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사에서 생각하는 자장율사와 수마노탑 (그리고 자장가)...080616
1.
마음은 들떠 있는데, 도통 손에 일도 책도 잡히질 않는다.
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 마음 조립하는 과정도 더디기만 하고...
게으름 때문이겠지? 아니면 녹슨 집중력에 대한 변명이든지.
그것도 아니면 막연한 안이함이거나, 회피일지도 모르고...
영월 상가에 가야한다.
날은 맑고, 해는 길다...
기왕 나선 김에 뭔가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했다.
이도 핑계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지도에서 보이는 태백이 그리 멀어 보이지만은 않는다.
그래~~~ 오늘은 고한 함백산의 <정암사(淨岩寺)>까지 간다.
<정암사 수마노 칠층석탑 ; 동해 용왕이 마노석을 옮겨 주었다고 해서 앞에 수(水)자가 붙었다고...>
조금 일찍 출발해도 욕할 이 없건만,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는데도 쓸데없는 이유가 많아진다.
태백까지 얼마나 걸릴까? 두시간 정도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7시 넘어서도 해가 있겠지? 디카에 대한 과신에 무거운 엉덩이,
다녀온 다음, 상가에서 보내야 할 긴 시간에 대한 우려가 출발을 자꾸 지연시킨다.
어라~~~ 영월을 지나서도 넓어진 국도가 얼마간 이어지네?
아무리 생각해도 영월의 산수는 마음에 든다.
모나지 않으면서도 깊고,
불쑥 솟은 융기에 물도 담았으니,
말 그대로 산 높고, 물 맑은 고장...
비교적 하늘에 가까워서인지 영월을 지나 태백으로 들어서는 길은 청량하다.
우람한 굴곡들이 지겹지 않아 긴장과 즐거움을 함께 보장하고,
카리스마가 제거된 느슨함에도 잃지 않은, 연이은 무쌍한 변화가 산뜻하다.
베토벤의 격정을 무디게 다듬고, 모차르트의 경쾌함을 느슨하게 조율하면 이 같을까?
바흐의 장중한 무게를 덜어내고 야니의 경음악으로 대체하면 38번 국도의 리듬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간과 정맥 지도... 여기에 고저까지 표시되면 좋았을텐데...ㅉㅉ /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낙동강을 따라 담대한 기백이 넘치는 산들이 독불장군처럼 산재해있는 경상도,
높지는 않지만 뜯어볼수록 정교한 기예를 자랑하는 서해안의 충청도,
넓은 평야에 홀로이 우뚝 솟았지만 모나지 않고 정겨운 서남쪽의 전라도,
높고 낮음이 분명하여 잘잘하지만 쉬이 변하지 않는 깊이를 가진 한강 하류의 경기도,
그리고 백두대간 웅장한 산세에 그럴 수 없이 묵직하면서 울퉁불퉁한 강원도...
어쩌면 우리네 산수는 그 지역의 정서DNA를 생산하는 원천인지도 모른다.
오대산-태백산-소백산-치악산 한가운데 자리 잡은 영월-평창-정선은 그렇게 묶여있다.
(최근까지도 영평정은 하나의 생활권, 행정권으로 선거권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2.
청량한 바람에 맑은 물소리, 그리고 약간의 어두움과 얕은안개의 마중을 받으며 정암사에 도착했다.
오후 8시... 너무 늦었다.
그래도~~~ 디카를 챙기고 줌으로 수마노탑을 댕기지만 (셔터 속도가) 너무 느리다...
과욕과 객기가 부른 늦은 출발이 오늘도 정암사를 카메라에 담지 못할게 뻔하다...
<오른쪽 위로 수마노탑이 보인다... 어둡고, 흔들리고... 그 와중에도 카메라는 챙기고...^^>
꽤 오래됐지?
십수년은 된 것 같은 가물거리는 기억에도 변함과 변하지 않음은 구별된다.
주차장도 넓어지고, 중창을 거듭했을 적멸보궁 정암사에 이제 단촐함은 없어 보인다.
불 꺼진 건물들을 가로질러 수마노탑을 향해 헉헉거리며 올라섰다.
왜 적지 않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곳에 자주 오질 않았지?
그리고 사진 정리를 하면서도 정암사의 수마노탑 예전 사진을 스캔 하지 않았을까?
