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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여행...

여행> 여주 영릉(세종대왕릉)... 070606

 

 

 

현충일에 세종대왕 능으로... 070606

 

영릉에 다녀오면서 기념품 몇개를 샀다...

하나는 앙부일구, 또하나는 거북이, 그리고 삼족오...

어딘가를 다녀오면서 나를 기념할 어떤 것 사기를 좋아한다...

사진과 마찬가지겠지만, 기억할 어떤 꺼리를 만들고 꺼내 보기를 좋아하는 습성탓이다...^^

 

앙부일구는 나침반까지 달아서 현장에 있을 때 시험해 보고 싶어서 산 종이공작이고

거북이는 옥쇄의 손잡이...

두툼한 크기의 옥쇄가 있는데 내가 도장으로 만들기는 만무하고 귀여워서 샀고,

삼족오는 내가 좋아하는 거여서...^^*

해서 추가로 기념품 사진 두장 올린다... 070624...

 

 

 



1. 현충일...


오늘이 현충일이랍니다...

게으른 몸이지만 어딘가에서 추념을 해야만 스스로 위안이 될 것 같은 분위기...

1년 12달 중 하루쯤은 내가 점유하는 공간을 다듬었던 분들을 기리는 것도

나름, 의미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오늘은 평소 외면하던

<죽음의 공간>에서 감사와 고마움을 표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24절기 중 손 없는 날이 청명, 한식, 망종인데

청명에는 벌초를, 한식에는 성묘를 하니

두 날을 피해 제사를 지낸다는 1956년의 망종이었던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했다는군요...

 

 


현충일이 1950년 한국전쟁에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기리는 날이라면

이와는 별도로 11월 19일을 <순국선열의 날>이라고 하여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순국하신 분들은 별도로 기념한다고 합니다...

두 날의 의미와 무게가 달라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근거리의 시간이 주는 차이와는 별개로

<반공>과 <극일>의 무게만큼 두 날의 비중은 사뭇 다르게 규정되나 봅니다...

 

 

 


나라를 지키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치의 깃발을 꽂는다는 것이 개인적 희생을 넘어

정치경제 공동체와 사회문화적 범위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이해되는가는

개입의 강도와 역사적 경험, 그리고 권력에 의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겠지요...

때문에 <반공><극일>외에도 <민주><국위선양><번영> 등의 가치관이

서로 혼재되고 우열을 다투는 것은 매 시대의 요청과 흐름에 따라 다르겠지요...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이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로 남아야 하는지 논란도 많겠지만, 대한민국 정부수립이후

현재 국립묘지로 운영되는 곳을 찾아보니, 서울 동작동과 대전현충원외에

천안 <망향의 동산>, <영천과 임실 호국원>, 그리고 <315, 419, 518 묘지>가 있네요...

 

 


애써 회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조금은 원거리로 나서고자 합니다...

오늘이 있게 한 옛사람을 추념하는 것이 시간적인 간극으로 영향력을 가늠할 수 없지만

어느 역사고 그 시대를 이끌고 주도했던 삶과 교훈은 오늘날에도 유의미할 것 같고

유독 존경하면서도 찾아보지 못했던 여주의 영릉으로 세종대왕을 만나러 갈까 합니다...

 

 

 

 

 


2. 죽음의 공간... 능을 찾아서...


저는 능을 즐겨 찾지 않는답니다...

인간이 만든 건축은 <죽음의 공간>에서 시작했지요?

이집트 문명을 거슬러 인류최고의 상징건축물인 바빌로니아 문명이 만든 바벨탑은

물론 <신을 위한 건축>이었지만, 공간경영을 건축이라 명명한다면

아무래도 <피라미드>등 죽음의 공간이 신의 공간보다는 앞서지 않을런지...

 

 

 

<판테온... 고대 신의 공간을 대표하는 로마의 유산... 모든 신들이 지구처럼 둥근 원안에...07년> 

 

 

하늘과 땅을 잇고, 또 선견과 예지의 이름으로 사람위에 군림했던 시대에

신과 죽음의 의미는, 스스로 신으로 호칭되면서 모호한 경계를 가지게 마련이고

그런 점에서 신과 죽음을 구분하기 쉽지는 않겠지만, 신과 종교를 분리한다면

저는 죽음의 의미를 종교의 신보다 앞에 두는 입장입니다...

