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고달사 국보 부도.
고달사에서 대부분 내 발걸음은 맨 위쪽에 있는 국보 부도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오늘은 석대좌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제서야 부도에 대해 말하게 되었다.
사실 고달사가 유명해지고 무게를 갖춘 것은 이름모를 국보4호 부도 때문이다.
3.4m 높이로 우리나라 부도 중 가장 크고 장중한 모습을 갖췄다고 소개되는 이 부도는
장중한 크기로는 화엄사 석등과 비슷한 미감으로 비견되면서도 독창적인 모습으로 사랑받는데,
탑과 불상에 치중되었던 신라시대 불교장엄이 부도와 부도비로 전이되는 과정의 유물이다.
<고달사 부도... 원감국사 부도로 알려졌으며 국보4호다...>
당당한 크기에 굵직한 볼륨과 깊은 선들은 호방한 기상을 놓치지 않았고,
넉넉한 여백에 자리잡은 얕은 부조와 조각들은 유려한 선과 부드러운 정성으로 새겨져 있다.
거북과 용(이무기)과 구름무늬로 채워진 기단부는 사실적인 조각으로 생동감을 살려냈고,
간결한 선으로 새겨진 팔각원당 사리함의 사천왕상 등은 단순한 처리로 조잡함을 막아줬고,
넓고 큰 지붕돌의 육중한 무게는 장대한 기품과 넉넉한 포용력의 상징처럼 조화를 이뤘다.
복잡하지 않은 지대석 복련은 차분한 가운데 넉넉한 안정감을 살려주고,
굵고 깊은 윤곽의 기단부 상대석 앙련은 강직한 기운으로 당당하면서 또렷하며,
적절한 크기의 몸돌을 짓누르는 커다란 옥개석은 포효하는 기상처럼 충분히 넉넉하고,
상륜부 작은 지붕돌은 장명등 처럼 오롯이 전체적인 미감을 조화롭고 균형 잡히게 만들고 있다.
원형 기단에 팔각의 탑신, 넓고 두툼한 지붕돌과 적절한 높이의 상륜부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비례는
결코 편하지 않는 부도탑 미감을 전체적으로 유려하면서도 웅장한 느낌까지 살려주고 있다.
4-2. 누구의 부도이고, 언제 만들어졌을까?
이 부도는 정말 원종대사의 스승이라 일컬어지는 봉림산파 초조 원감국사 부도가 맞을까?
이만한 규모와 장엄을 고려한다면 고달사에서 찾을 수 있는 선승은 원감국사가 가장 유력하다.
본래 봉림산문은 원감국사의 제자 심희가 머물던 창원 봉림산 봉림사의 이름으로 개창되었지만,
처음에는 원감국사가 자리잡은 혜목산 고달사에서 이름을 따 혜목산문이라 불렸었고,
심희의 제자 원종대사가 다시 고달사에서 크게 선문을 일으켜 고달선원으로 중흥기를 맞았었다.
<원종대사 부도...>
그러나 심희-진경대사와 찬유-원종대사의 부도와 부도비는 각각 봉림사와 고달사에 남아있지만,
현욱-원감대사의 부도와 탑비만 찾을 수 없는데다 현재 고달사터에 남아있는 부도가
양식적인 면에서 이둘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데다 그 크기와 장엄의 화려한 격이 높다는 점 등이 감안되어
우리는 이름모를 이 부도를 헤목산문-봉림산문의 초조 원감국사 부도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또한 중앙박물관에 있는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 심희의 부도가 924년에 만들어졌고,
원종대사 부도탑이 977년에 고달사에 만들어졌으니 이 원감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부도탑은
현욱의 생몰년도인 869년에서 924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개연성이 높다.
문제는 옥개석에 솟아오른 귀꽃은 869년경 전반기 형태의 부도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과,
기단부에 구름무늬가 들어간 선림원터 부도(886년) 보다 시기적으로 앞설 수 있는가의 의문이 남는다.
<망해사 부도...>
이런 이유로 이 부도탑은 진경대사 사후 또는 원종대사가 고달사로 돌아온 이후에 만들어졌을 수 있다.
