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디쯤 오셨나요?
한 1km 남은 거 같은데요? 다 오셨나요?
아뇨~ 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만에 나보다 어린 사람들과의 식사에 초대됐다.
심사역, 평가사, 변호사, 그리고 나...
은행관련 일을 하다보면 곁가지로 보완해야할 일들이 만만치 않다.
어쩔때는 감정평가도 받게 되고, 계약사 컨폼도 받고, 신탁사 조정도 하고...
수수료, 이자, 기간, 약정조건 외에도 요구되는 것들이 많다.
게다가 몇 개 은행이 모여 대주단이 만들어지면, 각사마다의 사정으로 추가되는 것들도 많고...
아무튼 이번 일은 순조롭지는 않지만, 무난한 결과로 정리되었고,
평가회사 측에서 간단하게 식사하자는 제안에 반포에 있는 장어집으로 모이게 됐다.
윤팀장만 종로쪽에 근무해서 이곳으로 잡았는데,
아무래도 걸어와도 될 정도로 가까이 근무하는 김변호사가 제일 늦을 거 같은데요?
구구절절 서두를 꺼내서 내가 하고픈 이야기는 <인사>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인사냐고?
몇주만에 만난 박본부장이 대뜸 하는 말 ;
<피곤해 보이시는데요?>
사실, 이날은 이 한마디에 완전히 맛이 갔다.
2.
색시 있잖아, 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
갑자기 몸이 노곤해지고,
오늘 하루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쭈욱 펼쳐지더니,
힘이 쑤욱 빠지는 거야.
며칠만에 인천에 갔었으니 결정되지 않았던 많은 사안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일단 금속공사 전사장 만나서 외부 스펙과 컬러 등에 대해 논의를 했고,
이사장 만나서는 전기관련 업체선정과 견적에 대해 문제점을 설득해야 했으며,
내장팀 만나서는 작업한계와 최종 금액에 대해 조정하고, 다시 전사장과 같이 사양에 대해 정리하고,
사업승인 진척상황에 대해 설계사무실과 통화하고 대책에 대해 검토시키고,
그러고는 점심을 먹었지? 보쌈 정식, 대게 맛이 없었어...
도배 김사장이 기다리고 있어서 전반적인 컬러의 흐름과 패턴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직원들과 최근 모델 하우스 마감재에 대해 상의를 하고,
조경 박사장 만나서 외부마감과 내부 조경에 대해 다시 의견을 주고받고,
송사장이 가져온 타일들 골라보면서 욕실, 주방, 발코니 등 구획별로 조정을 했고...
그사이 현장 올라가서 잘못 시공된 부분 어떻게 변경시킬 것인가 지시하고,
보도문건으로 몇몇 건설사와 광고대행사에 우리측 의견 반영시키느라 10여건 넘게 통화하고,
그러고도 말하지 않은 전화통화와 생각들까지 널어놓는다면 끝이 없었을거야...
아무튼 그렇게 인천 일들 정리하고
간만에 부담 없이 편한 자리에 가나보다 하고 부리나케 달려왔었거든~
근데 그 친구한테 <피곤해 보이시네요> 한마디를 듣고 나니,
나의 하루가 너무 피곤하게 느껴지는 거 있지.
3.
속으로는 이게 무슨 조환가 싶어 내색은 안 했지만,
자꾸만 내 하루하루가 너무 여유도 없고, 일에 쫓기고, 하중이 많구나 하는 생각만 자꾸 들더라고.
물론 나도 요즘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반성은 많이 해.
내가 체계와 시스템을 갖추고 업무를 제대로 분장을 못한 결과일지 모르지만
내 욕심만큼 일이나 직원들이 따라주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내가 S-Oil의 슈퍼맨은 아니면서도 오지랖 넓게 일이 집중된 것도 현실이지만,
지금의 상황은 내가 일이 많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렇게 바빠야 할 때일 뿐이다.
단지, 요즘 일들이 서서히 재미가 없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어렵지 않다거나, 늘 하던 일이어서거나, 해야만 하는 일이거나, 가벼워서 그런 건 아니다.
곰곰 생각 해 내린 결론은 ; 결말이 너무 빤하기 때문, 그 끝이 이미 보이기 때문이다.
