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악산 신흥사와 울산바위
백제금동 대향로와 화엄사 석등을 모본으로 한 청동향로와 청동등의 호위를 받으며
작지 않은 불전까지 갖춘 청동 통일대불이 원경의 울산바위를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신흥사...
사천왕문을 지나 보제루를 거쳐, 극락보전에 다다른다.
신흥사에 들어서면 설악의 품에 안긴건가?
산사와 어우러진 설악산...
아무도 그 절이 깊은 산속에 묻힌 적막의 공간이라 느끼지 않았다.
시간을 단축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개발의지와 게으른 문명이 너무 깊게 들어왔기 때문이다.
<통일대불 앞 햇살이... 모처럼 가족 함께 먼 나들이를 했다...>
<사천왕문... 설악산에 푹 안겨 있다고 생각되지만, 곧바로 하늘이 보일만큼 넉넉한 공간에 자리잡은 신흥사...>
<신흥사 보제루... 1770년 영조때 지어진 건물... 단차가 높은 산지가람이 아니면서도 누하진입 방식을 택했다...>
<신흥사 극락보전... 1647년 인조 때 지어진 불전으로 동대에 만들어진 불전치고는 규모가 작을뿐만 아니라 상당히 장식적이다... 내부에 안치된 아미타삼존불도 목조(보물 1721호, 1651년, 무염제작)불상으로 역시 동시대 만들어졌던 법주사, 무량사, 귀신사, 송광사(완주) 등의 소조불과 비교해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범종루... 신흥사에서 제일 맘에 들었던 전각이다... 위치와 크기 등등이...>
신흥사에서 설악산을 바라본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설악으로 이름 붙이고 바라볼까 묻기도 민망하게 설악산은 멀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서북쪽으로는 백담사에서 북쪽으로 신흥사, 동남쪽으로는 남쪽 진전사지와 선림원지까지가 설악산이고,
인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면서 만나는 남쪽의 가리봉, 점봉산 사이의 길을 내 한계령이라 이름짓고,
소양강 줄기의 한계천과 북천을 따라 인제, 원통에서 속초로 넘어가는 미시령을 남북의 경계로 삼는데,
지금 내가 서 있는 신흥사는 울산바위와 대청봉을 바라보는 외설악으로 설악산의 동북쪽 끝이다.
<보제루 옆에서 바라본 신흥사 경내와 설악산... 주동선은 천왕문-보제루-극락보전이지만, 전체적인 구성은 옆으로 펼쳐진 병렬식의 느낌이다... 신흥사에서는 제일 좋았던 자리...>
들어가면서 만족하지 못하고, 나오면서 벌써 아쉬움을 느낀다면 이 여정의 한계를 알고 시작했기 때문이겠지.
무미건조한 대청봉을 바라보면서, 설악산의 깊이와 높이를 감상하지 못하는 건 내가 서있는 위치 때문이고
내 정성이 계곡 사이사이, 암봉 너머너머의 수려함과 장중함을 함께 담기 터무니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룡능선 서북쪽으로 오세암-백담사-봉정암으로 이어져 용아장성에서 소청봉에 이르는 내설악을 생각한다.
지리산과 함께 그곳에 오를 때 내가 산에 대해 생각하는 미련도 씻어질까? 그래도 오늘은 울산바위다.
<권금성 올라가는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울산바위와 신흥사...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서 내 목적은 울산바위였으니, 다양한 프레임을 찾으려 노력했다?^^ 저렇게 산이 푹 파묻혀 있는데, 천왕문 등에서 곧바로 하늘이 보인다는 게 재밌지? 아무튼 울산바위는 참 기묘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동명항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이렇게 되면 결국 나는 울산바위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다 본셈인가?^^ 조금 더 멋인게 잡을 수 있는 포인트가 있었는데(95년 기억) 그곳을 다시 찾지 못했다...ㅠㅠ>
설악산에 와 본 게 언제지? 가족을 생각하면 딱 20년만이고, 짧게 잡아도 17년쯤 되니까 한참 전이 맞다.
물론 고등학교 수학여행까지 포함해도 당시 기억들은 생생하다. 그 때 나의 기억력이 생생한 만큼...
여전히 같은 숙소와 비슷한 경로로 설악산을 스쳐지나갔다. 한번은 케이블카를 타고, 두세번은 걸어서...