왜냐하면 부도의 양식이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닌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으며,
구름무늬가 강조된 기단부와 옥개석 등에 나타나는 귀꽃은 900년경에야 부도에 정착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 900년대 초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예상되는 망해사 부도와
940년에 만들어진 흥법사 진공국사 부도탑 사이에 이 원감국사 부도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흥법사 진공국사 보도탑...>
내가 부도의 제작년도와 이 부도탑의 주인공을 찾는데 집착하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개개의 유적과 유물이 시대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떤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내 머릿속에 계보와 체계를 세우고, 잠재된 문화DNA를 찾는데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하지 않는 타임머신을 타고, 당대 사람들의 흔적을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헛생각중 하나다.
이제부터는 나만의 상상력으로 원감국사 부도가 만들어진 시기와 그 의미를 쫓아본다.
4-3-1. 원감국사 부도의 독창성...
사실 이 부도를 충분히 칭찬하고 국보로 지정할만한 이유는 결코 작은 의미가 아닐지도 모른다.
달마대사 입적후 시신이 그대로 탑속에 안치되던 중국식 유행이 정착된 것이 선종의 부도이고,
(인도의 화장에 비교하여, 시신을 그대로 안치했다는 것은 불교가 이미 중국화 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유형의 부도를 처음으로 신라에서 받아들이고 조성한 것이 진전사지 도의선사 부도다.
(수나라를 전후한 시기의 시신안치에서 신라에서는 불교가 정착하면서 화장 장례가 보편화 된다)
그리고 초기 부도들은 신라식으로 각색하였지만, 당나라풍의 모든 요소들을 그대로 차용했었다.
<진전사 도의선사 부도탑...>
이런 시대적 조류와 사상적 변화를 쫓아 신라는 자신만의 고유한 형식을 실험하고 만들기 시작했는데
팔각원당형의 중국식 양식과 유형을 신라식으로 정형화 시킨 첫 시도가 844년의 (傳)염거화상 부도고,
기단부를 운룡문으로 통째로 구획하고 변형시킨 대표적 사례는 886년 선림원 홍각선사 부도이며,
여기서부터 시작된 구름무늬 기단부는 이후 제작되는 상당수 부도에서 중요한 소재로 부각하게 되는데,
이런 양식의 최고형태가 900년을 전후해 만들어진 바로 이 고달사지 (傳)원감국사 부도이다.
그리고 이 국보 부도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나타나는 부도와 전혀 다른 형태로 조성되었다.
<선림원 홍각선사 부도탑...>
4-3-2. 기단부에 새겨진 거북이와 이무기...
그러면 이 부도가 앞선 시기, 그리고 앞으로 조성 될 부도탑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
가장 커다란 차이점은 부도탑의 기단부에 거북이와 용이 함께 두드러지게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원감국사는 그의 비중과 영향력에 비해 부도비 자체가 없다는 점이 지극히 의심스러운데,
만약 부도탑과 부도비를 하나로 만들려 했다면 지금 같은 형식의 부도탑이 되지 않았을까?
부도비 몸체인 거북이와 비석 상단을 장식한 용이 사리를 안치한 부도와 함께 조성되었다면???
(물론 여기에는 비약이 있다. 성주사지에도 낭혜화상의 백월보광탑비만 있지 부도탑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원종대사가 다시 봉림사에서 고달사로 무게 중심을 이동했을 900~920년경,
원종대사 주도로 원감국사의 부도비를 생략한체 부도탑만 사리보관용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미 원감국사의 약력은 진경대사 비문에 충분히 설명되었기에 생략되었을 수 있고,
(만약, 원감국사 부도비가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봉림산문을 혜목산문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그렇게 거북이와 용과 사리와 구름이 함께 존재하는 지금같은 형식의 전무후무한 부도가 되었다.
(이런 유형의 부도는 선림원지 부도와 불국사의 사리탑, 원종대사 부도 등 4기에 불과하다)
4-3-3. 건축구조의 결구방식을 포기한 새로운 시도...
또 한가지 국보부도에서 놓치지 말아야할 점이 있는데, 전체적인 비례와 결구방식의 근본적 변화다.