두가지 이유였던 것 같다.
하나는 수마노탑에서 어떤 생동하는 기운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 일거고,
또 하나는 자장율사의 완결되지 못한, 혹은 남겨 놓은 꿈에 대한 미진함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의 탑에 대한 미감은 꽤나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다.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과 예사롭지 않은 위치, 그리고 정교한 상륜부를 갖춘 탑에
너무 박한 평가를 내렸던 게 정암사를 마음에 두지 않은 이유다.
게다가 그리 극적이지 않은 조망과 조금은 답답함을 느끼는 좁음도 한몫했을 것 같다.
<수마노탑에서 바라본 정암사 경내... 그리고 들어오는 길... 이제는 태백까지 넘어가는 길이 새로, 넓게 뚫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암사 자장율사를 다시 만나러 온 이유도 두가지다.
하나는 전탑계열의 탑중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마노탑 사진을 다시 찍기 위함이고,
또 하나는 자장율사와 <자장가>에는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정리해 보기 위해서다.
(#1. 똘똘이를 재우면서, 예전의 햇살이를 재우면서 불렀던 자장가와 아이들의 잠투정을 기억한다.
잠을 무서워하는 아이들... 어쩌면 몸과 마음, 혹은 무언가와의 분리를 두려워하는 것 같은 잠투정,
나는 이점 때문에 자장율사의 죽음과 자장가에는 매우 긴밀한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의 출발은 아주 단순무식했다. 자장가와 자장율사에는 언어학적 통일성이 너무 분명하다는...
물론 내가 <소쉬르>류의 기호학이나 구조주의자는 아니지만 그 의도는 매우 흥미롭게 생각한다)
3.
왜 <자장(慈藏)율사>는 이곳에 정암사를 세웠을까?
낮지 않은 돌계단을 오르며 자장율사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본다.
강릉에 머물다가 꿈에 계시를 받고 큰 구렁이들이 또아리를 튼 이곳에 절을 세웠고,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체 몸과 영혼이 분리되어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했다는 전설...
그리고, 탑을 세우고, 떨어지는 그 몸을 받쳤을 칡덩쿨과 관련된 갈반지(葛磻地)란 淨岩寺의 옛 이름...
내가 정암사에 정을 붙이지 못한 이유 중 하나인 자장율사의 미진한 열반에도 불구하고,
율사는 내가 생각한 것 보다 큰 그릇이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암자들 중 원효암, 의상암, 자장암을 빼고 스님이름이 들어간 암자가 얼마나 될까?
큰스님들 중에 진표와 자장을 빼고 <율사>가 붙은 <대사>가 누가 있지?
게다가 신라시대 창건설화를 가진 사찰은 대부분 원효, 의상, 자장이 주인공이지 않는가?
<자장율사...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시절을 대표하는 신라의 큰 스님이었다.
고구려와 백제 연합전선으로 국망의 위기에 놓인 신라 대당외교의 핵심 외교관(?)이었고,
중국 오대산에서 선덕여왕이 미륵보살의 화신임을 수기를 받았다고 주장한 선지자(?)였으며,
이때 문수보살에게서 직접 받은 석가세존의 금란가사와 사리를 신라로 들여온 스님이기도 했고,
여왕의 시대를 끝내고 김춘추를 왕위에 옹립할 사상적 근거(미륵불)를 만든 정치가(?)였다.
또한, 진평왕 이후 확충일로의 신라불교계를 종법과 계율로 조직하고 체계화한 종정이고,
석가 진신사리가 모셔진 오대 적멸보궁(통도사,상원사,봉정사,법흥사,정암사) 등의 창건주이며,
선덕여왕으로 하여금 황룡사 구층탑을 건립하게 만든 호국불교의 중흥자이고,
화엄종과 아미타종을 설파하며 토속적 신라불교를 체계적 중국풍으로 바꾼 장본인이기도 하다.
진골 출신으로 재상의 덕목을 갖췄음에도 현실 정치에는 발을 내딛지 않았지만,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며, 다시 여왕을 설득하여 황룡사 구층탑을 만들게 한 집요한 정치적 영향력...
귀족 출신이면서도 진표율사에 버금가는 참혹한 수련을 마다하지 않는 계율의 수호자이면서,
신라일대에 수많은 사찰을 건립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염불로 만든 <자장율사>의 이중성...
