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달사 석대좌...>
이제 하나씩 잠깐이라도 살펴볼까?
언젠가 <불대좌>에서도 말했지만, 고달사지의 사각형(방형) 석대좌는
아마 가장 간결하면서도 허틈이 없고,
정중하면서도 날카롭지 않은 부드러운 마무리는,
군더더기 없이도 꽉 차게 보이는 몇 안 되는 수작에 꼽힐만 하다.
물론 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석대좌는 단연 석굴암 본존불 대좌라고 생각한다.
흉내낼 수 없는 최고의 완숙과 완벽함을 자랑하는 석굴암의 원형 석대좌를 뺀다면,
육중한 크기와 단정하면서도 정성스런 손길로 갈무리된 석대좌로 이만한 게 없다.
크기에서는 금산사 팔각 석련대, 육중함으로는 만복사지 석대좌가 있고,
넓이로는 성주사지 석대좌, 화려함으로는 부석사 자인당 석대좌 등이 있고,
정교함과 아기자기한 맛을 갖춘 홍천 물걸리나 원주 박물관, 충주 각연사 석대좌도 있지만,
단순하면서도 육중하고, 간결하면서도 준수한 맛은 다른 석대좌에서 찾을 수 없는 맛이다.
<같은 방형(사각형) 석조대좌 중, 아기자기하면서도 화려하고 가장 장식적 요소가 강한 석대좌는 장곡사 상대웅전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두 석대좌를 비교해보면 미감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 복련과 귀꽃을 보면 장곡사 석대좌가 2~3대(1대가 30년 정도) 후에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 / 불상높이 154cm / 900년경... 고달사와 같은 유형인 사각형(방형) 석대좌다... 이렇게 불상 뒤에 광배가 있는 형식이었다면 고달사 석대좌에 있었을 불상은 생각보다 작을 수도 있다... 석대좌가 원종대사 귀부와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면,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의 석대좌가 7~80년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석대좌와 비슷한 형식의 방형 석대좌인 수도암 약광전 석불좌상을 생각해보면
이곳에 앉았을 불상의 크기에 한계가 있지 않을까 짐작되지만,
만약 광배가 없는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을 생각한다면 크기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철불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도 있지만, 내 관심은 어떤 형상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철불인가, 석불인가? 그러나 소재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닌가?
<수도암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좌상 / 불상높이 251cm / 800년경... 이처럼 광배가 없었다면, 고달사 석대좌의 불상은 이보다 더 컸을 수도 있다... 또한 고달사 석대좌가 원감국사 부도(869년 추정)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면, 이와 비슷한 유형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 석대좌에는 과연 어떤 모습의 불상이 자리하고 있었을까?>
절대자에 대한 기복과 기원을 넘어서서 주체와 개체의 완성과 각성이 강조되던 시기,
호국과 중앙집권을 위한 상징 구현을 위한 대승불교 화엄종이 정점에 치달으며 무뎌진 때,
이념, 법신을 불상으로 구현한 것이 바로 광명, 지혜와 빛의 상징인 비로자나불이다.
불교의 전파와 완숙과정을 봐도, 초기엔 절대자의 상징인 현존불 석가모니불상이 조성되고,
사회의 혼란기나 급격한 변화가 추동될 때는 미륵불과 미륵보살이 득세를 한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상 / 780년... 자세히보면 왼손과 오른손이 바뀌었다... 신라의 최고 전성기 경덕왕대, 그는 불국토의 완성을 대내외적으로 표방하기 위해 불국사와 석굴암을 짓고, 비로자나불을 안치했다...>
그리고 사회적 안정과 숙명적 내세를 염원하는 시기에는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이 등장하는데,
개인적으로는 밑으로부터, 즉 대중적 염원은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로 형상화되기 쉽고,
강력한 사회적 안정과 권위를 강조하려는 집권층의 염원은 비로자나불로 만들어진다고 보는데,
그런면에서 비로자나불은 미륵불과 아미타불의 내용이 충분히 경험된 이후에나 만들어지는,
어쩌면 불교 사상의 마지막 구현형태로 등장하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상... 만약 철불이었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불국사 비로자나불 이후 80여년후인 865년에 조성되었는데 크기도 1/2로 줄었고, 느낌도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최완수씨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불상 얼굴을 성덕왕과 경덕왕의 모습이 아니었을까하고 추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손 모양(수인)을 비교해봤으면 해서 석조와 철조 비로자나불상 사진을 참고로 올린다...>
왼손 검지를 똑바로 세우고, 오른손 주먹으로 감싸 안은 지권인... 이게 비로자나불의 수인이다.
오로지 손가락 모양 하나가 바뀐 것으로 이념은 상징이 되고, 상징은 수양의 목표가 됐다.
선종은 그렇게 대승불교/화엄종을 기본으로 소승불교와 밀교 만다라를 흡수했다.
지혜와 용기, 자비와 위엄을 함께 갖춘 인간적 형상의 불상, 그것이 비로자나불이다.
전성기를 이루던 신라말 고려초의 고달선원에는 비로자나불의 광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새로운 사상적 조류에 강력한 권위에 대한 염원은 그렇게 불상의 형태를 규정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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