 

 <강화도 고인돌... 세계에 분포하는 고인돌의 40%가 한반도에 있나? 죽음의 공간?... 97년> 

 

 

또한 무덤이 건축인가에 대한 논란도 많겠지만, 고인돌등의 거석문화에서부터 출발하면

무덤이 굳이 건축으로서의 권위와 상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고

신의 공간을 넘어 <권력의 공간>이 건축 되는 시점에 이르러서야

인간들은 이제야 죽음의 공간을 축소하고 기능과 상징으로 대체 되지요...

 

 

 

 

<경복궁과 베르사이유 궁전은 권력의 공간이라 불러도... 93년, 97년>

  

 

물론 나폴레옹이 안장된 파리의 앵발리드나 17세기 타지마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서양과 중동은 신의 공간이 건축의 중심이 되는 시점에서부터,

그리고 동양에서는 불교의 화장과 도교의 영향에 따른 풍수도참사상이 자리하면서

죽음의 공간은 거추장스러운 건축을 버리고 비석과 표석으로 남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앵발리드... 바티칸대성당... 중세 신의 공간을 대표하는 베드로 성당이나 나폴레옹묘는 기념건축에?>

 


조선의 건국과 함께 나말려초의 도선비기가 고려시대를 관통하면서 정착했던 양택풍수는

한양천도에서 절정을 이룬 후, 사실 조선의 도참사상은 음택풍수를 중심으로 남았지요...

묘택의 폐해와 생존의 여유마저 풍족하지 못했던 민초의 생활을 돌이켜보면서

게다가 건축적인 공간경영을 탈피한 능묘의 유적은 제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고

고려이전의 고분군들이 주는 정형화되지 못한 고대사가 주는 호기심도 없고

유쾌하지 못한 조선의 역사 때문인지 능묘는 제게 즐거운 공간이 아니었나 봅니다...

 

<서울 백제 고분군... 죽음의 공간위에 솟은 삶의 공간? 그렇게 2000년의 세월이 이어진다...> 




3. 세종대왕...

 

 

 


 

조선시대를 비롯해 우리나라 역대의 지도자중 가장 성군으로 꼽히는 분...

세종로, 세종대학교, 세종과학고...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 성인남녀면 누구나 한 장씩은 그 분의 영정을 담고 다니며

숱한 상징과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은 단지 예서 끝나지 않지요...

 

 

 


 

김&장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법무법인 이름도 세종이고

제우스의 방패를 상징하는 이지스함의 이름도 세종대왕함이고

관변 문화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만든 예술관 이름도 세종문화회관이며

또 우리는 그 분이 태어난 날인 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이름 하여 기념하기도 하고...

 

 


대단히 수직적인 체계를 갖춘 중동과 서양의 문화는 그래서 수평적이고

애초 수평적으로 출발했던 동양의 사상은 유교라는 틀에서 강고한 수직성을 갖추지요?

지폐의 도안마저 순위를 매기고, 존경하는 지도자의 일위로 올려놓은 분이지만

우리가 정작 세종대왕과 친근하고 자연스럽게 접근하는 통로가 풍부한지는 모르겠고...

 

 

 


어쩌면 가장 익숙하고 친숙해서 어렵고 조심스러운지도 모르고

또 어느 개인이 담기에 너무 큰 그릇이어서 부담스러운지도 모를 이름...

가장 추앙받으면서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리 존재하는 분...

그러나 너무 많이 알려져서 그의 인간적 깊이와 우리에 미친 영향에 대해

우리는 충분히 공감하고 깊이를 터득하고 있는지는 한번은 물어볼 필요도 있겠네요...

 

 

 

 




4. 세종대 만들어진 천문과학기구들과 문화재 교육...


좁지 않은 주차장에 수학여행 온 차량들이 채워지기 전 영릉에 들어섰답니다...

세종대에 만들어진 숱한 천문과학기구들이 한쪽 뜰을 점유하고 있었지요...

혼천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앙부일구, 측우기, 수표 ... 한번 씩은 들어봤던 기구들과

세종전이라는 건물에는 훈민정음을 비롯한 여러 악기들과 대내외 활동과 관련된 그림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꼭 그만큼을 이곳 영릉과 세종전은 갖추고 있었지요...

이러 이러한 것들과, 저러저러한 것들을 만들고 업적을 남겼다...

사용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기록을 전제로 국내 최초로 복원하였다...

어디에 있는 것을 축소, 혹은 확대하여 여기에 모아 놓았다...