그 이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양면성과 분절성은 그의 죽음으로까지 연결된다.
(#2. 혹자는 지장보살계의 계송인 <지장가>가 지은이였던 율사의 이름을 따라 변했다고도 주장한다.
아무튼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면서 과도한 공역과 수탈로 아이를 재우기 위해 만들었든,
황룡사 백고좌에 참가하지 못한 노인들이 아이들을 돌보면서 불렀던 노래이든,
- 얼마나 성대하고 거창했으면 야단법석이라는 말이 이 백고좌에서 생겨났겠는가 -
너무나 덕이 높아 그의 이름을 암송하는 것만으로도 염불이 되었든 간에
<자장가>는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로 인해 만들어진 것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아무튼, 이 글을 준비하면서 자장가와 자장율사의 연관성을 확인해서 내심 기뻤다.
인터넷 검색창에 <자장가와 자장율사>를 치면 관련자료들이 어느 정도 모여있다.^^)
넘치면 비울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선덕여왕 - 진덕여왕대를 대표하며 그 이름만으로도 신라 전체를 감복시킨 자장율사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삼화령 애기부처>와 <남산의 배리삼존불> 등을 조성하지만,
김유신 - 원효에 밀려나(?) 강원도 동해안 쪽의 오대산-두타산-설악산-강릉으로 떠난다.
(오대산 월정사/상원사, 설악산 신흥사/백담사, 강릉 수다사, 두타산 삼화사 등을 창건하면서)
그리고 그에게 수기를 내린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암사에서 몸을 잃어버린다.
혹, 그는 미륵보살의 시대를 마감하고, 그 자신이 미륵불이 되려했던 것은 아닐까?
현실적으로는 자장율사는 박씨(박혁거세)의 정치력을 재생시켰지만(삼화령 애기부처 조성 등)
화랑도에서 잔뼈가 굵고 군사력을 가진 김유신 세력에 밀리고, 아미타신앙에서는 원효에 밀린다.
어쩌면 율사로 이름 붙여진 그의 수행과정과 불교에 귀의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미륵세상(김춘추), 아미타 신앙(원효), 화엄종(의상)을 보지 못하고 백제멸망 2년 전에 죽는다.
(#3. 문수보살을 다시 만나기 위해 몸을 남겨두고 자장은 석달 후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다.
그러나 한달 후 새로 들어온 스님은 움직이지 않는 자장의 몸을 화장해 버린다.
다시 돌아온 자장은 돌아갈 육신을 찾지 못하고, 그의 유골을 토굴에 수습해 달라며 떠난다.
지금의 보살핌에서 잠시 떨어져서 홀로 몸만 남아야 한다는 불안함... 그게 잠투정이 아닐까?
그의 못다 이룬 꿈과 몸과 분리된 영혼을 위로한다는 의미로 자장자를 축소하고 싶지 않다.
무의식속에 내제된 불안감 제거라는 최고 최대의 염불로 <자장가>는 남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천삼사백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자장가를 부르며 그의 공덕을 칭송하는지도 모르고...)
<후레쉬도 사용하고, 별 별 show를 다하며 찍음...^^>
물론 순전히 개인적인 추론으로 견강부회와 침소봉대를 넘나들었는지 모르나,
그의 혹독한 수련방법과 전체주의적인 호국, 그리고 재원에 바탕을 둔 귀족적 성격으로 인해
원효의 비조직적이고, 대중적이며, 거침없지만 깊이 있는 신라불교가 탄생했을지도 모르고,
당/신라-고구려/백제의 치열했던 침략과 정복전쟁에서 필요했던 미륵보살 신앙이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구현하는 아미타불의 관음보살 신앙으로 옮기는 정점에 그가 위치한다.
내가 높지만 넓지 않은 터에, 조금은 답답하고 밝지 않게 정암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아상에 사로잡혀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한 그의 아둔함을 탓하기 때문도 아니고,
(我相;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거나 남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마음이라는 뜻도 있으나,
한편 가장 단순한 속세의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개념이겠다)
몸을 잃고 영원히 떠 돌아다녀야 하는 그의 영혼에 대한 위로와 안타까움보다
(그에게는 -유일하게- 열반이 없고 다비(화장)만 있다)
제국의 통일을 아우르고, 한 사상의 꽃을 피우기에 그에게 주어진 시대의 한계가 너무 분명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정암사에서 그의 간과할 수 없는 업적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완성할 수 없어 혹은 완결하지 못해 더 작아 보이는 그의 한계를 보는지도 모른다.