원종대사 부도탑은 이 부도의 모방이니 제외하고, 불국사 사리탑엔 거북이와 용이 없으며,
선림원지 부도는 이전 시기 부도 기단부가 연꽃대였던 것을 적극적으로 변형시킨데 반해
이 부도는 사리함이 있었을 몸돌보다 넓은 기단부를 갖춰 석탑의 비례를 차용하였고,
지붕돌에서 기와와 막새, 서까래와 부연 등 세세한 묘사를 배제하고 구조적 형태만 차용한 점은
부도탑 양식이, 지금까지 건축적 표현양식을 포기하고 공예적 조각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목조탑의 번안과 차용에 그치던 석조탑이 완성된 것은 목조건축 조립/결구방식 배제를 의미한다.
목조와 석재라는 소재의 변화는 질감의 대체 외에 구조와 조립방식의 변화를 수반하는 문제이고,
석탑이 자기고유의 미감와 체감과 질감을 갖춘 것은 공예적 결구방식으로 조각된 이후부터 시작된다.
(정림사탑/미륵사탑/탑리오층탑과, 왕궁리탑/감은사탑/석가탑의 근본적 차이는 이 결구방식 변화에 있다)
800년대 만들어진 대부분 부도들은 목조건축과 중국식 전탑의 번안과 차용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원감국사 부도는 목조건축의 디테일한 표현을 완전히 포기하고 상징적이고 공예적으로 재구성하였다.
이 점이 고달사 부도가 국보부도로 불릴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다.
4-3-4. 상징적 요소들의 공예적 완성...
또한 이 부도는 우리나라 최초라 할 수 있는 진전사 도의선사 부도를 공예적으로 완성할 뿐아니라,
염거화상 부도, 철감선사 부도, 선림원터 부도, 범일국사 부도 등 모든 요소를 총합하게 되는데,
석탑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도의선사 부도의 비례와 체감에 장식적 요소를 극대화시켰고,
단아하게 신라부도의 고유한 미감을 살린 염거화상 부도의 연화좌 형상을 적극적으로 변형시키며,
철감선사 부도에서 보이는 사자좌의 장식적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고,
선림원터 부도와 범일국사 부도에서 보이는 수미좌, 구름무늬는 독창적으로 수용한다.
한마디로 고달사 국보부도는 사리가 안치되는 팔각원당형 몸돌의 원형만은 그대로 유지한 체
부처의 자리를 상징하는 지금까지의 연화좌, 사자좌, 수미좌 등 모든 구성을 바꾸게 되는데,
연화좌의 기계적 해석, 사자좌의 상징적 차용, 수미좌의 물리적 변형, 구름/물결무늬의 적극적 강조로
모든 상징물들은 사상체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탑파의 형식을 수용한 부도의 원형에 최대한 가깝게,
그러나 양식과 구성, 그리고 미감은 이전의 창작물들을 완전히 융합하면서도 독창적으로 완성되었다.
이점이 고달사 부도를 국보부도로 칭찬해도 부족하지 않은 세 번째 이유가 된다.
4-3-5. 최초의 실험으로 완성된 독창성...
이처럼 새로운 유형과 형식을 갖추고, 화려함과 장중함을 함께 갖춘 부도탑은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다.
1085년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이 만들어질 때까지...
(그리고 새로운 유형으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청룡사 보각국사와 회암사 무학대사 부도탑이다)
신라의 독창성을 유지하면서 선종, 봉림산파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고달사 국보부도...
그런면에서 장대한 크기와 유려한 솜씨, 조화와 균형미를 갖춘 이 부도의 가치는 국보급이 분명하다.
모방없이 창작과 창조가 존재할 수 없으나, 그 변화를 주도하고 갈무리하며 이끄는 정성과 추진력은
그에 걸맞는 완숙된 경험과 진취적인 능동성, 그리고 체계적 사상을 전제해야만 한다.
내가 이 부도를 국보로 인정하고 탐색하는 이유는 최초의 실험이면서도 완숙한 경지를 갖췄다는 점,
석탑의 비례를 차용한 안정감에도 불구하고 진취적이며 호방한 기풍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
부도와 부도비가 갖춰야할 모든 요소들을 조화롭고 슬기롭게 적용하면서 새로운 유형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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