 

 

 


물론 영릉에 가서 세종대왕의 일생과 업적을 설명하라고 강요할 순 없지요.

하지만 영릉이외에 세종대왕 박물관이나 도서관이라도 따로 있나 물어 봅니다...

세계 최초와 동양 최대에 목숨 거는 우리들의 경쟁의식과 우열인식이 항상 첨언되면서

정작 우리들은 최초와 최대로 누구에게 기억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는지

 

 

 

 

 

 

 


체제를 확립하고, 학문을 발전시키고, 대내외 외교와 국방을 정비하고

국내 생산력을 증대시키고자 각종 지침과 과학기구를 만들고...

어느 분야에서도 초기 조선의 제도를 정비하며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고,

그 하나하나의 깊이와 폭에서도 당시의 동양문화의 수준에 앞서 나갔는데

그 영향력과 치적이 과거의 기록과 현재의 확인에 머무른다면 불행이 아닐지...

 

 

 


역사를 돌이켜보고 전통의 문물을 계승하고 보존하는 이유가

단순히 있었던 사실의 확인을 위한 최소한 조치라면 효율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최소한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으로,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계승의 논리로

역사를 연구, 보존한다면 우리는 계량화 되지 못한 많은 가능성을 포괄해야 되지 않을지?

 

 

 

 

 


보존이 화석화 되고, 관리가 전시로 끝난다면,

교육이 내용을 갖지 못하고, 목표가 근시안적이라면...

어쩌면 우리들이 갖추고 있고 준비하고 있는 것들의 문화의 실체가 그러한 것이라면

불행을 넘어 낭비가 아니고 무엇일지... 씁쓸함을 넘어서는 짜증이 났다면 나의 예민함?

 

 

 


최소한 비디오가 되든 영상물이라 있어 풍부한 설명이 있어 다양한 호기심을 충족하고,

만져보고 체험하여 경험하는 이들의 자산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교육의 기본이고,

또 그 부족함을 채울 여지를, 공부하고 교육받으려는 이들에게 남겨 주어야 하는데

전시했다와 모아 놓았다는 것 외에 아무런 준비를 문화재청은 하지 않고 있지요...?

 

 

 


어디나 따라다니는 기획의 부재와 전시행정의 표본이며

이정도면 세금의 낭비를 넘어서 책임의 방기이자 의무의 회피 아닐까 싶은데...

더군다나 이공계의 회피나 기초과학의 부재가 사회적 이슈가 된지 오래이고

단순히 고소득과 취업에만 집중된 사회적 분위기를 정부가 탓할 것은 아니지 않을런지...

 

 

 


녹색의 잔디에, 빨간색 녹막이 철 난간에

고급스럽고 복잡할 것 같은 기구들을 보며 들었던 생각이랍니다...

아이들과 놀이삼아 놀러오고, 홍보도우미(있었나?)의 설명을 잠깐 잠깐 들으며

이 아이들이 영릉에 가봤다는 것 외에 무엇을 말할 수 있을지...

그것을 우리들은 충분히 채워주고, 새로운 창작욕을 북돋아주는지 생각만 했지요...

 

 

 




5. 영릉에 올라서...


성역화의 일원으로 만들어진 철근콘크리트조 세종전과 훈민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꺾인 참도를 따라 정자각, 영릉이 보입니다...

정자각 오른쪽으로 수복방과 비각이 있고, 왼편에 수라간이 있고,

봉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양쪽으로 나있는데 왼편에는 소대가 있지요...

 

 


올라서면 마석(馬), 무인석, 마석, 문인석, 망주석, 양석(羊)과 호석(虎)이 둘러 있고

가운데로 장명등(명등석)과 혼유석(상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위는 낮은 담장의 곡장이 오각의 형태로 둘러쳐져 있지요...

 

 


신라를 대표하는 괘릉이 당대의 능묘를 도입한 이래로 살펴보면

고려시대 공민왕릉을 통해 완성된 형식은 세조의 건원릉을 통해 조선에 정착되고

부분적으로 수정 간소화 되다가,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에서 파격의 변천을 이루기까지

세종의 영릉은 하나의 봉분에 2개관을 안치하는 합장이라는 형식의 규준이 되지요...

 

 

 

 

세종이 영릉으로 이장되어 조선의 국운이 100년은 연장되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종대왕릉은 천하의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여주 북성산을 주산으로 왼편의 개울물을 모아 오른쪽 아래에 연못이 흐르고

정남향의 방위에 좌청룡 우백호를 갖춰 모란반개형이라 불리는 음택이지요...