<상륜부... 뜯어볼만한 예쁜 모습... 괜찮다...>
4.
늦은 시간, 발걸음 마다 후회가 뚝뚝 떨어진다.
그래도 그 안타까움 하나하나마다 어떻하든 수마노탑을 볼 수 있어 마음을 가볍게 만든다.
햇빛에 반사되는 회백색 수마노탑은 못 봐도,
어스름한 어둠에 희미한 달빛에 반사된 탑을 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배례석이 옆으로 비껴나고, 불전함이 한 가운데로???>
이런 위치에, 9m의 높이면 결코 만만한 크기가 아님은 분명하다.
벽돌 크기로 잘래낸 마노석을 하나하나 쌓아올린 칠층의 모전석탑 계열이다.
층급받침은 맨 아래층이 9단으로 시작해 하나씩 줄이면서 마지막 단은 3단으로,
낙수면(물이 떨어지는 지붕경사면)은 7단으로 시작해 한단씩 줄여 마지막 단은 1단으로...
맵시 있게 정돈된 찬찬함을 엿볼 수 있는 탑...
근데 나는 왜 이 탑이 이리 정을 주지 않은 걸까?
연꽃 문양 배례석과 탑지석 등의 연관성을 보면서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1700년대 조선 시대에 복원한 모습을 1996년에 보수해 지금의 모양이 되었다.
즉,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모전석탑이 천년을 넘게 복원하고 보수한 형태인 것이다.
<배례석... 생각해보니 연꽃 문양이 담긴 배례석 사진들이 별로 없다...>
아이템과 모토는 신라에 있고, 공은 고려가 들이고, 복원은 조선시대에...
글세... 고려시대의 탑이라고 추정하지만 선뜻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
전반적인 형태는 통일신라시대 송림사 오층전탑과 비슷한 미감이고,
개인적인 느낌은 조선시대의 법주사 팔상전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벽돌구조와 건립위치의 불안전으로 고려시대에 중수되었다면, 그건 이해하겠다.
(진동과 횡적 모멘텀에 취약한 구조에, 벼락/홍수에 안전장치가 없는 위치...)
<대구 팔공사 송림사 오층전탑... 가장 비슷한 미감으로 비교해본 탑이다...>
아무튼 송림사탑이나 정암사탑은 크기와 높이에 비해 위압감이 적고,
당당함이나 진취적인 어떤 기상을 갖추지 못해, 너무 정적이다.
말 그대로 한단씩 줄이면서 쌓아올린 몸돌과 지붕날개는 지나치게 인위적이고,
날카롭게 솟은 상층부까지의 체감은 안정된 형태를 위해 도식화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내가 보는 정암사 수마노 모전석탑은 조선시대의 미감으로 재구성된 게 아닐까?
특히 영정조 시대에 오층, 칠층으로 재구성되었다는 기록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모르겠다.
조선시대를 지나치게 방어적이며 보수적으로만 바라보는 내 시각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도전과 모험이 거세된 닫힌 구조에서 나는 꿈 없이 늙어가는 과거지향적 정체성을 느끼니,
한계가 노정된 깊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노인의 향수처럼 조선시대를 바라보면서,
기백과 역동성 넘치는 패기만만한 긴장감을 찾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째든 나는 송림사 오층전탑, 정암사 칠층석탑 등에서 기운생동 하는 패기를 못 느낀다.
유교적 영향으로 땅에 더욱 천착하며 긴장감을 빼버린 팔상전에서는 감미로움까지 포기했다.
전혀 다른 형태이지만 비슷한 느낌이라 여겨지는 탑들과 비교해보면,
미륵사 서탑, 분황사탑 같은 규모의 탑에서 느끼는 든든함을 갖기에는 너무 날렵하고,
탑리 오층탑, 죽장동 오층탑 같은 탑과 비교하면 강직한 담백함이 없이 너무 날카롭고,
그나마 상륜부가 남아있어 현이동 오층탑에 비하면 화사한 맛은 갖췄다.
한마디로 지나친 안정감을 추구하면서 변화 없는 밋밋함에서 나는 정체된 답답함을 느낀다.