그때 기억 중 하나가 울산바위에 대한 감상이다. 그리곤 다짐했지, 수묵화 같은 사진 한 장 찍어보기로...
오늘 이렇게 저렇게 속초를 쏘다니며 울산바위를 열심히 잡아봤지만, 역시 만족스럽지 못하다.
가까우면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고, 멀면 너무 멀어서 충분치 못하다는 아쉬움은 우리들 관계를 닮았다.
<카메라의 한계라는 게 ; 가까운 건 더 크고, 먼 것은 더 작게 만들어 버리는 탓에 풍광사진은 우리의 마음과 느낌을 그대로 포착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말라버린 하천과 골속골속 속살을 드러낸 산하의 모습만큼은 그대로 읽을 수 있을 듯... 신흥사 들어가는 길과 권금성쪽에서 바라본 외설악...>
설악산과 비교적 가까운 콘도에서 바라다보며 묻는다. 산은 무엇을 봐야하고 어디에서 느낄 수 있을까?
산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고, 산 밖에서는 산이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 채워지지 않는 것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채우려하고, 비워지지 않는 걸 알기에 우리는 비우려 하지?
설악산, 울산바위... 오래전부터 각인된 이미지를 찾으면서도 나는 늘 언저리에 머물며 채움과 비움을 말한다.
그 안과 밖의 경계 어디쯤에서 나는 대청봉을 바라보고, 울산바위를 담으며 설악산을 느끼려 한다.
산이 허락한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동명항에서 바라 본 대청봉... 깊이보다는 높이로, 너그러움 보다는 장벽에 의지한 폐쇄적인 느낌이 먼저든다..>
다시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제일 먼거리의 동명항 방파제에서 대청봉과 울산바위를 바라본다.
내가 설악산에 기울인 정성의 최대치고, 설악산이 내게 허용한 최대의 배려가 그 거리인 셈인가?
바다와 도시와 산이 한데 어우러져 또 다른 장관을 이룬다.
산이 도시를 품은 것일까? 도시가 산에 의지하는 것일까?
포근하다 여기기엔 봉우리가 너무 위압적이고, 품었다고 말하기엔 너무 펼쳐진 도시... 강릉과는 다른 맛.
울산바위에 꽂힌 마음 때문일까? 설악산도 속초시도 내게는 겉도는 느낌...
그렇지만 오고가며, 여기저기 울산바위를 느낄 수 있는 포인트를 찾는 긴장감이 있어 심심치만은 않았다.
<동명항 방파제에서 바다와 도시와 산... 설악산은 저 대청봉 너머에서부터 진짜 맛을 감추고 있는지도...>
<일출이 지난 시간만큼 사진의 빛도 달라진다... 훨씬 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면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 산과 바다가 변할 수 없다면 도시가 바뀌어야 하나? 아니면 바라보는 내 마음이 바뀌어야 할까?...>
2. 케이블카 타고 권금성으로
권금성에라도 올라볼까? 케이블카 타고가면 설악의 최소치는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설악이라는 테두리의 가장 끝 언저리에서 커다란 만족을 바란다면 그것 자체가 욕심임을 나는 안다.
그렇지만 이 케이블카만큼 불만족스러운 것도 없다. 500여m를 올라가는 것 외엔 아무런 기능이 없으니까.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남산과 설악동 케이블카만큼 무미건조하고 형편없는 관광시설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먹히는 건, 그것 외에 선택할 체력과 시간을 비롯해 대체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가족과 함께 움직이고 있으며, 나는 현재의 여건을 잊을만큼 충분히 준비하지도 못했다.
<마지막날, 날씨가 많이 풀렸다... 그리고 똘똘이는 여전히 신발 꺾어 신는 버릇이 남아있다...^^>
칼바람... 빙판, 그리고 차가운 날씨...
그렇게 꽁꽁 단도리한 덕분에 둔중해진 몸을 이끌고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보기위해? 느끼기 위해? 함께 한다는 것 외엔 아무런 약속이 없지만 갈때까지 가보자며 모두 손을 잡았다.
성취의 척도는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의지에서 시작하고, 도달 했는가 못했는가의 결과에 한정되겠지만
결의도, 목적도 없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또 엉금엉금 기면서 갈 수 있는 끝까지 올랐고 우리는 웃었다.