 

 


신라에 석등이 있다면, 조선에는 장명등이 있다는 생각도 해보고,

잔뜩 움추려 목이 없어진 문인석, 무인석을 보면서 그들의 긴장된 충성심을 확인하고

허허로운 바람에 청량감과 신선함이 감돈다는 남쪽의 소나무들을 세어 봅니다...

비어 있어서 자유로운 곳...

만세에 나라를 이어갈 만한 기가 탄생할 자리인지,

살아 백년의 저택 호사스러움이, 죽어 만년의 유택만 못하다는 말의 의미를 그려봅니다...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비각이 있고 세종의 정식 시호가 새겨져 있습니다.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길지요?

세상의 우두머리, 풍부하고 엄숙한 법, 꽃이 피어나는 문, 무에도 깊고 밝음,

어진 성자에 효로 세상을 밝힌 대왕이라는 뜻인가요? ^^

 

 

 

 


제 기억에 조선조에서 가장 긴 시호를 가진 이는 선조이지요...세종의 두배쯤...

물론 그 양반을 그렇게 칭찬하고 기려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시호의 구성은

世宗은 죽어서 종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묘호이고

莊憲은 명나라에서 조선의 왕에게 내려준 시호입니다...

그리고 그 뒤는 신하들이나 후대 왕들이 세종을 칭송하면서 덧붙인 호들이고...

 

 


그래서 세종대왕의 정식 시호를 世宗莊憲王이라 부르게 되는데

엄밀히 따지면 명나라에서 내려준 시호가 왕의 정식시호가 되는 셈이지요...

외치의 일환이어도 좋고, 자주권을 위한 방편이어도 좋지만

조선왕들의 편력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도 세종장헌대왕실록이 정식 이름이 되었고,

언젠가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반도 전역과 조선까지를 포괄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6. 재실에 앉아서...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화창한 햇살과 가끔 불어주는 시원한 솔바람도 마냥 상큼하지만은 않습니다...

넓은 잔디밭 한가운데를 가로지르지 못한 체, 마르지 않은 개울물을 따라 걸어봅니다...

훈민문을 벗어나 왼편의 재실에 앉아서 이런저런 생각...

 

 


왕자로 태어나 태자가 되고, 왕에 즉위해서인지 순탄하게만 느껴지고

여느 전장터와 혼란기를 겪은 난세와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되는 것도 아니고

숱한 치적과 업적이 있음에도 문의 융성과 문화적 관심 때문에 조용한 이미지로 그려지고

어쩌면 세종대왕은 드라마틱한 격정적 삶이나 반전이 없어선지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정치나 치도라는 것이, 없는 듯 하면서 권위가 있고,

말하지 않으면서 주도하고, 보이지 않으면서 이끌고,

힘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평정... 하는 게

진짜 힘이고 지도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오면서 다시 보이는 전시물들...

문화재 교육에 대한 대답 없는 투정을 부렸습니다...

물론 저는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의 대표주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 모두가 역사와 유산에 대해 정통해야 함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관심을 이끌고, 보다 가까이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과거의 유산과 유물들이 보다 넓은 미래를, 깊이 있는 진보를 향한 매개가 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문화적 공감대를 가진, 한반도의 DNA를 물려받은 우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지요...

 

 

 

 


손에 잡히지 않는 지식까지도 계량화되고 권력이 되고 재산이 되는 시점에서

우리는 오늘의 우리가 있게 했던 훌륭한 유산과 자산들을 너무 가치 없게 쓰는 건 아닌지...

그것이 누구의 책임이든, 또 이만큼의 안목과 선택으로 우리는 후대에 평가 받겠지만

안타까움과 한심함을 독백하는 것이니 흘려들으시고...

예닐곱 대의 관광버스에 북적이는 학생들의 교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들었다는...

 

 


오늘은 마음 한 켠에 남겨 두었던 세종대왕을 만나고 나오는 길입니다...

물론 그의 삶과 치적에 대해 나열할 필요는 없겠지요...

조선은 늘 비껴갔었는데... 이제는 조금 더 시간의 간극을 좁혀야 되나 봅니다...

단정하고 기교라고는 찾을 수 없는 재실을 벗어나 차에 오르면서 그런 생각을...

 

 


세종대왕...

너무 넓어서,

너무 깊어서,

너무 높아서,

우리는 그 위업을 눈으로 보지 못하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