단, 고려 건립과 조선 복원이라는 시대의 옷을 벗어버리면 새로운 맛을 그릴 수 있다.
정암사 수마노탑을 의상의 관음사상이 전파된 경로를 따라 전탑계열로 그려보는 거...
(안동과 영양 봉감탑을 보면서 이미 주장했지만??? - 이거 완전히 믿거나 말거나네?)
그리고 카리스마 넘치는 긴장감을 포기하고, 은은함에 덧씌워진 고고함을 그려 본다면...
<저기 달님이 보이시는가? 옅은 달무리를 받은 수마노탑... 물론 조명이 설치되어 있지만...ㅎㅎ 그래도 좋았다는...^^ (*잘 안보이시면 사진을 클릭해서 크게 보실 것)>
생각해보라...
달빛 받은 백색 옷의 <수월관음>이 물소리를 들으며 절묘한 위치의 절벽에 서있는 모습을...
사자를 타고 석가모니를 호위하는 문수보살의 당당함은, 높지 않은 이곳의 터로 바꾸고,
진골계열 귀족의 화려함과 명성과 아집으로 뭉친 자장의 꿈은, 넓지 않은 이곳의 터로 바꾸고,
고고한 은인자중에 예리함과 편안함으로 대치하면 수월관음의 고운자태가 보이지 않을까?
왠지 정암사 수마노탑에 서면 모든 걸 뒤집어야만 하는 객기가 발동한다.
5.
참 희한한 일이지?
가장 안정적일 것 같은 사각 원추뿔 모양의 정암사탑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끼고,
모든 것을 갖추고 영향력을 행사한 자장율사의 열반에서 미숙함을 느끼니?
수마노탑과 자장율사의 절묘한 비대칭 조화가 정암사에 남아있다니...
<마노석 부분... 인위적 조명 때문인지 몰라도 색깔이 생각보다 다양하다... 제천 장락동 전판암도 여러 색깔로 보이더니... 그리고 보수의 문제인지 모르지만 탑 전체에 백화가 아주 심하다... 석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참 부드러운 돌이다.
어렸을 적 곱돌이라 부르며 학교 마루바닥도 광내고 분필대용으로도 썼던 마노석...
곱고 곱게 다듬고 잘라내, 저마다 다른 크기의 보석을 공들여 쌓았다.
시대도 빼고, 사람도 빼고나면 부드럽고 다양한 색깔의 마노석 탑만 남는다.
어스름한 어두움에 옅은 달무리가 정암사 탑을 밝힌다.
작은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
이제 답답한 조망은 자족의 편안함으로 바뀌고,
채움과 거리가 멀 것 같은 좁은 경내는 비울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은 적막으로 바뀌었다.
이럴 때~~~^^
가만 자리에 앉아 달도 보고, 하늘도 보고, 바람도 느껴보고...
나누고 싶은 많은 이야기들이 담배연기를 따라 날아간다.
더 늦으면 안 되겠지?
달빛을 찾아 내려오는 돌계단에 뭔가 놓고 내려온 느낌...
<언제부턴가 탑을 만져 보려 노력하는데, 오늘은 저 풍경을 울려보지 못했다...ㅠㅠ 다음에는 꼭 가서...^^>
아~~~
층층이 달려있던 풍경들이 무슨 사연이라도 만들어줄 것 같은데...
살짝만 건들어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텐데...
(아무도 보지 않는데, 세월의 무게 때문인지 자장이 깨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염려 때문인지...)
다음에 정암사 수마노탑에 다시서면 그 종소리를 들어봐야겠다.
자장~~~ 자장~~~ 자장가가 들리는지...^^
잘 다듬어진 수마노탑과
멋들어진 상륜부를 보면서
나는 아직도 자장가를 부르고 있다.
수마노탑에서 나는 요염한 수월관음을 찾고 있다.
<왼쪽에 보이는 흰색이 뭐냐고? 담배연기입니다... ☞☜ 글도 사진도 어지럽기는 매 한가지...>
처음 정암사에서 느꼈던 허망함, 혹은 허전함...
여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미완숙의 불편함...
텅빈 것 같은 작은 공간을 아직도 어리둥절하며 뭔가를 찾고 있다.
공허함을 지우려 애쓰는 마음일까?
관조의 허허로움이 자유로운 상상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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