그것은 길고 짧음, 어렵고 쉬움의 문제가 아니라, 맞잡았기에 나눌 수 있는 벅찬 추억이기 때문이다.
<권금성 가는 길에서... 왼쪽에 보이는 하얀 줄기가 토왕성 폭포지?>
다 오른 뒤, 우리는 그제서야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볼 여유를 보장 받는다.
또 경험하지 못한 초행길은 늘 길고 지루하지만, 막상 다다라 되돌아오는 길만큼 짧아지는 것도 없다.
생각보다 짧은, 그리 어렵지 않은, 모두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한 일이었음에도 우리는 안도하고 즐거워한다.
추위와 빙판, 그리고 따가운 칼바람은 우리의 자랑을 빛낼 또 다른 역경으로 대체되고,
기어오르는 동안 정지됐던 우리들의 사고는 그제서야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조금 더 극적이며 도전적으로, 조금 더 감동적으로 웃음을 배가시키고 상쾌함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권금성에서... 오를 때마다 되묻는다... 왜 하필 이곳에 케이블카를 설치했는가 하고 말이다... 여전히 실망스럽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속초쪽 외설악에서는 이 곳 외에 케이블카를 설치할만한 곳이 없다고...^^>
그럼에도 권금성은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하다.
장쾌한 조망이 보장된 곳도 아니고, 드라마틱한 경관으로 잊지 못할 감동을 주는 곳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단지 작은 만족과 뭔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제역할을 다하고 남은 건 느끼려는 이들의 몫.
보이지 않는 공룡능선을 향하며 설악을 그리는 것도, 동해를 조망하며 바다를 담는 것도 내 의지다.
어쩌면 설악산에 오르지 않고도 산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나는 챙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산에서 산을 보고, 도시를 보고, 바다를 보고, 그리고 울산바위를 봤다. 그렇게 만족하기로 했다.
<겨울산의 재미는 이런 능선을 보는 맛일 것이다... 가까이 혹은 멀리서라도...>
<나는 이런 능선을 보면 꼭 호랑이 줄무늬가 생각난다... 꿈틀꿈틀 생동거리는...>
<멀리 속초시내가 보인다... 그리고 양쪽의 석호와 길게 뻗어 있는 방파제도... 신년 일출을 본다고 많은 사람들이 서있었던... 방파제 끝마다 서 있는 빨간색, 하얀색 등대도 있고, 아치 구조의 파란색, 빨간색 다리도 있고...>
3. 향성사지 삼층석탑
내려오는 길... 지나칠 수 없는 곳에 잠시 머무른다. 물론 피곤한 가족들은 차에 남고, 나는 탑을 찾고...
우리 삶의 패턴이라는 게 끊임없는 반복의 축적이기에 한번 경험했던 것은 쉽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생각날 때 불쑥 불쑥 거침없이 좋았던 것을 또 보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거리, 시간, 여유의 문제와 무관하게 한번 놓친 기회를 두 번 잡기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자꾸 진지해지고, 최대한 넓고 깊고 많이 느끼려하며, 무비의 만족을 중시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일까?
단지 내가 하고 싶은 것들, 해야할 것들에 대한 충실한 준비를 위해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노력할 뿐,
나처럼 주변을 대충대충 정리하는 사람도 없는데, 가끔 붙는 진지와 완벽이란 꼬리표도 그 때문인거 같고...
<향성사지 삼층석탑... 보물 443호, 높이 4.33m 다... 신흥사, 케이블카 타러 올라가는 길 바로 옆에 있다...>
또한 사람들은 때때로 몰랐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 생각에는, 알기에도 하지 않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 인간들의 한계임에도 말이다.
또 한번의 반성이 철지난 원칙을 되살릴지 모르겠지만, 분명 몰랐고 예전엔 관심 밖 영역이었을 뿐이다.
예전엔 왜 몰랐지? 이곳에 보물급 석탑이 있었다는 사실을? 역시 나는 보고 싶은 것에만 집착했나?
향성사지 삼층석탑을 보면서 이제껏 몰랐다는 사실, 지나쳤다는 사실에 의아해하는 이유를 찾는 중이다.