딱 하나 ; 뚜껑을 열었을 때, 분양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만 모를 뿐...
성격인지 기질인지 모르겠지만, 결과가 보이면 나는 흥미를 잃는다. 그것도 아주 빨리...
그렇지만 흥미를 잃고 있다고 피곤해야할 이유까지는 없지 않을까?
최근, 4개월여를 끌어오던 각종 은행일들이 한꺼번에 정리가 되었고,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여러 심의들도 무리없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공사 준비에 몰두할 수 있도록 여러 준비들이 되어 한숨을 돌렸고,
그 여파로 허리도 아프고, 소화도 잘 안됐지만,
어제 병원 갔다 나오면서 아파야했던 이유에 대해서도 납득을 하고
오늘부터 다시 즐겁고 활기차게 일해야지 싶었는데 피곤해 보인다니 이게 무슨 일일까?
굳이 긴장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서 아무런 방어기제가 없이,
그 친구도 아무런 의도나 목적없이 무심코 던졌으리라 생각했던 그 한마디에 ;
나는 내가 피곤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게 되었고,
오늘 하루의 일정을 머릿속으로 복기를 하면서
- 그래 너무 많은 말을 했고, 쉴 시간없이 움직였지...
게다가 얼마전 일 마무리 되면서 쉴틈이 없었던 것도 사실인데다
9월말까지는 꼭 해야만 하는 일들로 일정이 꽉 차 있잖아??? -
하면서 그 말에 나자신을 동조시켰던 거 같다.
4.
하하하...
<플라보시 효과>라는 게 있다.
그렇다면 역(易) 플라보시 효과라는 것도 있겠지?
이 약을 먹으면 나아질 수도 있지만, 이 약을 먹고 안 아픈 게 아플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피곤하다는 말에 내가 피곤해야만 하는 이유를 찾고, 피곤한 나를 합리화 시켰잖아.
신랑~
그러니까 나이 드신 분들이나, 숙녀 분들,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 ;
많이 안 좋아지셨네요, 더 나이 들어 보인다느니, 힘들어 보인다느니 하는 말은 실례라잖아.
느낌이 있다고 생각대로 그대로 말하면 사회생활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겠어?
내 자신이 무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런 의도없이 내게 그렇게 말했던 박본부장이 그랬듯이,
나도 남들에게 의도하지 않았던 피해를 준적이 많지 않았을까?
나는 공감을 표하고, 이해를 넓힌다며 던진 말이 상대방을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늘 생각하지만, 사람들을 만날 때 한마디 한마디, 특히 첫 번째 인사말이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그 한마디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일 수도 있고, 관심의 표명일 수도 있고, 친근감의 확인일 수도 있다.
문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점인 거 같다.
나는 지금까지 상대방이 갖는 나에 대한 이미지를 어떻게 귀결시킬 것인가를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가 아니라, 내가 한 말의 기운이 어떻게 상대방에게 영향을 줄 것인가 생각해야할 거 같다.
동어반복일 수도 있고, 불필요한 말 만들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남이라는 게 나의 이미지를 상대방에게 확인하기 위해, 각인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만남을 통해 만들어지는 그 어떤 즐거움, 편함, 자극이 공유된 기억과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자연스럽지 않을지 모르지만 조금 더 계산되고, 꿀 바른 아첨 같은 이야기도 필요한 듯 싶다.
젊어지셨네요,
여전히 활력이 넘치십니다,
얼굴이 훨씬 좋아 보이시는데요...
내가 상대방에게서 무엇을 얻으려는 게 아니라도,
그런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밝은 인사가 훨씬 효과적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에게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그게 상대방에게 힘을 준다면 상대방에게 필요하다면,
우리가 함께 갖고 싶은 것들을 첫 인사말로 던질 수 있을 거 같다.
상대방이 힘이 있을 때, 그 기운이 내게도 힘으로 다시 전달될 것이므로...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절 잘 보내세요...^^* (0) | 2009.10.01 |
---|---|
요즘> 간만에 내 블로그의 음악을 듣다...090808 (0) | 2009.08.08 |
오늘> 달리고 싶다...090627 (0) | 2009.06.27 |
오늘> 작은 상처, 큰 불편...090627 (0) | 2009.06.27 |
오늘 일기? 090617 (0) | 2009.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