만을 찾아다녔다.

신영복님의 지적처럼 우리의 건축의지는 <최선의 不自由, 不自然>인지도 모른다.


내가 바라본 건축과 탑도

결국은 그들이 존재한 시간과 공간속에 머무는 것이고

그들을 뒷받침하는 나무와 풀과 바람과 햇빛,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인위적 혹은 무의식적 행위의 축적이 전제되었음에도

나는 애써 그들을 무시하고 고갱만을 전체로 치환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나 하는

변명이 길어졌다...

 

<97보림사... 당간지주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 사실 이때까지 당간지주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전각과 건축,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 찾아보던 시절...> 




나의 전통문화 답사여정은 일정한 흐름이 있었다.

역시 제일 앞자리에 서는 것은 역사와 철학이었다.

이때쯤, <장기적인 안목>과 <열린 마음>에 대해 정리했던 것 같은데...

여기에 문화와 생활이 보태어져 예술이 보이기 시작하고

맨 먼저 시작된 것은 도자기였던 것 같다.

아마도 <아름다운 선택>이란 개념을 만들 때였던 것 같다.


<도자기>가 <그림>과 문방사구로 넓혀지고,

한편에서는 <門>에 대한 관심이 생기고,

다시 건축에서 공간으로...

이때는 상당부분이 풍수지리와 가람배치가 주요한 관심이었고.

 

<97강화도... 이때 서울시내를 비롯해 門이란 문은 거의 찾아 다닌듯 싶다... 문경새재 빼고...^^> 


이런 걸 한데모아 <공간경영>에 대한 시야를 뜨면서 얼굴을 찾게 되고,

불상을 쫓아다니면서 <시대의 이상적 상>에 대해 그림을 그렸었다.

공간에서 <불상>으로 옮겨진 나의 관심사에 참 극적이다 싶게 등장한 게 탑이었다.

시대정신과 이상적 조형이 완전히 <인간의 얼굴>을 벗는 순간, 탑이 보였다.

 

 


<탑>이 채워지고 채워지고 난 이후에

나는 비로서 부도와 석등, 조각들을 보게 된 것 같다.

건축에서 공간 - 공간에서 불상 - 불상에서 탑...

그리고 탑에서 부도, 석등, 문살, 담장, 조각 등으로...

오늘은 <당간지주>를 메모해 본다.

 

<99불국사... 이때도 당간지주의 맛을 느끼지 못했었다...>



2. 당 (幢 혹은 번(幡))


사찰의 영역표시와 괘불을 걸었다는 당간과 당간지주는

조형미로 접근하건, 역사적 변천과정을 살펴보든

나의 주요한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부차적인 역할>이 충분한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을 것이고,

예술적으로 완성된 형태, 즉 <법당(보당)의 완벽한 상>을 내가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괘불을 걸었다는 것은 조선시대부터의 유행에 불과하고,

당간과 당간지주는 사찰의 영역표시가 아니라,

신성한 지역의 상징이라는 馬韓 시대의 蘇塗전통이 불교에 습합된,

한마디로 후대에 의미가 축소되고 불교식으로 각색된 내용에 불과하다.

 

<97미황사... 美자가 들어간 유일한 절집...^^ 괘불 걸이용으로 만들어진 당간지주는 조선시대 이후에 조성된 것들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당간지주의 형태...>  


만약 당간이 사찰의 영역을 표시했다면

우리처럼 대승불교가 정착한 중국이나 일본에도 당간이 많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 조금 더 멀리 동남아나 인도 등에서 당간을 보신 분???

아마도 없었거나 극히 드물다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버팀대이고,

그 당간에는 당(번, 법당)이 걸려 있기 때문에 당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당은 불교의 발생지 인도에서 시작했고,

그 원형은 간다라 시대를 잇는 마투라 시대의 암벽조각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 漢 대에 군사용 깃발 번과 결합하면서 급속히 유행한 법당은 宋대까지 이어지는데

北魏시대에 <제비꼬리형 幢(幡)>이 완성되어 한반도의 삼국시대로 전승된다.

중국 돈황석굴, 일본 법륭사, 동대사 정창원에 당대의 당과 번이 다수 보관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에 제작된 당만 남아있어 고구려 고분벽화 그림으로 추정할 뿐이며,

일본 오사카 叡福寺에 <新羅國獻上之幡>이란 묵서명 된 번이 한 점 남아있다.

 

<07영주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 재현... 아래쪽에 재현 고분이 있고, 위쪽에 고분이 있다... 고구려의 영향으로 조성된 고분으로 여기 그려진 당은 인도 - 중앙아시아 - 북위 - 수나라를 거쳐 완성된 唐대의 幢유형과 비슷하다...  둥글게 처리된 조륜과 당두는 당시에는 각이져 있었다...>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는 그림으로는 영주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의 그림에서

고구려 적석총의 고분벽화에 그려진 번과 비슷한 유형의 당을 확인할 수 있고,

오늘날에도 일본의 도외지를 다니다보면 색색의 깃발모형 당을 눈으로 볼 수도 있다.

결국 인도에서 시작된 당은 중국 - 한반도를 거쳐 오늘날 일본에도 건재하고 있으며,

그 형태는 북위시대에 완성된 제비꼬리형에서 물고기 모형으로 변형된 듯하다.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깃발... 여러가지 설이 있고 가이드마다 설명이 다르지만, 나는 오늘날까지 이어진 幢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당간과 당간지주 보다는 당이 강조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