차타고 올라갈 때는 저 정도면 충분히 보물급인데 하면서 지나쳤다가 내려서는 여기저기 뜯어보기 바쁘다.
단상들로 조합된 스쳐지나가는 인연은 아쉽게 여기면서, 정작 가까이서는 흠집 하나에도 실망하는 불편한진실.
이층 기단, 상층 기단부의 탱주 두개, 5단 층급받침의 지붕돌, 그리고 4.3m 크기를 가늠하는 내가 그렇다.
허어 어렵다. 기단부의 탱주 2개는 8세기 후반 양식이고, 5단 층급받침과 4m 전후 크기면 9세기 중반...
그런데 하층 기단부에 우주와 탱주가 없는 건 빨라도 10세기 전후라는 말인데 150여년의 변화가 다 있다?
게다가 높아진 기단부에 비해 너무 좁아진 일층 몸돌, 두툼하게 보이는 지붕돌들로 어딘지 균형은 깨지고,
아하~ 이 탑이 결정적으로 놓친 것은 상승감 아냐?
<조금 멀리서 보면 향성사지 삼층석탑의 온전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 온다... 몸돌들에 비해 두툼한 지붕돌, 그리고 현저히 높아진 기단부와 너무 가늘어진 일층몸돌... 차라리 노반이라도 있었다면 지붕돌의 둔중함은 많이 상쇄되었을텐데...>
참으로 탑의 미감이라는 게 오묘하기도 하지만 간사하기도 하다.
전각 끝부분(지붕돌)의 반전과 귀솟음 하나 없다는 이유로 이렇게 탑이 흐트러질 수 있다니 말이다.
예전에 경주 구정동에 삼층탑이 한기 서 있었다. 일층 지붕돌은 이거사터에서 나머지는 염불사터에서...
그렇게 조합된 삼층석탑은 어딘지 어리숙하게 외롭게 서 있었지. 일층 지붕돌 하나 때문에 말이다.
또 이와 비슷한 석탑들이 몇기 더 있으니, 창녕 서삼층석탑과 양지 세중돌박물관의 삼층석탑이 그것이다.
공통점이라면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두툼해진 지붕돌과 지붕돌 모서리의 반전(귀솟음)이 없다는 점.
그것으로 탑은 둔중해지고, 균형과 비례는 깨지고, 장중하지도 경쾌하지도 않은 어정쩡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경주 구정동 삼층석탑... 물론 지금은 일층 몸돌 빼고 모두 염불사지로 옮겨져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삼층쌍탑의 염불사지 석탑은 8세기 후반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용명리탑과 비슷한 느낌으로 보였는데, 꼭 찾아보고 싶은 탑으로 꼽아 놓고 있다... 아무튼 일층몸돌 하나가 탑 전체의 미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이렇게 크다... 생각하면 할수록 석가탑의 일층 몸돌과 지붕돌의 비례, 그리고 이층 지붕돌의 두께까지 정말 황금비를 갖추고 있다는 생각에 감탄하게 된다...>
<세중 돌박물관의 삼층석탑... 기단부나 몸돌 모서리에 새겨진 우주가 무척 두툼하지만 전체적으로 눌린 느낌이 드는 탑... 몸돌에 비해 지나치게 두꺼워진 지붕돌 때문이라 생각한다... 특히 반전이 없는 지붕돌은 볼록한 삿갓처럼 보이는데, 지붕돌의 반전은 그런 착시를 고려한 매우 과학적인 장치였다...>
기단부가 높아지고 일층몸돌이 얇아진만큼 여리게 보이지만, 차분하고 정성스럽게 다듬어진 모습,
그래도 반전이 사라진 직선의 지붕돌 마감은 과연 이게 제 짝일까 싶을 정도로 미감을 깨뜨리고 말았다.
예부터 함흥에서 원산-고성-속초-양양-강릉-동해는 동예의 영역이었으니 지역적 특수성이 있었을까?
그리 멀지 않은 진전사터나 선림원지의 석탑들과 비교해보면 그건 아닌 거 같고,
결국 800년대 후반 이 절이 만들어진 시대의 매너리즘과 석공의 한계로 결론을 지어야 할 거 같다.
장중하고 수려한 산세에 그 후광을 이어받았다면 금상첨화였을 터인데 아쉽다는 생각에 자꾸 말이 새나간다.
<이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이처럼 약간 올려봐야 전체적인 균형감을 갖추게 돼있다고 생각했다... 저 느낌을 가질 수 있으려면 거돈사지 처럼 기단부 밑에 석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랬으면 훨씬 안정적이고 당당한 느낌으로 보였을텐데...>
4. 선림원지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잖아. 함께 다시 이곳을 밟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경험 때문인지 강행한다.
게다가 진전사지 보다 선림원지는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잖아.
깊은 오지, 넓지 않은 곳에서 느끼는 경쾌한 울림으로 간직된 곳을 나누고 싶은 게 내 욕심이기도 하고...
단정하고 차분한... 너무나 각져 있어 무미건조해진 진전사탑과 시초라는 의미만 읽는 진전사 부도를 보고,
날을 바꿔 선림원지로 향했다. 아직은 빙판... 뽀드득 뽀드득 타이어가 밟는 눈자국 소리는 긴장의 연속이다.
<진전사지 삼층석탑... 국보 122호, 높이 5m... 눈은 비슷하게 있는데 필름을 잃어버려 2003년 사진으로 대신한다...>
햇살이 똘똘이는 차에 남기로 하고 색시만 데리고 새하얀 눈밭의 선림원지에 들어섰다.
언젠가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오늘은 새하얀 눈이 펑펑 쏟아진다. 돌아가는 길이 괜찮을까?
그렇다고 조급해지는 것도, 발걸음이 서둘러지는 것도 아니다. 결국 아이들도 차에서 나와 눈밭을 뒹군다.
그들이 탑을 보고, 석등을 보고, 부도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눈밭에서 뒹굴고, 남 몰래 쉬하는 것이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뿐이겠지...^^
<선림원지 삼층석탑... 보물 444호, 높이 5m... 설악산을 비롯 관동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탑이다...>
<선림원지 석등... 보물 445호, 886년... 고복형 석등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로 매우 정성스럽게 조성되어 있다...>
보여주고 싶었다. 물론 블로그도 그렇고 글도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면 모두 나눠주고 싶다.
선림원지에 온 이유가 그것이고, 선림원지에 머무는 이유도 그것뿐이다.
그래서 때로는 조잘거리기도 하고 강요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냥 생각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그러고보니 누군가와 함께 답사여행에 나서면 나는 나의 감상을 온전히 가져본 적이 없다.
다시 본다는 안도감과 가끔씩 새롭게 보이는 것에 신선함을 느낄 뿐, 무엇을 줄것인가 그것만 생각하니까.
오늘의 선림원지도 그렇다. 경쾌함도 느끼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말하고, 막다른 곳이라는 것만 강조한다.
새하얀 도화지, 텅빈 마음, 그리고 아무런 생각없이 멈춰버린 머리...
쏟아지는 눈발에 시간도 멈추고 소리도 멈추고 공간도 텅 비어버린 선림원지...
결국 눈을 감았다.
내가 탑을 보는지, 석등이 나를 보는지, 내가 부도를 기억하는지, 탑비의 거북이가 우릴 보는지...
<눈은 우리를 천진난만하게 만든다... 웃음을 준다... 그리고 바라보게 만든다...>
아~ 아쉽다. 그때 햇살이 노래를 들어 볼껄...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나도 같이 눈밭에 누워 볼껄...
두팔 환하게 벌리고 데굴데굴 뒹굴어 볼껄...
그냥 그렇게 머물러 볼껄...
이제야 사진속의 선림원지를 바라보며 그런 미련을 갖는다.
다음에~ 다음에 가면 그렇게 해보련다...^^
<선림원지에서 맞았던 눈... 비처럼, 바람처럼, 꽃잎처럼... 모든 게 멈췄다... ... ...>
그리 어렵지 않게 속초에 갔었다.
갑자기 새벽에 별보며 버스타고 서울에 올라왔다가, 다시 달보며 버스타고 속초에 내려갔다.
그리고 이제 구불구불 먼 길을, 아직 눈이 녹지 않은 대여섯 고개를 넘어 서울로 향하고 있다.
7시간 반... 쉽지 않게 서울로 올라왔다.
아직 설악산에 대한 갈증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설악산, 울산바위... 여전히 나는 동경하고 있다... 그 깊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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